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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운 이야기 스크랩 좋은말 슈퍼 엑설런트(Super Excellent)
김남규(엘리트공인) 추천 0 조회 106 07.01.06 10: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슈퍼 엑설런트!

최준영ㆍ박영출ㆍ유회경ㆍ노윤정 지음



1부 슈퍼 엑설런트의 힘!

포기하는 대신 정면돌파하라

1966년 선경직물 임원 전체회의에서 최종건은 "나는 전후의 잿더미 위에서 선경을 일으켰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정신으로 쉬지 않고 달려왔고, 선경을 단단한 반석에 올려놓았습니다. 지금은 제대로 된 기업을 일으켜 세울 때입니다. 이제 선경은 종합섬유기업으로 첫발을 내디디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동생 최종현이 '선경 5개년 계획'을 발표했는데, 66년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 설립, 67년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 건설, 그리고 70년에는 선경기술센터를 설립한다는 내용이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임원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술렁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임원들만이 아니었다. 원사 공장을 짓자는 최종현의 제안에 배포가 크기로 유명한 최종건조차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최종현은 망설이고 있던 형을 설득하고자 시도했더니, 최종건은 "야, 누가 원사 공장 지으면 좋은 걸 모르냐? 돈이 문제지."라고 말했다. 그래서 최종현은 "돈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고, 최종현은 "그럼 네가 계획을 짜 봐라. 뛰는 건 내가 해 볼게."라며 동의함으로써, 원사 공장 건설이 추진되었다.

해결책으로 최종현은 일본 거래회사를 통한 '현물 차관' 방식을 선택했다. 당시 선경에 원사를 공급하던 일본의 데이진이라는 회사에 300만 달러 상당의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말하자면 '외상'거래였다. 공급받은 원사로 상품을 만들어 3년 안에 모두 갚겠다고 약속했다. 데이진으로서도 3년 동안 안정적으로 거래처를 확보하는 셈이기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나 누가 지급을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다. 최종현은 선경에 원사 공장 설비를 공급하기로 한 일본의 이토추를 끌어들였는데, 선경과의 거래가 성사되기를 원했던 이토추는 최종현의 보증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형제는 '선경화섬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원사 공장 건설을 추진해, 1968년에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을 완공했고, 이듬해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도 완공했다. 두 공장의 건설로 한국의 원사 생산력은 하루 35.5톤에서 48톤으로 늘었고, 선경은 이 중 26퍼센트를 생산하는 국내 1위 원사 메이커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이 사건은 SK그룹의 역사에서 최초의 도약으로 기록되고 있다.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법

"유공의 인수자로 선경그룹이 최종 확정되었음을 발표한다." 1980년 11월 28일, 박봉환 당시 동력자원부 장관의 기자회견으로 재계는 술렁거렸다. 당시 유공은 연 매출 1조 원을 돌파한 국내 유일의 기업이었다. 따라서 국내의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예외 없이 유공을 인수하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고, 선경이 최후의 승자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없었기에 정부 발표에 모든 사람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바로 특혜 시비가 불거져 나왔다. 심지어는 '새우가 고래를 집어삼킨 형국'이라며, 과연 선경이 자신보다 수백 배나 큰 유공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인지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정부는 선경을 선택한 이유로 "선경은 우리나라 종합상사로서는 처음으로 상당량의 원유를 유공에 공급했고, 앞으로 원유 추가 확보의 잠재력이 있으며, 산유국과의 친분도 두터워 오일머니 유치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라고 말했다. 일반 국민에게는 석유 사업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섬유 업체로 알려져 있던 선경이 어떻게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최종현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며 기회를 기다렸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 말에 원사 공장을 설립하여 도약의 기틀을 마련한 선경은, 일찌감치 석유 사업에 눈을 돌렸다. 천연 섬유가 아닌 화학 섬유는 대부분 석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런 이유로 선경은 창업자인 최종건 회장 시절부터 '섬유에서 석유까지' 수직 계열화를 목표로 삼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선경에 처음으로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70년대 초였다. 당시 일본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본 국내에서는 정유 시설을 확장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일본으로 건너가 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인 최종현은 경상남도에 정유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약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기계, 기술은 일본이 담당하고, 선경은 부지 마련과 경영을 맡기로 했다. 정유공장을 짓기 위해서는 자금과 설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원유가 확보되어야 했다.

당시 최종현의 사업 파트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실력자 가운데 하나였던 베드라위였다. 최종현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수지 공장을 짓는 일을 돕고, 베드라위는 선경이 정유공장을 설립할 경우 석유를 공급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양측의 사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도 전에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이것이 석유파동으로 이어지면서 최종현은 정유공장 설립을 보류해야 했다.

