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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보원(以德報怨)
덕(德)으로써 원수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원수에게 은덕을 베풂을 이르는 말이다. 은혜로 원한을 갚는다는 뜻으로 논어에 유래하는 말이다.
以 : 써 이(人/3)
德 : 덕 덕(彳/12)
報 : 갚을 보(土/9)
怨 : 원망할 원(心/5)
출전 :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 제36장
或曰 : 以德報怨, 何如?
子曰 :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 제36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은혜로 원한을 갚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 정직함으로써 원한을 갚고 은혜로써 은혜를 갚아야 한다."
공자는 원한이 있는 상대에 대해 은혜로 갚는다고 한다면 반대로 은혜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은혜와 원한을 갚는 옳은 방법은, 원한에는 정직함으로써 갚고 은혜에는 은혜로써 갚는 것이라고 하였다.
원한을 은혜로 갚는다고 하면 후덕한 마음으로 아량을 베푸는 것이라 여기겠지만 상대에 따라 경우가 달라 한결같이 하기가 어렵다. 차라리 솔직하게 감정에 충실한 마음과 태도로 대하는 것이 좋은 것이며 은혜에는 반드시 은혜로 보답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나오는 이덕보원(以德報怨)이라는 말은 은덕(恩德)으로써 원한을 갚는다는 뜻으로 원망스러운 상대에게 오히려 너른 마음으로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자는 이덕보원(以德報怨)이 아닌 이직보원(以直報怨) 이덕보덕(以德報德) 해야 한다고 하였다.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 제36장
논어집주
36-1.
或曰(혹왈) 以德報怨(이덕보원)이 何如(하여)하니잇고
혹자가 말하였다. "德(은덕)으로써 원망(원한)을 갚는 것이 어떻습니까?"
或人所稱은 今見(현)老子書라 德은 謂恩惠也라
혹자가 말한 것은 지금 노자(老子) 책에 보인다. '덕(德)'은 은혜를 이른다.
36-2.
子曰(자왈) 何以報德(하이보덕)고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으로써 德에 갚으려는가?
言 於其所怨에 旣以德報之矣면 則人之有德於我者에 又將何以報之乎아
그 원망하는 바(상대)에 이미 덕으로써 갚았다면 나에게 덕이 있는 자에게는 또 장차 무엇으로써 갚을 것인가라고 말씀한 것이다.
36-3.
以直報怨(이직보원)이요 以德報德(이덕보덕)이니라
정직함으로써 원망을 갚고, 德으로써 德을 갚아야 한다."
於其所怨者에 愛憎取舍를 一以至公而無私가 所謂直也라 於其所德者엔 則必以德報之요 不可忘也니라
원망이 있는 자에게는 사랑하고 미워함과 취하고 버림을 한결같이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음으로써 하는 것이 이른바 정직이란 것이다. 덕(德)을 입은 자에게는 반드시 덕으로써 갚고 잊지 않아야 한다.
☉ 或人之言은 可謂厚矣라 然이나 以聖人之言觀之하면 則見其出於有意之私하여 而怨德之報 皆不得其平也니 必如夫子之言然後에 二者之報 各得其所라 然이나 怨有不讎而德無不報면 則又未嘗不厚也라 此章之言이 明白簡約하고 而其指意 曲折反覆하여 如造化之簡易易知而微妙無窮하니 學者所宜詳玩也니라
☉ 혹자의 말은 후덕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성인의 말씀을 가지고 살펴보면 유의(有意)의 사심(私心)에서 나와 원망과 덕에 대한 갚음이 모두 공평함을 얻지 못하였음을 볼 수 있으니, 반드시 부자(夫子)의 말씀과 같이 한 뒤에야 두 가지의 갚음이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원망을 원수로 여기지 않고 덕을 갚지 않음이 없으면 또 후덕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장의 말씀은 명백하고 간략하면서도 그 뜻은 곡절이 있고 반복하여 마치 조화(造化)의 간이(簡易)가 알기 쉽지만 미묘한 진리가 무궁한 것과 같으니,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자세히 완미해야 할 것이다.
위의 혹자와 공자의 문답을 통해 '원한'에 대처하는 공자와 노자의 자세가 사뭇 다름을 볼 수 있다. 이덕보원(以德報怨)은 도덕경 63장에 나오는 보원이덕(報怨以德)과 같은 말이다. 그렇다고 이덕보원(以德報怨)을 노자가 한 말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경구였을 수도 있다.
원한을 덕으로써 갚는다고 하는 그 지고한 관용의 경지가 노자의 주장과 잘 부합된다는 판단에서 후대에 도덕경을 필사하거나 편찬하던 이가 덧붙였을 수도 있다. 죽간본에는 이 구절이 나오지 않고, 도덕경에서도 앞뒤 맥락을 따져보았을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구절은 아닌 듯 보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원한을 덕으로써 갚는 자세가 전혀 없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공자가 말한 이직보원(以直報怨) 곧 원한을 곧음으로써 갚는 자세에는 분명 가깝다고 할 만하다. 곧음이란 옳은지 그른지 따져 판단한 뒤 선택한 자세요 행동 방식이다. 이는 원한이라는 깊은 응어리, 뒤틀리고 응등그러진 마음을 냉철한 이성으로 추스르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었던 조선이 에도 막부의 간청에 따라 국교를 재개한 과정이 그러했고, 일제 강점을 거친 뒤 한국 정부와 한국인이 가졌던 태도도 그러했다.
