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신을 날마다 자주 비춰 보아야 할 “하느님의 거울”
2025.2.9.연중 제5주일 이사6,1-2ㄱ.3-8. 1코린15,1-11 루카5,1-11
날마다 “나는 누구인가?” 묻는 자가 수도자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물어야 질문입니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등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답은 하나 “주님을 찾는 주님의 사람이다!”입니다. 오늘 세 독서는 모두가 주님을 만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부들이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음을 봅니다.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내용입니다. 호숫가에서 군중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수님은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게 한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우연스런 장면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은 시몬을 염두에 두셨음이 분명합니다.
새삼 우리 삶에 결코 우연은 없고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 있음을 깨닫는 장면입니다. 시몬의 배에는 예수님과 시몬 단 둘 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신후 먼저 시몬에게 말을 건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같습니다. 깊은 데가 어디 일까요? 깊은 데는 저 밖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깊은 데’서 주님과 함께 삶의 그물을 내려 ‘삶의 의미들’을 잡아 올려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신 곳은 그 어디나 깊은 데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시몬의 허무감이 물씬 배어있는 대답입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고백이 그대로 시몬의 인생고백처럼 느껴집니다. 평생 애써온 삶이지만 허무하고 무의미한 인생이었다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 외치던 허무주의자 코헬렛의 탄식도 생각납니다. 주일미사를 마치면서 드리는 시편 127장 말씀이 연상됩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로다.”
바로 여기에다 더하고 싶은 행복기도 다음 대목입니다. 늘 되뇌어도 늘 새롭고 좋은 고백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여기에 하나 더하고 싶은 다짐의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주님과 함께 하는 충만한 기쁨의 삶이 바로 꽃같은 봉헌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시몬이 주님을 만난 순간의 기쁨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곧 이어 스승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자 어부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시몬의 허무가 충만한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 주님을 발견함과 동시에 참나를 발견한 시몬입니다.
참으로 시몬이 오매불망 간절히 찾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평생 고기잡이 하면서 늘 허기에 가득했던 시몬이 삶의 참의미이신 주님을 만나자 허무의 빈자리는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찼던 것입니다. 시몬의 고백이 충격적 감동을 줍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친 죄인으로서 자신의 참모습을 본 시몬입니다. ‘스승님’의 호칭에서 ‘주님’이란 호칭으로 바뀝니다. 아마도 시몬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주님 사랑의 기적 체험이 됐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 시몬입니다. 주님을 만남과 동시에 이뤄졌을 회개로 시몬의 마음은 깨끗해지고 겸손해졌을 것이며, 그 마음 자리는 주님의 기쁨과 평화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대로 이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만난 우리의 마음도 그러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빛이신 주님을 만날 때 사라지는 마음 속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입니다. 인생 허무와 무의미에 시달리며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을 당신께 인도하는 사람이 될 것이란 예언입니다. 시몬을 위시하여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평생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구원의 출구’ 예수님을 만나 탈출하여 ‘삶의 방향’인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요 상상이지만 만약 이 어부들이 ‘삶의 의미’이자 ‘삶의 방향’인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또 우리가 주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우연은 없습니다. 만약? 이란 가정적 질문은 다 부질없는 공허한 질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지금 이 자리 까지 ‘신의 한 수’처럼 인도해주셨음을 믿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심기일전 분발하여 더욱 주님을 충실히 따르며 부여된 사명에 충실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고 오늘 여기서부터만 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 체험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한 이사야의 고백에 이어 전개되는 대화도 흥미진진합니다. 미사전례중 “거룩하시다”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큰 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시몬처럼 이사야도 주님의 거울에 비친 죄인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며 회개와 동시에 마음 역시 순수하고 겸손해졌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듯 ‘주님의 거울’에 내 모습을 자주 비춰보는지요?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거울에 내 마음의 얼굴을 비춰보는 시간입니다. 이어 주님과 주고 받는 대화도 그대로 미사은총을 연상케 합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이사야가 주님을 만나 깨끗해진 것처럼, 미사은총으로 죄는 없어지고 죄악은 사라져 깨끗해진 우리를 염두에 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주님을 기쁘게 했을 이사야의 참 통쾌한 응답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 말씀 잊지 않고 평생 마음에 담고 고백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은 파견에 따른 사명을 통해 완성됩니다. 사명 수행을 위해 주님의 부르심과 파견입니다. 이어 바오로 사도의 진솔한 소명체험 고백이 감동을 줍니다. 역시 ‘주님의 거울’에 환히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겸손과 순수의 사람 바오로입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는데,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이런 비상한 소명체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소명체험이 대부분입니다. 아니 평범의 비범입니다. 하나하나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닌 대체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존재로 주님께 불림받은 우리들입니다. 유대인 랍비이자 신비가 여호수아 헷쉘의 말이 생각납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무의미하고 허무한 무명의 ‘헛것’으로 살다가, 주님께 불림받음으로 참존재로, 거룩하고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마음의 얼굴을 주님의 거울에 비춰보면서 우리의 유일무이한 소명을, 성소를 새롭게 확인하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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