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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3k2a4Gi0Fc?si=vKIdwIfjiiNhltea
(Wilhelm Backhaus- Brahms Piano Concerto No. 20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피아니스트라는 말은 작곡가란 말과 같은 선상에 있었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대 작곡가는 동시에 명 피아니스트였다. 지휘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후에 작곡과 피아노 연주가 분업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전문 피아니스트의 선구자로는 한스 폰 뷜로우(1830-1894)를 꼽는다. 그는 베를린필의 초창기 지휘자로도 유명하지만 동시에 직업적인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의 계보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보다 조금 전의 사람인 카를 체르니를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대로 체르니는 음악사를 장식하는 명교사였다.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지만 그 중에서도 프란츠 리스트(1811-1886)와 테오도르 레세티츠키(1830-1915)는 음악 사상 가장 큰 피아노의 인맥을 형성한 사람이다.
리스트의 제자 중에는 모리스 로젠탈(1862-1946), 에밀 폰 자우어(1863-1942),오이겐 달베르(1864-1932),프레데릭 라몬트(1868-1948), 인슈트반 토만(1862-1940) 등이 있으며 앞서 말한 한스 폰 뷜로우도 이 계열에 있다. '펄'같은 복각전문 레이블을 뒤지다보면 이들의 말년 녹음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뷜로우는 이후 하인리히 발트라는 명교사를 배출했고, 발트는 아르투르 루빈슈타인과 빌헬름 캠프라는 20세기 거장을 길러냈다. 달베르트는 '건반의 사자왕'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빌헬름 박하우스와 요제프 호프만 등을 길렀고, 헝가리 출신인 토반 문하에는 에르네 도흐나니, 벨라 바르토크 등이 있었는데, 도흐나니는 다시 아니 피셔, 기오르규 치프라 등을 길러낸다.
체르니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흐름은 레세티츠키 계열이다. 그의 제자 중엔 나중에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그나츠 얀 파데레프스키같은 사람이 이었다. 이 계열은 리스트 계열에 비해 더욱 화려하고 자유스런 해삭을 존중했기에 강력한 주관을 가진 스타일리스트들이 이 흐름에 포진해있다.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의 주인공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시하여 벤노 모이세비치, 미에치슬라브 호로초프스키, 알렉산더 브라일로프스키, 베토벤 전문가 아르투르 슈나벨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리스트, 레세티츠키와는 별개의 맥락으로 형성된 흐름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프랑스였다. 파리음악원의 앙토완 프랑수아 마몽텔(1816-1898)에서 시작하는 이 흐름은 루이 디에메(1843-1919)를 거쳐 위대한 피아노 교사 마르그리트 롱, 알프레드 코르토, 이브 나트, 로베르 카자드쉬, 블라도 페를레뮈테르, 그리고 쇼팽의 달인 상송 프랑수아 등의 명연주자들을 배출해냈다. 루마니아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한 여성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은 모차르트의 세계를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도록 연주해냈다. 같은 루마니아계인 디누 리파티는 불꽃같은 인생을 연소시키면서 쇼팽과 슈만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러시아의 피아니즘은 안톤 루빈슈타인의 전통이 거장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로 이어지고 다시 알렉산드르 골덴바이저, 겐리히 네이가우스, 시몬 바레르, 레프 오보린 등을 낳는다. 이들에 이어 20세기 중반 피아노계의 전설을 이룩했던 거장들이 나열된다. 러시아적 스케일이 무엇인가를 들려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불렸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바흐 음악의 대가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강철같은 터치를 자랑하던 에밀 길렐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서방 세계에 펼쳐놓은 파장은 가히 원자폭탄에 비할 만 한 것이었다. 호로비츠가 남긴 65년의 카네기홀 복귀 연주회나 86년 모스크바 귀환 연주회 실황은 그 자체로 전설적인 이야기였으며, 40세가 넘은 나이에 비로소 서방 세계에 드러낸 리히테르의 모습 역시 엄청났다.
2차 대전 후의 미국은 어느 분야에서나 그랬지만 각국에서 귀화한 연주자들로 들끓었다. 미국 피아노계의 선두주자로 활약하다가 요절한 윌리엄 카펠을 위시하여 카잘스의 양아들 유진 이스토민,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우승한 '텍사스의 영웅' 밴 클라이번 등이 있었고, 개리 그라프만, 레온 플라이셔, 얼 와일드, 루돌프 제르킨 등이 미국 음악에 주역이 되었다. 레세티츠키의 말년 제자인 미에치슬라프 호르초프스키는 100살이 넘도록 활동하면서 그 고고한 음색을 들려주었다. 현재에 이르러선 머레이 페라이어라는 걸출한 피아니스트를 내놓았다. 그의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연주가 주는 투명한 정감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98년 들어선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를 녹음하여 또 한번 감탄사를 던지게 만들었다.
피아노 음악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독일에선 박하우스의 뒤를 이어 발터 기제킹이라는 거인이 있었다. 동구 출신들의 약진도 주목할 만하다. 슈라 체르카스키는 80세가 넘도록 살면서 고풍스런 시정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알프레드 브렌델, 헝가리 출신의 타마스 바샤리와 졸탄 코치슈는 명실상부한 피아노계의 장로로 남아 있다.
이탈리아에는 미켈란젤리라는 '건반의 수도승'이 있었다. 그가 들려준 지극히 투명하면서도 세밀한 음화는 다시 태어날 길이 없다. 그가 잠시 가르친 바 있는 마우리치오 폴리니 역시 제네바 콩쿠르, 쇼팽 콩쿠르를 사상 최연소 나이로 휩쓸면서 피아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영국에는 마이라 헤스라는 여왕이 있었으며, 커트너 솔로몬, 클리포드 커즌, 존 옥던 등이 있어 아카데믹한 해석과 탁월한 테크닉을 선보일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에는 폴란드 출신의 아르투르 슈나벨이 있었다. 그가 들려준 베토벤 연주는 SP 시절 필청판 중의 하나가 되었다. 뒤를 이어 그 유명한 빈 삼총사 프리드리히 굴다, 파울 바두라 스코다, 외르크 데무스가 종횡무진으로 활약했다. 특히 '기인' 굴다는 베토벤,모차르트의 세계에서 듣는 이를 매혹시킨만큼 재즈 음악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있다.
