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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南國]의 현지인[現地人]들이 말하는 대륙[大陸]의 역사[歷史] 조선사[朝鮮史]
우리의 역사[歷史]가 반도[半島]의 역사[歷史]인가 ? 아니면 대륙[大陸]의 역사[歷史]인가 ? 하는 논제[論題]는 다시 재론[再論]할 가치도 없는 말이다.
역사[歷史]라는 것은, 당시대[當時代]의 일들을 기록[記錄]한 역사서[歷史書]의 원전[原典]을 바탕으로,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들을 말하고 배우는 것이다.
현재[現在] 공교육[公敎育]을 통하여 한국[韓國]의 국민[國民]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국사[國史]라고 하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우리 선조[先祖]들이 남겨놓은 역사서[歷史書]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왜곡[歪曲]과 조작[造作]과 변조[變造]된 식민잔재[植民殘在]의 산물[産物]일 뿐이다.
우리 역사서[歷史書]에 대한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악랄[惡辣]하고도 음흉[陰凶]한 흉계[凶計]속에서 살아남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 그 사서[史書]에서 말하고 설명하는 내용들을 따라, 그 지역[地域]들을 찾아서 현지[現地]를 살펴보면, 우리의 선대[先代]들이 남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모두 사실[史實] 이었음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또한 수[數] 천년[千年]을 이어 내려온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후손[後孫]들이 그 지역[地域]에 살고 있으면서, 오늘도 우리의 역사[歷史]를 잊지 않고 가슴속에 깊이 담고 있으며, 옛 우리의 역사[歷史]인 선조[先祖]들의 역사[歷史]를 잊지 않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歷史]의 맥[脈]은 오늘도 생생[生生]히 살아서 본래의 그 지역[地域]에서 도도[滔滔]히 흐르고 있으니, 왜곡[歪曲]되지 않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다. 어찌 티끌만큼이라도 거짓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
허[虛]와 실[實]을 구분하지 못하고, 도[道]와 사[私]를 분별[分別]하지 못하는 한국[韓國]의 오늘날 실상[實相]은, 사이비[似而非]한 식민사학[植民史學]을 국사[國史]라고 가르친 그 폐단[弊端]이 현실[現實]로 나타나는 것이다. 학문[學文]의 근본[根本]이 역사[歷史]에 기인[起因]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으며,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근본[根本]이 역사[歷史]를 따라 흐르는 선조[先祖]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
사이비[似而非]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인 시아비아[是我非我]의 식민사학[植民史學]은,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하고, 조선사[朝鮮史]를 비하[卑下]시키며,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장구[長久]한 역사[歷史]의 맥[脈]을 끊어 버리고, 조선사[朝鮮史] 후예[後裔]들의 정신[精神]과 역사[歷史]에 대한 혼[魂]과 맥[脈]을 무력화[無力化] 시켜서, 영원[永遠]한 식민[植民]의 지배[支配]를 이루기 위하여 만들어진 가공[加工]의 쓰레기만도 못한 추잡[醜雜]한 식민[植民]의 잔재물[殘在物]일 뿐이다.
또한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지우기 위하여 거짓과 위선[僞善]과 사악[邪惡]함으로 포장된 그 추잡하고 더러운 산물[産物]일 뿐이며, 그러한 것을 역사[歷史]라고 가르치는 이러한 행위[行爲]는, 나라의 재앙[災殃]이며, 국민[國民]의 불행[不幸]이며, 현재[現在]와 미래[未來]에, 나라를 망국[亡國]으로 치닫게 하는 지름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와, 우리의 선대[先代]인 우리 자신들의 조상[祖上]님들이 남긴 역대[歷代] 문집[文集]속에서 말하고 설명하는 수[數] 천년[千年]전 당시[當時]의 생생[生生]한 모습들이, 지금도 대륙[大陸]의 남방[南方] 지역[地域]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남아서, 그 역사[歷史]의 숨결을 간직하고, 선대[先代]들의 전통[傳統]을 지키며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傳]해지고 있다.
