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본(破本)
심강우
시를 쓴다고 방을 나가지 않은 날이 많았다
걱정하는 사람의 말이 달개비 꺾이는 소리로 번졌다
더러 흩어 놓은 말들이 구름을 이루고 떠돌다
한낮의 소나기로 다녀갔으나 처마가 깊어 젖지 않았다
한갓되이 울 밖의 소문에 귀를 담그지 않으리
온몸의 감각세포가 문풍지가 되어 달빛만이 우련했다
문고리 거는 기척에 모시나비 한 마리 기웃거리다 가고
내 속을 훑은 기억들이 뒤란의 동백으로 붉어질 때
삿갓을 닮은 섬에서 글을 썼다는 사람을 생각하곤 했다
그이 역시 붓을 들었을 때는 풍향(風向)을 묻지 않았으리
그이의 호흡을 필사한 후박나무가 푸른 소매를 흔들고
바늘땀 뜨듯 골무꽃은 자색 무릎걸음으로 안부를 물었으리
주위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문지방을 넘어선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벼랑 끝이었다 출렁이는 수평이었다
좀 더 수직을 유지하기로 했다
내가 버린 단어들이 수평의 검은 수위를 높였다
물살이 되어 아프게 철썩거렸다
이대로 섬이 잠겨도 좋다고 생각했다
먼 훗날 파도가 그치고 바다가 육지가 되고
내가 살던 방이 검은 지층이 되었을 때
우연히 닿은 어떤 인연이 퍼렇게 박힌 파본(破本) 한 구를
발견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시집『사랑의 습관』 2023년 시인동네 시인선
단추
심강우
송곳니를 윗단추로 쓰는 사자는 완고한 재단사임에 틀림없다. 물소는 조여드는 오늘을 벗어버리고 싶다. 치수를 재는 앞발과 거부하는 뒷발이 가위표로 재단된다. 쌀자루나 풍선처럼 어떤 것들은 한사코 채우면 터지는 법이다. 늘 목을 내놓고 다니기 버릇해 온 물소가 단추를 풀기 위해 용을 쓰느라 눈 속의 실핏줄이 터져 뇌우(雷雨)가 쏟아질 기세다.
들판 가득 수 놓인 색색의 꽃들이나 산중의 아름드리나무, 망망대해 곳곳에 박힌 섬들 또한 하나하나 채워 풍경을 여민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깨 짚어 시침질하는 속 깊은 궁량. 하늘이 겉옷이라면 숲은 어긋난 바람을 단속하는 방한조끼쯤 되려나. 아무리 어두워도 새들은 길을 잃지 않는다. 나무를 나누어 채우는 저 수많은 단추들은 이유없이 흔들리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차라리 지퍼처럼 단순하면 어떨까. 사자는 단추를 끝까지 채우려 들겠지만 물소는 마지막 남은 단추를 채움으로 새끼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빗물에 반지하방 문이 잠긴 것, 거기 사는 일가족이 수장된 건 억지로 채워진 것이다. 치수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과 같다. 이곳에도 노회한 재단사가 많다. 마치 열렬한 사랑처럼 물소를 부둥켜안는 자세를 곧잘 흉내 내곤 한다.
떨어져 나간 단추와 같은 단추가 없어 다른 단추들마저 버려진다. 버려진 단추들은 그때 비로소 눈을 뜬다. 실밥을 부둥켜안고 운다.
시집『사랑의 습관』 2023년 시인동네 시인선
심강우 시인
2013년 〈수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소설, 2017년 《어린이동산》 중편동화 당선했다. 시집 『색』, 『사랑의 습관』 동시집 『쉿!』 『마녀를 공부하는 시간』, 소설집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 『꽁치가 숨쉬는 방』 『우리가 우리를 버리는 방식』, 동화집 『꿈꾸는 의자』, 장편동화 『시간의 숲』 『미래로 간 아이』 등이 있다. 〈눈높이아동문학상〉 〈성호문학상〉 〈동피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