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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46회
때는 가을 7월 그믐날이었는데, 병가(兵家)에서는 그믐날을 기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호자(胡子) 곤(髡)과 심자(沈子) 영(逞), 그리고 陳나라 하설(夏齧)은 모두 대비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吳兵이 쳐들어오자, 영채 문을 열고 나가 싸웠다. 그런데 吳兵은 죄수들이라 기율이 없어 어떤 자는 달아나고 어떤 자는 제자리에 멈추기도 하여 대오가 엉망이었다. 3국의 군사들은 吳兵이 혼란한 것을 보고, 서로 공을 세우려고 대오도 정비하지 않은 채 마구 추격하였다.
공자 광(光)은 좌군을 거느리고 혼란한 틈을 타서 진격하다가, 하설을 만나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렸다. 胡·沈의 두 군후는 당황하여 길을 뚫고 달아나려고 했으나, 엄여(掩餘)가 거느린 우군이 당도하여 가로막았다. 두 군후는 마치 날아가던 새가 그물에 걸린 것처럼, 도망칠 곳이 없어 모두 吳軍에게 사로잡혔다. 胡·沈·陳의 군사들은 죽은 자가 무수하였고, 생포된 자는 8백여 명이었다.
공자 광은 胡·沈 두 군후를 참수하게 하고, 사로잡힌 군사들은 모두 풀어주었다. 군사들은 楚나라 좌군으로 가서 말했다.
“胡·沈 두 군후와 陳나라 대부가 모두 피살되었다!”
허(許)·채(蔡)·돈(頓) 3국의 군사들은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져, 감히 출전할 생각을 못하고 각자 살길을 찾아 달아났다.
왕료(王僚)는 좌우 2군을 합하여 마치 태산이 압도하는 듯한 기세로 楚軍 진영을 향해 돌격하였다. 중군의 원월(薳越)은 미처 진도 펼치지 못해 군사들 절반이 도망치고 말았다. 吳兵이 뒤를 추격하여 공격하니, 시체가 들판에 늘리고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 원월은 대패하여 50리를 달아나서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공자 광은 곧장 운(鄖) 땅으로 가서 초부인(楚夫人)을 모시고 귀국하였다. 蔡나라 사람들은 감히 吳軍에 대항하지 못하였다.
원월이 패잔병을 수습하니, 겨우 절반이 생존하였다. 공자 광이 좌군만 거느리고 초부인을 모시러 운 땅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밤을 새워 달려갔는데, 楚軍이 蔡나라에 당도했을 때에는 吳軍은 이미 운 땅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난 뒤였다. 원월은 더 이상 추격할 수 없음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군명을 받고 소관(昭關)을 지키면서 오자서를 잡지 못해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고, 게다가 7국의 군사를 잃고 군부인(君夫人)까지 놓치는 죄를 지었구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죄만 지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楚王을 뵐 수 있겠는가?”
마침내 원월은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초평왕(楚平王)은 吳軍의 기세가 대단함을 듣고 심중으로 몹시 두려워하였다. 낭와(囊瓦)를 영윤으로 임명하여 양개(陽匄)를 대신하게 하였다. 낭와는 영성(郢城)의 성곽이 낮고 좁다고 하면서 새로운 성을 쌓아야 한다는 계책을 바쳤다. 그리하여 영성 동쪽에 큰 성을 새로 쌓았는데, 현재의 성보다 높이는 7척 더 높고 넓이는 20여 리 더 넓었다.
예전의 성이 기산(紀山) 남쪽에 있기 때문에 기남성(紀南城)이라 부르고, 새로운 성을 영성(郢城)이라 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겼다. 영성 서쪽에 또 하나의 성을 쌓아 맥성(麥城)이라 하고 영성의 우익(右翼)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기남성·영성·맥성이 ‘品’ 字 형태를 이루어 서로 긴밀하게 연락할 수 있게 하였다.
楚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낭와의 공이라고 칭송했는데, 심윤수(沈尹戍)는 웃으며 말했다.