조선[朝鮮]의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에 속했던 탐라[耽羅]에는, 조선[朝鮮]의 군마[軍馬]로 한라산[漢拏山] 기슭을 누비던 명마[名馬]와, 그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천하[天下]의 명마[名馬]들이, 오늘도 그 지역[地域]에서, 한라산[漢拏山]의 정기[精氣]를 담고 흘러내리는 물을 마시며, 굽이굽이 펼쳐진 그윽한 초원[草原]을 달리면서, 한가로이 평원[平原]에서 풀을 뜯으며 뛰어 놀고 있다.
양이[洋夷]와 결탁한 일제[日帝]와,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에 의하여, 조선[朝鮮] 팔도[八道]의 광활[廣闊]한 대륙[大陸]이 중국[中國]으로 둔갑[遁甲]하는 그 전말[顚末]도,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찾으면서, 서서히 들어나고 있다. 오늘날의 중국[中國] 광동[廣東]이 어찌 명[明]과 청[淸]나라의 광동[廣東] 지역[地域]이 될 수 있겠는가 ?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명[明]과 청[淸]나라의 광동[廣東] 지역[地域]은, 지금의 광동[廣東] 지역[地域]으로부터, 서[西]쪽으로 5000리[五千里]를 지나가야 한다. 지금의 광동[廣東] 지역[地域]은, 조선[朝鮮]의 영남[嶺南] 지역[地域]이며,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의 지역[地域]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 삼한[三韓]의 지역[地域]이다. 역사서[歷史書]를 따라서, 이를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 할 수 있는 역사[歷史]의 유적[遺跡]이, 대륙[大陸]의 남방[南方] 지역[地域]인 옛 탐라국[耽羅國]의 서남방[西南方] 지역[地域]에,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명[明]나라의 마지막 황제[皇帝]인 남명[南明]의 영력제[永曆帝]인 영명왕[永明王]을 보필하여, 명[明]나라를 일으키려 했던 이정국[李定國]은, 영명왕[永明王]이 살해[殺害]되자 그 자신도 분노[憤怒]를 이기지 못하고 병[病]이 들어 죽었다.
남명[南明]의 영명왕[永明王]을 받들고 이정국[李定國]이 활동했던 지역[地域]이 운남[雲南], 광동[廣東], 광서[廣西] 지역이다. 이정국[李定國이 죽자, 처음에 그를 광동성[廣東城] 동[東]쪽에 장사[葬事]지냈다가, 후[後]에, 순천부[順天府] 노구교[蘆溝橋]의 서[西]쪽 10리 지점에 있는 호가항[胡家港]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고 당시[當時]의 기록[記錄]은 전[傳]하고 있다.
반강[盤江]에서 패[敗]한 이정국[李定國은, 광동[廣東]으로 달아나서 죽었다. 연원직지[燕轅直指]의 유관록[留館錄], 노구교기[盧溝橋記]에서는, 당시[當時]의 이러한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당시[當時]에 청[淸]나라의 실정[實情]을 보고 들은 다른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도, 모두 다르지 않다. 다만 오늘날의 왜곡[歪曲]된 역사[歷史]에 대한 해설[解說]만이,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감추고 거짓과 변조[變造]된 위선[僞善]의 역사[歷史]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중국[中國] 대륙[大陸]의 최[最] 서남방[西南方] 지역인 맹랍현[勐腊县]에는, 명[明]나라 마지막 남명[南明] 황제[皇帝]인 영력제[永曆帝], 영명왕[永明王]을 보필했던 이정국[李定國]의 사당[祠堂]이 있다. 이 지역[地域]의 토착민[土着民]들은 이정국[李定國]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맹랍현[勐腊县]은 베트남, 태국, 라오스, 미얀마, 중국[中國]등의 국경[國境]이 교차하는 지역[地域]이다. 오늘날 티벳트의 설산[雪山]에서 뻗어내린 대[大] 산맥[山脈]이 남[南]쪽으로 2천리를 내리달려 열대[熱帶] 기후[氣候]속으로 들어간다. 이 지역은 티벳트에서 시작된 설산[雪山]의 대산맥[大山脈]이 동남아[東南亞]와 뱅골만까지 내리뻗는 중간 지역[地域]에 위치[位置]하여, 이 산맥[山脈]을 따라 위치[位置]하고 있는 지역[地域]들은, 굽이굽이 감도는 태산[泰山] 준령[峻嶺]속에 들어 있다.