가장 재미있는 일은 음악적 변방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태어나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일이다. 칠레의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그랬으며, 스페인의 알리시아 데 라로차가 그랬다. 아르헨티나의 여성 영웅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도저히 여성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힘과 스케일로 차이코프스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선사했다. 90년대 들어 포르투갈의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들려준 모차르트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들 '변방의 인물' 중에서 가장 전설적인 인물은 역시 캐나다의 글렌 굴드였다. 이렇다할 스승도, 유파도 없이 나타난 굴드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자, 그렇다면 브렌델이나 폴리니, 아르헤리치, 페라이어같은 거성들 이후의 피아노계는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30대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비르투오조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역시 러시안 스쿨의 후예들이다.76년 몬크리올 콩쿠르에서 우승한 니콜라이 데미덴코, 73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85년 쇼팽 콩쿠르에 우승한 스타니슬라프 부닌, 87년 부조니 콩쿠르 우승자인 릴리야 질베르슈타인, 90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우승한 보리스 베레초프스키, 91년 에이버리 피셔상을 수상한 예핌 브론프만 등이 모두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지휘자로도 명성을 날리고 있는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있으며, 여전히 관심의 초점이 되는 에프게니 키신도 포함되어 있다.
https://youtu.be/5r-C3aDHBz4?si=4ugHrs03m_FkQUSZ
(Krystian Zimerman - Beethoven Piano Concerto No.2 & No.4)
물론 젊은 연주자 중엔 러시아 출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티안 침머만은 75년 쇼팽 콩쿠르에 최연소 우승하면서부터 일찌감치 음반계의 주목을 받았다. 쇼팽, 드뷔시 작품에서보여준 그의 서정성은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다. 유고 출신의 이보 포고렐리치나 핀란드의 올리 머스토넨은 대단히 주관적인 해석을 들려주지만 그만큼 매혹적인 것도 사실이다. 피아노의 장을 맺기 전에 언급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20세기 후반들어 부활한 포르테 피아노다. 포르테 피아노는 18세기 후반에 하프시코드를 밀어내고 태어난 피아노의 원형이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규모 콘서트홀에서의 연주를 위해 스타인웨이를 위시한 그랜드 피아노들이 탄생하면서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는가 싶었는데, 원전악기 연주자들의 설득력이 커지면서 다시 많은 레코딩에 사용되고 있다. 이미 파울 바두라 스코다나 외르크 데무스같은 노장들이 포르테 피아노를 사용하여 연주한 적 있었고,현재에 이르러선 맬컴 빌슨, 스티븐 루빈, 맬빈 탕, 안드레아스 슈타이어 등이 당대의 음악을 연주할 때 즐겨 사용한다.그러나 이 시대에 있어 포르테 피아노로 가장 주목받는 연주자를 들라면 아무래로 네덜란드의 요스 판 임머젤과 미국의 로버트 래빈을 들어야 할 것이다.
20세기 피아니즘의 흐름
정말로 하늘의 별만큼이나 그 숫자가 많은 20세기의 피아니스트들을 모두 살펴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무대에 오르지 않는(몇 명의 예외는 있지만) 거의 유일한 연주자들이며,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많은 해석의 갈래와 개성, 그리고 무수한 카리스마들이 생겨나는 분야라고 하겠다.
우선 맞닥뜨리는 것이 분류의 문제이다. 각자만의 고유한 개성과 음악적 기질을 띠고 있는 이들을 무슨 수로 헤아려 나눌 것인가. 21세기가 바로 앞에 다가온 이 시점에서 드라마틱한 피아니스트, 서정적인 피아니스트, 혹은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와 아카데믹한 피아니스트 등의 나눔에 공감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도 의문이다.
19세기 전통의 계승자들
지금까지도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일컬어지던 프란츠 리스트에서부터 현대 피아니스트들의 기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리스트는 잘 알려진 대로 명교사 카를 체르니를 사사했는데, 체르니의 또 다른 제자 테오도르 레셰티츠키는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하지 않다. 레셰티츠키는 폴란드 출신으로, 19세기 초까지 통용되던 다소 딱딱하고 경직된 손모양과 손가락에 부담을 많이 주던 주법을 버리고 릴랙스된 팔과 전신을 이용하는 소위 ‘자연주법’을 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에 비해 확연히 무거워진 피아노의 액션이나, 텍스처의 확대에 따라 요구되는 오케스트라적인 음향을 위해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하겠다. 물론 리스트도 그의 연주 모습을 묘사한 삽화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의자와 악기 사이를 넓게 벌려 움직이기에 충분한 공간을 만들고, 팔을 쭉 편 상태에서 상체의 무게를 이용하여 연주하는 ‘그랜드 스타일’의 자연주법을 몸에 익히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우선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를 가로질러 살았던 리스트의 제자들을 살펴보면, 대표적인 인물들로 한스 폰 뷜로·카를 타우지히·에밀 폰 자우어·모리츠 로젠탈·오이겐 달베르트·프레데릭 라몬트·조피 멘터·알렉산드르 질로티·아르투르 프리드하임·콘라트 안조르게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자우어·로젠탈·달베르트·라몬트·프리드하임 등은 20세기의 피아니스트로서 필수라고 할 만한 레코드 녹음(일부는 피아노 롤)을 남겼으며, 지극히 개성적이나 리스트의 학생이었다는 이미지와 다르게 의외로 단정한 표정을 띤 연주를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특히 지금도 구할 수 있는 레코드로 에밀 폰 자우어가 만년에 녹음한 리스트의 2개의 협주곡은 느긋한 템포로 결코 테크닉적이지 않은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데, 동시에 귀족적이고 장려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훌륭한 솜씨여서 역시 리스트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한편 레셰티츠키의 제자들은 리스트 계열보다 더욱 화려하고 다양한 음악성을 자랑했는데, 스승 스스로가 표현의 자유로움과 자발성을 강조했기 슈베르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던 슈나벨이나, 실내악 연주에 주력했던 호르초프스키 정도가 19세기풍의 주관적이고 로맨틱한 비르투오시즘을 추구한 레셰티츠키 악파에서 다소 벗어난 이색적인 존재들이었다고 하겠다.
새롭게 선 20세기 피아니즘의 전통
아마도 20세기를 누빈 피아니스트들의 본격적인 시작은 쇼팽의 나라 폴란드부터 살펴봐야 그 순서가 맞을 것이다. 앞서 말한 파데레프스키나 프리드만 외에도 파데레프스키를 사사한 쇼팽의 대가 비톨드 말쿠진스키, 그와 동시대의 할리나 체르니 스테판스카 등과 한 세대 전의 명인 요제프 호프만과 레오폴드 고도프스키를 잊을 수 없다. 단정한 조형과 상쾌한 매력을 지닌 음악성으로 높이 평가되었던 요제프 호프만의 얼마 남지 않은 레코드를 들어보면, 이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예민한 귀와 손가락을 가졌는지 실감하게 된다. 또 그의 친구였던 고도프스키는 쇼팽의 작품을 포함한 각종 편곡의 명수로도 유명한데, 섬세하면서도 세련된 서정미와 웅대한 효과의 테크닉으로 독자적인 피아니즘을 구축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우리 시대 마지막 스타일리스트 슈라 체르카스키도 원래 우크라이나 태생이나, 요제프 호프만을 사사했으므로 폴란드 계열에 포함시켜도 좋을 듯하다.