반면에 오랜 세월 이 땅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 그리고 이 땅과 외교를 맺고 교역하면서 선진 문물의 혜택을 지속적으로 받았던 일본은 이덕보덕(以德報德) 즉 덕을 덕으로써 갚지 않고 이원보덕(以怨報德) 즉 원한 살 일로써 덕을 갚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보다 더한 배은망덕(背恩忘德)은 인류 문명사를 다 뒤져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이덕보원(以德報怨)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냇물에 새겨라
우리나라 속담이다. 서양 속담은 좀 다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서 유래했다. 그의 저서 '연설록'에는 "받은 은혜는 영원히 기억하고, 겪은 원한은 흐르는 물처럼 잊어버려라"라고 나온다. 아버지에게 저 속담을 배웠다.
직장으로 전화한 아버지가 퇴근 후 지인 모친상에 문상을 같이 가자고 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택시로 혜화동 상가에 가면서 아버지는 부의금 봉투를 가져왔느냐고 했다. 어찌 될지 몰라 봉투 두 개를 준비해 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향전(香奠)'이라 쓴 봉투를 내보이며 "내 것은 준비해 왔다"라며 "네 것은 네가 준비하라"라고 했다.
겉봉에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 흰 봉투를 내밀자 직접 쓰라고 해 흔들리는 택시 안에서 손을 붙잡아 '부의(賻儀)'라고 쓰고 내 이름을 뒷면에 썼다. 아버지는 두 가지를 바로 지적했다. 부의는 반가(班家)에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 양반은 '상제(喪祭)' 또는 '상금(喪金)'을 썼다. 그게 아니면 '향전(香奠)'을 써야 한다고 해 그 자리서 고쳐 썼다.
또 이름 마지막 자 '권세 권(權)'을 약자인 '권(权)'으로 쓰자 "제 이름을 약자로 쓰는 놈이 어딨느냐. 제 이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남이 귀하게 여기겠느냐"며 이름은 반드시 정자로 쓰라고 했다.
내가 "봉투에 돈은 얼마를 넣을까요"라고 묻자 아버지는 "형편대로 하라"고 했다. 이어 "형편이 안 되면 빈 봉투를 낼 수도 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위인이라면 사귀지 말라. 저쪽에서 내 경조사에 냈던 금액에 맞춰 내는 건 거래다"라고 지적했다.
아버지는 "오늘 문상 가 뵙게 될 분은 내 스승이다. 공직에 오래 계셨다. 네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문상 와 처음 뵈었다. 전상으로 다리를 잃어 낀 내 의족을 어루만지며 '용기 잃지 마라. 내가 도움이 돼줘야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며 힘을 주신 분이다. 연유는 잘 모르겠지만, 평소 왕래가 없던 분이 조문을 오셨다"라고 일러 주며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도움과 은혜는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저 어른은 그날 이후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은 내 은인이다. 은혜는 기억하고 보답해야 한다"며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냇물에 새겨라"라고 했다. 또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답하는 것은 덕목이며 돈으로 환산하는 건 옳지 못하다.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설명했다.
'은혜 은(恩)'자는 침대에 大(큰 대)로 누워있는 사람을 그려 '의지하다'란 뜻을 지닌 '인할 인(因)'자와 '마음 심(心)'자가 결합한 글자이다. '의지(因)가 되는 마음(心)'이라는 뜻이다. '은혜 혜(惠)'자는 '마음 심(心)'자와 실을 감아두던 방추(紡錘)를 돌리는 '오로지 전(專)'이 합친 글자다. 실을 푸는 모습을 그린 전(專)자에 심(心)자를 결합해 선한 마음을 베푼다는 뜻을 표현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한자에도 온통 선한 마음을 베푸는 글자로 된 은혜의 보답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얕은 수작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심하기를 당부했다.
조문을 마치고 아버지가 나랏일을 오래 하신 큰 어른이라고 소개했다. 명함을 드리자 꼼꼼하게 살핀 그분은 내 아버지에게 했던 말씀을 녹음기처럼 들려줬다. "은행에 잘 들어갔다. 축하한다. 지금은 어렵겠지만 허드렛일이라도 정성을 쏟아라. 혹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와라."
두어 시간 머무르는 동안 본 문상객은 적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공직에서 물러난 뒤라 그럴거다. 그 사람들은 시장에서 장 보러 왔다가 장 다 본 뒤 돌아간 사람들이다. 세상인심이란 그런 거다"라며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정치인인 맹상군(孟嘗君)의 고사를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일러줬다.
맹상군은 재산을 털어 천하의 인재를 후하게 대우해 삼천 명의 식객을 거느렸으나 그가 감옥에 갇히자 모두 떠났다. 그때 마지막까지 남아 보좌하던 문객 풍환(馮驩)이 한 말이다. 아버지는 "은혜는 그렇게 장보듯해서는 안 된다"고 엄명했다.
이날도 마지막에 '이덕보원(以德報怨)' 고사성어를 인용했다. 은혜로 원한을 갚는다는 뜻으로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 제36장에 나온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은혜로 원한을 갚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 정직함으로써 원한을 갚고 은혜로써 은혜를 갚아야 한다."
或曰 : 以德報怨 何如?
子曰 :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공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은혜와 원한을 갚는 옳은 방법은, 원한에는 정직함으로써 갚고 은혜에는 은혜로써 갚는 것이라고 하였다. 원망스러운 상대에게 오히려 너른 마음으로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갖추어야 할 인성은 여러 가지다. '감사하는 마음, 긍정적인 사고방식, 베푸는 마음 등을 갖추어야 한다'며 그러자면 겸손, 배려심, 책임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아버지는 "진실성은 감사하는 마음을 진심으로 표현하는 데 중요하다. 가식이나 거짓말 없이 진심 어린 감사를 표현함으로써,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 수 있다"라며 새겨두라고 했다. 진실성이야말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인성이고 손주들에게도 꼭 물려줘야 할 소중한 성품이다.