“자상(子常; 낭와)이 덕정(德政)을 펼칠 생각은 않고 헛되이 토목공사만 일으켰구나. 만약 吳軍이 쳐들어오면, 비록 영성이 열 개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낭와는 계보(雞父)에서 패전한 치욕을 갚기 위해, 많은 배를 건조하고 수군을 훈련시켰다. 3개월이 지나 군사들이 물에 익숙해지자, 낭와는 수군을 거느리고 장강(長江)을 따라 내려가 吳나라 경계까지 가서 무위(武威)를 떨치고 돌아왔다.
吳나라 공자 광은, 楚軍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보고를 받고 군대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갔다. 공자 광이 국경에 당도했을 때는, 낭와가 이미 회군한 뒤였다. 공자 광이 말했다.
“楚軍이 무위만 떨치고 돌아갔으니, 변경은 필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공자 광은 몰래 소(巢) 땅을 기습하여 함락하고 종리(鐘離) 땅까지 점령한 뒤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갔다.
초평왕은 두 읍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 마침내 마음의 병을 얻게 되었는데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주경왕(周敬王) 4년에 병이 위독해지자, 초평왕은 낭와와 공자 신(申)을 침상 앞으로 불러 세자 진(珍)을 부탁하고 훙거하였다.
[공자 신은 字가 자서(子西)이며, 초평왕의 서자(庶子)이다.]
낭와가 백극완(伯郤宛)과 상의하며 말했다.
“세자 진은 나이가 어리고, 또 그의 모친은 본래 세자 건(建)의 부인으로 왔으니, 올바른 후사(後嗣)가 아니오. 자서(子西)는 장자(長子)이며 선한 사람이요. 장자를 세우는 것은 명분에도 맞고 선한 사람을 세우면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오. 자서를 왕위에 옹립하면 楚나라가 의지할 수 있을 것이오.”
[제142회에, 세자 진의 모친 맹영(孟嬴)은 진애공(秦哀公)의 누이동생으로서 초나라 세자 건에게 시집왔었는데, 초평왕이 가로챘었다.]
백극완이 낭와의 말을 공자 신에게 고하자, 신이 노하여 말했다.
“만약 세자를 폐한다면, 그것은 군왕의 비행(非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자는 秦나라 여인의 소생으로, 그 모친은 이미 군부인(君夫人)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올바른 후사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적자(嫡子)를 버림으로써 秦나라의 후원까지 잃는다면, 안팎으로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영윤이 이익으로 꾀어 화(禍)가 나에게 미치게 하려고 하니, 그는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다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반드시 그를 죽여 버릴 것입니다!”
공자 신의 말을 전해들은 낭와는 두려워, 세자 진을 받들어 왕위에 즉위하게 하였다. 진(珍)은 이름을 진(軫)으로 바꿨는데, 그가 초소왕(楚昭王)이다. 낭와는 그대로 영윤이 되고, 백극완은 좌윤(左尹), 언장사(鄢將師)는 우윤(右尹)이 되었다. 비무극(費無極)은 세자의 사부(師傅)였기 때문에, 그 은혜를 생각하여 함께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한편, 정정공(鄭定公)은 吳나라에서 초부인(楚夫人)을 모셔갔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보석 비녀와 귀걸이를 바치게 함으로써 세자 건을 죽인 원한을 위로하였다.
[제144회에, 세자 건은 晉나라 순인(荀寅)과 결탁하여 정나라에서 내란을 일으키려 하다가 정정공에게 죽음을 당했었다.]
초부인이 吳나라에 당도하자, 吳王은 서문 밖의 저택을 하사하여 미승(羋勝)과 함께 살게 하였다.
[미승(羋勝)은 초나라 세자 건의 아들이므로, 초부인의 손자이다. 초나라 공실의 성이 미씨(羋氏)이다.]
오자서는 楚王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면서 종일 그치지 않았다. 공자 광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楚王은 그대의 원수인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기뻐해야 할 텐데, 왜 도리어 통곡하는 것입니까?”
오자서가 말했다.
“저는 楚王을 위해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리를 효수(梟首)하여 원한을 갚지 못하고 그가 창 아래에서 편안히 죽은 것이 원통한 것입니다.”