기후[氣候]는 고온[高溫] 다습[多濕]하고 열대[熱帶] 식물과 온대[溫帶] 식물들이 혼합[混合]되어 골고루 분포[分布]되어 자라고 있다. 남아 있는 옛 가옥의 구조[構造]는 고온[高溫]의 습[濕]한 기운을 피하기 위하여,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짓는 형태[形態]이다. 오늘날 동남아[東南亞] 지역[地域]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택의 구조[構造]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를 읽어 내리다 보면, 조선[朝鮮]의 남방[南方] 지역[地域]인 영남[嶺南]과 전라도[全羅道], 제주[濟州] 지역[地域]에는, 고온다습[高溫多濕]한 기후[氣候]와 그러한 풍토[風土]로 인하여 생기는 장기[瘴氣]의 독[毒]에 대한 기록[記錄]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넘쳐나는 것은, 조선[朝鮮] 팔도[八道]의 남국[南國]이라고 불리던 지역[地域]은, 바로 이 맹랍현[勐腊县]과 같은 기후[氣候]와 풍토[風土]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정국[李定國]의 사당[祠堂]은, 맹랍현[勐腊县]의 서[西]쪽 산[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사당[祠堂]은 오래되고 퇴색[退色]되어 있어 볼 것이 없다. 사당[祠堂]의 건축[建築]양식은, 조선[朝鮮]의 고건축[古建築] 모양을 따르면서, 지붕은 동남아[東南亞] 지역[地域]의 형태[形態]를 지니고 있다. 이정국[李定國]의 사당[祠堂]은, 운남성[云南省] 중점문물보호단위[重点文物保护单位]로 지정[指定]되어 있다.
현지[現地]의 설명에 의하면 이정국[李定國]이 죽어서 장사[葬事]를 지낸 묘[墓]의 유지[遗址]에 이 사당[祠堂]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現在] 이 사당[祠堂]은, 맹랍민족영웅이정국사[勐腊民族英雄李定国祠],우칭한왕묘[又称汉王庙] 시제사명진왕이정국적사당[是祭祀明晋王李定国的祠堂]이라는 명칭[名稱]을 붙여 부르고 있다. 이정국[李定國]에 대하여 한왕[漢王]이라는 존칭[尊稱]을 쓰는 것이 다소 의아[疑訝]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당시[當時]에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을 보도라도, 명[明]나라를 한[漢]나라로 부르고 있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있음을 볼 때, 의아[疑訝]스럽게만 생각 할일은 아닐 것이다.