곧음으로 원수를 갚는 일
지금은 가히 불신과 의심을 넘어 분노와 증오의 시대라 할 만하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에게 해가 되면 분노하고 증오한다. 맹자가 이른 대로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칠정(七情)이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이리니, 분노와 증오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보아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노와 증오가 쌓이면 원수가 되고 그러면 복수를 해야 한다. 복수의 시대야말로 생지옥이다. 증오와 분노가 복수로 폭발하여 무차별적인 살상을 저지르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국내적으로 지역과 당파가, 국제적으로 국가와 민족이 생각과 이해가 다르다고 서로 미워하고 성내면서 복수하려 나서고 있다.
복수라 하면 부모를 죽인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를 떠올린다.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망수애구(忘讐愛仇)'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잊고 사랑하라니 수긍이 될 일이었겠는가?
김평묵(1819∼1891)은 '서교에서 복수를 잊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는데 인정에 가깝지 않다'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듣자니 예수의 법도는, 복수를 잊고 원수도 사랑한다지. 하늘 함께 하지 못한다 했으니, 이 이치는 천고의 밝은 진리라네'라고 했다. '아버지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는다'는 말이 예기(禮記)에 있으니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어찌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부모를 죽인 원수가 아니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중국에도 '망수애구(忘讐愛仇)'와 비슷한 말이 있었다. 노자는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는 뜻의 '보원이덕(報怨以德)'을 말했고 공자는 보원이덕 대신 곧음으로 원한을 갚는다는 뜻의 '이직보원(以直報怨)'을 제안했다.
이때 '덕'이 아니라 '직'으로 갚아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왔는데 그중 김창협(1651∼1708)의 설이 주목된다. 김창협은 "갚는 것이 마땅한 원한은 갚는 것이 마땅하지만, 갚지 않는 것이 마땅한 원한은 갚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또 원한의 대상이 뛰어나고 재주가 있다면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라 하더라도 공의(公義)로 그를 아끼고 취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 예로 원수지간이었던 한(漢)의 개훈(蓋勳)과 소정화(蘇正和) 사이에 있었던 고사를 들었다. 소정화가 권력을 농단하던 자를 처단하려 하다가 도리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개훈이 힘을 써서 구해 주었다. 이에 소정화가 개훈을 찾아가 사례하려 하자 개훈이 만나 주지 않고 예전처럼 원수로 여겼다고 한다.
최고의 지식인으로 자처한 '정조'도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 "이덕보원은 노자의 학설이지만 충후(忠厚)한 도가 되기에 해로울 것이 없는데, 성인이 그르게 여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원한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으니, 갚는 방법도 각기 달라야 할 것 같다.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라면 덕으로 갚는 것이 본디 불가하지만 아주 사소한 원한이라면 덕으로 갚는 것이 어찌 충후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정조는 국가를 망하게 하거나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이 옳지만 개인적이고 사소한 원한은 덕으로 갚는 것이 '이직보원'의 뜻이라 보았다. 부모를 죽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복수를 외치는 자들은 그 '곧음'을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원한은 덕으로 갚되 원수는 잊지 말자.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성대중(成大中)의 이 말을 읽어보시라. "지인(至人)은 은원(恩怨)이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보복과 길흉은 하늘에 맡기고 그저 앉아 관망할 뿐이다. 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다가는 스스로 망하게 될 것이니, 제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굳이 내 손을 쓸 것이 있겠는가?"
베풂의 작동 메커니즘
한 유튜브 동영상을 보니, 미국 애틀란타의 한 주민이 택배 물품들이 손상된 채로 배달되는 일이 많아 종종 분통을 터뜨려야 했다. 택배 운전자들이 물건을 거칠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심 끝에 신통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택배 운전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현관문 앞에다 택배 운전자들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도록 음료와 과자 등을 비치해 놓고, 그들을 격려하는 문구도 함께 써놓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비치된 음료 등을 보고 감동한 택배 운전자들은 그의 물건을 훨씬 조심스럽게 다뤄주었고, 어떤 이는 격한 감격의 제스처를 취하거나 현관문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하기도 했다.
작은 호의를 베풀어 갈등이 가볍게 해소할 수 있었으니, 진정 평화적이고도 지혜로운 해결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이 사례를 보니, 선생의 말씀하신 층간 소음의 갈등 해결 방법이 생각났다.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위층에서 쿵쿵 뛰는 애 때문에 시끄러우면, 올라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면서 애 얼굴도 보고 이름도 물어보라. 왜냐하면 아는 애가 뛰면 덜 시끄럽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한 정신 승리의 고결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논어에서도 '덕으로 미움을 갚으라(以德報怨/이덕보원)'고 했고, 에이브러햄 링컨도 "적을 망가뜨리는 최고의 방법은, 그를 친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택배 운전자를 위한 배려나 위층 아이를 위한 아이스크림은 모두, 이덕보원(以德報怨)의 실천이며, 링컨이 말하는 '적을 친구로 만드는 행위'에 해당한다. 호의와 베풂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마음이 변화하기는 하지만, 위 두 사례는 마음이 변화하는 주체가 각기 다르다.
택배 사례는, 내가 상대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면, 그로 인해 상대가 나를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으로 느끼게 되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거나 나를 이롭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즉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작동 방식으로서, 상대를 친구로 만들어 '적을 망가뜨리는' 멋진 전략이다. 여기에는 호의의 '주고 받음'이 전제되어 있어, 은근히 거래의 개념이 개입된 비즈니스 냄새가 다소 풍긴다.