공자 광도 그 말을 듣고 탄식하였다.
호증선생(胡曾先生)이 시를 읊었다.
父兄冤恨未曾酬 부형의 원한을 미처 갚기도 전에
已報淫狐獲首邱 음탕한 원수가 편안하게 죽었음을 들었도다.
手刃不能償夙願 손에 든 칼로 원한을 갚을 수 없었으니
悲來霜鬢又添秋 슬픔으로 귀밑머리만 하얗게 되어 더욱 근심하였도다.
오자서는 초평왕에게 직접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여겨, 사흘 밤을 자지 않고 궁리한 끝에 한 계책을 생각해 내어, 공자 광에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대사(大事)를 거행하려 하시면서, 아직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까?”
공자 광이 말했다.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楚王이 막 죽고 楚나라 조정에는 훌륭한 신하가 없습니다. 공자께서는 吳王에게, 楚나라가 국상을 당하여 혼란한 틈을 타서 군대를 일으켜 楚나라를 정벌하고 패권을 도모하라고 아뢰십시오.”
“만약 나를 대장으로 삼아 보내면, 어떻게 합니까?”
“공자께서는 일부러 수레에서 떨어져 발을 다치십시오. 그러면 吳王은 공자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엄여(掩餘)와 촉용(燭庸)을 대장으로 천거하시고, 또 공자 경기(慶忌)를 鄭나라와 衛나라로 보내 함께 楚나라를 공격하자고 결탁하게 하십시오. 이건 그물 하나로 세 날개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吳王의 죽음은 목전(目前)에 있게 됩니다.”
“비록 세 날개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조정에 있습니다. 나의 찬탈 행위를 보고, 나를 용납하겠습니까?”
[제142회에, 吳王 이매(夷昧)가 병이 위독해지자 계찰에게 군위를 전하려 했는데, 계찰은 사양하고 자신의 식읍인 연릉으로 돌아갔었다.]
“吳와 晉은 지금 화목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吳王에게 계자를 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중원의 틈을 엿보게 하라고 하십시오. 吳王은 큰일을 좋아하고 계략에는 소홀하므로, 필시 그 말을 따를 것입니다. 계자가 멀리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했을 때는, 대위(大位)가 이미 정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다시 폐립(廢立)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 광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오자서에게 절을 하고 말했다.
“내가 자서를 얻은 것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다음 날, 공자 광은 입조하여 왕료에게, 楚나라의 국상을 틈타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왕료가 기꺼이 그 말에 따르겠다고 하자, 광이 말했다.
“이번 일은 제가 마땅히 앞장서야 하는데, 제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발목을 다쳤습니다. 지금 치료를 받는 중이어서, 임무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왕료가 말했다.
“그렇다면 누구를 대장으로 삼으면 좋겠습니까?”
“이 일은 큰일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친족이 아니면 맡길 수 없습니다. 왕께서 선택하십시오.”
“엄여와 촉용이 어떻겠습니까?”
“적합합니다.”
광이 또 말했다.
“예전에 晉과 楚가 패권을 다툴 때는, 吳나라는 속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晉나라는 이미 쇠약해졌고 楚나라는 여러 번 패전했기 때문에, 제후들의 마음이 이반하여 어느 나라를 섬길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북이 다투던 정세가 장차 동쪽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공자 경기를 鄭나라와 衛나라로 보내 그들의 군대를 일으켜 함께 楚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계자를 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중원의 정세를 살피게 하십시오. 그런 후에 왕께서 수군을 거느리고 후원하면 패권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왕료는 크게 기뻐하면서, 엄여와 촉용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楚나라를 정벌하게 하고, 계찰을 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하지만 경기는 보내지 않았다.
한편, 엄여와 촉용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수륙(水陸)으로 병진하여, 楚나라 잠읍(潛邑)을 포위하였다. 잠읍의 대부는 굳게 지키면서 출전하지 않고, 사람을 도성으로 보내 위급을 고하였다. 그때 초소왕이 막 즉위하여, 왕은 어리고 신하들은 서로 헐뜯고 있었다. 吳軍이 잠읍을 포위했다는 보고를 받고서, 조정은 당황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자 신(申)이 아뢰었다.