호프만이나 고도프스키와 라이벌 관계를 이루었던 러시아의 거장이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였다. 그는 대선배격인 안톤 루빈슈타인의 전통을 이어받아 스크랴빈 등과 함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활약했다. 흔히 러시아적이라고 하면 선이 굵고 큰 스케일의 음악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는 거기에 섬세한 뉘앙스와 작품에의 뛰어난 통찰력을 수반한 짙은 표현력이 더해진 것이었다. 이런 전통은 후에도 이어져 미국의 줄리어드에서 활약한 조셉과 로지나 레빈 부부, 러시아에서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길러낸 알렉산드르 골덴바이저·겐리히 네이가우스·시몬 바레르·레프 오보린, 여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였던 타티아나 니콜라예바·라자르 베르만·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등이 그 자랑스러운 계승자들이라고 하겠다. 이중 시몬 바레르는 오데사 출신으로 호로비츠보다 여덟 살 위인데, 한때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렸으나 비교적 일찍 숨을 거둔 대가이다.
명교사 펠릭스 블루멘펠트를 사사했으며, 글라주노프는 그를 가리켜 “오른손은 리스트, 왼손은 루빈슈타인”이라 평했다고 한다. 전해져 오는 레코드는 대부분 1930년대의 것으로, 확실히 기교적인 면에서는 호로비츠나 길렐스를 능가하며, 명쾌하고 현대적인 악상도 기억에 남는다. 아울러 바레르는 호로비츠와 더불어 20세기 초 미대륙에서 최초로 성공을 거둔 피아니스트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서구로 눈을 돌리면 전통이라는 면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나라는 프랑스다. 19세기 말 파리 음악원에서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을 배출한 루이 디에메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하겠으며, 그후에 마르그리트 롱·알프레도 코르토·라자르 레비·이브 나트·로베르 카자드쉬·블라도때문에 그들의 연주는 저마다 극히 유일무이한 개성을 지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역시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를 들 수 있겠는데, 거장적이고 루바토를 많이 쓰는 다소 옛스런 스타일의 피아니스트였다고 전해진다. 또 파데레프스키는 역사상 최대의 인기를 누렸던 ‘스타’로 알려져 있는데, 후에 폴란드 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낼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와 무대에서의 독특한 흡인력이 그 비결이었다고 하겠다.
이밖에도 오시프 가브릴로비치·마크 함부르크·이그나츠 프리드만·엘리 나이·아르투르 슈나벨·파울 비트겐슈타인·벤노 모이셰비치·미에치슬라프 호르초프스키·알레산더 브라일로프스키 등이 레셰티츠키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20세기 초의 대가들인 이들 모두가 전혀 다른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들 중 베토벤과 페를르뮈테르·상송 프랑수아·에릭 하이드섹 등이 프랑스적 에스프리를 뽐낸 바 있다. 이중 롱 여사의 교육자로서의 활동과 나트·하이드섹(프랑스인으로는 다소 이색적인)의 베토벤 연구 등은 금세기를 마감하면서 다시금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또한 프랑스 계열로 넣어야 할 인물에 스페인계이며, 풀랑크의 친구이기도 한 리카르도 비니예스와 루마니아 출신의 클라라 하스킬·디누 리파티를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원숙기에 들어선 라두 루푸도 루마니아 태생인데, 후에 모스크바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에서는 박하우스·기제킹·켐프와 함께 에트빈 피셔를 언급해야겠다. 원래 스위스인으로 라이프치히 악파의 거두 마르틴 크라우제를 사사하여 독일 음악의 정통을 이어받았다. 그의 바흐와 베토벤 연주는 현대 독일 악파의 하나의 규범이 되고 있으며, 레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그의 연주는 고귀하고 세련된 매너 위에 강한 생명력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나타난 피아니스트로는 콘라트 한젠·헬무트 롤로프·한스 리히터·베르너 하스 등이 있는데, 이들의 전통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피아니스트로는 현재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그 대표격이라고 할 만하다.
오스트리아는 슈나벨 이후 다소 피아니스트의 공백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나 프리드리히 뷔러·브루노 자이들호퍼, 그리고 교육자로도 유명한 요제프 디힐러 등이 연이어 나타났고, 그후 유명한 빈의 삼총사들이 아직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낙천적인 빈의 전통은 21세기에도 결코 약해지지 않을 전망이다.
신대륙에서 꽃 핀 열정과 환희
이탈리아를 포함한 라틴계 피아니스트들의 활동 역시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더욱 거세지고 있다. 우선 라틴계를 살펴보면 오이겐 달베르트의 부인이었던 테레사 카레뇨 정도가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라틴계 피아니스트이며, 남미 출신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던 금세기 초 칠레에서 온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유럽에서 성장하여 성공했다. 그후 알리시아 데 라로차·브루노 레오나르도 겔버·마르타 아르헤리치·다니엘 바렌보임 등이 한 세대 후에 등장했고, 이들의 활약상은 여기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이탈리아는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의 존재가 너무 커서 양적으로 조금 모자란 듯한 느낌이지만, 만능 피아니스트인 알도 치콜리니가 건재하고, 현대적인 피아니스트의 전형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바야흐로 대가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어서 든든하다.
이웃나라 프랑스에 비해 화려한 전통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영국의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순수하고 아카데믹한 연주 양식을 고수하고 있어서 호감이 간다. 한때 피아노의 여왕 자리를 차지했던 마이라 헤스·커트너 솔로몬·클리포드 커즌, 그리고 아깝게 일찍 세상을 떠난 대형 피아니스트 존 옥돈 등이 대표격이다. 이중 솔로몬은 20세기 초·중반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서정미의 터치와 강철과 같은 테크닉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또 요즘 들어 그 활동이 뜸한 대기만성형의 피아니스트 피터 도노호 역시 발군의 테크닉과 작품을 꿰뚫는 혜안으로 매니어들의 주목 대상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이다. 미국의 피아노계는 본의 아니게 유럽세에 잠식당한 부분이 있었고, 그 결과 여러 면(특히 우리나라에 소개된 음반)에서 과소평가돼 온 경향이 없지 않았다. 우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떠오른 피아니스트로는 요절한 윌리엄 카펠, 그리고 유진 리스트·유진 이스토민·얼 와일드 등이 있다. 동 시대의 줄리어스 카첸은 유럽으로 건너가 브람스 등의해석에 이름을 날렸으나 역시 43세로 사망했다.
그후 레너드 페나리오·바이런 재니스·아베이 시몬 등이 기교파로 명성을 떨쳤고, 이제는 선생님으로 더 유명한 게리 그라프만과 레온 플라이셔 등도 이전 세대를 사로잡았던 대가들이다.