그 뒤 최종현과 베드라위의 인연은 사우디아라비아 주요 인물들과의 만남으로 확대되었다. 베드라위는 외삼촌이자 왕비의 남동생인 카라마담에게 최종현을 소개했고, 카마라담은 왕실 특사인 족달을 최종현에게 보냈다. 또 이들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민'의 자말자와 부총재와 야마니 석유장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말자와는 그의 민간인 창구로 압둘라 박사를 소개했다. 압둘라 박사는 이후 한국을 수차례 방문했고, 올 때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재계 인사들을 서너 명씩 데려와 최종현에게 소개했으며, 최종현은 자말자와의 충고를 받아들여 중동 지역에 지사를 설립했다.

사막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살아온 아랍인들은 좀처럼 남을 믿지 않았지만, 일단 신뢰를 쌓으면 결코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을 믿지 못하면 쓰지 않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않는다'라는 최종현의 신념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최종현과 사우디아라비아 친구들의 우정은 두터워졌고, 이 우정은 제1차 석유파동과 1979년 이란의 석유수출 중단 위기 때 선경은 물론 국가에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참고로 당시 유공 인수 경쟁에 참여했던 대기업들이 자산 규모와 현금 동원력만을 중시한 반면, 최종현은 오랜 기간 쌓아온 산유국과의 인맥을 통해 원유 확보 능력을 직접 입증해 보였다. 또 아랍계 은행으로부터 1억 달러를 조달하여, 오일머니 유치 능력까지 증명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경그룹에게 정유사업은 10여 년 전부터 준비해온 숙원사업이었고, 한편 기업이 사업을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최소 10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최종현의 신념이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한평생을 사는 동안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왜 당신한테는 세 번은커녕 단 한 번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느냐는 불만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러나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끊임없이 준비하고 계획하는 자에게만 기회가 온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가 그냥 가버렸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준비된 새우에게는 고래를 삼킬 기회가 온다.

미래를 지배하는 자의 달력은 10년 더 빠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10년 앞을 내다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 사업이 잘 된다고 하여 10년 후에도 여전히 잘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앞으로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하면, 이미 먼저 시작한 사람을 따라잡을 방법이 없다. 이런 이유로 최종현은 늘 '10년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그것이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최종현에게는 뚜렷한 원칙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하고,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며,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있었는데, 이러한 세 가지 원칙은 사업 확장의 방향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었다. 이 세 가지 원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바로 슈퍼 엑설런트 정신이다. 사실 이러한 원칙을 모두 충족하는 사업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최종현은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려고 애쓰는 대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룹의 간부진은 물론 평소 가까이 지내던 교수나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고 자문을 구했다. 또 미국을 방문하면 세계적인 회계법인 딜로이트 컨설팅의 선경 자문팀을 만나 미래사업에 관한 조언을 구하곤 했다.

1984년, 최종현은 이러한 노력을 더욱 체계화하고 조직화하기 위해 미주 경영기획실(현 SK USA)을 설립했는데, 이들에게 부여된 주된 임무는 미래사업 발굴, 정보기술(IT), 통신, 금융, 유통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조사 활동을 벌이고 사업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 당시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아들 최태원은 새롭게 등장한 이동통신사업에 큰 매력을 느끼고, 수시로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미주 경영기획실에서도 선경그룹의 미래사업으로 이동통신사업이 적합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미주 경영기획실은 1988년 미국의 작은 이동통신사 '테네시 RSA'에 지분 투자를 했다. 투자 수익보다는 이동통신 경영을 학습한다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이처럼 치밀하게 이동통신사업을 준비하던 최종현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990년 7월 정부가 통신사업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최종현은 1991년 4월 선경텔레콤(이후 대한텔레콤으로 이름 변경)을 설립하고,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 대비하여 철저한 준비에 들어갔다.

최종현은 손길승 당시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에게 대한텔레콤 사장 자리를 맡기고 실질적인 운영은 목정래에게 일임했다. 대신 두 가지 주문을 했다. 입찰과정에서 다른 경쟁업체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줄 것과 해외 파트너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1992년 7월 체신부(현 정부통신부의 전신)의 1차 심사발표에서 대한텔레콤은 8,127점을 얻어 2,3위 기업들을 큰 차이로 따돌렸다. 같은 해 8월 20일 2차 심사발표에서도 대한텔레콤은 다시 최고점수를 획득하여, 최종 허가대상 법인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반(反)선경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노후를 대비해 사돈인 최종현에게 사업권을 줬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최종현은 8월 21일 기자회견을 자청, 사업권 획득이 정당한 노력의 결실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론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당시 민자당 대표이던 김영삼이 여론에 편승하여 '선경 불가'를 집요하게 주장하였다. 김영삼과 독대한 끝에 최종현은 최종 결단을 내리고, 사업권을 따낸 지 7일 만에,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반납하겠다고 천명했다. 체신부도 다음달에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문제를 차기 정권으로 이양한다는 발표를 했다.

