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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blog.naver.com/idaero47/224407006542 한글나라 만들고 한글누리 이루기에 바친 한 삶 우리말은 한말이고, 우리글은 한글이다. 한말을 한글로 적... blog.naver.com 한글나라 만들고 한글누리 이루기에 바친 한 삶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리대로 우리말은 한말이고, 우리글은 한글이다. 한말을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할 때에 우리말이 홀로 서고 우리말이 홀로 설 때에 우리 얼도 홀로설 수 있으며 우리나라가 바로 서고 자주독립국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말은 있으나 우리글이 없어 중국 한자를 쓰면서 중국 문화 곁가지로 살아왔다. 그러다가 1446년 조선 4대 임금 세종이 우리글 한글을 만들어 주시며 즐겨 쓰라고 하셨지만 조선 내내 우리글을 푸대접했다. 중국 지배를 받다보니 중국 눈치를 봐야하기 때문이지만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에 빠진 성리학자들이 나라를 이끌면서 한글과 한글을 만든 세종정신을 멀리하고 한문과 중국을 섬기고 한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잘못되었기에 한힌샘 주시경 선생은 “그 나라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며 우리말을 ‘한말’, 우리글을 ‘한글’이라고 우리 말글에 떳떳한 이름을 지어 부르며 우리 한말글(한말과 한글)을 살리고 다듬고 제자들을 키웠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모인 조선어학회(한글학회)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에도 일본 말글에 먹히지 않게 목숨을 바치며 지키고 갈고 닦아서 광복 뒤부터 우리 말글로 교과서도 만들어 교육하고 공문서도 쓸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일본 식민지 국민 교육으로 일본 한자말을 한자로 적는 한자혼용에 길든 일본 식민지 국민 세대가 이 나라 지배층이 되어 우리말을 우리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잘못을 바로잡아 한글나라를 만들려고 “한글이 살고 빛나면 한겨레와 한국이 살고 빛난다.”며 한글과 세종정신으로 나라를 일으키려고 내 한 삶을 한말글 독립운동에 바쳤다. 나는 이 일에 나설 때 이 일이 이렇게 오래 가고 힘들 줄 몰랐다. 그런데 수천 년 동안 한자를 쓰고 중국을 섬기면서 뿌리내린 사대주의와 일본 식민지 국민교육으로 길든 노예근성이 뿌리 깊게 박혀서 한말글 홀로서기가 힘들었다. 다 이루어지나 했더니 또 가로막는 자가 나오고 힘겹게 막아내니 또 나왔다. 한 고개를 넘으면 또 고개가 나왔고, 강을 하나 건너면 또 강이 나왔다. 참으로 멀고도 거친 한말글 독립운동 길이었고 긴 싸움이었다. 내가 어쩌다가 국어독립운동을 하게 되었고, 지난 60해 동안 어떻게 한글나라를 만들려고 애썼는지 살펴보련다. 1. 우리 말글살이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다. 나는 미국 군정 때인 1947년 가난한 농민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버이 모시고 농사를 짓기로 아버지와 약속하고 1962년 예산농고에 들어갔다. 그런데 5.16 군사정부는 광복 뒤 미국군정 때부터 한글로만 적던 교과서를 1964년부터 한자를 섞어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니 논밭에 거름주기는 施肥(시비), 사과나무 가지치기는 剪枝(전지), 꽃따기는 摘花(적화)라고 칠판에 한자를 쓰며 앞으로는 한자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시비’라는 말은 싸움 걸다와, ‘전지’라는 말은 전기충전지와, ‘적화’라는 말은 적화통일이라는 말과 소리가 같아 헛갈렸으며 그렇게 되니 농업시간이 한자시간처럼 되고 공부도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지 못하니 학생 때 책을 많이 보려고 도서관에서 책을 열람하니 우리말글로 된 책이 없었다. 나는 농과이기에 축산에 관한 지식은 책을 보고 스스로 더 얻으려고 ‘축산전서’를 열람해보니 일본글 책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찾은 우리말글로 된 전문서적은 전문용어는 한자로 쓰고 토씨만 한글인 한자혼용이어서 읽기 힘들었다. 우리말글로 제대로 쓴 책이 없다니 한심스러웠다. 그래서 김소월이 한말글로 쓴 시, 이광수가 쓴 소설 “흙, 사랑, 무정, 유정”들과 심훈이 쓴 소설 상록수도 읽었는데 재미가 있고 내용이 농촌계몽 민족부흥운동이어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그때 우리 말글로 된 전문서적이 없어서 신문도 자주 보았는데 정치 경제면은 온통 한자혼용이고 사건 사고만 가득한 사회면과 문화면은 한글전용이었다. 그런데 신문에 한글전용과 한자혼용 논쟁 글이 있는데 한글전용하자는 분 글은 내 생각과 똑 같았고 한자혼용하자는 이들 글은 억지소리였다. 우리말을 우리글자인 한글로 적으면 누구나 읽기 쉽고 지식과 정보를 빨리 얻을 수 있는데 한자를 쓰는 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마침 학교에서 조회 시간에 명사들 특강을 했는데 농촌운동을 하는 한인수(새마을운동 제창자) 고교 선배와 예산 출신으로 미국 유타대학 교수인 이태규 박사의 강연을 듣고 더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농촌운동과 국어운동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2. 농촌운동가 한인수 선배와 과학자 이태규 박사 강연에 감동하다. 한인수 고교 선배는 웅변가로서 농촌운동을 하는 분이었는데 “국민 80%가 농민인데 농민 80%가 글도 읽지 못하고 하루 밥 세끼도 못 먹는다. 농민이 무지와 가난에서 벗어나야 이 나라가 일어난다.”면서 저만 잘 살려고 하지 말고 함께 농촌부흥운동에 나서자고 외쳤다. 예산 출신인 이태규 박사는 “박정희 소장이 우리나라 과학을 일으켜달라고 초청해서 귀국했다. 고향 젊은이들아, 나는 미국 유타대 화학교수로서 노벨상 수상자로 오르내리고, 내 아들 딸 사위도 미국 박사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예산 산골에 머물러 있지 말고 큰 뜻을 세우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 박헌영도 예산 내 친구다.”라고 말씀하셨다. 두 분 강연을 듣고 대학에 가서 농촌운동과 잘못된 국어정책을 바로잡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들어올 때 농고를 나와 어버이 모시고 농사를 짓겠다는 아버지와 약속은 깨지고 대학에 들어가려고 대학 시험을 봤으나 떨어졌다. 대학입시에 필요한 영어, 수학 들은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 배우고 농업공부만 한 농고 출신은 무리한 일이었다. 그렇게 입시에 떨어지고 집에 있으니 아버지는 잘 되었다고 약속대로 진학을 포기하라고 하셔서 나는 아버지와 밥도 같이 안 먹고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안 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설 날 인사차 우리 집에 온 아버지의 친구 한양교 아저씨가 보고 나를 당신 집에 데리고 가서 공부시키겠다고 했다. 