또 텍사스의 영웅 반 클라이번을 위시하여 존 브라우닝·어거스틴 아니에바스·미샤 디히터·앙드레 와츠 등도 여전하다. 이들의 영광은 다양한 레퍼토리의 피터 제르킨이나, 갈수록 깊어지는 예술성을 자랑하고 있는 머레이 페라이어 등에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다음 세기 미 대륙에서 울려퍼질 피아노 소리 역시 더욱 더 흥미로워질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 피아니즘의 계보
제1세대 (1870년대∼1910년대 출생)
골덴바이저 · 파인베르크 · 네이가우스 · 플리에르…
20세기 러시아 피아니즘의 시작을 이 시기(1870년대)로 잡는 이유는이 시기에 출생한 몇 명의 피아니스트들이 현대 러시아 피아노 교육의기초와 방향을 확립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기말적 현상과 여러복합적인 사조들이 뒤엉켜 있던 유럽 음악계에서 비교적 보수적인전통과 철학을 추구했던 러시아는 1870년대 두 명의 걸출한 작곡가 겸피아니스트를 탄생시켰는데, 바로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랴빈이 그들이다.
스크랴빈이 바그너에 심취하여 급진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과는 달리,모스크바 음악원의 니콜라이 즈베레프 교수 밑에서 동문 수학한라흐마니노프는 전통적인 유럽-독일식 피아니즘에 충실한 모습으로 평생을 일관했던 피아니스트였다.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사촌이기도했던 알렉산더 질로티에게도 피아노를 배웠는데, 질로티는 리스트의 문하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던 바, 라흐마니노프는 리스트의 비르투오시즘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20세기의 어법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장본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두 작곡가 외에도 1870년대는 장차 20세기 초 러시아 피아노계를이끌어 갈 대가들이 태어난 시기이기도 했는데, 1873년에 콘스탄틴이굼노프가, 75년에는 알렉산더 골덴바이저가 각각 태어났다. 이 두사람은 1888년생인 겐리흐 네이가우스, 1890년생인 사무엘파인베르크와 더불어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 전후의 러시아 피아노교육과 연주계를 이끌어나갔던 주도적 인물들이다.
이밖에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마리아 그린베르크·시몬 바레르등의 스승이었던 펠릭스 블루멘펠트(1863년생), 작곡가로도 명성을떨쳤던 니콜라이 메트네르(1879년생) 등도 교수로서 많은 제자들을길러냈다. 이들은 이른바 국제 콩쿠르 등 경연대회의 개념이 아직생겨나지 않았을 무렵 연주 생활의 절정기를 맞았던 세대다. 서유럽의피아니스트들이 보여준 주관적이고 스타일리스틱한 해석과는 달리엄격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분위기 위에 작곡가의 의도와 악보에 대한치밀한 분석 등을 주장하여 금세기 러시아 예술 전체를 꿰뚫는사실주의의 틀을 마련했다는 데에서 무엇보다 그 의의를 찾을 수있겠다.
현대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아버지이며 가장 높은 위치의 대부라고할 수 있는 알렉산더 골덴바이저(Alex ander B.Goldenweiser)는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알렉산더 질로티에게 피아노를, 안톤 아렌스키에게 작곡을 배우고 졸업한 후, 1906년부터 줄곧 모스크바음악원에 재직하면서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그리고리긴스부르크·드미트리 바쉬키로프·라자 베르만 등의 제자들을길러냈다. 생전에 모스크바 음악원 총장과 학장을 두루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작곡가로 활동했던 경력과 함께 악보의 철저한 분석,연주자의 주관보다는 작곡자의 의도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작에 대한경외심을 강조한 교수로 알려져 있다.
골덴바이저보다 2년 연상인 콘스탄틴 이굼노프(Kon stantin N.Igumnov) 역시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으로 질로티와 파브스트를사사했다. 젊은 시절에는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철학적 의미를 띠고있는 표정의 연주로 알려졌으며, 제자로는 레프 오보린·야코프플리에르·나움 슈타르크만 등을 길러냈다. 멜로디아 레이블에 그의최만년의 모습을 담은 연주실황 앨범이 전해지는데,(베토벤·쇼팽·리아도프 등) 테크닉에서 다소 기력의 쇠잔함이느껴지긴 하지만 인자하고 푸근한 노대가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생전에 길렐스, 리히테르 등 최고의 대가들을 배출해 냈던 명교수겐리흐 네이가우스(Heinrich G.Neu haus)는 독일과 폴란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러시아인이다. 순수한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으며,테크닉적인 면에서 합리적인 주법을 구사했던 피아니스트는 아니었지만특유의 낭만적 기질과 음영의 예민한 표현, 그리고 독창적 해석 등으로수많은 연주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제자로는 앞의 두 사람 외에도 야코프 자크·레프 나우모프·이고르 주코프·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 등 대가들의 이름만 간추려도 셀 수 없을 정도이다. 또 네이가우스의 집안은 피아니스트의 가계로도 유명한데, 그의 손자인 스타니슬라프부닌 외에도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에 못지않은 멋과 흥을 지닌예술가였던 아들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도 있다.
골덴바이저의 제자이며, 역시 모스크바 음악원의 4거두 중 한 사람인사무엘 파인베르크(Samuel E. Feinberg)는 많은 작품을 쓴 작곡가로도알려졌다. 특히 9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20세기 러시아 피아노 문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들이다. 작품에 대한 뛰어난 분석력으로객관적이고 엄정한 예술을 추구했던 그는 많은 레퍼토리를 연주했던피아니스트로도 선구자감이다. 제자로는 빅토르 메르자노프·지나이다이그나체바 등 지금도 현역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치고 있는교수들을 다수 배출해 냈다. 특히 파인베르크의 저서 ‘예술로서의피아니즘’은 모든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교과서라고 할 만큼 폭넓게읽히는 명저로 남아 있다.
여성 피아니스트의 위상이 미약했을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엘레나베크만 셰르비나(Elena A.Bekman-Shcherbina)의 활동은 눈부시다.혁명과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황폐해진 국민들의 정서를 러시아영토 전역에 걸친 수많은 연주활동으로 어루만져준 그녀의 공로는대단한 것이었다. 바실리 사포노프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훗날 어린이를 위한 여러 가지 연주 교본의 연구에도 힘을 기울였던 베크만셰르비나는, 만년에 특이하게 그네신 음악학교와 모스크바 음악원양쪽에서 교편을 잡았던 경력이 있다.
이제 잊혀진 천재의 순서이다. 바로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스키(Vladimir V.Sofronitsky). 누구보다도 예술가적 기질이 충만하고 영감에 찬 연주를 들려주었던 대가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태생으로페트로그라드 음악원을 졸업했다. 만년에 모스크바로 자리를 옮겨 잠시교수로 일하기도 했으나 그의 본령은 역시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에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음반들은 대개 실황녹음인데,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명반들이다. 특히 쇼팽이나 리스트 등 낭만파 연주에서 들려주는 소프로니스키의 다양한 음의 팔레트는 어떤 곳은 동양의 담채화를, 또 어떤 곳에서는 서양의 근육질이 느껴지는 유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철저한 프로페셔널리즘과 동시에 본능적인 흥분과 광기마저 느낄 수 있는 그의 연주는, 그래서 들을수록 항상 새롭다. 후에 그는 스크랴빈의 딸을 아내로 맞아 이 작곡가의 가족이 되었고, 스크랴빈 박물관에서 전설적인 연주회와 마스터 클래스를 여는 등스크랴빈 연주의 최고 권위자라는 평을 얻었다.