연원직지[燕轅直指]
유관록[留館錄]
노구교기[盧溝橋記]
崇禎十七年四月二十九日。李自成焚城闕。出阜成門。西奔。五月初一日。吳三桂入都。直從蘆溝橋。逐賊而西。連敗之。至固關班師 [중략]
숭정[崇禎] 17년 4월 29일에 이자성[李自成]이 성궐[城闕]을 불사르고 부성문[阜成門]으로 뛰어나가 서[西]쪽으로 도망하였는데, 5월 1일에 오삼계[吳三桂]가 도성[都城]으로 들어와서 곧장 노구교[蘆溝橋]로부터 적을 쫓기 시작, 서[西]쪽으로 향하면서 연달아 패멸[敗滅]시키고 고관[固關]에 이르러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었다. [중략]
順治二年。流賊張獻忠據四川西充縣。逞殺無辜。三桂與肅王豪格討殺之。其養子孫可望奔滇中。餘黨尙鬧川中。三桂仍駐漢中 [중략]
순치[順治] 2년에 유적[流賊] 장헌충[張獻忠]이 사천[四川] 서충현[西充縣]을 거점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살해하자, 오삼계[吳三桂]가 숙왕[肅王] 호격[豪格]과 함께 그들을 쳐 죽였다. 장헌충[張獻忠]의 양자[養子] 손가망[孫可望]은 전중[滇中]으로 도망하고 남은 무리가 오히려 천중[川中]을 시끄럽게 하자, 오삼계[吳三桂]는 그대로 한중[漢中]에 주둔하였다. [중략]
五年。大同鎭摠兵姜瓖與楡林,寧夏,甘肅三鎭同時叛。全秦震恐。秦督孟喬請師於三桂。三桂倍道來。破姜瓖於楡林。時孫可望旣入滇。勢復振。進攻川陜。三桂入屯川南 [중략]
5년에 대동진[大同鎭] 총병[摠兵] 강양[姜瓖]이 유림[楡林], 영하[寧夏], 감숙[甘肅] 세 진[鎭]과 함께 동시에 반란[叛亂]을 일으키자 온 진[秦] 지역이 떨며 무서워했다. 진독[秦督] 맹교[孟喬]가 오삼계[吳三桂]에게 지원병을 요청하자, 오삼계[吳三桂]는 급히 달려와 강양[姜瓖]을 유림[楡林]에서 파멸시켰다. 그때 손가망[孫可望]이 이미 전[滇]으로 들어가 형세를 다시 떨쳐 천협[川陜]을 진격하니, 오삼계[吳三桂]는 천남[川南]에 들어와 주둔하였다. [중략]
可望部下李定國。勇悍剛直。而目不知書。有金公趾者知其可動。乃取三國志。爲之誦說。斥可望以董卓,曺操。期定國以武侯。定國大感悟 [중략]
손가망[孫可望]의 부하 이정국[李定國]은 용맹스럽고 강직[剛直]했으나 글을 알지 못했다. 김공지[金公趾]라는 자가 있어, 그가 동요할 수 있는 인물임을 알고 곧 삼국지[三國志]를 구하여 그를 위해 강론하되, 손가망[孫可望]을 동탁[董卓], 조조[曹操]에 비유해 배척하고 이정국[李定國]은 제갈량[諸葛亮]으로 기대하니, 이정국[李定國]이 크게 깨달았다. [중략]
時永曆在安隆。定國入安隆。奉永曆入雲南。可望進擊定國。定國迎擊大敗之。可望走降於湖南經略洪承疇。後入都。淸人封可望爲義王 [중략]
당시[當時] 영명왕[永明王]이 안륭[安隆]에 있었는데, 이정국[李定國]은 안륭[安隆]으로 들어가 영명왕[永明王]을 받들고 운남[雲南]으로 들어갔다. 손가망[孫可望]이 이정국[李定國]을 공격[攻擊]하니, 이정국[李定國]은 그를 맞아 쳐서 대패시켰다. 손가망[孫可望]은 달아나 호남경략[湖南經略] 홍승주[洪承疇]에게 항복[降伏]했는데, 그 후 도읍[都邑]에 들어가니 청[淸] 나라에서 손가망[孫可望]을 봉[封]하여 의왕[義王]으로 삼았다. [중략]
可望具言雲南可取狀。三桂欲自以爲功。上疏請進兵雲南。遂敗定國於盤江 [중략]
손가망[孫可望]은, 운남[雲南]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오삼계[吳三桂]를 본받아서 스스로 공[功]을 세우려 했다. 그는 운남[雲南]으로 진군할 것을 상소[上疏]하여 청[請]하고 드디어 이정국[李定國]을 반강[盤江]에서 패멸[敗滅]시켰다. [중략]