“吳軍이 우리의 국상을 틈타 쳐들어왔는데, 우리가 출전하여 대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어 저들은 더욱 깊숙이 쳐들어올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좌사마 심윤수로 하여금 육군 1만을 거느리고 가서 잠읍을 구원하게 하고, 좌윤 백극완으로 하여금 수군 1만을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따라 내려가 吳軍의 후방을 끊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吳軍을 앞뒤에서 공격하게 되면, 吳軍 장수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초소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공자 신의 계책대로 두 장수로 하여금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진격하게 하였다.
한편, 엄여와 촉용은 잠읍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첩자가 와서 보고하였다.
“楚나라 구원병이 오고 있습니다.”
두 장수는 크게 놀라,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성을 계속 포위하고 한쪽은 楚軍을 대적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심윤수는 튼튼한 벽을 쌓아놓고 출전하지 않으면서, 군사들을 사방으로 내보내 돌로 보루를 쌓아 吳軍이 땔나무와 물을 얻는 길을 차단하였다.
엄여와 촉용이 놀라고 있는데, 또 탐마(探馬)가 달려와서 보고하였다.
“楚軍 장수 백극완이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강어귀를 차단했습니다.”
吳軍은 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하였다. 두 장수는 병력을 나누어 영채를 두 개 세우고 서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楚軍과 대치하는 한편, 사람을 도성으로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공자 광이 왕료에게 말했다.
“신이 지난번에 鄭나라와 衛나라의 병력을 빌려야 한다고 했던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이라도 사람을 보내면 늦지 않을 것입니다.”
왕료는 경기로 하여금 鄭나라와 衛나라로 가서 병력을 규합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네 공자가 모두 바깥으로 나가게 되고, 공자 광만 국내에 남게 되었다.
오자서가 공자 광에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날카로운 비수(匕首)를 구해 놓으셨습니까? 전제(專諸)를 써먹을 때가 왔습니다.”
공자 광이 말했습니다.
“구해 놓았습니다. 예전에 越王 윤상(允常)이 구야자(歐冶子)로 하여금 검 다섯 자루를 만들게 하여, 그 가운데 세 자루를 吳나라에 바쳤습니다. 첫째는 담로(湛廬), 둘째는 반영(磐郢), 셋째는 어장(魚腸)인데, 어장이 비수입니다. 길이가 짧고 가늘지만, 쇠를 흙처럼 벨 수 있습니다. 선군께서 나에게 하사하셨는데, 지금 비상시에 대비하기 위해 침상 머리에 숨겨 놓고 있습니다. 이 검이 매일 밤 빛을 발하는데, 아마도 신물(神物)이 왕료의 피를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공자 광은 어장검을 꺼내 오자서에게 보여주었다. 오자서가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공자 광이 전제를 불러 어장검을 건네주자, 전제는 공자 광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 뜻을 알아차리고, 탄식하며 말했다.
“왕을 확실히 죽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외사촌인 엄여와 촉용은 멀리 나가 있고, 아들 경기와 숙부 계찰도 사신으로 타국에 가 있습니다. 왕은 고립되어 있어,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일은 생사가 걸린 일이므로, 제가 감히 멋대로 할 수 없고 노모께 아뢰어 허락을 받은 후에야 명을 받들 수 있습니다.”
전제는 집으로 돌아가 노모를 뵙고, 말없이 울기만 했다. 노모가 말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느냐? 공자께서 너에게 무슨 일을 시켰느냐? 우리 집은 공자께 많은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보답해야 한다. 무릇 충과 효는 겸전할 수 없는 법이니, 너는 마땅히 가야 한다. 너는 내 걱정은 말고, 큰일을 이루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도록 해라. 그러면 나는 죽어도 썩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전제가 떠나지 못하고 있자, 노모가 말했다.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으니, 강에 가서 물을 좀 떠 오너라.”
