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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친구 명복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자주색 감자 한 박스를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그 감자는 물이 많아서 요리로는 적합하지 않고 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색깔이 자주색이지만, 쪄 놓으면 고구마처럼 속이 노랗고 맛도 고구마 맛이 난다고 했다. 고구마라는 말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감자를 보내준다는 친구에게는 미안했지만, 킥킥대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복이는 내가 전학 갔던 입석초등학교에서 3학년부터 6학년 1학기 까지 같이 공부한 소꿉친구이다. 전학 온 첫날 학우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유독 눈에 띄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명복이었는데 비쩍 마른데다 피부까지 까무잡잡했다. 또 옆 머리통에는 계란만한 크기로 두 군데나 머리카락이 없었다. 그 당시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을 처음 본 터라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 싸움을 하다 머리카락이 뽑힌 것인지 무척 궁금했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금기와도 같이 여기는 듯 했다. 단지 그 아이가 말랐다는 이유로 고복수 선생님의 ‘신라의 달밤’이란 노래를 개사해서 ‘아~, 신라의 말라빠진 명태 대가리’라고 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후 그 금기는 어이없이 깨지고 말았다. 유일하게 그 비밀을 알고 있던 계현이라는 아이가 명복이랑 싸움이 붙었는데, 자기가 불리해지자 명복이의 약점을 폭로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이유가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1학년 겨울방학 이었다고 한다. 명복이는 간식으로 먹을 군고구마 열 개를 아궁이에 묻었다고 했다. 고구마가 익자 아궁이에서 꺼냈는데 한 개가 모자랐다. 부지깽이로 아무리 재를 뒤집어 보아도 그 한 개가 나오지 않았다. 명복이는 모자란 한 개의 고구마를 찾기 위해 아궁이에 머리를 디밀었다고 했다. 당연히 불씨가 명복이의 머리카락에 옮겨 붙었고 결국 계란만한 땜통이 두 개나 생겼다고 했다. 명복이는 자신의 비밀이 폭로되자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음을 터트렸고 철딱서니 없었던 우리들은 마냥 킥킥대며 즐거워했었다.
그로부터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모두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다. 각자 하는 일도 다르고 사는 곳도 제각각이지만, 아직까지 연락하며 지내는 몇몇 친구들은 가끔 술자리도 함께하고 먹거리도 나누어 먹는다. 특히 명복이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기 때문에 수확한 농산물을 가끔 보내온다. 농약을 치지 않아 벌레가 갉아먹은 자국이 마치 곰보 같다고 너스레를 떨며 번번이 친구들에게 싸 보낸다. 작년엔 무를 심었다고 무를 보내오고 올해는 감자를 심었다고 감자를 보내왔다. 내년엔 또 무엇을 심을는지....... 많은 양은 아니지만 해마다 보내오는 정성이 고마워 성의표시라도 할라치면, 친구들끼리 정을 나눈 것이지 물건을 판 게 아니라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비록 땀 흘리며 힘들게 농사짓지만, 뿌린 대로 거두는 정직한 땅과 푸근한 고향이 좋다는 명복이. 그런 명복이가 힘들게 심어 가꾼 감자 한 알이 다른 무엇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소중하게 느껴진다.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에나 내려가 막걸리 한 잔씩 했던 게 전부였던 지난날들이 부끄러워진다. 돌아오는 주말엔 햇살도 가리고 땜통도 가려줄 멋진 모자 하나 사서 소꿉친구를 만나러 가야겠다. 깜짝 놀라 기뻐할 친구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은 고향마을을 달려간다.
혜원 (본명 : 김혜정)
경북 상주 출생. 제2회 ‘상상인’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