그런데 선생의 방법은 아이스크림을 얻어 먹은 층간 소음의 범인인 아이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애초에 없었다. 당초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나니, 내 마음 속의 그 아이는 평소 불편한 소음을 내게 강요하던 밉살스런 윗집 아이에서 '알고 지내는 이웃 사람' 내지는 '친분이 있는 동네 아이'로 변해 버렸다.
내가 호의를 베풂으로써 상대를 보는 나의 관점, 나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상대를 그대로 두고 내가 변하여 갈등을 완화시키는 방법이니, 이는 차원이 다른 고도로 지혜로운 혹은 대단히 종교적인 해결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고의 원리는 벤저민 프랭클린 효과로 설명될 수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당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은 당신의 호의를 받은 사람보다 당신에게 호의를 다시 베풀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즉 호의를 베풀면 그 호의를 받은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가 펜실베이니아 의회에서 활동할 때 적대적인 라이벌 의원이 있었는데, 그와의 에피소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에게 아주 희귀하고 흥미로운 책이 있다는 말을 들고, 나는 그 책을 읽고 싶으니 며칠만 빌려달라는 요청의 쪽지를 써 보냈다. 그는 즉시 책을 보내주었고, 나는 일주일 후 감사의 쪽지와 함께 책을 돌려주었다. 다음에 의회에서 만났을 때, 그는 처음으로 나에게 매우 정중하게 말을 걸어왔고, 이후 나에 대해 협조적으로 변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어 그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유지하였다."
이 벤저민 효과는 선생의 효과와 그 원리는 같지만, 그 작동 메커니즘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선생의 효과는 내가 베푼 호의로 상대에 대한 내 인식의 변화를 도모하는 데 반해, 벤저민 효과는 내가 상대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침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내게 호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벤저민 효과 쪽이 훨씬 능동적이고도 전략적이다.
실제로 적대적이거나 껄끄러운 상대와 소통하거나 가까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면, 상대방이 거부할 수 없는 작은 요청을 해보시라. 그러면 경직된 관계에 작은 틈새가 절묘하게 벌어지기 시작하는 기막힌 마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효과와 벤저민 효과는 모두 호의를 받은 쪽보다 호의를 베푼 쪽의 마음이 더 우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심리적 현상을 설명한다. 인간 심리의 묘한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인지 편향(cognitive bias)의 예다.
아마도 베푼 사람은 상대가 필경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호의를 베풀었다고 자신의 판단과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심리적 기울어짐으로 인해 인과가 전도된 인지 편향이 생기는 것으로 이해된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처럼.
그러니 이들 효과는, 공동체 사회를 살아가려면 타인들과 호의뿐만 아니라 폐 끼침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남들에게 너무 베풀지 않고 내 것만 챙기는 각박함은 당연히 호감의 대상이 되지 못하겠지만, 남의 신세를 조금도 지지 않으려고 오직 내가 가진 것만으로 버티며 생존하는 사람도 남의 호감을 받기 힘들다는 말이다.
공동체 사회에서 적절한 폐 끼침도 서로를 결속시키는 바인더로서 작동한다는 점을 기억해야겠다. 그리고 이러한 베풂의 작동 메커니즘은 우리가 주변에 우호적인 관심을 가질 것을 권한다. 마음이든 물질이든 너무 쩨쩨하게 굴지 말고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굳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좋은 관심을 베풀어 보면, 내 마음이 변하여 세상 사람들이 좀 더 좋아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적어도 내게 더 살만한 곳이 될 것이고 내 삶의 재미가 좀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이직보원(以直報怨)과 이덕보원(以德報怨)
요즘 심심찮게 '촉법소년'이란 말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청소년의 학교 폭력이 논란이 됐다. 근래에 청소년 범죄가 학교의 범위를 벗어나 무인 매장의 상습 절도와 차량 파손에서부터 무면허 운전에 이은 교통사고, 성폭행을 비롯한 강력 범죄로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청소년은 연령에 따라 처벌을 경감 받는 소년법 적용 대상이다. 만 10세 미만의 범법소년은 어떠한 처벌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만 10~14세의 촉법소년은 보호처분을 받지만 형사처분의 대상은 아니다. 만 15~18세의 범죄 소년은 보호처분과 형사처분의 대상이 된다. 아울러 형량이 감경될 뿐만 아니라 가석방의 기회도 일찍 주어지고 보호처분 전과 기록이 남지 않는다.
이처럼 청소년 범죄에 대해 성인과 처분의 종류를 달리하고 감경 내용을 허용하는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첫째, 청소년이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와 사리를 전체적으로 파악해 그 책임을 다 질 수 없다는 점이다. 일의 인과관계를 투철하게 파악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행위의 결과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청소년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다. 이 때문에 청소년 시기의 범행이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에 짐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소년법은 청소년이 사리 파악을 정확히 하지 못해서 지은 범죄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묻기보다 재생의 기회를 줘서 보호하자는 취지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청소년이 배고픔을 참지 못해 식료품을 훔친다든지 사람을 밀쳐서 가벼운 부상을 입히는 경우라면 우리는 소년법의 처분과 감경에 대해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있다. 근래에 청소년이 자신의 나이가 형사처분과 보호처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상습적이거나 강력한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 이 때문에 소년법을 개정해서 청소년 범죄에 대해 좀 더 무거운 처벌을 부과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아지고 있다.