전제가 강에 가서 물을 떠 와 보니, 노모가 보이지 않았다. 전제가 아내에게 물었더니, 아내가 대답했다.
“어머님께서는 피곤하다고 하시면서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마 누워 계실 것이니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전제는 의심이 들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노모는 침상 위에 목을 매어 죽어 있었다.
염선(髯仙)이 시를 읊었다.
願子成名不惜身 자식의 이름 이루고자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니
肯將孝子換忠臣 기꺼이 효자를 충신으로 만들었도다.
世間盡為貪生誤 생을 탐하여 삶을 그르치는 세간의 인간들아
不及區區老婦人 평범한 노부인에게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전제는 한바탕 통곡하고 나서 서문 밖에 어머니를 장례 지냈다. 전제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공자께 큰 은혜를 입고서도 목숨을 바쳐 보답하지 못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소.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나는 공자에게로 가야겠소. 내가 죽더라도 당신 母子는 공자께서 보살펴 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전제가 공자 광을 찾아가 노모가 돌아가신 일을 얘기하자, 광은 전제에게 사과하고 위로하였다. 전제가 말했다.
“공자께서는 연회를 베풀어 吳王을 초청하십시오. 왕이 오기만 하면 일은 십중팔구(十中八九) 성공한 겁니다.”
공자 광은 왕료를 알현하고 말했다.
“저의 집에 요리사가 한 사람 새로 왔는데, 태호(太湖)에서 생선 굽는 법을 배워 그 맛이 기가 막힙니다. 저의 집에 왕림하셔서 맛을 보십시오.”
왕료는 생선구이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내일 형님 집으로 가겠습니다. 너무 많은 비용을 쓰지는 마십시오.”
공자 광은 무사들은 지하실에 매복시키고, 또 오자서로 하여금 무사 백 명을 거느리고 바깥에서 접응하게 하였다.
다음 날 아침, 공자 광은 궁으로 가서 다시 왕료를 청하였다. 왕료는 내궁에 들어가 모후에게 말했다.
“공자 광이 연회를 베푼다고 하는데, 어떤 모략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모후가 말했다.
“광은 항상 마음속에 불만을 가득 품고 있는데, 이번 연회도 결코 호의는 아닐 것입니다. 왜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거절하면 그와의 사이에 틈이 생길 것입니다. 엄중히 대비하고 가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왕료는 갑옷을 세 겹으로 껴입고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공자 광의 집으로 갔다. 왕료를 호위하는 군사들이 길을 가득 메웠는데, 그 행렬이 끝이 없었다. 왕료의 어가가 집 앞에 당도하자, 공자 광이 나와 영접하고 안으로 인도하였다. 왕료가 좌정하자, 광은 곁에 앉았다.
연회석에는 왕료의 친척과 근신들이 가득히 앉아 있었다. 역사(力士) 백 명이 장창을 들고 칼을 차고 왕료의 주위를 지키고, 요리사가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세밀히 검색하였다. 요리사는 음식을 바치고 나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한 채 여전히 무릎걸음으로 물러 나와야 했다.
광은 왕료에게 술을 한 잔 올리고 나서, 갑자기 다친 발이 몹시 아픈 척하며 왕료에게 말했다.
“발에 통증이 심하여 가슴까지 전해집니다. 천으로 단단히 감싸면 통증이 그칠 것 같습니다. 왕께서 잠시 편히 앉아 계시면, 발을 싸매고 곧 다시 나오겠습니다.”
왕료가 말했다.
“형님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광은 발을 절뚝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지하실로 숨어 버렸다.
잠시 후, 전제가 생선구이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역사들이 철저히 수색했다. 하지만 생선 뱃속에 어장검이 들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역사들이 좌우에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전제는 무릎걸음으로 왕료 앞으로 나아갔다. 전제는 생선을 뜯는 척하다가, 비수를 꺼내 왕료의 가슴을 냅다 찔렀다.