定國走廣東。聞三桂殺永曆。哀憤成疾死。始葬于廣東城東。後移于順天府蘆溝橋西十里胡家港 [중략]
이정국[李定國]은 광동[廣東]으로 달아나서 오삼계[吳三桂]가 영명왕[永明王]을 살해[殺害]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프고 분노[憤怒]한 끝에 병[病]이 나서 죽었다. 처음에는 그를 광동성[廣東城] 동[東]쪽에 葬事하였다가 뒤에 순천부[順天府] 노구교[蘆溝橋]의 서[西]쪽 10리 지점에 있는 호가항[胡家港]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중략]
廣東初葬之地。至今寸草不生。人過之。必拜云。出於忘其名庭聞錄。胡家港。距此不遠。欲往觀。而恐日暮城閉。未果 [중략]
광동[廣東]의 처음 장사[葬事]하던 땅은 지금 한 치의 풀도 나지 않고,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면 반드시 절을 한다고 하는데, 이는 지은이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정문록[庭聞錄]에서 나온 얘기다. 호가항[胡家港]이 여기서 멀지 않으므로 가 보려 했으나 날이 저물어서 성문[城門]이 닫힐까 염려하여 그만두었다. [중략]
橋東有一小城以護橋。門楣刻曰拱極城 [중략]
노구교[盧溝橋] 다리 동[東]쪽에 한 자그마한 성[城]을 두어 다리를 보호하게 하였는데 문미[門楣]에 ‘공극성[拱極城]이라 새겼다. [중략]
毛奇齡集。橋爲南北咽喉。崇禎中。流賊窺畿南。當事者議築此城。設把總。隷兵鎭之。城祗二門。通南北往來。題門者。南曰永昌。北曰順治。實頌之。非有他也 [중략]
모기령[毛奇齡]의 문집[文集]에, “노구교[盧溝橋]는 남북[南北]의 인후[咽喉]가 된다. 숭정[崇禎] 연간에 유적[流賊]이 기내[畿內] 남[南]쪽을 엿보므로 당사자[當事者]들이 의논[議論]하여, 이 성[城]을 쌓은 다음 파총[把摠]을 설치하고 군사[軍士]를 예속시켜서 그들을 진압[鎭壓]하게 하였다. 성[城]에다 문[門] 둘을 내어 남북[南北]으로 오가는 길을 통[通]하고, 남문[南門]에는 영창[永昌], 북문[北門]에는 순치[順治]라고 했으니, 실은 칭송[稱頌]하는 뜻이요,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략]
後李賊僭號。改元永昌。本朝建號順治。門讖之先兆如此云云。城周不過六七里。亦有人居焉。穿城而還。別取路入外城廣安門。沿途所見。忙未悉記 [중략]
그런데 뒤에 이적[李賊]이 참람[僭濫]하게 연호[年號]를 영창[永昌]이라고 고쳤고, 본조[本朝] 청[淸] 나라가 순치[順治]라는 연호[年號]를 삼았으니, 문[門] 이름의 비결[秘訣]이 앞서 조짐[兆朕]을 보인 것이 이와 같다. 하였다. 성[城] 둘레는 6 ~ 7리[六七里]에 불과한데 역시 인가[人家]가 있다. 성문[성문]을 통해 돌아왔으나 별도의 길을 택해서 외성[外城]의 광안문[廣安門]으로 들어왔다. 연도[沿途]에서 본 것들은 바빠서 다 기록[記錄]하지 못했다. [중략]
연도기행[燕途紀行]
초십일갑신[初十日 甲申]
晴。留。金汝輝來謁。細問燕京事情。答以帝御新搆天淸宮。太后御慈寧宮正宮。皇后御翠華宮 [중략]
맑음. 머물렀다. 김여휘[金汝輝]가 와서 뵈었다. 연경[燕京] 사정[事情]을 자세히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황제[皇帝]는 새로 지은 천청궁[天淸宮]에 있고, 태후[太后]는 자령궁[慈寧宮]에 있으며 정궁 황후[正宮皇后]는 취화궁[翠華宮]에 있습니다. [중략]