유태계의 피를 물려받은 명연주자 그리고리 긴스부르크(Grigori R.Ginsburg)는 한마디로 ‘정중동’의 연주자이다. 깔끔하면서도 섬세한싱잉 라인과 단단한 구성감각, 그리고 뛰어난 테크닉으로 이름을 떨쳤던 그의 연주는 현재 남아 있는 리스트·안톤 루빈슈타인 등의 음반에서 그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골덴바이저의 제자로 철저한 음악적 청교도의 삶을 살았던 긴스부르크는 길러낸 제자로 세르게이 도렌스키·글렙 악셀로드 등 현재 러시아 피아노 교육계를 대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와 같은 부류의 피아니스트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반주자로서널리 알려진 레프 오보린(Lev N. Oborin)이 있다. 그 역시 절제와 자기 수양을 음악 활동의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았던 연주자로, 철두철미한 컨트롤과 단정함이 가장 큰 특징이다. 작위적이고 가식적인 해석이나 교육을 싫어했던 오보린은 학생들에게 무척 엄격한 ‘호랑이 선생님’으로 전해 내려오는데, 그 결과 제자로는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예카테리나 노비츠카야 등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뛰어난 연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병이나 부상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혹은 젊은 나이에 연주생활의 종지부를 찍어야 했던 아쉬운 인물들도 많다. 야코프 플리에르(Yakov V.Flier)는 한때 에밀길렐스와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던 최고의 비르투오소였다. 초기 콩쿠르무대에서 플리에르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3위에 그쳤지만 빈 국제 콩쿠르에서는 길렐스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이처럼 뛰어난 실력을 과시했던 플리에르에게 갑작스런 불행이 닥쳐왔다. 오른손 넷째 손가락이 마비되고 만 것이다. 더 이상 연주할 수 없게 된 플리에르는 그후 교육에 힘을 쏟아 많은 후계자들을 양성했다. 제자들의 면면도 실로 화려하다. 벨라 다비도비치·레프 블라셍코·미하일 루디·블라디미르 펠츠만·미하일 플레트뇨프 등등…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플리에르의 녹음들 또한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는데, 쇼팽의 소품들이나 리스트 소나타에서 보여주는 소리의 양감과 뉘앙스의 다양함 등은 그의 천재성을 다시금 확인케 해 준다.
레프 오보린의 뒤를 이어 제3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야코프 자크(Yakov I. Zak) 역시 병으로 무대에서 일찍 은퇴하여 교육자로 더욱 명성을 떨쳤다. 그의 오래된 쇼팽 녹음을 들어보면 조금 차가운 듯한 하드 보일드의 억양이 담겨 있는, 그러나 깨끗한 표정이 무척 매력적인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제자로 엘리소 비르살라제·니콜라이 페트로프·류보프 티모페예바 등이 있다.
한편 50대 초반에 아깝게 세상을 떠난 시몬 바레르(Simon Barere)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안나 에시포바와 펠릭스 블루멘펠트를 사사했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었지만, 구 소련 초기의 피아니스트 중 바레르만큼 외국에 많이 알려졌던 피아니스트도 드물 것이다. 20∼30년대에 이미 독일·영국·미국 등에서 연주회를 열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바레르는 희대의 테크니션으로, 글라주노프가 ‘오른손은 리스트, 왼손은 루빈슈타인의 것을 물려받았다’고 평할 정도였다. apr레이블에 남아 있는 리스트 등의 연주를 들으면 과연 글라주노프의 말대로 무서운 테크닉과 동시에 정교한 구성, 컨트롤등이 느껴지며, 다시금 재조명받아야 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고생각되는 피아니스트다.
마지막으로 블루멘펠트의 또 다른 애제자였던 여성 피아니스트마리아 그린베르크(Maria I. Grinberg)가 있다. 그녀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나 시몬 바레르와 같이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출신으로, 블루멘펠트에게 피아노의 오케스트라적인 이디엄의 활용가능성에 대한 영감을 이어받아 큰 스케일과 작품 전체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었던 피아니스트다. 특히 베토벤 등 독일계 작곡가에 조예가 깊었으며 솔레르·스카를라티 등 바로크 음악의 레퍼토리도 무척 다양했다. 후에 그녀는 그네신 음악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한 바 있다.
제2세대 (1910년대∼1930년대 출생)
블라셍코· 니콜라예바· 말리닌· 도렌스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연주자들에게 새로운 과제로 다가선 것이 바로 콩쿠르였다. 192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쇼팽을 기념하는 피아노 콩쿠르가 창설되었으며, 같은 해에 세계 국제 콩쿠르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제네바 콩쿠르도 시작됐다. 또 1933년에는 빈 국제 콩쿠르가,브뤼셀에서는 1938년 후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라고 이름을 바꾸게 되는 외젠 이자이 콩쿠르가 열리게 되어, 유럽은 바야흐로 콩쿠르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중요한 것은 이들 대회에서 러시아의 젊은이들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제1회 쇼팽 콩쿠르에서는 레프 오보린이 1위, 그리고리 긴스부르크가 4위로 입상했고, 빈과 브뤼셀에서는 각각 야코프 플리에르와 에밀 길렐스가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이런 놀라운 성과에 고무된 소련 정부는 이들 젊은 음악가들을 정치적인 이유에 의한 선전이나 과시 혹은 국력 신장의 표시로 내세우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1958년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였다.
그러나 애써 준비한 대회의 피아노 부문 우승이 텍사스에서 온 청년 반 클라이번에게로 돌아가자, 자존심이 상했던 소련은 거의 국책 사업이나 다를 바 없는 지원을 음악가들에게 쏟아부었고, 그후 그리고리 소콜로프·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같은 스타들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원인이야 어찌됐든 이 시대의 피아니스트들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와 지원사격 속에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세대라고 하겠다. 모든 것이 무상으로 지급되고 대회준비와 연주 스케줄까지 나라가 맡아서 관리해 주는 편리한 시스템의 혜택을 받았던 이들은,하지만 자유가 없이 틀에 박힌 모습과 행동을 강요받기도 했다.또 소련은 자신들이 서방세계에 내놓아도 나름대로 적합하다고 판정된 예술가들만을 외국에 내보내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폈는데, 그 결과로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에밀 길렐스·바이올린에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은 외부에 비교적 빨리 알려졌던 반면,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스키 등 버림받은 예술가들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정부의 철저한 비호하에 뛰어난 음악가들로 훈련되었으며,콩쿠르 등 경쟁 무대에서 남들을 물리칠 수 있는 뛰어난 테크닉·재빠른 손가락·러시아적인 정열과 힘 등을 앞세워 세계를 재패하기 시작했다. 소위 ‘러시안 스타일’이라는 것이 전 세대 스승들의 노력으로 꽃피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시기라고 하다.