그 아저씨는 6.25 전쟁 때 군복무를 했는데 그때 홀로 계신 그 분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가 돌봐주어 그 분은 내 아버지를 친형처럼 생각하고 명절 때마다 인사차 오는데 그 모습을 본 것이다. 그래서 아저씨는 “애들이 공부를 안 해서 걱정인데 저렇게 공부하겠다는 애를 막지 말자.”고 아버지를 설득해 나를 서산 읍내 당신 집으로 데리고 가서 초, 중학교에 다니는 당신 아들딸을 가르치며 공부하게 했다. 그러나 수학과 영어는 참고서를 가지고 혼자 시험공부를 한다는 게 힘들고 쉽지 않아서 힘들어 할 때에 신문에서 한글학자 김윤경 교수가 쓴 “잘못된 국어정책”이란 글을 보고 그분에게 “내가 한글을 살리려고 대학에 가려고 하는데 힘들어 진학을 포기할까 고민이다.”라며 내 뜻과 꿈을 적어 보냈더니 바로 답장을 해주셨다. 김 교수님은 “나는 한글을 지키려다 일제에 끌려가 옥살이도 했다.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워지는데 너 같은 젊은이를 만나니 반갑고 기쁘다. 꿈은 이루어지니 포기하지 말고 꼭 대학에 가서 국어학계에 이름을 남기라.”는 말씀을 하셔서 용기를 내 대학에 갔다. 3. 대학에 들어가 국어운동대학생회를 만들다. 김윤경 교수님의 답장은 내가 한글나라 만들기에 바치게 만드는 큰 울림이었다. 이렇게 1966년 동국대 농업경제과에 들어가니 마침 농촌운동 모임이 있어서 바로 가입해 활동을 하면서 학교 밖 모임도 열심히 나갔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예산농고 이우재 선배가 사무국장으로 있는 농업근대화연구회의 금요강좌와 성균관대 2대 총장을 지낸 이정규 박사가 이끄는 토요강좌에 열심히 나가서 조직 생활을 익히고 세상을 더 알게 되었다. 금요 강좌 쪽에는 그때 학사주점 사건과 관련 된 분도 있었으며 다음에 국무총리와 국회의원을 한 선배들도 있었고 토요강좌 쪽에는 독립운동을 한 이강혼 광복회장, 우당 선생 아들 이규창 선생, 역사학자 홍이섭 교수들이 있고 다른 학교 친구들도 있어 학교에서보다 더 많은 걸 배우고 깨달았다. 이렇게 농촌운동을 하면서 조직 생활을 익히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면서 국어운동 모임을 만들 고민을 하다가 주요한 선생이 쓴 ‘도산전서’를 읽고 감동해 대학에 흥사단 학생모임을 만들고 국어독립운동을 할 생각을 하고 있던 1967년 3월 서울대 학보에 서울문리대 이봉원군이 한글운동 깃발을 들었다는 조그만 기사가 있어서 바로 그를 만나 동국대학에도 국어운동대학생회를 만들고 함께 한글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대학4-H연합회와 농촌운동모임에서 여러 대학이 연합해 학생 활동을 해봤기에 국어운동도 그 경험을 살려서 함께 활동하자는 생각으로 그 당시 출범한 고려대, 연세대까지 연합해 한글날에 정부에 한글전용 촉구대회를 하자고 제안하고 서울대 이봉원군과 내가 앞장서서 그 준비를 했다. 그렇게 1967년 한글날에 4개 대학이 “한글전용 정책 촉구 대회”를 서울대에서 열려고 했으나 서울대 학생과에서 허가하지 않고 동국대 학생과도 외부 정치활동을 하면 동아리 동록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봉원군과 내가 앞장서서 준비한 일이지만 서울대와 동국대는 성명서에서 빠졌다. 그때 이봉원 군이 한글학회와 접촉하고 나는 공병우타자기에서 만들어준 유인물을 찾아오고 연세대도 함께 참여하게 하려고 정중헌 회장을 만나러 두 번이나 연세대에 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고려대와 연세대 이름으로 언론에 보도 자료를 내고 고려대에서 한글전용 촉구 행사를 하려다가 경찰에 유인물을 빼앗기고 제지당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4. 정부가 1970년부터 한글전용 정책을 실천하기로 하다. 1967년 한글날에 국어운동대학생회 학생들이 한글전용 촉구 대회를 열려다가 경찰이 막아서 열지 못했다는 언론보도를 본 박정희 대통령이 한글학회 이사인 이은상 선생에게 자문하니 “대학생들 말을 들으면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처럼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고 설명하니 박 대통령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한갑수 한글학회 이사가 한글전용 5개년 계획안을 설명하니 박정희 대통령이 알아들고 한글전용이 좋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때 대학생회는 대통령이 독일에 갔을 때 이름을 한자로 서명하려고 무거운 벼루까지 가지고 갔다는 보도를 보고 “대통령이 남의 글자로 서명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며 한글로 서명하라고 건의했는데 앞으로 그러기로 했고 그때 탑골공원을 정비하며 세운 정문에 ‘삼일문’이라고 한글로 현판을 써 달았다. 그리고 1968년 3월14일에 박 대통령이 내각에 한글전용 정책을 검토라고 지시했다는 보도가 있어서 3월 17일에 동숭동 서울문리대 교정에서 4개 대학국어운동대학생회가 대통령 발표를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그때 내가 한국방송 라디오 인터뷰를 하고, 텔레비전 인터뷰는 나와 함께 참석한 우리학교 국문과 여학생 후배가 했다. 서울대와 동국대 학생이 주축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한글은 훌륭한 글자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정부는 왜 한글전용법을 지키지 않는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어 일본을 물리쳤다고 자랑하면서 지금 철갑선도 만들지 못하나?”라고 말한 게 하루 종일 뉴스에 나왔다. 그날 우리는 서울대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나는 광화문 지하도와 종로에서, 서울대 이봉원군은 명동에서 후배들을 이끌고 전단을 뿌리고 거리 계몽활동도 했다. 그날 한글학회 이사인 정인섭 교수가 우리 학생들을 종로 한일관에 모이게 해서 맛있는 갈비탕을 사 주시며 “오늘 너희들 활동이 방송과 신문에 다 나왔으니 이제 박 대통령도 한글전용을 안 할 수 없을 거다. 오늘 아주 기분 좋은 날이다.”라시며 그 식당에 다른 손님들도 있는데 아리랑을 크게 부르시고 우리들에게도 답가를 부르라고 해 나와 함께 간 여학생 후배가 ‘오빠 생각’노래를 한 일도 있다. 그 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말 경에 “1970년부터 교과서와 신문까지 한글전용을 하겠다.”고 발표하고 새로 지은 광화문에 그 뜻을 담아 한글현판을 달았다. 연산군은 한글벽서 사건을 보고 한글을 못살게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들 항의를 들어주고 한글을 살려서 나라를 일으킨 것이다. 5. 내 이름을 한말글로 ‘이대로’라고 바꾸다. 그때 서울대 국어운동대학생회가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고 적자는 ”고운이름 자랑하기“ 행사를 했는데 1967년 첫 행사 때에 음악가 금수현 선생의 아들딸인 금난새 형제가 으뜸 이름으로 뽑혔다. 