공자와 노자는 오늘날 소년법이나 촉법소년 등의 법률 용어를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 타인에게 피해를 줘서 원한을 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두고 생각을 달리했다.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은혜로 원한을 갚을까요?"라고 물었다. 공자의 대답은 이랬다. "어떻게 은혜로 원한을 갚을 수 있겠는가. 올바름으로 원한을 갚고, 은혜로 은혜를 갚는다."
或曰, 以德報怨.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노자는 공자와 생각이 달랐다. "원한을 은혜로 갚는다. 너무 쉽게 생각하면 반드시 어려움이 많다. 이 때문에 성인은 모든 일을 어렵게 여기므로 끝내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報怨以德. 多易必多難.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矣.
오늘날 청소년 범죄에 대해 공자라면 '이직보원'의 논리를 제시하며 처벌 강화를 주장하고, 노자라면 '이덕보원' 또는 '보원이덕'의 논리를 제시하면서 여전히 감경과 보호를 주장할 듯하다.
공자는 청소년 범죄에 대해 감경과 보호라는 이차적인 고려보다 정의와 형평이라는 일차적 고려를 더 우선시하고자 한다. 반면 노자는 정의를 부르짖는 일이 쉬워 보일지라도 또 하나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어려운 '이덕보원' 또는 '보원이덕'에서 시작하자고 말한다.
오늘날 공자와 노자의 논리를 바탕으로 소년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청소년 범죄를 덮어놓고 성인과 같이 처벌하자며 '범죄'에 방점을 두거나 미성숙한 사람을 성인과 동일하게 처벌해서 안 된다며 '청소년'에 초점을 맞추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취지를 살리면서도 청소년이 자신의 나이를 명백하게 의식하고 악용하거나 고의적이며 상습적으로 범행할 경우 처분과 교화를 강화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범행을 저지른 청소년을 보호하는 것만큼이나 피해를 입은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는 일의 무게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마침 대선 기간인 만큼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활발하게 논의되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덕보원(以德報怨)
위인포(魏仁浦, 911~969)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모친과 6개월이 되지 않은 동생만 남았다. 모친이 가족들의 삶을 짊어졌다. 겨울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면서 공부에 전념했다.
경륜을 갖춘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도도한 의견으로 시사를 품평하여 명성을 얻었다. 위인포는 모친과 작별하고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상의를 벗어 강에 던지며 성공하지 않으면 다시 이 강을 건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당(唐)이 망하고 오대십국시대가 열리기 시작하던 혼란기였다. 후진(後晋) 말기에 추밀원의 하급관리가 됐다. 후진은 내란과 거란의 침입으로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했다. 거란군이 출제와 태후를 잡아갔다. 947년, 유지원(劉知遠)이 후한을 세웠다.
위인포는 거란과 대치하던 전선에 있었다. 대장 곽위(郭威)가 거란의 상황에 대해 묻자 위인포는 상세히 설명하여 호감을 얻었다. 이듬해 유지원이 죽고 은제 유승우(劉承祐)가 계위했다. 군부를 장악한 곽위가 거란의 침입을 막으러 가면서 향후의 대책에 대해 물었다. 위인포는 재물을 풀어 인심을 얻으라고 충고했다. 곽위는 그의 계책에 따라 쿠데타를 일으켜 후주(後周)를 건국했다.
곽위는 난세의 명군이었다. 위인포는 추밀원부승지로 승진하여 심복이 됐다. 곽위는 군대의 시찰을 중시했다. 어느 날 기상이 악화되자 출정한 군사들이 걱정돼 위인포에게 상황을 물었다. 위인포는 각 주둔지의 상황과 지휘관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자세히 설명했다. 곽위는 깜짝 놀랐다.
과로로 죽음을 앞둔 곽위는 양자 시영(柴榮)에게 후사를 맡기면서 이인포를 중용하라고 당부했다. 세종 시영도 곽위에 못지않은 영걸이었다. 시영이 위인포를 재상으로 임명하자 모두 과거 출신이 아니라고 반대했다. 세종은 옛날의 재상은 과거 출신이었냐고 되물었다. 세종은 성격이 급했다. 작은 잘못에도 불같이 화를 내자 위인포가 대신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다.
세종도 과로로 쓰러졌다. 6세인 시종훈이 즉위했지만 사람들은 천하에 주인이 없다고 떠들었다. 960년, 신년하례식을 거행할 때 거란이 북한과 연합하여 침입했다는 급보가 도착했다. 조광윤(趙匡胤)의 계략이었다. 병권을 장악한 조광윤은 진교역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개봉으로 회군했다. 위인포는 반항했지만 곧바로 진압됐다. 조광윤이 회유했지만 위인포는 병에 걸려 죽기 전까지 곽위와 시영을 잊지 못하고 나라를 지키기 못한 것을 자책하다가 객사했다. 향년 59세였다.
맑고 소박했으며 넉넉한 마음을 지녔던 위인포는 뛰어난 언변과 지모까지 겸비했다. 난세에 살면서도 일편단심으로 자기를 알아준 주군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자책감으로 고독하고 적막하게 지냈다. 당대의 사람들은 그를 '적막한 위인포'라고 불렀다.
후한 은제의 총신 고연휘(賈延徽)는 위인포의 이웃에 살았다. 위인포의 집이 명당이라는 소문을 듣고 욕심이 나서 모함했다. 위인포는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다. 후한이 망하자 고연휘는 체포됐다. 위인포는 위기에 빠진 사람에게 보복할 수 없다고 풀어주었다.
산서는 지염(池鹽)의 산지였다. 정원소(鄭元昭)는 소금을 관리하면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나중에 위인포의 장인 이온옥(李溫玉)과 교대했다. 둘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이 시기에 위인포는 추밀원에 근무했다. 정원소는 이수정의 난에 관련됐다고 이은옥을 체포했다. 위인포도 연루됐지만 실정을 알고 있던 추밀원에서 불문에 붙였다.