제2세대의 대표적 피아니스트로는 먼저 올해 78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빅토르 메르자노프(Victor K.Merzhanov)를 소개해야겠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오르간과 피아노를 복수 전공했으며,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열린 전 소 연방 콩쿠르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참가해 리히테르와 공동 1위를 차지했던 피아니스트다. 젊은 시절에는 눈부신 테크닉과 폭넓은 레퍼토리의 연주자로 알려졌으며, 교수로 변신한 이후에는 제자로 유리 슬레사레프, 타티아나 셰바노바 등을 두었다. 또 그는 각국의 콩쿠르들의 단골 심사위원으로 현재도 전세계를 여행하며,모스크바에서 간간이 솔로 콘서트도 여는 등 지금도 전혀 쇠퇴하지 않은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 유학했을 당시의 필자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최근 60대 후반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급서한 두 사람의 피아니스트가 있는데, 레프 블라셍코(Lev N. Vlasenko)와 타티아나 니콜라예바(Tatiyana P. Nikolayeva)가 그들이다. 미하일 플레트뇨프를 길러낸 교수로 알려진 레프 블라셍코는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는 반 클라이번에 밀려 2위에 머물렀지만,헝가리 리스트 콩쿠르에서는 최고의 테크니션인 라자 베르만을 누르고우승을 차지했다. 야코프 플리에르의 수제자로, 멜로디아에서 리스트의 전 작품을 녹음하기도 한 블라셍코는 러시아 최고의 베토벤 연주자로도 알려져 있다. 스카를라티에서 라흐마니노프에 이르는 그의 레퍼토리는 같은 세대의 쟁쟁한 피아니스트들 중에도 독보적인 것이며, 하나같이 밝고 따뜻한 음색으로 순수하고 맑은 음악세계를 보여주었다.니콜라예바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따로 필요없을 것이다. 최고의 바흐 연주자였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조력자이자 친구이기도 했고,작곡가, 뛰어난 교육자로도 유명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젊은이 못지않은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던 니콜라예바는 결국 무대에서 연주 도중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번에는 피아니스트의 왕국이었던 네이가우스의 제자들을 살펴보자. 예프게니 말리닌(Evgeni V.Malinin) 과 이고르 주코프(Igor M.Zhukov) 는 이 세대의 대표적인 네이가우스 학파 출신의 대가들이다. 예프게니말리닌은 모스크바 태생으로 학생시절 이미 쇼팽 콩쿠르와 롱 티보 콩쿠르에서 연거푸 입상할 만큼 천재성을 발휘했다. 특히 베토벤과 쇼팽의 작품에 일가견이 있으며,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의 전설적인 연주는 지금도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최근 건강의 악화로 인해 연주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교수로서, 각종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서 그의 위치는 여전히 확고하다.
이고르 주코프는 스크랴빈의 소나타 전곡 녹음으로 서방세계에 알려졌으며, 지휘자와 실내악단의 대표로도 일하는 멀티 음악인이기도 하다. 그의 연주는 타고난 품성에 기인한 냉철함과 네이가우스식 교육에서 비롯된 낭만적이고 즉흥적인 기질이 잘 조화된 이상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세번째로 소개하는 네이가우스의 제자는 다름아닌 그의 아들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이다. 52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연주를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다. 허나 그의 콘서트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그만이 진정한 아버지 네이가우스의 후계자였다’고 했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일면 퇴폐적이기까지 한 로맨티시즘, 선병질적인 분위기, 나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예술가적 풍모를 그는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레코드 역시 흔치 않은데, 일본 JVC에서 출시된 1972년 모스크바 실황녹음에서 들을 수 있는 그의 쇼팽은 위에 언급한 ‘쇼팽적’ 요소들이 넘쳐 흐르는 매력적인 연주다.
이 외에 젊어서의 연주활동보다는 교수로 더욱 그 명성을 높인 피아니스트들도 있다. 세르게이 도렌스키는 부닌·슈타르크만·루덴코 등의 젊은 천재를 발탁해 낸 모스크바 음악원의 터줏대감이다.드미트리 바쉬키로프는 알렉세예프·데미덴코·네볼신 등을 발굴해 낸 스승이며, 미하일 바스크레센스키는 이골린스키·쿠즈네츠바를 길러낸 바 있다.
제3세대(1940년대∼1950년대 출생)
소콜로프· 페트로프· 플레트뇨프· 모길레프스키…
콩쿠르에서 러시안들의 강세는 계속되어 그들에게는‘동토의 왕국에서 날아온 괴물들’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게 된다. 특히 이 세대는 현재 40~50대의 나이로, 그 예술적 원숙함으로 보았을 때 최전성기를 맞고 있다.
어느 정도 정체된 느낌을 주는 ‘소련식’ 즉물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 어떤 선입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개방된 사고방식의 개성적인 피아니스트들도 여럿 나타나기 시작한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며 지휘, 작곡활동도 겸하고 있는 미하일 플레트뇨프나, 러시아인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모스크바에서 수학하여 명실공히 러시안 스쿨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는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유태계 러시아인들의 활약상이다.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유태민족의 음악적 파워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 역시 활동하고 있는 음악가들 중 거의 5할 정도가 유태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들은 폭넓은 외교력과 자금력으로 동족 음악가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으며, 앞으로 활동할 제4세대의 러시아 피아니스트들 역시 이들 유태계들의 행동 여부가 그들의 무대를 좌지우지하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 확실하다. 바야흐로 러시안들의 돌풍은 그야말로 군웅할거의 양상으로 접어들고 있다고 하겠다.
3세대 연주자들 중에서 먼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출신의 몇 명을 살펴보자.니콜라이 데미덴코(Nikolai Demidenko)는 드미트리 바쉬키로프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몬트리올 콩쿠르·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등에서 입상한 관계로 익히 알려져 있다. 1985년 모스크바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영국에서 데뷔한 이래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 시절엔 뛰어난 테크닉에 비해 지나치게 내성적인 모습이 지적되기도 했으나, 후에 하이페리온 레이블로 앨범을 발매하면서 특유의 날카로우면서 섬세한 기질이 빛을 발하고 있다. 쇼팽·리스트 등이 주요 레퍼토리지만 부조니·스크랴빈 등에서도 능하며, 특히 메르트너의 작품에 강한 애착을 보인다.