비수는 세 겹의 갑옷을 꿰뚫고 등 뒤로 튀어 나왔다. 왕료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역사들이 일제히 당상으로 뛰어올라 칼과 창으로 전제를 마구 찔렀다. 전제는 육니(肉泥)가 되고 말았다. 연회석에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지하실에 숨어 있던 광은 일이 성공한 것을 알고 무사들을 풀어 놓았다. 교전이 벌어졌다. 공자 광 측의 무사들은 전제가 왕료를 죽임으로써 기세가 올랐지만, 왕료의 병사들은 왕이 죽는 것을 보고 기세가 꺾였다. 그리하여 왕료의 병사들은 절반은 죽음을 당하고 절반은 달아나 버렸다. 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들도 오자서가 거느린 무사들에 의해 거의 다 죽거나 달아나고 말았다.
공자 광은 곧장 조정으로 들어가 백관을 모아 놓고 말했다.
“요는 선왕의 유명을 어기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죄를 지었소. 오늘 일은 광이 왕위를 탐해서가 아니라 요의 불의를 미워하였기 때문이오. 광은 임시로 섭정하고 있다가 숙부가 귀국하시면 마땅히 왕위에 떠받들 것이오.”
광은 왕료의 시신을 거두어 예로써 장례지내 주었다. 또 전제도 후히 장례를 지내 주고, 그 아들 전의(專毅)를 상경(上卿)에 임명하였다. 오자서는 신하로 삼지 않고 빈객으로 예우하였다. 시장 관리 피리(被離)는 오자서를 천거한 공으로 대부가 되었다. 광은 백성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빈민들을 진휼하였다. 이리하여 나라 안은 안정되어 갔다.
공자 광은 경기가 바깥에 있는 것이 염려되어, 발이 빠른 자를 시켜 그가 돌아올 시기를 알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강변에 주둔하여 대기하였다.
경기는 귀국하는 도중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달아났다. 공자 광이 병거를 타고 추격하였다. 경기는 수레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나는 듯이 빨라서 말이 따라잡지 못하였다. 공자 광은 궁수들을 불러 활을 쏘게 했지만, 경기가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손으로 막아내 한 대도 맞지 않았다.
공자 광은 경기를 붙잡을 수 없음을 알고, 관리들에게 서쪽 변방을 철저히 방비하라고 명하고 도성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 계찰이 晉나라에서 돌아왔다. 계찰은 왕료의 죽음을 듣고 곧바로 묘를 찾아가서 상복을 입고 곡을 하였다. 공자 광은 친히 왕료의 묘에 가서 계찰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이는 조부와 여러 숙부들의 뜻입니다.”
계찰이 말했다.
“네가 구하여 얻은 것을 어째서 또 양보하느냐? 나라에 제사가 끊어지지 않고 백성들이 왕을 저버리지 않는 한, 왕위에 오른 자가 곧 나의 주군이다.”
광은 더 이상 권하지 못하고 吳王에 즉위하고, 스스로 합려(闔閭)라고 칭하였다. 계찰은 왕위 다툼에 넌더리를 내고 연릉으로 내려가, 죽을 때까지 吳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계찰을 고결한 사람으로 존경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연릉에 장례 지냈다. 후에 공자(孔子)가 친히 가서 ‘유오연릉계자지묘(有吳延陵季子之墓)’라고 비명(碑銘)을 썼다.
사관이 시를 지어 찬탄하였다.
貪夫殉利 탐욕한 인간은 이익을 위해 목숨을 버리니
簞豆見色 단사두갱(簞食豆羹)에도 얼굴빛이 달라지네.
春秋爭弒 춘추 시대엔 다투어 시해가 일어났으니
不顧骨肉 골육도 돌아보지 않았도다.
孰如季子 그 누가 계자(季子)를 아는가.
始終讓國 시종(始終) 나라를 사양하였더라.
堪愧僚光 부끄러울 뿐이로다 요와 광은
無慚泰伯 태백(泰伯) 앞에 부끄럽지 않느냐.