한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지 10개월이 지난 1993년 12월, 정부는 2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방식을 발표했다. 단일 컨소시엄 방식으로 하되, 컨소시엄 구성은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가 2개월의 시한을 두고 결정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한국통신(현KT)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 추진계획도 발표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최종현은 난감해 했다. 결국 최종현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포기하고 대신, 한국이동통신 인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최종현의 결단으로 나머지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전경련은 이후 포철을 1대 주주, 코오롱을 2대 주주로 한 제2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한 뒤 이를 체신부에 통보함으로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은 일단락되었다. 대신 선경그룹은 1994년 1월 24, 25일 이틀 동안 한국통신이 보유한 한국이동통신 주식의 경쟁 입찰에 참여하여, 한국이동통신 주식 23퍼센트(127만 5,000주)를 계열사인 유공, 선경인더스트리, 흥국상사 등을 통해 시가를 웃도는 가격인 주당 33만 5,000원에 인수했다. 선경그룹의 미래사업에 대한 최종현의 꿈이 우여곡절 끝에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돌파구다

최종현은 누구보다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신봉자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택한 성공 전략은 창조적인 노력을 통한 '독점'이었다. 이러한 그의 소신은 연이어 국내 최초, 세계 최초의 기록을 수립해간 SK의 이동통신 사업에서 여실히 그 위력을 드러냈다. 즉 SK텔레콤의 성장은 어느 누구보다 앞선 전략 때문이었는데, 광고나 고객 세분화 정책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도로 소비자의 마음을 얻고 순간순간의 위기를 돌파했다. 이를 살펴보자.

1997년은 한국통신, LG, 한솔 등 개인휴대단말기(PCS) 사업자가 상용 서비스를 시작한 시점이었다. 같은 날 SK텔레콤은 기존의 '디지털 011'이라는 이동통신 브랜드를 '스피드 011'로 변경하고, 통화소통률과 품질 등 사용자 편의성에 초점을 맞추어 집중 마케팅을 펼쳤다. 그 결과 011 가입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 CDMA 상용화 3년 만에 SK텔레콤 이동통신 가입자 수가 500만 명을 돌파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는데, 시장점유율은 크게 증대되었지만 10, 20대의 젊은층 고객이 취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1999년 7월 SK텔레콤은 TTL브랜드를 출시하였다. TTL 브랜드 출시는 국내 이동통신업계에 돌풍을 몰고 왔다. 이후 SK텔레콤 등 5개 업체들은 기존 장려금 지급 위주의 출혈 경쟁에서 벗어나 신상품 개발, 고객 서비스 중심의 창의적 마케팅 정책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1999년 이후 국내 이동통신 업체들 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져, SK텔레콤은 이동통신업계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같은 800㎒대 주파수를 사용하고 있는 신세기통신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 SK텔레콤은 IMT-2000(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for the 2000: 현재 각 국가에서 개별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다양한 이동전화 시스템의 규칙을 통일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단말기로 다양한 영상, 신호 등을 이용할 수 있게 한 이동통신 서비스) 사업권을 획득하기 위해 주력했고, SK IMT는 비동기 사업자로 선정되었다. 더욱이 SK텔레콤은 2002년 1월 인천광역시에서 세계 최초로 동기식 IMT-2000 상용 서비스를 시작했다. 또 하나의 세계 최초 상용화 기록을 세운 것이다.

한편 국내 시장에서 탄탄한 기반을 다진 SK텔레콤은 해외로도 눈을 돌리기 시작해 1995년 10월 인도 델리에서 무선호출 사업을 시작했고, 이동통신 부문에서도 1996년 태국, 1998년 브라질에서 이동통신 서비스를 추진하는 등 90년대 중반부터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또 1999년 몽골에서 아날로그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중국에서는 2002년 7월 CDMA 이동통신업체 차이나유니콤과 무선 인터넷 관련 조인트 벤처기업 '유니에스케이(UNISK)'를 설립했다. 또 카자흐스탄과 이스라엘에는 '네이트' 무선 인터넷 플랫폼을 공급했다. 특히 베트남에서는 LG전자 등과 함께 CDMA이동통신 업체 '에스텔레콤'을 설립, 가입자 16만 명을 모으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아울러 2005년 1월에는 미국의 인터넷접속업체(ISP)인 어스링크와 조인트벤처 'SK어스링크'를 설립해 미국 시장에 진출했는데, SK어스링크는 미국 현지 이동통신 업체의 망을 임대 사용하는 가상이동망서비스 방식으로 2005년 3분기부터 미국 전역에서 음성과 데이터 서비스를 시작한다.

