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새 오래전 이야기다. 1980년대 초 군대 동기인 최대길을 오랜만에 만났더니, 며칠간 몹시 아팠다고 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오는 전화도 못받고 끙끙 앓다가 나은 뒤 서울에 사는 큰 누나를 만났더니 다음과 같이 묻더란다. “어디 여행갔었어? 궁금해서 전화를 했더니 전화도 안 받고,” “누나의 말을 듣고 나자 혼자서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혼자 아파서 무슨 일이 생겨도 여행 간 줄 알지 않겠어” 오래전 일인데, 친구보다도 더 오래전 사람으로 백 년 전에 이 세상을 뜬 프란츠 카프카의 글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언제까지나 독신자로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인 모양이다. 나이가 들어 하룻밤 정도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싶을 때, 그는 품위를 지키면서 함께 어울려 주기를 애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몸이 아프게 되면 자신의 침대 한구석에서 몇 주일씩이라도 텅 빈 방을 바라보아야 하고, 언제나 사람들과 문 앞에서 작별을 해야 할 뿐, 한 번도 자신의 아내라는 사람과 나란히 층계를 올라올 수 없고, 자신의 방 안에 있는 앞문들은 단지 낯선 집 안으로 통해 있을 뿐이며, 늘 한 손에는 자신의 저녁거리를 들고 집으로 와야 하고, 낯선 아이들을 놀라워하며 바라보아야 하지만 "나에겐 아이들이 하나도 없구나"하고 줄곧 되풀이해서도 안 되며, 젊은 시절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두 독신자들을 따라 외모와 태도를 꾸며 나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그것은 괴로운 일일 것이다. 실제로 오늘 혹은 또 장래에 누구나 그런 형편이 될지도 모른다. 자신이 살아 있는 몸으로, 정말로 현실적인 머리와 또 이마를 손바닥으로 철썩 칠 수 밖에 없다.”
프란츠 카프카의 <독신자의 불행>이라는 짧은 글이다. 2024년 현재 우리나라만 해도 혼자 사는 사람이 일천만 세대가 넘었다는데 그 <독신자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카프카 역시 독신자로 살다가 불행한 삶을 마감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독신자의 불행을 체득하면서 살다가 가야 한다. 어디 인간만 그럴까,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사물들이 영문도 모르고 혼자서 태어났다가 영문도 모르고 혼자서 가는 것이니까? 돌아가는 것을, 왔던 곳, 즉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여행에서 돌아와 가끔씩 박정현의 <도착>을 듣는다. 인생이 떠남과 돌아옴, 그리고 다시 떠남이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기어코) 떠나가는 내 모습 저 멀리서 바라보는 너 안녕 (나 이제) 깊은 잠을 자려 해 구름 속에 날 가둔 채 낯선 하늘에 닿을 때까지
낮 밤 눈동자 색 첫인사까지 모두 바뀌면 추억 미련 그리움은 흔한 이방인의 고향 얘기
잘 도착했어 제일 좋은 건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아 차창 밖 흩어지는 낯선 가로수 한 번도 기댄 적 없는 잘 살 것 같아 제일 좋은 건 아무도 날 위로하지 않아 눌러 싼 가방 속 그 짐 어디에도 넌 아마 없을 걸
어쩌다 정말 가끔 어쩌다 니가 떠오르는 밤이 오면 잔을 든 이방인은 날개가 되어 어디든 가겠지 저 멀리 저 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