이 행사는 우리말글이 있는데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고 쓰지 않는 잘못을 바로잡는 역사상 중대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로만 주장하지 말고 우리부터 실천하자고 내 이름을 한말글로 ‘이대로’라고 바꾸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한글을 푸대접해도 나는 나대로 한글을 살리고 빛내어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뜻을 담았고 이름은 부르고 기억하기 쉬워야 한다. “는 생각으로 그렇게 지었다. 그때 ”군자는 대로 행“이라는 말이 있어서 사람들이 기억하기 좋을 거라는 것과 나도 군자답게 나라사랑 길을 죽을 때까지 가겠다는 생각도 이름에 담았다. 그때 내가 이름을 바꿀 때 농촌운동을 함께 하는 뜻벗(동지)들에게 내 생각이 어떠냐고 물어보니 좋다면서 나를 대단한 애국자로 보며 ‘이대로 각하’라고 부르기도 해서 힘이 났다. 그때만 해도 모두 한자로 이름을 쓸 때인데 나는 일부러 행사에 가면 방명록에 한글로 ‘이대로’라고 쓰니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한글이름을 짓자는 운동 차원에서 일부러 더 그렇게 했다. 한글단체 어른들도 내 이름은 기억하기 쉬워서 한자단체와 싸울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나를 찾고 앞세웠다. 한때 ”이대로가 좋아“ 같은 유행가도 있고 전두환 정부 때 강남에서 건배사로 ”이대로! 좋다! “라는 말도 유행이어서 한자단체 패들이 ‘이대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오천 년 동안 써온 제 겨레말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제 글자 한글이 있는데 제 말글로 이름도 짓지 않고 적지 않으며 중국 한자로 이름을 짓는 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렇게 나부터 한말글 이름으로 바꾸고 썼더니 20년 뒤 국어운동대학생회 회장을 지낸 후배들 가운데 ”김슬옹, 김불꾼, 김한빛나리“ 처럼 한말글 이름으로 개명하는 후배가 나와서 함께 열심히 한글운동을 해서 든든했다. 그리고 이제 일반 국민들도 우리 말글로 이름을 많이 짓고 있어서 반갑고 고마웠다. 우리 국어운동대학생회가 한 일 가운데 ”박정희 정부가 한글전용 정책을 펴게 한 것과 한말글로 이름을 짓는 운동을 한 것“은 매우 큰 업적이고 자랑거리다. 6. 한글 한자 문자전쟁 선봉장이 되다. 정부가 1970년부터 한글전용 정책을 강력하게 펴도록 하게 만들고 그 일을 주도했던 서울대 이봉원군과 나는 1970년 승리감을 담고 함께 학훈단 육군 소위로 군에 입대했고 1972년 6월 전역해서 한글학회 회장이 된 허웅 지도교수를 찾아가 ”이제 저는 농촌에 들어가 새마을운동을 하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고 앞으로 한글을 어떻게 빛내면 좋을지 내 뜻과 의견을 적은 글을 드리니 허웅 회장께서 ”너희 대학생들이 이룬 한글전용 정책이 김종필 총리와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반대하고 서울대 국문과 이희승 교수와 조선일보, 동아일보 같은 신문이 함께 한글전용을 가로막고 있어 그 업적이 물거품이 되게 되었다. 내 힘만으로는 못 막으니 다시 대학 후배들을 이끌고 네가 앞장서 나와 함께 막아내자.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1972년 한글날에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를 결성하게 되었는데 다른 대학 후배들도 내가 회장을 맡으면 따르겠다고 해서 초대 동문회 회장을 맡게 되었고 그때부터 학생 때 지도교수였던 허웅 한글학회 회장을 모시고 한글과 한자 싸움판 선봉장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때 우리 대학생들이 정부에 한글전용정책을 펴게 하니 1969년 서울대 국문과 이희승 교수가 그 제자들과 ‘어문회’라는 일본식 한자혼용하자는 모임을 만들고 한글전용을 반대해서 한글과 한자 문자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허웅 회장은 일제와 맞서서 한글을 지킨 외솔 최현배 회장처럼 투쟁 경력이 있는 분이 아니라 전국국어운동대학연합회 지도교수를 맡았던 학자여서 정부와 언론까지 손잡은 막강한 세력과 싸우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절실하게 되어 내가 나서게 된 것이다. 이렇게 결성된 전국국어운동학생동문회(회장 이대로)는 바로 ‘소리’라는 소식지를 내고 한글날마다 덕수궁 동상 잎에 모여 대학생 후배들과 우리 뜻을 밝히고 한글사랑 운동을 하게 된다. 그때 나는 여러 학교에 학생 동아리를 늘리는데 힘썼고 숙명여대, 상명여대 들에 모임이 창립되어 여학생들이 늘어나니 모임이 더 활발해졌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니 독재청치가 가혹해지고 문화운동모임인 국어운동학생회까지 탄압해서 연세대만 빼고 다른 대학들은 한 동안 활동이 뜸하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독재정치가 좀 풀렸을 때에 다시 연세대 김슬옹 후배가 앞장서서 활동하고 건국대, 외국어대, 경기대들과 지방 대학까지 전국에 40여개 대학으로 모임이 늘어났다. 7. 시민운동 모임인 한말글사랑겨레모임 만들다. 한글과 한글학회 구원투수로 국어운동대학생회 후배들을 20년 동안 이끌고 허웅 회장을 도와 한자혼용파와 싸우는 문자전쟁 선봉장으로 활동하던 나는 학생운동 차원을 넘어서 시민운동으로 전환하자고 1987년 한글날에 ‘국어운동동지회’라는 이름으로 한글회관에서 창립총회를 하고 내가 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한글단체 어른들이 군사독재정권과 맞서려면 대학생회 이름이 더 유리하니 시민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동문회 이름 그대로 두고 시민들과 함께 한말글 사랑운동을 시작했는데 마침 1988년 민주화 바람이 일어나니 공병우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 한글문화원을 차리고 한글기계화운동을 시작하면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한글문화원 건물 안에 사무실을 주셔서 공 박사와 함께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지난날 우리가 한글학회를 도와 한글운동을 했지만 학회는 우리가 모일 방도 주지 않았는데 이렇게 사무실을 주시니 고맙고 힘이 났다. 그래서 중단되었던 동문회 소식지도 다시 내고 달마다 한글문화원 강당에서 ”한말글사랑 이야기마당“을 열었다. 먼저 국어연구소가 꼭 필요하지도 않은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표준말을 바꾸고 일부 한글맞춤법을 바꿔서 한글학회 권위를 짓밟으려고 하는데도 한글학회는 나서지 않아서 내가 그 잘못을 따지는 토론회를 열었고, 남북언어통일, 일본 한자말 버리기, 한자혼용 반대, 한글 이름 짓기 들 토론회를 열었더니 신문도 우리 소식을 보도해주었다. 그 때 한국일보가 우리 활동을 크게 보도하니 홍사덕 전 의원이 우리 활동을 라디오에서 소개했다. 