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에 나는 아홉 번째 수필집 《우린 친구가 맞지》를 출판했다. 나는 이 수필집에 상당한 의미를 둔다. 수필가로 등단하 고 거의 30년이 되면서, 우리 수필의 현주소에 회의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나의 회의를 수필로 써서 꾸민 책이기 때문 에 나는 이 수필집에 나름의 의미를 준다. 1930년대의 우리 수필이나. 2000년대의 수필이나.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의 수필가들도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독자들도 우리 수 필을 읽지 않는다는 것에 무척 실망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 리 수필도 독자들이 재미를 느끼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소설 기법을 가져오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 었다.
이번 수필집에는 그런 시도로 쓴 글을 여러 편 실었 다. 수필 평론가 신재기 교수가 나의 수필을 꼬집어 주었다. “그는 창작 방법의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주장하는 동 시에 실제 작품으로도 보여준다. 그의 수필에는 실험적인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번 작품집에서도 마찬가지 다. 몇몇 작품은 거의 소설에 가깝다. 논란의 소지가 다분 하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는 신선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렇다. 우리 수필의 고질적인 병폐는 관습과 고정된 틀에 갇혀 있다는 점이 아니던가.”
- 신재기(문학 평론가)
나는 수필을 소설 형식으로 쓰려고 했다. 그러려면 이야 기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수필 장르라면 소설과는 차이 가 있어야 한다.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이야기는 내가 꾸 며서 만들더라도 소재는 나의 경험이나. 나와 관련이 있는 데서 가져오자고 했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이어 도 괜찮지만 수필이 모두 허구이어서는 안된다. 나의 경험 에서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꾸며내자. 경험이 바탕인 사실과 환상세계를 조합하는 형식으로 만들어 보자. 이렇게 타협하 여 쓴 글이다.
그러면서 실재의 현상을 표현하기를, 그림처럼 구체적으 로 그려내자. 그림을 보여줌으로 의미를 전달하자. 이야기 형식도 그렇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독자가 재미를 느끼게 함으로 의미 전달도 쉽게 일어나게 해준다
. 나는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만났던 두 인물, 이당과 소정이 미술 공부를 같이 하였다는 점과, 왜정시대에 서로 다른 길 을 걸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우린 친구가 맞지》를 써보았 다. 이 글은 미술사 공부에서 나와 친숙하였던 것을 소재로 가져왔고, 상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듯이, 이야기를 만들어서 소설 형식으로 써 본 글이다. 그림과 이 야기가 은유적으로 의미를 담을 수도 있지만 이당과 소정의 관계를 사실이듯이 표현하여 사회를 비판한 형식의 글이라 고 하겠다.
그러나 어려운 의미를 담아내는 것은 결코 아니 다. 그래서 나는 이런 형식의 글에 매우 만족하였다.
<우린 친구가 맞지>
“우린 친구가 맞지?”
“같이 공부를 했으니 맞다고 해두자.”
“이 친구야, 내가 너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일본 유학도 같이 다녀왔는데, 왜 그리 삐딱해.”
“이당, 자네야 이제 조선 천지를 휘어잡는 대화가이고 나 는 밥도 못 먹는 주제인데 아직도 친구로 대해주니 고맙네.”
“너는 조석진 선생을 외할아버지로 둔 진골眞骨이지만 나는 등을 비빌 곳조차 없는 육두품六頭品이었잖아. 육두품이 사는 것이 어떤 건지 알아?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피눈물 을 얼마나 흘렸는지 알아?”
변관식은 김은호의 한이 서린 듯한 항변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비꼬듯이 대꾸한 것이 조금은 미안했다. 그러다가 한 숨을 쉬면서 말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어. 화가 의 길이 쉽지 않다는 거지, 그래서 뭐랬는지 알아. ‘할아버지 저 밥 먹으려고 화가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을 그리 는 것이 그냥 좋아서입니다.”
“배부른 소리 하네. 난 배가 고파서 그림에 매달렸어. 배 가 고파서.”
“아무리 그렇더라도 일본 그림을 그대로 베껴서 그리는 것 은 너무 하잖아”
“이 사람아, 그림이 팔리고 있잖아. 나는 일본 그림을 그 리는 것이 아니고 팔리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거야. 조선의 혼이 어떻고 하면서 고고한 척 해도 일본풍이라는 욕을 하면서도 내 그림을 사는 사람은 조선 사람이야. 나는 밥을 먹 기 위해서지만 그 사람들은 밥을 배불리 먹으면서도 내 그림을 사는거야.”
“밥, 그것뿐인가.”
“그렇다네.”
“그렇다면 자네만 왜놈 그림을 그릴 것이지 왜 제자들에 게도 그런 그림을 그리게 하는거야. 제자들을 선전과 국전 에 몽땅 입·특선시켜서 이 나라를 일본색 그림으로 도배를 하는 거야.”
“고고한 척 사는 자네가 권력의 맛을 모르겠지. 난 말일세. 미술 모임에 나가면 사람들이 허리를 직각으로 꺾어서 인사 를 한다네.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뒤 꽁무니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 다닌다네. 남자로 태어나서, 그 맛은 정말 황홀하지. 자네야 알 리가 없지.”
“그것도 밥 먹는 것과 관련이 있어?”
