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피로 물든 요하강 (1)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 국민혁명군 제8병단의 태생
국공내전 요심전역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 국민혁명군(국군) 제8병단은 1948년~1949년경 만주 지방 요심전투에서 공산군의 공격에 소멸된 부대이며,
8병단 장령(장성) 등의 간부중 상당수는 반당‧반혁명 분자로 분류되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었습니다.
심지어 2010년대에도 인터넷 검색 등의 방법이나 현지 방문을 통해서도 여러 인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1980년대부터
중화인민공화국과 한국과의 교류과 활발해지고, 대만과의 단교 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수립이후 무역과 인적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요심전역이라 불리우는 만주 내전,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사회주의 계열 조선의용군의 행적은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김무정, 최창익, 김두봉, 박효삼, 윤공흠, 김창만, 박형식, 최용건, 김학철, 이홍광, 박일우, 김웅, 허정숙, 장지락, 방호산 등등이 있다고 합니다.
(※각각 성명은 주관적인 기준과 참가자의 진술에 따라 무작위로 정했기에, 호적상 및 역사기록상의 이름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혁명군 제8병단에 관련된 수백여명에서 수천여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공산주의 이념에 부적합하다고 간주되었는 지 혹은 반당‧반혁명 사건에 연루된 까닭인지 최후에 대해서 자세히 전해진 바 없었습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일제 때 한국 신문은 대대적으로 보도
한국에서 일제 때 발행된 모든 신문들은 만주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반일사건을 일으켰던 인물들을 톱뉴스로 대대적으로 보도하곤 하였습니다...
한국 신문과 기록을 보고,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근래에 들어서는
한국 독립운동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장학량, 장종창, 장작상, 풍옥상, 곽송령, 풍덕린, 오준승, 하주국, 우학충, 왕이철, 만복린, 마점산, 소병문, 정초, 이두, 풍점해, 장옥정, 장전구, 왕덕림. 공헌영, 손명구, 맹은원, 주경란, 위립황, 맹부덕, 양정우, 조상지, 주보중, 이조린 등등의 이름과 행적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국민혁명군 제53군(군단)의 정체
만주에서 소멸된 국민혁명군 제8병단의 주력부대는
제53군입니다.
53군의 기원은 중화민국 시기 만주지방 흑룡강성 일대에서 결성된 부대를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나,
더 멀리 보자면 청나라때 흑룡강 장군 (※청나라 때 '장군', '도통', '통령'이라는 벼슬은 한국의 ‘판서’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휘하의 흑룡강 일대의 군부대가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 시대에 만주지방에 조직되었던
여(여단), 사(사단), 군(군단)을 모체로 하여 수차례의 개편을 거쳐 조직된 군단 급 부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제53군에 관해서는 한국에서 별로 다뤄진 바 없음으로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과 객관적이지 못한 주관에 따라 작성되고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중화민국 시기 군벌간 다툼, 만주지방의 동북왕 장작림의 권력투쟁, 잦은 국경분쟁, 열강의 중국 침략, 일제의 만주 정책 등등에 대해서는
「신불해」, 「길00」 선생님들과, 「중국군벌전쟁」의 여러 책들과 논문들에 자세하게 나오므로, 그러한 것을 참고하면 될 것이며
다만 8병단의 행적과 최후에 대해서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로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의 자료외에는, 중국에서도 잘 다뤄지지 않은 점도 있었습니다.
(※중국측 자료를 쉽게 볼 수 없던 시절에는, 오직 한국의 신문보도가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1920 ~ 1950년대 한국 신문들의 높은 관심
예외적인 자료가 있으니
바로 한국의 신문들이었습니다.
한국의 대중적인 신문들은 1919년 3.1운동 이후 창간 당시부터 만주에서 반일사건이 터질 때마다 대서특필하였기에 잘 보도되어 있었습니다.
지나사변 주요전쟁에서 패전과 졸전으로 악명 높은 부대
중국 역사를 다룸에 있어서..
유명한 사건들이 많지만
‘서안사변’, ‘1942년 중국 대기근’, ‘베트남 전쟁’, ‘임팔 전투’, ‘노구교 사건’, ‘장성전투’를 언급한다면
웬만한 한국 사람들은 한번쯤 들어본 사건들일 것입니다.
이 사건들에 모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부대중 하나가 53군입니다.