그 때 시작한 한말글사랑 이야기마당은 지금은 한글학회에서 내가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를 맡고 3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공병우 박사는 한글문화원 안에 한국글쓰기연구회(회장 이오덕) 사무실도 주시고 젊은 나와 이오덕 선생이 손잡고 시민운동모임을 만들면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오덕 선생이 이끄는 교사들과 한글단체 사람들이 함께 모여 발기인 대회까지 열었는데 이오덕 선생은 모임 이름을 ”우리말살리기모임“으로 하자고 제안하고 국어운동대학생회 출신 젊은이들은 ”한말글사랑모임“으로 하자고 해 합의가 안 되었다. 젊은이들은 주시경 선생이 지은 우리말 이름 ‘한말’과 우리글 이름 ‘한글’을 살려서 우리말글을 ‘한말글’이라고 부르며 우리말글을 지키고 빛내자고 주장하고, 이오덕 선생은 ‘한말글’이란 말이 일반인에게 낯설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을 설득해 이오덕 선생의 뜻대로 하려 했으나 끝내 이오덕 선생은 굽히지 않아 따로 따로 활동하게 되어 나는 ‘한말글사랑겨레모임’을 맡아 활동을 했다. 8. 중앙일보 제호를 한글로 바꾸고 한글가로쓰기 하게 하다. 이렇게 시민운동 모임을 만들고 ”한글이름 펴기, 한자로 된 국회의원 이름패와 휘장 한글로 바꾸기, 한국은행 한자현판 한글로 바꾸기,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 영어조기교육 반대 운동 들 중대한 일을 하면서 공병우 박사와 독립신문이 창간한 4월 7일 신문의 날에 해마다 여러 일간신문에 “독립신문 창간 정신을 살려서 한글전용으로 신문을 만들라.”라고 건의문을 보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던 1995년 3월 7일에 공병우 박사가 돌아가셔서 그해 4월 7일에는 나만 한말글사랑겨레모임 이름으로 여러 신문에 건의문을 보냈는데 바로 중앙일보 조일현 편집부 차장이 “사장이 내 건의를 들어주려고 하는 데 간부들이 반대하니 만나 설득을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중앙일보 간부들을 만나니 한글전용으로 바꾸었다가 신문사가 망할까 불안해하기에 나는 “걱정하지 말라. 모험은 1988년에 창간한 한겨레신문이 7년 동안 다했고 점점 독자가 늘어나고 있다. 중앙일보가 제호를 한글로 바꾸고 한글전용하면 독자가 더 빨리 늘어나 1등 신문이 될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더니 그해 한글날부터 중앙일보가 제호도 한글로 바꾸고 한글전용 가로쓰기를 단행했다. 그러니 내 말대로 1년 만에 독자 수가 동아일보를 뛰어넘어 2위에 올라 조선일보까지 넘보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말할 것이 없고 한국일보와 다른 신문들도 깜짝 놀라며 전부 한글전용 가로쓰기로 바뀌었다. 이 일은 1896년 독립신문이 한글전용을 한 다음 100여 년 만에 모든 신문이 한글전용으로 바뀌는 큰 사건이었다. 나는 1988년에 한겨레신문을 창간할 때 창간주주로 참여하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의 세 자식들도 창간 주주로 이름을 올렸다. 어른이 되면 한겨레신문을 사랑하고 독자가 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이 초창기 창간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다른 신문들이 모두 한글전용을 하니 그 빛이 제대로 나지 못해서 안타깝다. 아무튼 가장 끝까지 한글전용을 반대하고 한자혼용을 하던 조선일보 동아일보들이 스스로 무릎을 꿇게 한 것은 또 하나 한글나라를 이루는 큰 업적이고 보람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아직도 제호는 일제 때 쓰던 한자를 쓰면서 한자혼용하자는 세력을 도와 한글을 빛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참 못되고 못난 언론들이다. 9. 한글전용법 폐기, 한자혼용법 제정을 막다. 1990년대는 한글과 우리말이 연산군 때 다음으로 최대 위기였고 일제 때보다 더 한글은 탄압을 받았다. 일본 한자말을 일본처럼 한자로 적자는 서울대 국문과 이희승 교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립국어원을 만들고 한글과 한글학회를 죽이려고 나섰고, 정부가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더니 김영삼 정부가 영어 조기교육을 주장하면서 한글과 한국말이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거기다가 김대중 정부 때에는 국회에서는 박원홍 의원이 앞장서서 김종필 전 총리와 함께 한글전용법을 폐지하고 한자혼용법을 제정하자는 법안을 제출하고 김종필 총리와 심재기 국어원장이 공문서에 한자를 병기하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육해공 총 공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오덕 선생과 다시 손잡고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공동대표 이오덕, 이대로, 김경희)을 만들고 한글단체와 함께 그들과 맞서는 싸움에 앞장섰다. 나는 1999년 한글날에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에서 김종필 총리와 심재기 국립국어원장, 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진태하 회장들을 우리말 훼방꾼으로 뽑아 그 잘못을 알려주었더니 진태하 회장은 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내용증명을 보내고 허웅 한글학회장에게는 나를 돕지 말라고 경고장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고소할 테면 하라며 답변서를 보내고 김종필 총리에게도 내용증명으로 그가 1972년부터 한글을 못살게 군 잘못을 밝히고 내가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 조직위장을 맡았던 일을 말하며 그건 친일행위로서 민족 반역이라며 공개토론하자고 내용증명을 보냈는데 응답이 없었다. 1990년 정부가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뺄 때는 노재봉 국무총리를 한글전용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해 바로잡은 일이 있었고 그 뒤부터 민변 임종인 부회장이 스스로 나를 찾아와 돕겠다고 해서 자신 있게 맞섰다. 그리고 한글단체 대표들을 이끌고 한글회관에서 궐기대회를 하고 앞장을 서서 거리 시위에도 나섰는데 전투경찰은 우리가 큰 길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문체부 앞에서 기자회견도 하고 삭발 시위도 했다. 1999년 3월1에는 종로 탑골공원에서 한글독립선언식을 하고 한글회관까지 거리 행진해 와서 궐기대회도 했다. 그래도 듣지 않아 덕수궁 세종대왕동상 앞에서 반대 집회를 하고 100미터 펼침막을 들고 종합청사까지 거리행진을 하다가 조선일보 앞에서 경찰이 펼침막을 찢으며 사람들을 파출소로 연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죽으려면 살고, 살려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투쟁해서 승리했고 막아냈다. 그런 투쟁사실을 언론은 보도를 안 해서 국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오늘날처럼 저절로 한글이 쓰이게 된 줄 아는데 많은 이들이 피땀 흘려 투쟁한 결과다. 