알렉산더 슬로보자니크(Alexander A. Slobodyanik)는 쇼팽 콩쿠르·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등에서 입상한 경력도 있지만 소위콩쿠르 타입의 연주자는 아니며, 내성적이고 서정적인 예술 세계를 추구하는 피아니스트다. 꾸준한 연주활동으로, 특히 모스크바 청중들에게 친숙한 그는 작품의 자유로운 판타지의 표현이 매력있는 연주자다. 레코드로는 모차르트·멘델스존·슈만의 환상곡 등이 나와있다.
슬로보자니크와 같은 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i L.Sokolov)는 당시 16세밖에 되지 않았던 천재 소년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나 그후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최근 다시 재기하여 오푸스 111이라는 레이블에서 베토벤·쇼팽 등을 녹음하고 있는 소콜로프의 연주 스타일은 무엇보다도 강철 같은 힘과 경이적인 테크닉에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최근에는 여기에 연륜을 동반한 깊은 맛이 가미되어 청중들을 흥미롭게 하는데, 그 미래가 더욱 주목된다.
이들 보다 선배격인 엘리소 비르살라제(Eliso K.Virs aladze)는 그루지아 공화국 출신으로 야코프 자크에게 배웠다. 1962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했고, 그후 동유럽 등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연주 특징은 남성적이면서도 낙천적인 해석과 독특한 리듬처리 등에서 나타난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연주회를 많이 갖는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인 비르살라제는·나탈리아 구트만(첼로) 등과의 실내악 연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이들이 60년대의 러시아의 스타 들이었다면, 현재 가장 ‘잘나가는’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인 미하일 플레트뇨프(Mikhail V.Pletnev)는 70년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배출한 스타라고 하겠다.작곡과 지휘·피아노 등 다방면에서 그 재능을 뽐내고 있는플레트뇨프의 성공은 불과 20대 초반에 시작되어 지금도 그칠 줄모르고 있다. 냉정하고 분석적이나 그 안의 러시아인 특유의 흥분이 느껴지는 플레트뇨프의 음악세계는 항상 변화를 모색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미래 지향성의 그것이다. 그의 연주회장을 찾으면 두뇌와감성이 가장 적절히 조화된 이상적인 음악가의 모습을 보는 듯하며 항상 새로운 놀라움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러시아인들의 대륙적 기질과 큰 스케일은 이른바 ‘만능 피아니스트’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피아니스트들을 배출해 냈다.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Vladimir V. Krainev)는 영국 리즈 콩쿠르에서 2위, 리스본 콩쿠르 1위,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도 1위를차지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힘과 정열이 넘치는 연주로 청중을 사로잡는 그의 레퍼토리는 바흐에서부터 시작해 슈니트케까지 이르는 거의 모든 피아노 문헌을 망라하며, 협주곡만도 연주할 수 있는 곡이50곡을 훨씬 넘는다. 최근까지 그 실력에 비해 지명도가 낮은 편이었으나 교육자로 좋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유럽과 동아시아 등지에서 그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또 다른 대형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페트로프(Nikolai Petrov)는 야코프 자크의 스파르타식 훈련 속에서 태어난 연주자이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등에서 입상했으며, 그후 주로 러시아내에서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다.낭만파의 대곡들이 주요 레퍼토리이나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 등 20세기 작품에도 일가견이 있다. 큰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풍부한 소리와 전광석화 같은 테크닉, 남성적인 스케일 등이 특징이다.
위의 두 사람과는 달리 자신에게 맞는 영역과 분야에만 힘을 쏟는 학구파도 있는데, 알렉세이 류비모프(Alexei B.Lubimov)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러시아인 치고는 이례적으로 스케일이 아담하고 살롱풍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피아니스트인데, 전문 분야 역시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 등이다. 특히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연주는 그야말로 일품이며, 에라토에서 앨범이 출시되어 있다. 또 류비모프는 피아노포르테 등 고악기에도 관심을 보여 러시아내에서 드물게 원전악기 앙상블 단체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펠츠만(Vladimir O. Feltsman)은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이 높았으며, 야코프 플리에르를 사사했다. 후에 사회주의 체제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낳기도 했던 펠츠만은 젊은 러시아 세대를 대표하는 지성파 피아니스트이다. 그의 연주는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하며, 항상 악곡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 사색적이기도 하다. 몇 년 전 모스크바에서 들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의 연주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최근에는 바흐·리스트 등에 심취하고 있다.
역시 플리에르의 제자인 미하일 루디(Mikhail Rudy)도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로, 유연하면서도 심오한 깊이가 느껴지는 연주를 선보인다. 라흐마니노프·스크랴빈 등의 러시아 작품과 후기 낭만파 작품들이 주요 레퍼토리이다. 반면 요즘 들어 예전의 명성에 못 미치는 활동을 보이는 피아니스트들도 있다. 드미트리 알렉세예프(Dmitri K.Alexeyev)는 바쉬키로프의 제자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롱 티보 콩쿠르에서 입상했으며, EMI레이블로 여러 개의 앨범을 내놓아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90년대 들어 활동이 뜸한 편이다.
또 예프게니 모길레프스키(Evgeni G.Mogilevsky)는 네이가우스의 마지막 제자 중 한 사람으로 19세의 나이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을 차지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연주자이다. 데뷔 당시 호평을 받았던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과 베토벤 후기 소나타의 앨범을 들어보면 탁월한 구성 감각과 입체적인 톤 컬러, 그리고 고도의 집중력 등으로 이미 완성된 대가의 솜씨를 엿볼 수 있었는데, 중년에 들어서면서 그 음악적 성장이 느려진 감이 있다. 뛰어난 재능의소유자인 만큼 또 다른 변신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러시아와 독립국가 연합을 주요 무대로 삼고 있는 국내파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지휘자 로제스트벤스키의 부인인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 슈만 스페셜리스트로 이름 높은 라리사 제도바,초절기교를 자랑하는 블라디미르 오프치니코프 등도 주목할 만하다.제3세대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사람은 바로 사라져버린 ‘천재 소녀’ 예카테리나 에르비 노비스카야(Yekaterina G.Ervy-Novitskaya)다. 일찍이 신동으로 레프 오보린에게 발탁되어 10세에 최초의 독주회를 가졌고, 17세의 나이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이라는 영광을 누렸던 노비스카야는 그러나 벨기에로 이주한 후 연주활동을 중단하고 교수로만 활동하고 있어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최근 멜로디아에서 출시된 ‘러시안 피아노 스쿨’ 시리즈에 실려 있는 그녀의 연주를 들어보면, 과연 이렇게 과거에 묻혀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연주자라는 생각이다. 하루 빨리 재기하여 젊은 시절 보여주었던 그 재기 발랄한 모습과 나이와 함께 더욱 내실이 가해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제4세대(1960년대 이후 출생)
키신· 루간스키· 베레초프스키· 네볼신· 부닌…
https://youtu.be/sGJfHwSe7Sg?si=puzPWLWnfv27gnNr
(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1 키신과 카라얀)
시대가 바뀌었다. 1990년 이후 개방과 자유경제를 선택한 러시아는 그들의 최후의 보루였던 공산주의를 포기하면서까지 대국으로서의 부흥을 꿈꾸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수많은 혼란과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음악계도 마찬가지여서 그간 온실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실력 연마에만 힘을 쏟을 수 있었던 러시아의 음악가들은 이제 저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동분서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주자들의 검증무대로 훌륭한 몫을 해오던 콩쿠르들도 포화상태에 이르러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는 90년대의 음악계는, 그래서 콩쿠르 등의 경력이 없으면서도 강렬한 퍼스낼리티를 지닌 여러 스타들의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해진 무대는 내실보다는 괴팍한 외적 요소만을 내세운 반짝 인기의 연주자들도 내보내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서도 혹독한 스파르타식(혹은 러시아식) 훈련과 음악의 본질에 대한 신증함을 갖춘 젊은 러시아인들을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하겠다.