미얀마(버마) 방면 전투에 동원된 중국군의 전사 및 부상자 수는 약 20만명 정도
중일전쟁기간중 중국원정군이 미얀마(버마), 인도, 베트남, 태국 방면에 파견되었던 시기 동원된 중국군은 약 40만명 정도였으며, 전사 및 부상자는 약 20만여명밖에 되지 않아
(※일본과 중국의 사망자수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중국 측에서는 미얀마-인도 방면에서 일본군 16만여명 이상이 전사했다는 주장도 있고, 일본측에서도 그 정도 일본군 사망자 수를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 내용 수정합니다.)
중일전쟁을 통틀어 가장 잘 싸운 전투로 꼽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송호회전, 서주회전, 태원회전, 무한회전 등등에서 일본군에게 더 많은 타격을 입혔다고 주장하는 자료도 많습니다.
팔로군이 일본군을 물리쳤는가?
심지어 팔로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중국을 일본 침략자에게서 해방시켰다는 ‘백단대전’ 등등도 있습니다.
중국 CCTV 드라마를 보면 중국의 강토회복은 팔로군이 다한 것으로 나옵니다.
??? (물론 드라마에 그렇게 나온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역덕’들에게 (과거 무슨 드라마가 자주 방송되었고, 유튜브에도 숨은 독립유공자 ‘무다구찌 렌야 장군??’을 비롯해, 정신대 피해자도 많이 나오고, 또 일본에서도 일본군이 많이 죽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등등의 관계로 인하여) ‘임팔전투’라는 전투와 ‘베트남 전쟁’은 상당히 알려진 전쟁이었고,
8병단의 태생이 만주였다는 점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별로 좋게 평가되지 않는 것과는 무관하게
1920~1950년대 한국 신문에 자주 보도된 부대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볼 때
한국과는 무관한 부대가 될 수 없을 수도 있다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요 전투 때마다 전사자만 50%를 넘었다고 하니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 만주에서 출발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관내로 진입했던 병력중 과연 10%라도 탈영 등을 해서 살아서 만주로 돌아갈 수 있었는 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1937년 남경 학살 사건과 8병단은 큰 관계가 없어.
1980년대 무렵.
한 때 한국에서는
중일전쟁 기간인 1937년, 중국의 수도 남경 방어에 동원되어 졸전을 거듭한 부대가 이 부대라는 설도 있었지만
동북군의 여러 부대가 워낙 패전과 졸전에 많이 동원되다 보니 그런 소리가 있었을 뿐
1937년 남경학살사건 당시 남경을 방어하던 부대는 주로 남쪽의 병력으로 구성된 부대였고, 지휘관은 보정군관학교 1기 졸업생었던 당생지 장군이었습니다.
그리고 ‘1937년 남경학살사건’도 중국에서는 잘 알려진 사건이었습니다.
관련 사이트
임팔전투 (일본군 버마방면에서 16만명 전사설의 근거)
https://www.yomiuri.co.jp/special/imphal/#p/2
중국원정군
https://baike.baidu.com/item/%E4%B8%AD%E5%9B%BD%E8%BF%9C%E5%BE%81%E5%86%9B/5722
흑룡강장군(청나라)
https://baike.baidu.com/item/%E9%BB%91%E9%BE%99%E6%B1%9F%E5%B0%86%E5%86%9B/7288626
요심전역
https://baike.baidu.com/item/%E8%BE%BD%E6%B2%88%E6%88%98%E5%BD%B9/1295?fromModule=lemma_search-box
첫댓글 예고 보고 기다렸는데 드디어 ㅎㅎ
잘 읽어 보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당.ㅎㅎ
53군 기원의 역사가 깊군요
예.. 중화민국시기 1911~1945년경 여러차례 조직 개편을 통해 만들어진 군단급 부대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룡기2 혹시 이글 후속은 없나요?
기다리고 있는데 텀이 엄청 길군요
@더벨라지오 여러가지로 정말 죄송합니다..
후속 글 올리려고 노력중입니다. ㅎㅎ
@신룡기2 죄송은 무슨 아닙니다
요즘은 역사 연재물이 드물어
모처럼 재미지게 읽었는데요
하루에 몇번씩 와서 확인 하다가
궁금해서 한번 글남겨 봤어요
답글 확인했으니 천천히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