한글단체는 김종필 총리와 신낙균 문화부장관 영정을 단 상여를 메고 탑골공원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경찰이 막았다. 한글단체가 이렇게 치열하고 싸워서 한글을 지킨 것은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아서 국민은 가만히 앉아서 한글이 오늘날처럼 쓰이게 된 줄 안다. 10. 공병우 박사와 한글기계화운동에 나서다. 공병우 박사는 일제 때 서울에서 안과 전문병원을 처음 연 분이고 눈 검사 시력표를 처음 도입하고 쌍꺼풀 수술을 처음 시술하는 일들 안과학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고 앞을 못 보는 이들을 위해서 맹인 복지원을 열고 많이 도와준 분인데 광복 뒤 세벌식 속도타자기를 발명해 한글기계화에 큰 공을 세웠고 셈틀 시대에 한글정보화시대를 연 분이다. 세종대왕께서 만들어주신 한글을 주시경 선생이 누구나 쓸 수 있도록 갈고 닦았다면 공병우 박사는 타자기와 셈틀로 한글기계화를 연 개척자요 선구자다. 그런데 정부가 타자기 자판 국가표준을 한글 창제 원리와 장점을 죽이는 네벌식을 표준으로 정해서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정부와 맞서서 투쟁하다가 탄압을 받고 1980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으로 망명해 보니 미국은 타자기시대를 넘어 셈틀(컴퓨터)시대가 온 것을 보고 한글 창제 원리와 장점을 살린 세벌식 셈틀문서편집기를 개발해 1988년 민주시대 바람이 부는 걸 보고 귀국해 종로구 옛 공안과 자리에 한글문화원을 꾸리고 한글기계화 연구와 한글운동을 시작했다. 나는 1967년 국어운동대학생회가 태어나 활동을 할 때에 공병우 박사가 공병우 타자기로 학생들 유인물을 모두 만들어 주셔서 내가 공안과 사무실로 가서 찾아온 일은 있으나 공 박사와 함께 한글운동은 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한글기계화운동을 하면서 보니 이 분은 진짜 참사람이었고 참 애국자였으며 참 박애정신 실천가로서 성자이셨다. 그래서 나는 이 땅에 태어나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내 스승으로 받든다. 공 박사는 나에게 타자기와 셈틀을 주시면서 내게 직접 타자연습을 시키시고 내가 눈감고 400타까지 치는 것을 보고 이제 당신은 죽어도 좋다면서 흐뭇해 하셨다. 그리고 하이텔, 천리안 들 피시통신에서 함께 한글사랑운동을 했다. 그래서 나도 공병우 박사와 함께 누리통신 1세대다. 그때 나는 하이텔 천리안 들 통신회사에 영문으로 된 아이디를 한글로 바꾸라고 건의하니 들어주어서 그때 내 통신이름(아이디)은 한글로 ‘나라임자’로 썼고, 그 뒤 네이버와 다음에서 전자우편 또이름(별명)으로 ‘나라임자’로 썼기에 지금도 그때 함께 활동한 젊은이들이 나를 보면 ‘나라임자’님이라고 부른다. 그때 나는 피시통신 한글사랑 모임에서 ‘네티즌’ 이라는 말을 ‘누리꾼’으로 바꾸어 쓰자고 해서 많은 이들이 따라주었고 지금은 사전에도 올라갔다. 11. 한자로 된 국회의원 이름패와 휘장을 한글로 바꾸다. 1990년대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한자조기교육에다가 영어조기교육까지 하려고 해서 나는 그에 바로바로 대응해 싸우자고 ‘바로모임’이라는 별동대를 따로 만들고 한글국회 만들기, 한국은행 한자현판 한글로 바꾸기, 국립국어원 바로세우기, 영어 바람 막기에 신속하게 나썼다. 마침 내가 ‘한말글사랑겨레모임’을 만들 때 만난 원광호 뜻벗이 원주에서 당선이 되어 한글국회 만들기에 앞장서기로 했기에 나는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에 국회의원들 한글이름패를 만들어주자고 제안했고 안호상 회장을 내 차로 모시고 박준규 국회의장에게 한글이름패를 전달하려고 했으나 박준규 의장은 제 대학 스승인 안호상 박사를 만나주지도 않고 받지 않아서 원광호의원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글단체가 국회의원 이름패를 만들어다까지 주면서 쓰라고 해도 안 썼는데 15대 국회 때 김근태 의원이 국회 사무처에 제 이름패를 한글로 쓰겠다고 하니 판검사를 지낸 그 당 원내대표가 김근태 의원 같은 거물이 시시하게 한글 이름패에 집착하느냐며 면박을 주더란다. 그래서 나를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만나니 “국민 대표가 제 말글로 이름패를 쓰는 것을 하찮게 본다는 것이 말아 되는가.”라고 분개하며 앞으로 내가 하라는 대로 한글국회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겠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먼저 국정감사 때 피감기관에 자신의 이름패를 한글로 만들어달라고 해 한글이름패를 놓고 국정감사를 하게 했고, 그가 통합신당 원내 대표를 맡았을 때 60여 명 그 당 소속 의원 이름패를 한글로 모두 만들어 한글날에 박관용 의장에게 가서 단체로 요구하라고 했더니 그렇게 해서 한글로 바꾸었다. 그러니 17대 국회 때에는 개원 전에 국회 사무처가 모든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에서 한글로 이름패를 쓸 의원들을 물어보니 300명 가운데 30여 명만 빼고 모두 한글로 달겠다고 했고 지금은 국민의힘 소속 부산 출신 이헌승 의원과 대구출신 유영하 의원만 한자이름패를 쓰고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사라질 쓰레기로 보고 그냥 놔두고 있다. 그리고 그때 국회 상징인 국회 휘장을 한자로 바꿔달라고 건의했으나 되지 않았는데 17대 국회 때 노회찬 의원이 앞장을 서서 한글단체 대표들과 함께 국회의장을 만나 한글로 바꾸게 했다. 그때 노회찬 의원은 한자혼용으로 쓴 당선 선서문도 스스로 한글로 바꿔서 하고, 일본 법전을 베낀 법률 문장들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일도 했다. 그렇게 여러 의원들이 애써서 한글국회로 만들었다. 11.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고 공휴일을 되찾다. 1990년 노태우 정부는 공휴일이 많아서 나라경제가 어렵다고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뺐다. 그러나 그건 한글을 못살게 구는 자들이 경제가 어렵다는 핑계로 한글을 못살게 한 짓이었다. 나는 처음 청와대에 근무하는 이로부터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한글학회에 알리고 가장 먼저 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가 한글회관에서 그 잘못을 따지는 대회를 열었고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에서 그 대책회의를 열게 했다. 그때 한갑수 선생은 청와대는 국어운동대학생회라면 꼼짝을 못하니 나를 내세워 막자고 하셨다. 그런데 한갑수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 때 청와대가 국어운동학생회 이야기를 귀담아 듣던 때가 아니고 전두환, 노태우 때임을 모르고 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한글단체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나서주길 바라기에 내가 국어운동대학생회 대표들 40여 명을 이끌고 이어령 문화부장관에게 장관직을 걸고 한글날을 지키라고 건의하려고 문화부에 갔더니 경찰버스 두 대로 온 전투경찰들이 우리를 에워싼 뒤 이어령 장관은 차를 타고 청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최진용 어문과장이 직원들과 함께 우리를 문화부 직원식당으로 안내해 만나주어서 최 과장에게 장관이 꼭 장관직을 걸고 한글날을 지키라고 건의하고 최 과장도 그렇게 장관에게 전달하겠다고 했으나 이어령 장관은 한글날을 지키지 못했다. 