2부 슈퍼 엑설런트의 조건

패기는 삼위일체다

슈퍼 엑설런트의 핵심을 하나의 단어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단연 '패기'다.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목표에 도전하는 일 자체가 '두려움 없이 세상과 맞서는' 패기가 없으면 엄두조차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최종현은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패기로서, 이는 곧 일과 싸워서 이기는 기질을 의미하며, 패기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사고는 적극적으로, 행동은 진취적으로, 일 처리는 빈틈없고 야무지게 처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패기란 어느 정도 타고나는 성향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지만, 경험과 훈련을 통해 후천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기질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종현은 일찌감치 'SK맨십'(SK인이 갖추어야 할 자격 요건)의 핵심을 '패기'로 규정하고, 신입사원들의 패기를 길러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용기와 만용을 구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패기'와 '객기'를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등산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히말라야 산을 정복하겠다고 나선다면, 이것은 패기가 아니라 객기에 지나지 않는다. 패기에는 반드시 지식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종현은 패기의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다면 절대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진정한 리더는 하인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그린리프는 '남을 섬기는 사람이 남에게 존중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서번트리더십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여, 현대 경영에 새로운 빛을 던졌다. 서번트리더십의 핵심은 추종자가 선택하는 리더가 진정한 리더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리더가 먼저 아랫사람을 섬겨야 한다. 최종현은 선의의 실수는 유머로 넘기고 실무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의 부드러운 리더십은 SK의 자유롭고 유연한 기업문화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최종현은 계열사 사장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겼는데, 그의 신뢰는 '미련할 정도'여서 사장을 포함한 계열사 임원에 대한 그룹 차원의 감사 활동도 아예 없앴다. 믿지 못할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계열사 사장으로 쓰지 말고, 만일 사장으로 앉혔으면 최대한 그를 믿고 지원해야 한다(疑人不用 用人不疑, 의인불용 용인불의)는 것이 최종현의 신념이었다. 이런 그의 경영 방침은 단지 사장 등 임원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1970년대 말에는 출퇴근 카드제를 과감하게 없앴다. 그렇다고 최종현이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모든 실수에 너그러웠던 것은 아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안 된다고 못을 박았고, 한번 세운 원칙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했다. 특히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했다. 최종현은 자신의 리더십을 서번트리더십이라 규정한 적이 없지만, 그가 보여준 부드럽고 강력한 리더십은 오늘날 각광받고 있는 서번트리더십과 너무 닮았다. 참고로 요즘은 국내외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앞 다투어 서번트리더십을 도입하고 있다. 배려와 신뢰를 바탕으로 구성원들의 잠재적 에너지와 활력을 최대한 이끌어내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언제나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시스템 경영법

뚜렷한 자기만의 색깔과 시대의 흐름에 뒤지지 않는 문화를 가진 기업이 오랫동안 발전과 성장을 구가할 수 있다. SK그룹 역시 그들만의 기업문화와 경영철학을 가지고, 조그만 직물 공장에서 시작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성장과 결실의 밑바탕에는 SKMS(SK Management System, SK경영관리체계)가 있었다. 최종현 회장이 SKMS의 청사진을 처음 구상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그는 기업이 커지고 사회구조가 복잡해지면, 경영자의 개인적인 자질만으로는 기업이나 사회를 이끌어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과학적이고 현실에 맞는 경영 시스템을 정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최종현은 경영원칙을 먼저 세웠다. 그것은 첫째 사람을 잘 다루어야 하며, 둘째 기업을 합리적으로 운영해야 하고, 셋째 철저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경영이었다. 그리고 이 원칙을 토대로 경영 시스템을 체계화할 것을 경영기획실에 주문했다. 경영기획실이 선경그룹 경영 시스템의 초안을 짜는 데는 장장 4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1979년 3월, 최종현은 마지막으로 전 계열사 임직원들과 함께 3박 4일간 난상토론을 펼친 끝에 최종안을 확정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업의 경영 '매뉴얼'이 탄생했다.