“암, 있지. 허리를 굽히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나. 왜 자 존심을 상해가면서 그러는 줄 알아. 그 작자들도 그렇게 해 야 입·특선도 하고, 입·특선을 하는 것이 미술로 밥 먹고 사는 첩경이거든. 다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지. 속으로야 아니꼽기 그지 없겠지. 나도 예전에 스승의 가방 을 들고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몸종처럼 살았거든. 속으로 야 메스껍고 더럽지. 내가 겪은 일인데, 속으로는 나를 욕하 면서 겉으로만 저러는 줄 뻔히 알지. 그렇더라도 그 자들을 입·특선 시켜 주어야 나도 권력을 지킬 수 있거든. 말하자면 공생공사이지.”
“그렇구나.”
“자네도 고집을 그만 부리고 마음을 바꾸게. 유랑객이 되 어 전국을 떠돌아 다니니, 가족들이 개고생 하잖아.”
“알았어. 알았어. 밥 타령, 가족 타령은 그만 좀 하게. 유 랑을 하든 가족이 밥을 굶든 그건 내 일이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어. 그런데 말일세. 자네같은 친일 화가가 일본을 때려 부순 이순신 장군이나 논개의 영정을 그릴 때는 마음에 찔 리는 것이 없었어? 뜨끔하지 않았어.”
“글쎄다.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 보지 않거든. 그래서 모르 겠네만, 나야 영광이지. 그런 인물의 영정을 그리도록 선정 해 주면 나야 고마울 따름이지. 혼으로 따진다면 니보다는 나를 선정해준 사람들이 영혼이 더 없는거지.”
“영정 때문에 자네 제자인 월전月田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말이 있던데.”
이당의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 해졌다. 화가 몹시 나는 표 정이다. 그리고 음성이 높아졌다. “제자가 스승에게 대들다니, 제자가 스승에게, 고얀놈이 지. 스승을 하늘같이 높이 떠 받들어도 시원찮을 일인데, 나는 스승에게 머슴보다 더 험한 일도 수발들면서 그림을 배웠 는데.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세상 참 말세야. 말세.”
“제자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림 그리는 기술을 가르쳐주었지. 기술을. 그 때문에 밥 먹고 사는거야.”
“또 그놈의 밥 타령이야. 스승은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 이 아니야. 정신을 가르쳐 주는거야 올바른 정신을 넣어주 는거야.”
이당은 못 들은 척 했다. 그리고 말을 돌렸다.
“우린 친구가 맞지?”
“그럼.”
“자네도 이제 팔리지도 않는 칙칙한 그림을 그만 그리게. 요즘 사람은 밝고 화사한 그림을 좋아한다네. 그렇게 그려야 팔리는거야. 친구라서 내가 한 마디 해주는거야.” “고맙네, 우리가 죽고 난 뒤에는 어떨가. 함 봄세.”
세월이 흘렀다. 이당도 죽었고, 소정 변관식도 고인이 되 었다. 2008년에 친일 인명사전을 만들 때 이당은 화가로서 맨 먼저 이름을 올렸다. 밥 타령을 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했던 그의 그림 가격은 곤두박질 쳤다. 2018년 5월의 미술품 옥 션에서 소정 변관식의 그림은 1년 전에 1억 하던 그림이 8 억 5천 만 원에 팔렸다. 그들이 죽고 나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소정의 삶이 백 번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살아생전에 호의호식하면서 사는 것 이 좋을까. 죽어서 그림 값이 하늘을 찌르더라도 살아서 개 고생하는 것이…. 햄릿처럼 선택하지 못하는 내 삶을 돌아 보면 소정에게 부끄럽다. 앞으로는 소정처럼 살아야지. 마음은 그러한데, 그 마음이 다잡아지지도 않는다.
(2021, 소소담담). - 《우린 친구가 맞지》, <우린 친구가 맞지> 전문全文
나는 수필집 《우린 친구가 맞지》에서 1장章은 모두 소설 형 식으로 쓴 수필로 채웠다. 여기서 사용한 수필의 소재는 미 술사에서도, 문학 작품에서도, 역사적 사실에서 가져 온 것 도 있다. 소재는 사실이라기 보다는 이미지 형태로 보관되 어 있던 것이다. 내 상상력으로 가공하여 이야기 형식으로 만들었다.
<논개가 유디트를 만나다>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유디트를 논개와 대비하면서(둘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형식을 취했다.) 유디트도 논개처럼 나라를 구한 여인이지만, 팜므파탈적인 여인으로 표현하였음과 대비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논개 이야기가 얼마나 비논리적으로 가공하였는가 를 비판적으로 나타내려 하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허구 의식을 꼬집으려 했다. 수필에서 단순히 독백만이 아 닌, 사회비판 형식의 글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 논 리적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글쓰기는 지적 수필로 나아가는 지름길임을 보여주려 하였다.
‘지적’이라고 하면 무조건 ‘재 미 없다’는 선입견을 지울 수는 없을까. 소정과 이당은 한 시대를 같이 살았고, 같은 한국화풍의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이 두 사람이 만나서 내가 수필에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쓴 것은 순전히 나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허구 이지만 전혀 엉뚱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수필에서도 이 정 도의 허구는 상상력이라는 겉옷을 입혀 허용하자는 의도도 있었다.P275밑에서 첫째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