그 뒤 나는 국어운동대학생회 학생들을 이끌고 탑골공원원에 ‘한글독립선언식‘을 하고 명동까지 한글날 지키기 거리행진도 했다. 그러나 정부는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버려서 한글단체는 바로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에 나섰으나 한글단체만으로는 안 되어서 나는 시민단체와 사회 저명인사를 망라해 모시고 한글날국경일제정국민위원회(위원장 전택부)를 조직하고 내가 사무총장을 맡아 16대 국회 때 신기남 의원과 함께 한글날국경일제정법안을 내고 추진운동을 했으나 안 돼서 17대 국회 초에 신기남 의원에게 “민주당의원 만으로는 안 되니 한류와 한국어 보급까지 생각하는 큰 그림을 그리자고 한국문화세계화의원모임(대표 신기남)을 만들어 다시 한글날국경일제정을 하자면서 회칙까지 만들어 주었더니 김근태, 노회찬, 정두언 들 여야 의원 60여 명이 모였고 2005년에 법안을 내고 그해 연말에 통과시켰다. 그런데 국경일이 되면 자동으로 공휴일이 되는 줄 알았더니 안 되어 그 뒤 시민단체와 함께 '한글날공휴일되찾기국민연합'을 꾸리고 내가 상임대표를 맡아 공휴일도 22년 만에 되찾았다. 12. 중국 절강월수외대에 가서 한국어를 가르치다. 나는 2006년 국경일이 된 첫 한글날 경축식 위원회 사무총장으로 한글날 국경일 행사를 잘 마친 뒤 이제 한글나라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한글을 온 세계인이 쓸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겠다고 언론재단에 인터넷 신문 참말로(대표 박해전)와 함께 “국외 한국어 실태 조사” 과제를 내서 채택이 되어 중국, 일본, 몽골에서 한국어와 한글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조사했다. 그때 일본에 가니 겨울연가 연속극이 유행하면서 일반인들도 한국어를 배우려고 몰려들고 있었고, 중국 북경문화원에서는 한국어를 배울 사람을 모집했더니 희망자가 많이 몰려서 교통경찰까지 동원해 교통 정리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 절강월수외대에 가보니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그 절강월수외대에는 내가 오랫동안 한국어정보학회에서 남북 학자들과 중국에서 학술회의를 하면서 친해진 연변대 유은종교수가 가 있었기에 한국어교육 실태를 조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대학 총장이 나에게 “젊은 날에 뜻을 세우고 환갑이 될 때까지 그 뜻을 이루려고 애썼다는데 그런 사람이 중국에도 드물다. 우리 대학에 와서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가르치며 우리 학생들에게 그 정신을 심어주면 특별대우를 하겠다.”고 했다. 유은종 교수가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소개한 거 같았지만 한국에서는 한글운동을 하는 나를 멸시하는데 오히려 중국에서 나를 알아주어 기뻤다. 그리고 그곳 소흥은 내가 좋아하는 중국 사상가요 문인인 노신과 주은래가 태어난 곳이고 외국에 한글과 한국어를 알리는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터라 바로 그 학교에 가서 태권도장을 만들고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한글날이 있는 10월 마지막 토요일에 그 대학에서 중국 모든 대학에 있는 한국어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말하기, 한글 붓글씨, 한국노래자랑 대회를 여는 한글문화큰잔치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한글문화큰잔치를 9회까지 성대하게 하다가 10회 째는 온 세계에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리는 모범 본보기로 삼으려고 마음먹었는데 사드문제로 중국과 사이가 나빠지고 코로나유행병까지 겹쳐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2년 동안 한국어과 학생을 500명에서 1000명으로 늘리고 태권도를 그 학교 동양어학부 체육과목으로 만든 뒤 국내에서 한글날 공휴일 되찾기 한글박물관 짓기 들들 내가 나서야 할 일이 많아서 2009년에 귀국했다. 13. 정부에 세종학당 사업과 한글박물관 건립을 건의 하다. 그런데 그때 중국 대학에 근무하면서 청와대에 내가 낸 건의문을 국어원으로 이첩한 청와대 행정관이 내게 참 좋은 내용이지만 장관 정도가 의식을 가지고 추진해야 할 일이니 유인촌 장관 개인 전자우편주소를 알아봐줄 터이니 그렇게 보내라고 했다. 무사안일 공무원 의식과 조직으로는 그런 건의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이행할 환경이 아니라서 그랬다. 그래서 정부기관 공식 건의 통로가 아닌 유 장관 개인 네이버 전자 우편으로 건의문을 보냈더니 바로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만나 세종학당 사업과 한글문화관 건립, 한글주간 들 장관이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그때 나는 또 하늘에서 세종대왕이 나를 도와주셨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유인촌 장관 개인이 결단력 있는 사람으로 봤다. 그렇게 고마운 마음으로 다시 중국 대학에 가서 근무하고 있는데 그 업무를 담당하는 문체부 김준 사무관이 “세종학당 사업은 국어원에서 맡아 잘 시행하고 있는데 한글문화관 건립은 국회에서 예산도 따야 하고 절차가 복잡해 내가 귀국해 나서야 되겠다.”라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2009년에 귀국해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를 맡고 한글문화관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한 뒤에 사무총장으로 국회에서 한글문화관 건립 예산도 따서 한글문화관을 짓게 했다 그때 세종학당 사업과 한글문화관 건립은 함께 연계해 시행할 일로 보고 추진했으며 17대 국회 때 내가 한글날 국경일 제정을 하면서 신기남, 김근태, 노회찬 의원들에게 만들게 한 한국문화세계화의원모임(대표 신기남)이 많이 도와주어서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글문화관은 한류 확산을 위해서 한글과 한국어를 널리 알리고 빛내자는 뜻으로 ’한글문화관건립위원회‘이름으로 국회에서 예산도 따고 국민 공모를 통해서 이름도 ’한글누리‘라고 정했는데 어용교수와 공무원들이 짜고 이름을 한글박물관으로 바꾸고 고문서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 한글은 박물관으로 들어갈 글자가 아니고 새싹으로서 잘 키워야 할 글자다.”라면서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했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그 건립 연혁에서도 내가 한 일은 빼고 자신들이 세운 것처럼 하더니 요즘 불이 나서 몇 해 동안 문을 닫게 되었다. 