SKMS는 SK그룹의 경영이념을 간단명료하게 '이윤 극대화를 통한 영구 존속과 발전'으로 정의했다. 그 근간에는 최종현이 오랜 기간 고민해온 기업관이 굳건하게 깔려 있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속한 기업은 수익을 창출해 세금을 내고 구성원과 성과를 함께 나누기 위해 존재한다는 신념이었다. 이 이념의 목표는 상품과 조직과 인력을 세계 일류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SKMS는 경영의 '정적 요소'와 '동적 요소'를 구분했다. 정적 요소란 인사, 재무, 기획 등 일상적인 관리요소를, 동적 요소란 인간과 관련된 의욕과 역량, 의사교류, 패기 등을 의미했다. 정적 요소를 통해 최종현은 기업의 의사 결정 체계를 정립하는 데 주력했다. SKMS가 더욱 비중 있게 다룬 것은 인간을 중심에 둔 동적 요소였다. 최종현은 '인간은 석유와 비교도 되지 않는 무한한 자원이며, 경영은 결국 인간을 어떻게 활용해 가치를 극대화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발적'이고 '의욕적'인 능력 발휘를 강조했다.

SKMS를 만든 최종현 회장은 아무리 좋은 경영이념이더라도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SKMS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실천 지침으로 만든 것이 바로 슈펙스(SUPEX) 추구법이다. 슈펙스란 초일류를 뜻하는 'Super Excellent'의 조어로, SK의 경영 매뉴얼에는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단계를 꾸준히 추구하는 경영 기법'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슈펙스 수준의 목표는 일을 빈틈없이 처리해야 달성할 수 있다. 일처리를 확실하게 하려면 '일처리 5단계'라는 과정 -첫째, 주어진 과제의 조건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둘째, 목표달성에 필요한 개인 및 단위조직이 해야 할 가장 핵심이 되는 과제를 결정하며, 셋째, 슈펙스 수준의 목표를 설정하고, 넷째, 목표수준에 도달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을 모두 파악한 후에 마지막으로 장애요인을 제거해야 한다- 을 밟아야 한다. 그는 생전에 기업가로서 한평생 SKMS와 슈펙스 추구법을 정립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다. 1996년 신년사에서 최종현은 SKMS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자평했다.

"SKMS와 슈펙스로 이루어낸 성과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첫째, 서구식 경영법이 300년간 해결하지 못한 노사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회사의 정책 결정부터 작은 문제의 해결까지 전 구성원이 함께 토의하면서 단 한 번도 노사 대립을 겪지 않았습니다. 둘째, 부서 이기주의가 사라진 것입니다. 조직 간의 벽이 사라지면서 회사 전체가 함께 일하는 분위기가 됐습니다. 셋째, 조직운영의 집권화와 분권화입니다. 슈펙스를 통해 불가능하게 보이는 둘을 동시에 이루어낸 강한 조직이 됐습니다."

SKMS는 1979년 3월 이후 25년간, SKMS는 화석화한 경영이념이 되선 안 되며 경영환경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최적화되는 살아있는 경영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모두 13번의 개정을 거쳤는데, SK그룹은 2004년 10월 '이해 관계자들의 행복 극대화'라는 새로운 SKMS 경영이념을 채택했다. 최종현이 주장했던 '기업의 존재 가치는 이윤 극대화'라는 경영이념이 대폭 수정ㆍ보완된 것이다. 그러나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SKMS의 틀은 변함없이 최태원 SK(주) 회장과 임직원들의 열띤 난상토론을 통해 구체화되었다는 것이다.

3부 슈퍼 엑설런트 CEO 최종현

그가 인재 육성에 목숨 걸었던 이유

1974년 최종현은 충주에 있는 헐벗은 인등산을 사들여, 가래나무 150만 그루를 심었다. 30년 후 목재를 생산해 장학 사업을 위한 종자돈으로 삼겠다는 구상이었다. 지금 SK임업이 운영하는 이 숲을 SK그룹에서는 '인재의 숲'이라고 한다. 최종현은 인등산 기슭의 묘목이 막 뿌리를 내리기 시작할 즈음, 장학사업의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1974년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는데, 최종현은 재단을 둘러싼 사내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철저하게 사재로 운영하겠다고 못 박았다. 30년에 걸쳐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세계적인 학자들을 키우는 것이 이 재단의 목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기 장학생을 선발했다. 5명을 뽑는 데 130여 명이 지원했다. 1차 서류 심사와 4시간에 걸친 영어, 전공, 영어 논술시험을 치르고, 최종 관문에 오른 학생들을 최종현이 직접 면접을 봤고, 재단은 선발한 장학생을 철저히 관리했다. 예를 들어 재단은 1~2년 준비 기간을 두고 영어회화뿐만 아니라 다방면의 지식을 갖추라는 의미에서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자연과학도 가르쳤다. 또 유학 경험을 전수해줄 지도교수까지 따로 붙여줬다. 게다가 재단은 직접 세계 유명 대학의 커리큘럼까지 분석했다. 학생들에 대한 최종현의 관심과 애정은 대단했다. 그는 유공을 인수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1980년대 중반까지도 일요일마다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식사 자리에서는 경제 일반과 현안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토론은 한번 시작되면 서너 시간을 훌쩍 넘겼다.