현재 그 인기의 중심에 천재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을 비롯해 알렉세이 술타노프·니콜라이 루간스키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있으며,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니콜라이 데미덴코 등도 건재하다. 이들은 현재뿐만 아니라 21세기 건반의 주역들로 우리에게 늘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해 주는 기대주들이 아닐 수 없다.
한때는 사계절이 얼어붙고 추운 나라라고만 생각되었던 러시아에,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해지고 유럽의 통화가 하나로 통일된다는‘사건’을 맞이하게 된 20세기 말, 음악계에서 특정한 민족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편협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피아니스트들 역시 로컬한 민족적 색채를 앞세우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고, 오직 강한 퍼스낼리티(이 또한 완벽한 인성과 예술의 종합적인 완성을 전제로 한다)만이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러시아인들이 이런 시대 적응에 민감한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계속해서 매력적인 재능들이 태어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프게니 키신(Evgeni Kissin)은 그 수많은 천재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며,무엇보다 성장 일변도에 있는 그의 음악성이 남들 가운데 그를 두드러지게 하는 요소라고 하겠다. 그네신 영재 음악학교의 선생님인 안나 칸토르를 사사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무척 신중한 자세로 레퍼토리 선정에도 숙고를 거듭하는 스타일이다. 다른 천재들과 같이10대에는 무엇이든 성큼성큼 쳐대는 ‘겁없는 아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나, 이제는 피아노의 숨어 있는 ‘맛’을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슈만의 ‘판타지’나, 정말로 어른스러운 맛이 풍기는 일련의 라흐마니노프 등을 들어보면 그 조짐을 알 수 있다.
그보다 2년 연상으로 역시 요즘 인기 절정인 보리스 베레초프스키 (Boris Berezovsky)가 있다. 18세 때 영국 리즈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이미 그 전에 전 소련 콩쿠르에서도 입상한 바 있으니, 그 역시 조숙한 천재형의 피아니스트라고 하겠다. 민첩하고 잘 발달된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비는 테크닉이 통쾌하고, 게다가 그는 키신이 초기에 보여주었던 타건에 있어서의 둔탁함이 없어 듣기에 부담이 없다는 것도 강점이다. 단지 베레초프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한 러시아인 치고는 그다지 러시아의 냄새가 나지 않는 연주를 들려주며, 본인도 스승이었던 엘리소 비르살라제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어 이색적이다. 현재는 러시아 작곡가들의 연주와 녹음에 주력하고 있으나 브람스 등 독일계에도 관심을 보여 앞으로의 방향이 주목된다.
베레초프스키가 우승을 차지한 후 다음회인 제10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차지하여 세상에 알려진 피아니스트가 니콜라이 루간스키(Nik olai Lugansky)로, 그 또한 그 미래가 만만치 않을 것임이 예상되는 연주자이다. 고작 8세의 나이에 베토벤의 소나타 32곡을 암보로 연주했다는 믿을 수 없는 재능의 소유자로 1988년 라이프치히 바흐 콩쿠르에서도 2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지적이면서도 영감에 찬 해석, 치밀하고 정확한 테크닉 등으로 화려함보다는 내실을 추구하는 루간스키는 현재 모스크바에서 가장 팬이 많은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며, 러시아 피아노계의 새로운 자랑거리이다. 특히 그는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애제자로서, 어렸을 때부터 이 명교수의 지도하에 자라났는데, 1994년 콩쿠르 당시 그의 성공을 지켜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니콜라예바를 아쉬워하는 애호가들도 많았다.
같은 콩쿠르에서 3위를 차지한 바딤 루덴코(Vadim Rudenko)는 세르게이 도렌스키의 제자이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등 무려 6개가 넘는 콩쿠르에 입상했던 경력을 갖고 있다. 그의 연주는 낙천적이고 밝은 음색과 건강함이 주무기로, 거기에 귀를 의심케 할 정도의 재빠른 손가락이 함께 한다. 레퍼토리 역시 그 화려함이 두드러지는 리스트 등에 강하며, 이른바 음악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기분좋은 연주자이다.
천재들의 행진은 계속 이어진다. 엘다 네볼신(Eldar Nebolsin)은 드미트리 바쉬키로프 등을 사사했고 프라하·산탄더 등의 국제콩쿠르에서 입상했다. 산뜻한 테크닉과 신선하고 재치있는 곡 해석이 특징인 그는 최근 데카 레이블에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몇 장의 레코드를 내놓았다.
타쉬켄트 태생인 알렉세이 술타노프(Alexei F. Sultanov)도 남다른 개성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타쉬켄트 음악학교와 모스크바 음악원을 다녔으며, 1987년 미국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함으로써 세계 음악계에 데뷔했다. 그후 연주, 녹음과 동시에 연습을 거듭한 그는1995년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수상하여 다시 한 번 음악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술타노프의 연주는 피아노줄을 끊어뜨릴 정도로 강한 힘과 테크닉이 동반된 대담하고 도발적인 표현이 주된 특징이다. 텔덱 레이블에서 레코드를 내고 있는데, 앞으로도 음반이 발표될 때마다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것이 예상되는 흥미로운 피아니스트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러시아의 젊은 피아니스트는 한때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스타니슬라프 부닌(Stanislav S.Bunin)이다. 1990년대들어서 웬일인지 그 활동이 정체상태에 들어간 부닌은 80년대 말 나오는 레코드마다 매진 소동을 일으키며 신드롬을 일으켰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필자 역시 선이 가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해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그의 쇼팽에 많은 애정을 가졌었기 때문에 지금 느끼는 아쉬움 또한 크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부닌이 완전히 연주생활을 중단한 것은 아니며, 일본 등지에서 교수·연주자로서의 모습을 꾸준히 보이고 있다고 하니 그의 적극적인 무대에로의 복귀가 더욱 기다려지는 마음이다.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고, 그의 컴백에 오랫동안 박수를 쳐줄 사람들 또한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월간 '객석' 참고)
https://youtu.be/a6BlDj2JaTQ?si=gwFfZiF2UJwmdikO
글쓴이 : 베토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