이 일은 한글이 태어난 곳인 경복궁 광화문에 달았던 한글현판을 떼고 나라 망하게 한 한자현판을 복제해 달았다가 가짜로 밝혀져서 또 가짜를 단 문화재청이 한 짓과 닮은 현상이다. 14. 서울시에 한글마루지사업을 하게 하다. 2010년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를 맡고 한글학회에서 근무할 때 서울시 역사문화과 황금룡 팀장이 서울시에서 한글발전역사와 관련된 사업을 하고 싶다며 나를 뵙고 싶다고 했다. 2006년에 내가 서울시의회 박주웅 의장을 만나 세종대왕 나신 곳을 찾아 겨레문화 성지로 꾸미고 국민교육장 겸, 관광지로 만들자는 건의를 하고 여론 조성을 한 일이 있기에 나에게 자문을 구하려고 한 거 같았다. 그래서 만나 한글이 태어난 경복궁과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을 알리는 통인시장 근처 길가에 있는 세종대왕 나신 곳 표지석 옆까지 가서 그 옆에 쓰레기통이 놓인 꼴을 보여주며 서울시가 이러면 안 된다고 설명하니 황금룡 사무관이 바로 알아듣고 한숨을 쉬면서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주시경 선생이 한글을 갈고 닦고 제자들을 키우다가 지쳐서 갑자기 돌아가신 집터와 한글회관이 있는 경복궁 앞 광화문일대를 한글역사탐방지로 꾸미고 세종대왕 나신 곳을 찾는 한글마루지사업을 할 때라고 제안하니 바로 담당 과장과 국장에게 다시 설명하자고 해서 그들을 만나 자문위원회를 조직하고 세종로 공원에 한글의 훌륭함을 알리는 한글글자마당을 만들고, 그 옆에 일제 때 한글 맞춤법도 만들고 우리말 사전을 만들다가 일제에 끌려가 교도소에서 목숨까지 잃은 분들을 기리는 조선어학회한말글수호탑을 세우고, 주시경 마당에 고종 때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학교인 육영공원 교수로 와서 한글로 사민필지라는 교과서를 만들고 한글로 독립신문을 만든 미국인 호머 헐버트와 주시경 선생 기림 조형물을 세우게 했다. 사람이 고마움을 모르고 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다름이 없는데 한글을 만들어준 세종대왕과 한글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게 한글을 갈고 닦아준 주시경과 일제 때 목숨을 바쳐서 한글을 지키고 광복 뒤부터 한글로 교과서도 만들고 공문서를 쓸 수 있게 한 조선어학회 선열들을 제대로 기리지 않는 것은 잘못으로 전부터 마음먹은 일이기에 바로 시행하게 했다. 개인도 집안이 안정되면 조상을 받드는 일을 하듯이 한글을 만들고 지키고 가꾼 조상을 기리는 것은 후손된 도리요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한자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가 서울시 공무원이 말하고 마침 박원순 시장이 되어 도와주어 빨리 시행되었다. 그런데 요즘 오세훈 시장이 들어서서 이 성스러운 한글과 세종대왕을 기리고 빛내자는 광화문광장을 더럽히고 있다. 15. 영어 공용어 반대운동과 우리말 살리기 운동을 하다. 1990년대 김영삼 정부가 영어 조기교육을 하겠다고 하니 아파트 이름, 상품 이름, 회사 이름부터 영어로 이름을 짓는 바람이 불었고 한글 간판이 사라지고 영어 간판이 자꾸 늘어났다. 그래서 정부에 옥외광고물관리법에 간판은 한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외국 회사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국어와 한글을 함께 쓰게 했으나 처벌조항이 없다고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영어 조기교육으로 영어를 좀 알게 했더니 우리말이 있는데도 우리말을 쓰지 않고 영어를 섞어서 쓰는 일이 생겨서 우리말글살이가 어지러워졌다. 그래서 국어기본법을 만들어 우리말을 지키고 바로 쓰게 했으나 이 또한 처벌조항이 없다고 지키지 않았다. 정부와 국회에 국어기본법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하게 하는 법 개정을 요구해도 제 나라말을 바르게 쓰고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자꾸 규제를 하는 것보다 스스로 바르게 쓰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고 듣지 않았다. 어떤 자는 국제화 시대에 영어를 좀 쓰면 어떠냐고 했고 소설가 복거일과 소설가 협회는 아예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나섰다. 영어 바람을 일으켜서 제 돈벌이를 하려는 시사영어사 민영빈 회장은 미국 영어시험 보는 토익 대리점을 땄으나 보는 이가 없으니 영어 공용어 주장을 거들어 영어 바람을 일으켜서 돈벌이에 나섰다. 그는 뜻을 이루어 우리나라가 토익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는 나라가 되었고 회사이름도 제 이름 영문자를 따서 ’YBM어학원‘이라고 바꾸고 정치인, 학교, 회사들을 포섭해 세계에서 토익시험을 가장 많이 보는 회사가 되어 돈더미에 앉았다. 그렇게 얼빠진 자들이 설치고 김영삼 정권이 영어바람을 일으키면서 얼빠진 나라가 되어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는 나라가 되는 걸 보면서 나라 정신을 담는 그릇인 나라말을 지키고 바르게 쓰도록 해서 다시 나라를 일으켜야겠다고 이오덕 선생과 나는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을 만들고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나섰다. 그러나 사대주의와 노예근성에 빠진 자들이 많아서 영어 바람이 더 거세게 일었고 경기도와 서울시들 지방자치단체는 영어마을을 만들고 김대중 정부는 제주도를 경제자유특구로 만들며 영어를 공용어로 하겠다고 나섰다. 조선시대 정조 때 북학파라는 박제가가 중국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나서고 박지원, 정약용들이 중국을 담는 게 선진국이 되는 거라며 한자를 섬기다가 얼빠진 나라를 만들어 나라가 망한 꼴을 되풀이 해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했다. 16, 광화문 한글현판 달기와 세종 나신 곳 찾기에 나서다. 지난 60년 동안 힘들었지만 많은 분들이 애쓰고 하늘에 계신 세종대왕과 선열들이 도와주어 이제 교과서와 공문서는 말할 것이 없고 신문도 한글로 쓰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한자 숭배자가 영어 숭배자로 바뀌어 우리말글살이가 매우 어지럽게 되어 나는 다시 한글이 태어난 곳인 경복궁 광화문에 한글현판을 달고,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을 찾아 자주문화 성지로 꾸미자고 나섰다. 이는 오랫동안 우리 글자가 없었을 때 중국 문화와 한문을 섬기면서 뿌리내린 한자말과 일본 식민지 때 길든 왜말(일본 한자말)을 몰아내고 우리말과 우리 얼을 살려서 얼이 찬 나라를 만드는 환경과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일인데 아직도 얼간이들이 많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광복 80년이 넘었는데 공문서와 교과서에 일제 식민지 때 길든 일본 한자말(왜말)을 그대로 쓰면서 우리식으로 읽으니 우리말인줄 알고 있고, 그 왜말을 한글로 쓰니 알기 힘들다고 자꾸 한자말을 한자로 쓰자며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가르치자고 한다. 