1977년 신입생 환영회에서 연수 장학생들에게 그가 했던 말은 매우 흥미롭다.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1996년에 썼던 『문명의 충돌』보다 30년이나 앞서, 이미 세계가 문화권 중심 사회로 재편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냉전 시대로 남과 북이 대치하고 중국이 적대국이지만 30년 후에는 세계가 문화권 단위로 재편될 것이다. 그때는 여러분이 아시아 문화권의 중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가 생전 30년 동안 이루어야 할 몫은 100년 계획의 초석을 닦는 것이었다. 이후 30년은 아시아 문화권의 중추로 도약하는 시기, 나머지 40년은 세계의 학문적인 리더로 자리매김하는 시기였다. 100년 대계의 나머지 70년은 재단이 키워낸 장학생들이 맡아야 할 몫이었다.

설립 초기 인문, 사회과학과 동양학에 한정해 선발했던 장학생은 현재 자연과학과 정보통신 분야까지로 확대되었는데, 최종현은 30년 계획의 마무리를 지켜보지 못하고 1998년 세상을 떠났고, 아들 최태원이 재단 이사장직을 물려받았다. 이후 재단은 '아시아 문화권의 중추로 도약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아시아 국가와의 학술교류를 위한 물꼬를 터나가고 있다. 재단은 현재 아시아 6개국 13개 대학에 '아시아연구센터'를 설립,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은 한국이 중심이 된 아시아 경제권의 발전과 아시아 국가들의 협력을 폭넓게 연구하고 있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연습

최종현은 평소 유별날 정도로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일종의 기체조인 '심기신수련(心氣神修練)'을 통해 누구보다 열심히 몸을 관리했다. 독창적으로 기 수련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책과 비디오로 만들어 임직원들에게 돌릴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런 그가 폐암 선고를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

최종현은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의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병원에 입원했다. 수술 당일 걱정스레 지켜보던 식구들에게 "나 이제 올라간다."며 밝은 표정으로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은 6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수술이 끝나고 병실로 돌아온 그가 입을 열었다. "배고픈데 설렁탕이 먹고 싶다." 노심초사하며 결과를 기다리던 부인이 그 길로 나가 고깃국을 만들어와 남편에게 직접 떠먹여줬다.

하늘처럼 믿고 의지했던 남편의 갑작스런 폐암선고, 그리고 이어진 대수술. 부인 박계희는 어느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고 마음고생이 심했다. 최 회장이 수술을 받던 날 박계희는 남편과 모처럼 오순도순 시간을 보냈다. 박계희는 두 아들과 막내딸을 데리고 밖에서 모처럼 식사를 한 다음 뉴욕에 있는 SK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잠을 잤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밤사이에 박계희는 조용했던 성품처럼 혼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62세였다. 박계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을 순간, 최종현은 몸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회사는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회장의 병환과 박계희의 장례 문제를 동시에 논의해야 할 기막힌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고 박계희의 영결식이 6일 뒤 뉴욕 맨하튼에서 열렸고, 식이 끝나자마자 유해는 귀국길에 올랐다. 빈소가 워커힐 호텔 빌라 자택에 마련됐고 며칠 후 장례식이 치러졌다. 아내의 영결식이 치러지고 유해가 귀국길에 올랐는데도, 최종현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대수술을 마치고 힘들어하는 그에게 아내의 사망 소식을 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중환자실에 있던 최종현이 "네 엄마는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자녀들은 "감기 몸살 때문에 쉬고 있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이 비밀을 언제까지 덮어둘 수는 없었다. 논의 끝에 자녀들이 이 사실을 그에게 알리기로 결정했다. 병원에서는 최 회장이 충격을 받을 것에 대비해 의료진을 대기시키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갑자기 자녀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최종현은 이상한 낌새에 "뭐야?"하고 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막내딸(최기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빠, 사랑하는 엄마가 하늘나라에 먼저 가셨어요."

