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部長! 대전에서 치르는 오늘 우리 당 행사에 충남대학교 총장이 참석한 건 보통 일이 아닌겨'
「민주자유당 중앙연수원 교수」 「환경•노동위원회 수석전문위원」명함보다 더 예쁘고 좋은 시절의 명함은 6월항쟁으로 6•29 항복문서를 쟁취한 모태정당 군정종식 제1야당「통일민주당
선전부장」명함이다.
'정권재창출'의 사명을 안고 연수에 참여한 일선전사들의 얼굴에서 절박감이라곤 전혀 느낄 수가 없어. 나만 나타나면 웃어 퍼대고 난리여.
★친일폐족들 설쳐대는꼬럭서니가 두려웠었나?
광복 다음 해 46년 음력 8월 열 사흘 새벽 탯줄 짤림에 고고의 함성 내지르며 살아온 74年.
스물 다섯 살의 아버지랑 외갓집이 있는 선녀골에 가다가 부엉바위 저수지에서 잠간 쉬는데 뻥뻥소리 요란하여라.
태어난지 4년 만에 6•25가 발발 전쟁와중인 아마 대 여섯 살 되었을까? 부여군 홍산 가기 전 우리서천군에서는 가장 깊숙한 내륙 마산면 시선리 선녀골이 외갓집 동네로 피난가던 길이였다.
53년 4월인가? 휴전 조인되기 3개월 전 기산국민학교에 입학 했지만 학교가려면 면사무소를 지나면 군 미필 기피자인 울아버지 잡으려 뻔질나게 우리동네 드나들던 순경나리들이 드나드는 지서 앞을 지나기가 무서워 달려 가던가 고갤 푹 숙이고 다녀야만 했던 기억이 70중반 이 나이에도 생생하구나.
각 학년 대항 국어책 읽기 대회에 담임선생님이 나를 내보내셨던 건 4학년 때 주1회 학과공부 외 취미 특기별 공부하는 특활시간에 문예반을 지원했더니 지난 주에 숙제를 냈던가보다. '전교생 4학년 이상 6•25 웅변대회가 곧 있을테니
원고를 써와서 문예반끼리 먼저 해보겠다'는 숙제였다. 나는 듣지 못했지만 우리반 기채동무가 자기 형님이 써준 원고를 내게 보여 주면서 '니가 나가서 해보라'기에 원고 들고 나가 마구 외쳤더니 선생님이 '깜이 되겠다'고 판단을 하셨던 모양이라. 새로 원고를 써 주시기에 죽자 살자 연습을해서 운동장 아침 조회시간 교장 선생님만 올라 서시는 연단에 올라가 당시 면의원님이 오셔 선생님 몇 분과 심사하시는 웅변대회에서 입상을했다. 어쩌면 나의 끼를 발굴해서 키우신 선생님의 선견지명과 내게 새로운 삶의 열정을 키워준 기채 친구가나침판이자 리더였다.
바로 6•25 웅변대회에 나가서 입상한 게기로 책읽기 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하고 그게 발판되어 5학년 때는 졸업식 날 재학생 대표로 송사를, 우리들 졸업식 날엔 답사를 했고 중학교 진학해서도 송사 답사는 내 몫이 된 것이다. 심지어 68년 군에 입대, 논산훈련소가 아닌 조치원 51예비사에 입대해서도 신병입영 신고 선서를 내게 시켰던 건 아마 음량 음폭 즉 목소리가 커서 였으리라.
53년도 국민학교 입학때에 우리 내산정리에서 10명이 입학했는데 59년도 모두 졸업 후 동네에서 젤 가난한 나 혼자만 서천중학교에 진학하여 3년 후 14회 졸업식이 62년 1월였던가 ?
격동 74년 중 중학2년 60년도에 4.19를 다음 해 61년도엔 5.16을 겼었다. 60년도 2학년 4.19 그 해 7.29총선 전 시골인 서천극장에서 웅변대회가 있었다. 나는 '학생의 핏값을 보답하라'는 연제로 출전, 오른 손 검지 손가락을 이빨로 물어 뜯어 혈서를 쓰려는데 살이 안 뜯겨 마침 호주머니에 연필깍이 검정 면도칼이 있기에 그 칼로 손가락 안쪽을 연필 깍듯이 깍지 않고 꾹 눌러버려서 피가 덩어리로 바닥에 흘러 내리니 그걸 손가락 끝으로 찍어서 '학생의 핏값을 보상하라!'써서 흔들었다.
61년 1월에 1년 선배님들 졸업식 때는 내가 송사를, 우리 졸업식에선 내가 답사를 했던 기억이 이제 떠오르네.
고등학교 진학해서 3년간 학교부근 민가와 학교 폐건물 등 계속 자취만 했던 기록역시 나 혼자만 보유했었지.
아 ~ 옛날 격동 74년 탄신74주년 이여 ~
♥뭐여? 자랑하느냐구?
자랑할 시간있으면 회개 기도하거나 등산가거나 글 쓰는 습작활동하겠네.
지난 15일 오전 광복절날 광복회장이 기념사 낭독하러 연단 올라가서 생 중계 되는데 국민염장만 건드리고 내려오기에 엿 먹이는 소리좀 하고파서 지나온 내 과거를 더듬어 본 거여.
이민우 총재님은 우리 경주이씨 문중이셔.
여걸 3선 국회의원 처녀 김옥선 선수 ㅡ 박정희를 독재자로
그 이름 누구 땜에 대권을 쥐지 못했던가?
우리 가정의 제2고향 경기도 포천의 지도자 이한동 선수
늘 바른길을 찾으려 애쓰던 5세훈 선수는 아직 젊으니까
'의원님! 저는 정치인을 보좌하는 참모의 덕목은 바로 '직언직설' 이라고 주장합니다'
'재갑아! 너 내가 이렇게 하면 되겠니?'
온양어른 하늘 가실 적 서의원께서 맨 먼저 전송 오셨더라니까.
더듬는 것들은 조화커녕 여러번 쓰는 조기조차 언보냈어.
먹는 조기가 아녀. 세워놨다가 도로 찾아가는 조기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