나중에 추밀원 승지로 승진한 위인포가 정원소를 경사로 불렀다. 정원소는 겁을 먹었지만 위인포가 곽위에게 추천하여 오히려 승진시켰다. 정원소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곽위와 시영이 위인포를 중용한 것은 난세에 보기 드문 덕으로 원한을 갚는 이인표의 관용 때문이었다. 각박한 세상이다. 따뜻한 마음이 그립다.
▶️ 以(써 이)는 ❶회의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람이 연장을 사용하여 밭을 갈 수 있다는 데서 ~로써, 까닭을 뜻한다. 상형문자일 경우는 쟁기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❷회의문자로 以자는 '~로써'나 '~에 따라'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以자는 人(사람 인)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以자의 갑골문을 보면 마치 수저와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두고 밭을 가는 도구이거나 또는 탯줄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하고는 있지만, 아직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무엇을 그렸던 것인지의 유래와는 관계없이 '~로써'나 '~에 따라', '~부터'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그래서 以(이)는 ①~써, ~로, ~를 가지고, ~를 근거(根據)로 ②~에 따라, ~에 의해서, ~대로 ③~때문에, ~까닭에, ~로 인하여 ④~부터 ⑤~하여, ~함으로써, ~하기 위하여 ⑥~을 ~로 하다 ⑦~에게 ~을 주다 ⑧~라 여기다 ⑨말다 ⑩거느리다 ⑪닮다 ⑫이유(理由), 까닭 ⑬시간, 장소, 방향, 수량의 한계(限界)를 나타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일정한 때로부터 그 뒤를 이후(以後), 위치나 차례로 보아 어느 기준보다 위를 이상(以上), 오래 전이나 그 전을 이전(以前),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그 뒤로나 그러한 뒤로를 이래(以來), 어떤 범위 밖을 이외(以外), 일정한 범위의 안을 이내(以內), 어떤 한계로부터의 남쪽을 이남(以南), 어떤 한계로부터 동쪽을 이동(以東), ~이어야 또는 ~이야를 이사(以沙), 그 동안이나 이전을 이왕(以往), 까닭으로 일이 생기게 된 원인이나 조건을 소이(所以), ~으로 또는 ~으로써를 을이(乙以), 어떠한 목적으로나 어찌할 소용으로를 조이(條以), ~할 양으로나 ~모양으로를 양이(樣以), 석가와 가섭이 마음으로 마음에 전한다는 뜻으로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뜻은 마음으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는 말 또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의사가 전달됨을 이르는 말을 이심전심(以心傳心),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뜻으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당해 내려는 어리석은 짓을 일컫는 말을 이란투석(以卵投石), 대롱을 통해 하늘을 봄이란 뜻으로 우물안 개구리를 일컫는 말을 이관규천(以管窺天), 귀중한 구슬로 새를 쏜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손해 보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이주탄작(以珠彈雀), 독으로써 독을 친다는 뜻으로 악을 누르는 데 다른 악을 이용함을 이르는 말을 이독공독(以毒攻毒), 열은 열로써 다스린다는 뜻으로 힘에는 힘으로 또는 강한 것에는 강한 것으로 상대함을 이르는 말을 이열치열(以熱治熱), 옛것을 오늘의 거울로 삼는다는 뜻으로 옛 성현의 말씀을 거울로 삼아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이고위감(以古爲鑑), 새우로 잉어를 낚는다는 뜻으로 적은 밑천을 들여 큰 이익을 얻음을 일컫는 말을 이하조리(以蝦釣鯉), 손가락을 가지고 바다의 깊이를 잰다는 뜻으로 양을 헤아릴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을 이지측해(以指測海),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이식위천(以食爲天),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댄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기만하고 권세를 휘두름을 이르는 말을 이록위마(以鹿爲馬), 하나로써 백을 경계하게 한다는 뜻으로 한 명을 벌하여 백 명을 경계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이일경백(以一警百), 털만으로 말의 좋고 나쁨을 가린다는 뜻으로 겉만 알고 깊은 속은 모름을 이르는 말을 이모상마(以毛相馬), 남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자신을 경계함을 이르는 말을 이인위감(以人爲鑑), 백성을 생각하기를 하늘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백성을 소중히 여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음을 일컫는 말을 이민위천(以民爲天), 피로써 피를 씻으면 더욱 더러워진다는 뜻으로 나쁜 일을 다스리려다 더욱 악을 범함을 이르는 말을 이혈세혈(以血洗血), 양으로 소와 바꾼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 대신으로 쓰는 일을 이르는 말을 이양역우(以羊易牛), 과거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미루어 짐작한다는 말을 이왕찰래(以往察來), 불로써 불을 구한다는 뜻으로 폐해를 구해 준다는 것이 도리어 폐해를 조장함을 이르는 말을 이화구화(以火救火) 등에 쓰인다.