사정을 모두 전해들은 최종현은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했다. 잠시후 최종현의 통곡이 병실 밖으로 터져 나왔다. 최종현은 후에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의 서문에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폐암진단을 받고 수술까지 받는 고비에서 나는 일생의 동반자를 잃는 슬픔을 감수해야 했다. 운명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준비된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새삼 '사람의 목숨이란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아내가 죽고 14개월 뒤, 최종현은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1998년 8월 26일 새벽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얼마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최종현은 죽음을 자연의 순리로 담담하고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귀국 후 최종현은 요양생활을 하면서도 화요일마다 사무실에 출근, 업무를 처리하고 집필에 몰두했다. 타계 직전 최종현은 입원하라는 주위의 요청을 모두 물리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결코 오래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병원에 갇혀서 마지막을 맞고 싶지는 않다. 사는 날까지 집에서 맘 편하게 살고 싶다."라고 말했다. 1998년 8월 30일 오전 8시 워커힐 호텔에서 최종현의 영결식이 거행됐다.

영결식이 끝난 뒤 최종현의 유해는 벽제화장장으로 옮겨졌다.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다. 최종현은 평소 장례문화에 대해 "헬기를 타고 출장을 가면서 나라가 온통 무덤으로 덮여 있는 걸 보고 이대로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좁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데 걸림돌이다. 이를 개선하는 방법은 화장을 해서 가족묘나 납골당에 모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꺼리지 않고 찾을 수 있는 화장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 화장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장묘 문화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최종현의 화장은 파장이 컸고, 당시 최종현의 빈소를 찾은 상당수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고인의 화장문화운동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SK그룹은 최종현의 뜻을 받들어 장묘 문화 개혁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고 최종현의 타계 직후 서울시와 협의해 추모공원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추모공원 후보지의 지역 주민이 강하게 반대하여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SK는 SK대로 돈과 시간을 낭비했고 서울시도 장묘 문화 개혁의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4부 슈퍼 엑설런트 코리아

국경 없는 세계 경제 전쟁에서 이기는 법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2004년 SK그룹의 수출액은 131억 달러에 달했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2,542억 달러)의 5.2퍼센트를 차지한다. 수출에서 가장 비중이 큰 분야는 에너지화학으로, 83억 달러에 이르고, 건설, 물류, 서비스 분야가 45억 달러 수준이며, 정보통신 분야의 수출도 3억 달러를 넘어서며 새로운 수출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SK그룹은 향후 정보통신 분야의 수출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리기 위해 무형자산을 적극적으로 판매하고 해외 서비스를 강화하는 등 강력한 수출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SK텔레콤은 2004년 글로벌 사업을 담당할 별도 조직을 신설했다.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최종현은 기업가로 변신한 이후에도 세계경제의 흐름을 지켜보아 오면서, 언젠가는 세계시장이 하나로 통합될 것을 예견하고 단순히 상품 수출을 늘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에 선경그룹의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종현의 이러한 구상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최태원 회장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최태원은 아시아의 공동 변영을 위한 '지식 네트워크'의 건설을 제안했고,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이 사업의 진행을 맡았다.

지식 네트워크 건설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아시아의 젊고 우수한 학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국제학자교류 지원'사업이 첫 번째인데, 재단은 중국,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등의 학자들을 한국에 초청해 1년 동안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연구비와 연구실을 제공했다. 두 번째는 해외 14개 대학 및 연구소에 '아시아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비를 지원하는 현지화 사업이다. 그리고 연구의 결과물을 토론하는 포럼을 여는 것이 세 번째인데, 2004년 '문명의 화해와 번영'이라는 주제로 베이징포럼이 열렸다. 처음으로 열린 이 포럼은 주로 인문, 사회 분야를 다루었다. 2005년 시작되는 상하이포럼에서는 재정, 에너지, 정보기술을 중심으로 경제 전반에 대한 폭넓은 토론이 진행될 예정이다.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을 추구하는 SK그룹은 수출에서도 새로운 장을 개척했는데, 바로 기술과 서비스의 수출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유정제 시설을 보유한 SK(주)와 무선통신 분야 노하우를 가진 SK텔레콤은 '무형 자산 상품화'라는 독특한 수출 전략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하고 있다. SK텔레콤은 2002년부터 이스라엘, 대만, 태국, 카자흐스탄 등에 무선인터넷 플랫폼과 부가서비스를 수출했고, 중국에는 무선인터넷 서비스를 실시했다. 베트남에서는 2003년 7월 에스폰이라는 브랜드로 CDMA 방식의 이동전화 서비스를 시작했다. SK텔레콤은 이동통신 사업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시장에도 진출했다. 2004년 미국 최대 이동통신 사업자인 버라이즌 와이어리스를 통해 단조로운 통화연결음 대신, 음악이나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는 컬러링 서비스를 제공하고 매출의 일정 부분을 지급받고 있다.