그렇게 한자를 배우고 쓰다보면 국력과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한글의 장점과 가치가 살아나지 못한다. 그 나라 말은 그 나라 얼이고, 그 나라 말이 일어나면 그 나라 정신이 살고 그 나라가 일어나는데 우리말이 사라나지 못하고 얼빠진 나라가 되고 뿌리 깊은 사대주와 식민지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자주독립국도 안 되고 계속 힘센 나라에 짓밟히고 눌려 살게 된다. 그러지 않으려고 한글과 세종정신을 빛내자고 한글이 태어난 곳인 경복궁 정문에 한글깃발을 달고,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을 찾아 성지로 꾸미지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우리말 독립을 꼭 이루어 후손에게 물려주자! 한글은 우리말을 적기 가장 좋은 글자일 뿐 아니라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는 글자로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다. 그러나 한글이 태어나고 세종 손자인 성종 때까지는 한글을 알리고 쓰려고 힘썼으나 연산군 때 한글 벽서 사건이 난 뒤부터 한글은 짓밟히고 세종정신도 푸대접 받았다. 지배층인 성리학자들이 한글을 푸대접하고 한문만 섬기면서 공문서도 한자로만 쓰고 교육도 중국 한문을 배우고 읽게 했다. 이들은 어려운 한자를 아는 게 자랑이고 출세도구로 여기며 한문을 섬기니 나라가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개화기에 한글을 살려 나라 일으키려고 했으나 이미 나라가 기울고 시대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망했다. 일제 식민지 때에는 우리말과 한글은 사라질 번했으나 한글학회 선열들이 목숨을 바치고 한글을 지키고 갈고 닦았다. 그렇게 한글을 쓸 수 있게 해주었는데 뿌리 깊은 사대주의와 일본 식민지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본 식민지 국민 세대가 일본 식민지 교육으로 길든 일본 한자말을 일본처럼 한자로 적자고 했다. 바로 이 나라 최고 학자라는 서울대 국문과 이희승 교수가 그 제자들과 함께 ’어문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그랬다. 그건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일이고 간신히 살아나려는 한글과 세종정신을 짓밟아 나라를 못 살게 하는 일이기에 나는 그걸 바로잡으려고 국어독립운동에 나선 것이 내 일생 일이 되었다. 나는 처음에 이 한글나라 만들기가 그렇게 어렵고 오래도록 해야 할지 몰랐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거칠고 힘든 길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이 좋은 제 글자 한글을 안 쓴 것도 한스러운데 오늘날에도 한자타령을 하더니 영어타령으로 바뀌고 있다. 이재명 교육위원회에서 또 교과서에 한자병기 검토한다니 기가 막힌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는 각설이 타령이 떠오른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은 그 나라 공식문자인 로마자로 제 겨레말을 적을 수 없어 고민했는데 이제 한글로 적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한글이 세계 으뜸 문자로 증명되고 있는 판에 한자타랑에다가 영어 섬기기 바쁘니 답답한 일이다. 미친 듯이 한글나라 만들려고 발버둥친 내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꿈만 같고 인생이 짧고 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날 난 한글과 세종정신에 미쳐있었다. 다른 이들도 나를 한글과 세종정신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미쳤기에 그만둘 수 없었고 그래서 이룬 일이 있다. 그러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국어독립운동 길이다. 그러니 함께 대학생 때부터 국어독립운동은 한 뜻벗(동지)인 이봉원군도 우리가 환갑이 지나도록 할 만큼 했고 나름대로 이루어졌으니 그만하자며 이제 자기는 놔달라고 해서 지금은 연락도 안 한다. 그렇지만 내 눈에는 우리가 조금만 마음만 하나 되어 힘쓰면 국어독립 뜻과 꿈을 이룰 꼭대기가 보이는데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도망자 꼴이 되고 모두 물거품이 된다고 봤다. 더욱이 한글을 온 세계가 알아줄 때가 되었다. 그래서 멈춰선 안 되기에 지난 60해 동안 내가 활동한 자료집을 내서 후배들이 지난 역사를 알고 이어서 더 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집을 나와 몇 해 째 혼자 살면서 글을 쓰고 있는데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빨리 자료집을 내고 힘이 닿는 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도 함께 이루자고 말하련다. 이 일은 한배검의 홍익인간 건국 정신과 한임금(세종)이 한글로 모두 같이 잘 살리는 평등정신과 자주독립정신을 살려서 우리뿐만 아니라 인류문화발전에도 이바지하는 좋은 일이고 큰일이라 본다. 오늘날에서 조선시대 한글을 못쓰게 한 성균관 무리와 친일 조선일보가 한글을 못살게 굴고 있어 화가 난다. 이 강연은 1년 전에 울산시 이상도 선생이 이끄는 울산아카데미 문화강좌에서 국어독립운동 역사를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마침 세종학당 전우용 새 이사장이 내가 한 국어독립운동 이야기와 함께 세종학당을 처음 말들 때 과정을 직원들에게 특강해 달라고 해서 줄여서 이 글을 쓰고 며칠 전에 두 곳에서 강의를 했다. 다시 이름부터 우리말글로 짓고 쓰면서 우리말을 한글로만 적을 때 우리말이 독립한다는 걸 외치면서 지난날 나와 함께 한말글 독립운동을 한 뜻벗(동지)들에게 고마운 절을 한다. 그리고 정부와 온 국민들에게 하루빨리 일본 식민지 국민교육으로 길든 일본 한자말(왜말)을 교과서와 공문서에서 버리고 우리말을 살려 쓰고 영어 섬기기 그만해 우리 시대에 꼭 우리말글 독립을 이루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호소한다. 한말글 만세! 한겨레 만세! 한나라 만세! 1999년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우리말글 지키기 서명운동을 하던 찍그림(사진). 그때 많은 젊은이들이 한글전용법을 지키자고 서명하고 응원해주었다. 이 찍그림은 2026.9.8. 울산문화아카데미에서 강연하는 모습입니다. 같은 내용으로 9월3일에 세종학당 전 직원들에게도 특강도 했습니다. 앞으로 학생들이나 다른 단체에서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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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리대로 대표님의 업적은 자랑스러운 한국의
큰 빛이 될 겁니다.
잊지 않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더 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