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에 옛 모습이 그대로 남은 성이 많지 않다. 순천의 낙안읍성, 서산에 해미읍성, 고창의 모양성, 그리고 고창의 무장읍성이 조선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 성이고, 보령의 남포읍성도 볼만한 성 중의 한 곳이다. 조선시대에 현이었다가 1914년에 흥덕과 함께 고창군에 편입된 무장읍성에 한 때 무장초등학교가 있다가 밖으로 옮긴 뒤 제 모습을 찾은 지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무장현茂長縣의 백제 때 이름은 송미지현松彌知縣이었다. 신라가 무송茂松이라고 고쳐서 무령군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에서는 그 이름을 그대로 두었다. 신라에서 장사라고 이름을 고쳤고, 조선 태종 때 두 현을 합해서 지금의 이름인 무장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세종 때에 현감을 두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 하면서 고창군에 속하게 되었다. 무장현은 그 당시 해리. 무장. 공음. 상하. 성송. 대산. 심원면과 아산면 일부를 거느렸는데, 고창현의 경계까지가 14리였고, 남쪽으로 영광군 경계까지 23리이며 서울까지 6백 53리 떨어져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풍속’은 “고기잡이와 사냥을 숭상한다.“고 하였는데, 이 무장에 속해 있던 산이 선운산이다. 악지樂志에” 선운산곡禪雲山曲이 있는데, 백제 때에 장사 사람이 싸움에 나갔다가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그리워서 이 산에 올라가 바라보며 노래한 곳이다.‘고 기록된 이 무장 땅을 두고 정곤鄭坤은 다음과 같은 기문記文을 지었다. “무장은 장사와 무송이 합해져 이룬 이 고을은 전라도의 서쪽에 있고, 큰 바닷가에 있는데, 전조前朝 말기에 바다도적이 한창 설치어 백성이 생업을 잃고 흩어져서 쓸쓸히 온통 빈지가 오래더니,”라고 하면서 이 고을이 변방에 위치해 있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곳 무장동헌을 조선 전기의 문신 유순柳洵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10년 전에 이곳을 지났는데 지금껏 몸과 마음이 맑아라. 아관정위에 몸이 또 다시 이르니 붉은 작약 떨기 가에 눈이 다시 밝구나. 창 밖 청산은 예전대로인데, 숲 사이 꾀꼬리는 새(新) 소리를 들려주네. 마루에 앉아 지난해 생각 희미한데, 그 당시 이름 써두지 않은 것이 후회 되누나” 고 하였다.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무장 시내 쪽으로 세워져 있는데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교를 오고 갈 적에 들락 거려서 나라 안에서 제일 아름다운 초등학교 정문이라는 찬사를 들었었다.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조선 태종17년(1417)에 세워졌으며, 무장토성은 당시의 병마사였던 김저래金著來가 고을의 승려와 장정 2만 명을 동원하여 넉달 동안 공사를 벌인 끝에 완성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성의 둘레가 658보라 하였고, <문종실록>에는 “읍성의 둘레가 1470척이고 높이가 7척이며, 적으로부터 몸을 가릴 수 있도록 성벽위에 낮게 쌓은 담장인 여장女墻이 471개가 있었고, 옹성을 갖춘 문이 두개에 성 둘레는 2127척의 해자가 파여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무루를 지나 읍성으로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무장 객사이다. 선조 14년에 건립된 무장현의 객사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객사 건물은 주관主館과 좌우 익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지어져 위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은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주관은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현감과 대소 관헌이 모여 한양의 대궐을 향해 배례를 하던 곳이다. 좌우 익헌에는 왕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쓰였다. 무장 객사의 주관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홑 처머 맛배지붕인데 계단 난간석에는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고, 계단 양옆의 축대 돌에는 연꽃과 화병에 담긴 꽃이 새겨져 있다. 객사 왼편 나무숲 우거진 옆에 무장을 거쳐 간 수령방백들의 영세불망비들이 수십여개 세워져 있다. 운동장으로 들어서면 멀리서 손짓하듯 서 있는 건물이 무장 동헌이다. 1914년 무장과 흥덕현이 고창에 통폐합되기 전까지 무장 현감의 집무실로 쓰였던 무장동헌은 조선 명종 20년에 세워졌는데, 정면 6칸의 측면 4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장초등학교의 육중한 건물에 가려 답답했던 건물이 이렇게 시원스레 트이다니,
어느 시절인가 이 동헌에서 현감 아무개가 누군가를 향해 “이리오너라” 하고 불렀을 것이고,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고 소리치기도 했을 것이며, 그리고 슬프고 아름다운 여러 시절이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갔을 것이다.
동학접주 손화중이 무장접주로 활약했던 무장현에서 옛 자취를 더듬으며, 걷다가 보니 날이 저물었고, 나는 신경림 시인의 <집으로 가는 길>을 떠올리며 숙소로 돌아가는 귀로에 올랐으니,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 결 같이 빛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