SK텔레콤은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는 네트워크 운영사업을 포함한 다양한 사업모델의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SK(주)는 석유제품 외에도 정유사업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와 경험을 수출하고 있다. 한편 SK커뮤니케이션즈는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싸이월드'를 해외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싸이월드에서 사이버머니로 사용되는 '도토리'가 주력 수출품목으로 떠오를 날도 멀지 않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보통신 제품이 해외에 진출하려면 먼저 국내 시장에서 신뢰를 얻고 상품성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SK그룹은 우리나라 주력 수출 품목인 정보통신 제품의 테스트베드(test-bed) 역할을 맡고 있다. SK는 앞으로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에너지, 화학과 정보통신을 중심으로 강력한 성장엔진이 될 신규 사업을 개발하고, 이를 통한 무형자산 상품화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갈 계획이다.

슈퍼 엑설런트 코리아로 가는 길

1985년 2월에 열린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정주영 회장이 재추대되었고, 1987년에는 구자경 LG그룹 회장이, 1989년에는 유창순 회장이 이어받았다. 그런데 1991년에 이르자 재계에는 최종현을 추대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러나 최종현은 이를 극구 고사했고, 유창순 회장이 연임했다. 최종현이 고사한 이유는 표면상으로는 "일본의 게이단렌의 경우를 보더라도 연륜이 있는 사람이 맡는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관계라는 점이 실제 이유였다.

여건이 바뀌면 전경련 회장을 맡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던 최종현은, 회장직을 고사하면서도 선경그룹 회장실에 전경련 담당 임원 자리를 만들었다. 회장을 맡기에 앞서 전경련이 진행하는 사업에 대한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최종현은 1987년 2월부터 전경련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장을 맡고 있었다. 유창순 회장의 임기가 끝나가던 1993년 1월 27일 전경련은 차기 회장 선출을 위한 회장단 회의를 열어, 최종현을 만장일치로 차기 회장으로 추대했고, 최종현은 2월 12일 제21대 전경련 회장에 공식 취임했다.

"이제 전경련은 대기업의 이익이나 대변하는 그런 단체가 아닙니다. 자율, 창의, 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것만이 우리 경제를 성장시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경제계도 정부에 의지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하고, 정부도 기업을 규제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겉으로는 전경련 활동에 무관심해 보였던 최종현이었지만, 회장에 취임하자 곧바로 전경련에 대한 개혁 의지를 밝히고 실천에 옮겼는데, 먼저 그는 같은 해 3월 회장단 회의를 거쳐 '자율조정위원회'를 설치했다. 기업 간의 사업 마찰, 기업과 소비자 간의 분쟁 등을 재계가 자율 조정함으로써 신뢰받는 기업상을 구축하자는 의도였다. 동시에 30대 그룹 기획조정 책임자가 참여하는 '기조실장회의'를 발족시켰다. 최종현의 이 같은 행보는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최종현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국가 경쟁력 강화였다. 국내외 경제동향에 해박한 식견을 갖고 있었던 최종현은 당시 상황을 중요한 전환기로 인식했는데, 국경 없는 세계경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힘을 모아야 했고, 정부의 지원도 필요했다. 1993년 10월 최종현의 주창으로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 5단체가 참여하는 '국가경쟁력강화민간위원회'가 발족했다.

국가경쟁력강화민간위원회의 대표적인 사업이 당시 섬유, 신발 등 대표적 불황 업종의 활력 회복을 위해 실시한 '대구 섬유연구개발센터' 건립과 '신발산업 설비자동화 설계자금' 지원이었다. 또 국내반도체 설계기술의 향상과 전문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반도체회로 설계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 최종현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질적 관계 개선에도 역점을 두고 다양한 협력 사업을 전개했다. 이러한 민간 주도의 국가경쟁력 강화 사업은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등 급변하는 국제환경에서 국가경쟁력 강화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정부도 국가경쟁력 강화를 최우선 국정지표로 설정했고, 이를 위한 정부 차원의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최종현이 구상했던 많은 과제들이 뜻하지 않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결국 미완의 상태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기업에 사람은 바뀌어도 원칙은 바뀌지 않는 시스템 경영을 뿌리내린 것과 마찬가지로, 최종현이라는 자연인의 죽음이 그가 품었던 '슈퍼 엑설런트 코리아'라는 원대한 꿈의 좌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꿈은 그가 생전에 이룩한 많은 성과들과 비교하면 훨씬 수월해 보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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