[‘단사두갱(簞食豆羹)’은 대그릇에 담은 밥과 제기(祭器)에 담은 국으로, 소량의 음식을 이른다. 태백(泰伯)은 周나라 태왕(太王)의 장남이다. 태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태백, 둘째는 중옹(仲雍), 셋째는 계력(季歷)이었다.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성덕(聖德)이 있었다. 태왕은 군위를 계력에게 전하여 창에게 이르게 하고자 하였다. 태백은 그것을 알고 중옹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피하였다. 그리하여 태왕은 계력에게 군위를 전하였고, 창에 이르러 천하의 삼분지이를 차지하였다. 그가 문왕(文王)이다. 태백이 아들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중옹이 왕이 되어 吳나라를 개창했다.]
훗날 송나라 유생(儒生)이 논하기를, 계찰이 왕위를 사양했기 때문에 결국 변란이 일어났으므로 그의 어진 이름에 흠이 되었다고 하면서 시를 읊었다.
只因一讓啟群爭 한 번의 사양으로 여러 분쟁이 일어났으니
辜負前人次及情 형제간에 왕위를 전하라는 선조의 명을 저버렸다.
若使延陵成父志 만약 연릉의 계자가 부친의 뜻을 받들었다면
蘇臺麋鹿豈縱橫 고소대(姑蘇臺)에 사슴들이 뛰어다닐 수 있었겠는가?
[고소대(姑蘇臺)는 훗날 합려의 손자 부차(夫差)가 서시(西施)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越王 구천(句踐)에 의해 오나라는 멸망하고 고소대는 폐허가 된다.]
한편, 엄여와 촉용은 잠성(潛城)에서 곤경에 처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빠져나갈 계책을 찾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는데, 홀연 공자 광이 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두 사람은 방성대곡(放聲大哭)하였다. 엄여가 말했다.
“광이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였으니, 필시 우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楚나라에 투항한다고 해도, 楚나라가 우리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집이 있어도 가지 못하고 나라가 있어도 투신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어찌하면 좋을까?”
촉용이 말했다.
“지금 우리는 이곳에서 곤경에 처해 있는데, 언제 벗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차라리 밤을 틈타서 소로를 통해 소국으로 달아나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楚軍이 앞뒤로 포위하고 있어, 마치 새가 조롱 속에 갇힌 것과 같은데, 어떻게 탈출할 수 있겠는가?”
“저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양쪽 영채에 내일 楚軍과 교전할 것이라고 거짓 명을 전하십시오. 그리고 밤중에 우리는 미복(微服)으로 갈아입고 몰래 달아나면, 楚軍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엄여는 그 계책에 찬성하고, 양쪽 영채의 군사들에게 밥을 배불리 먹고 말에게도 여물을 충분히 먹이고서 군령이 내리면 진을 펼칠 수 있도록 대기하라고 명을 전하였다. 엄여와 촉용은 심복 몇 명과 함께 정찰병으로 가장하고, 본영을 탈출하였다. 엄여는 서(徐)나라로 달아나고, 촉용은 종오(鐘吾)로 달아났다.
다음 날 아침, 양쪽 영채에 주장(主將)이 보이지 않자, 吳나라 군사들은 혼란에 빠져 각자 배를 탈취하여 吳나라로 돌아가려고 허둥거렸다. 吳軍이 내버리고 간 병장기가 무수하였는데, 모두 백극완이 거느린 수군들이 노획하였다.
楚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吳나라의 변란을 틈타 吳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백극완이 말했다.
“저들이 우리의 국상(國喪)을 틈타 공격한 것은 義가 아니었소. 그런데 이제 우리가 저들을 본받아서야 되겠소?”
백극완은 심윤수와 함께 회군하여, 吳나라의 포로와 전리품을 바쳤다. 초소왕은 백극완의 공을 높이 사, 포로와 전리품의 절반을 백극완에게 하사하였다. 초소왕은 백극완을 신뢰하여 무슨 일이든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 공경의 예를 다하였다. 비무극은 백극완을 시기하던 끝에, 한 가지 계책을 세워 백극완을 해치려고 하였다.
첫댓글 앞으로 초,오와 오.월간의 기나긴 대결의
시기가 전개될 것이다.
부귀영화가 그렇게 좋다더냐.
호의호식을 넘어 주지육림을 즐기려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