▶️ 德(큰 덕/덕 덕)은 ❶형성문자로 悳(덕)의 본자(本字), 徳(덕), 惪(덕)은 통자(通字), 㥀(덕), 恴(덕)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悳(덕)으로 이루어졌다. 悳(덕)은 바로 보다, 옳게 보는 일이고, 두인변(彳)部는 행동을 나타내고, 心(심)은 정신적인 사항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德(덕)은 행실이 바른 일, 남이 보나 스스로 생각하나 바람직한 상태에 잘 부합하고 있는 일을 뜻한다. 본디 글자는 悳(덕)이었는데 나중에 德(덕)이 대신 쓰여졌다. ❷회의문자로 德자는 '은덕'이나 '선행'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德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直(곧을 직)자,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금문에 나온 德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德자는 사람의 '행실이 바르다'라는 뜻을 위해 만든 글자이다. 그래서 直자는 곧게 바라보는 눈빛을 그린 것이고 心자는 '곧은 마음가짐'이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길을 뜻하는 彳자가 있으니 德자는 '곧은 마음으로 길을 걷는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우리의 '삶'이나 '인생'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니 德자는 곧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德(덕)은 (1)공정하고 포용성 있는 마음이나 품성(品性) (2)도덕적(道德的) 이상(理想) 또는 법칙(法則)에 좇아 확실히 의지(意志)를 결정할 수 있는 인격적(人格的) 능력(能力). 의무적(義務的) 선(善) 행위를 선택(選擇), 실행(實行)하는 습관(習慣). 윤리학(倫理學) 상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임 (3)덕분 (4)어떤 유리한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原因) (5)공덕(功德) 등의 뜻으로 ①크다 ②(덕으로)여기다 ③(덕을)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④고맙게 생각하다 ⑤오르다, 타다 ⑥덕(德), 도덕(道德) ⑦은덕(恩德) ⑧복(福), 행복(幸福) ⑨은혜(恩惠) ⑩선행(善行) ⑪행위(行爲), 절조(節操: 절개와 지조를 아울러 이르는 말) ⑫능력(能力), 작용(作用) ⑬가르침 ⑭어진 이, 현자(賢者) ⑮정의(正義) ⑯목성(木星: 별의 이름) ⑰주역(周易) 건괘(乾卦)의 상,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태(太)이다. 용례로는 덕이 높고 인망이 있음을 덕망(德望),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을 덕행(德行), 덕행과 선행을 덕선(德善), 좋은 평판을 덕용(德容),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사귀는 벗을 덕우(德友), 덕행으로써 교화함을 덕화(德化), 덕이 두터움을 덕후(德厚), 덕의를 갖춘 본성을 덕성(德性), 덕으로 다스림을 덕치(德治), 잘 되라고 비는 말을 덕담(德談), 남에게 미치는 은덕의 혜택을 덕택(德澤),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덕량(德量), 도리에 닿은 착한 말을 덕음(德音),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도덕(道德), 아름다운 덕성을 미덕(美德), 여러 사람을 위하여 착한 일을 많이 한 힘을 공덕(功德), 집안을 망치는 못된 언동을 망덕(忘德), 사람이 갖춘 덕 또는 사귀어 서로 도움을 받는 복을 인덕(人德), 아름다운 덕행을 휴덕(休德), 이랬다저랬다 변하기를 잘하는 성질이나 태도를 변덕(變德), 착하고 바른 덕행을 선덕(善德), 항상 덕을 가지고 세상일을 행하면 자연스럽게 이름도 서게 됨을 이르는 말을 덕건명립(德建名立), 덕행이 높고 인망이 두터움을 일컫는 말을 덕륭망존(德隆望尊), 덕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뜻으로 마주치는 환경이나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수행에 도움이 됨을 이르는 말을 덕무상사(德無常師), 사람이 살아가는 데 덕이 뿌리가 되고 재물은 사소한 부분이라는 말을 덕본재말(德本財末), 덕이 있는 사람은 덕으로 다른 사람을 감화시켜 따르게 하므로 결코 외롭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덕불고(德不孤),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좋은 행실은 서로 권장하라는 말을 덕업상권(德業相勸), 덕망이 높아 세상 사람의 사표가 된다는 말을 덕위인표(德爲人表),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덕필유린(德必有隣) 등에 쓰인다.
▶️ 報(갚을 보/알릴 보)는 ❶회의문자로 죄를 짓고(幸) 다스림을 받은(문자의 오른쪽 부분인 글자 복 사람을 복종시키는 모양, 다스리는 모양) 사람이라는 데서 갚다를 뜻한다. 죄받다, 대답하다, 갚다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報자는 '갚다'나 '판가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報자는 執(잡을 집)자와 又(또 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報자의 금문을 보면 수갑을 찬 죄수를 잡으려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글자의 형태로만 본다면 같은 시기에 그려진 執(잡을 집)자와 비슷하다. 다만 報자에는 又(또 우)자가 있으므로 수갑을 차고 있는 죄수를 붙잡아두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죄수를 붙잡아둔 모습이 왜 '갚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일까? 報자에서 말하는 '갚다'라는 것은 사실 벌을 받아 죗값을 치르라는 뜻이다. 그래서 報(보)는 ①갚다 ②알리다 ③대답(對答)하다 ④여쭈다 ⑤치붙다 ⑥재판하다 ⑦판가름하다 ⑧공초(供招)받다(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다) ⑨간통(姦通)하다, 간음(姦淫)하다 ⑩나아가다, 급(急)히 가다 ⑪갚음 ⑫알림, 통지 ⑬신문, 신문지 ⑭처형,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갚을 상(償), 갚을 수(酬)이다. 용례로는 일반에게 알리는 새로운 소식을 보도(報道), 알리어 바치거나 베풀어 알림을 보고(報告), 근로의 대가로 주는 금전이나 물품을 보수(報酬), 입은 혜택이나 은혜를 갚음을 보답(報答), 원수를 갚음을 보복(報復), 은혜를 갚음을 보은(報恩), 공훈에 보답함을 보훈(報勳), 남에게 진 빚이나 받은 것을 갚음을 보상(報償), 착한 일은 착한 대로 악한 일은 악한 대로 선악이 대갚음됨을 보응(報應), 사정이나 정황의 보고를 정보(情報), 널리 알리는 것 또는 그 소식이나 보도를 홍보(弘報), 통지하여 보고함을 통보(通報), 상대방의 정보나 형편을 몰래 탐지하여 보고함을 첩보(諜報), 신문 기사에서 일컫는 그 신문 자체를 본보(本報), 앞으로의 일을 예상해서 미리 알림을 예보(豫報), 반가운 소식을 낭보(朗報), 경계하라고 미리 알림을 경보(警報), 정보를 제공함을 제보(提報), 빨리 알리는 것 또는 그 보도를 속보(速報), 확실하게 알림 또는 그러한 보도나 소식을 확보(確報), 여러 가지 일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 발행한 책자를 화보(畫報),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기사를 적어 벽이나 게시판에 붙이는 종이를 벽보(壁報), 그릇된 보도 또는 그릇 보도함을 오보(誤報),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천지와 선조의 은혜에 보답함을 일컫는 말을 보본반시(報本反始), 남을 국사로 대우하면 자기도 또한 국사로서 대접을 받는다는 뜻으로 지기知己의 은혜에 감동함을 이르는 말을 보이국사(報以國士), 조상의 음덕을 추모함을 일컫는 말을 보본추원(報本追遠), 자신의 삶의 은인인 군사부君師父에 대해서 죽음으로써 보답함을 일컫는 말을 보생이사(報生以死), 원한 있는 자에게 은덕으로써 갚는다는 뜻으로 앙갚음하지 않는다는 말을 보원이덕(報怨以德), 서로 대갚음을 하는 자연의 이치를 일컫는 말을 보복지리(報復之理), 봉숭아에 대한 보답으로 오얏을 보낸다는 뜻으로 내가 은덕을 베풀면 남도 이를 본받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투도보리(投挑報李), 자식이 부모가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반포보은(反哺報恩), 원인과 결과는 서로 물고 물린다는 뜻으로 과거 또는 전생의 선악의 인연에 따라서 뒷날 길흉 화복의 갚음을 받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인과응보(因果應報), 풀을 묶어서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죽어 혼이 되더라도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을 일컫는 말을 결초보은(結草報恩) 등에 쓰인다.
▶️ 怨(원망할 원, 쌓을 온)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마음심(心=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夗(원)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怨자는 '원망하다'나 '미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怨자는 夗(누워 뒹굴 원)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夗자는 달이 뜬 어두운 밤에 뒹구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누워 뒹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怨자는 이렇게 누워 뒹군다는 뜻을 가진 夗자에 心자를 결합해 너무도 분하고 원통하여 바닥을 뒹굴 정도(夗)의 심정(心)이라 뜻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怨(원, 온)은 (1)원한(怨恨) (2)원망(怨望) 등의 뜻으로 ①원망(怨望)하다 ②고깝게 여기다 ③책망(責望)하다 ④나무라다 ⑤미워하다 ⑥슬퍼하다 ⑦위배(違背)되다 ⑧어긋나다 ⑨헤어지다 ⑩풍자(諷刺)하다 ⑪원수(怨讐) ⑫원한(怨恨) ⑬원망(怨望) 그리고 ⓐ쌓다(온) ⓑ축적(蓄積)하다(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원망할 앙(怏), 한 한(恨), 근심할 담(憾),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은혜 은(恩), 은혜 혜(惠)이다. 용례로는 원통하고 한되는 생각을 원한(怨恨), 남이 한 일을 억울하게 또는 못마땅하게 여겨 탓함을 원망(怨望), 자기 또는 자기 나라에 해를 끼친 사람을 원수(怨讐), 원망하는 소리를 원성(怨聲), 자기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을 원가(怨家), 남편이 없음을 원망하는 여자를 원녀(怨女), 원한을 품은 여자를 원부(怨婦), 원망하고 꾸짖음을 원구(怨咎), 무정한 것을 원망하면서도 오히려 사모함을 원모(怨慕), 원한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불화를 원구(怨溝), 원한을 품고 악한 짓을 저지름을 원특(怨慝), 원한을 품음을 구원(構怨), 남이 저에게 해를 주었을 때에 저도 그에게 해를 주는 일로 앙갚음을 보원(報怨), 노여움과 원한으로 노하여 원망함을 노원(怒怨), 원수를 맺거나 원한을 품음을 결원(結怨), 어떤 일로 말미암아 남의 원한을 삼을 매원(買怨), 털끝만큼 하찮은 원망이나 원한을 발원(髮怨), 깊이 원망함 또는 깊은 원망을 심원(深怨),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원망을 적원(積怨), 몹시 분하여 생기는 원망을 분원(忿怨),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자나 자기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를 평등하게 대한다는 말을 원친평등(怨親平等),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다는 뜻으로 원한이 깊어 잊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원철골수(怨徹骨髓),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는 말을 원천우인(怨天尤人), 원한 있는 자에게 은덕으로써 갚는다는 뜻으로 앙갚음하지 않는다는 말을 보원이덕(報怨以德),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도에 지나치면 도리어 원망을 사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은심원생(恩甚怨生), 잘못을 뉘우쳐 다시는 그런 잘못이 없도록 함을 이르는 말을 자원자애(自怨自艾),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수가 없다는 말을 수원숙우(誰怨孰尤), 원망이 쌓이고 쌓여 노염이 깊어짐을 이르는 말을 적원심노(積怨深怒), 원망을 사면서도 꿋꿋하게 일을 진행함을 이르는 말을 임원감위(任怨敢爲), 서로 술잔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묵은 원한을 잊어 버린다는 말을 배주해원(杯酒解怨),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모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을 여원여모(如怨如慕)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