右眞王子。親王率精甲萬餘出師。與福建鄭芝龍子進功對壘未還。進功自明朝據九江口海島作孼。是海賊也。擁甲百萬。割據福建一半。欽戴永曆。不順淸朝。識者憂之[중략]
우진왕자친왕[右眞王子親王]은 정갑 만여 명을 거느리고 출사[出師]하여 복건[福建]에 있는 정지룡[鄭芝龍]의 아들 정진공[鄭進功]과 대진[對陣]하여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정진공[鄭進功]은 명[明] 나라 때부터 구강[九江]의 어귀 해도[海島]에 웅거하여 노략을 일삼았으니, 해적[海賊]입니다. 백만[百萬]의 갑병[甲兵]을 옹유[擁有]하고 복건[福建]의 반을 차지하여, 영력[永曆] 영명왕[永明王]을 공경하여 받들고, 청[淸] 나라에 순종하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근심합니다. [중략]
精甲萬餘隷洪承疇。與永曆對壘廣東。三年一替。又分把要害。亦將半萬。以此細算。燕京精甲。出師累萬 [중략]
정갑 만여 명은 홍승주[洪承疇]에게 예속시켜 영력제[永曆帝]와 광동[廣東]에서 대치시키고, 3년에 한 번씩 교대케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요해처[要害處]에도 5000정도를 나누어 배치시켰으니, 이렇게 자세하게 계산하고 보면 연경[燕京]에서는 정갑 수만 명을 밖에 내보내고 있습니다. [중략]
永曆建號雲貴。只保境土。難望進取。洪承疇開府長沙。經略軍馬。對壘朱氏三吳楚越。專征伐擅生殺。吳三桂率本部遼蒙萬甲。開王府于漢中。摠督軍馬。對壘流賊兩川秦隴。專征伐擅生殺。其權擬於北朝 [중략]
영력[永曆]은 운남[雲南], 귀주[貴州]에 나라를 세우고 오직 그 지경[地境]을 보전하기에만 힘쓰고 있으니, 이를 평정하기가 어려운 상태입니다. 홍승주[洪承疇]는 장사[長沙]에 본부를 두고 군[軍馬]를 통솔하여 주씨[朱氏] 영명왕[永明王]을 비롯해서, 삼오[三吳], 초[楚], 월[越]과 대치하고 정벌[征伐]과 생살[生殺]을 마음대로 자행하고 있으며, 오삼계[吳三桂]는 본부와 요동[遼東], 몽고[蒙古]의 정갑 만여 명을 거느리고, 한중[漢中]에 왕부[王府]를 열고 군마를 총괄 감독하며, 유적[流賊]을 비롯해서 양천[兩川], 진롱[秦隴]에 대치하고 정벌[征伐]과 생살[生殺]을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그 권세가 북조[北朝]를 연상케 합니다. [중략]
淸師討鄭進功未平。廷議援錦州例。將徵火手萬人於吾東。以舟師進逼福建。帝亦然之矣 [중략]
청[淸] 나라 군대가 정진공[鄭進功]을 토벌했으나 평정하지 못하자, 조정[朝廷]의 의론은, 금주[錦州]의 전례에 따라 포수[砲手] 만[萬]명을 조선[朝鮮]에서 징발[徵發]하여, 주사[舟師]로 복건[福建]에 진공[進攻]할 것을 건의했으며, 황제[皇帝]도 또한 그럴듯하게 생각했습니다. [중략]
閣老巴迄以爲堂堂淸朝。借師外國。恐虧雄聲。一用鮮師。勦淸未易。適足移禍。深非護恤屬國之意。力沮是事 [중략]
그러나 각로[閣老] 파흘[巴迄]은, ‘당당한 청[淸] 나라로서 다른 나라에 군대를 빌린다는 것은 위신을 손상시킬 염려가 있고, 또 조선[朝鮮] 군대를 쓰더라도 적[賊]을 소탕하여 평정하기는 쉽지 못할 뿐더러 화근[禍根]만 전가시키게 될 것이니, 실로 속국[屬國]을 보호하여 어루만지는 뜻이 아니다.’ 하면서 힘써 이를 저지시켰습니다. [중략]
天淸宮成。禮部擬送頒赦勑使。巴又以爲朝鮮年凶。詔使纔歸。又送勑使。斷非柔遠之道。大君今行。順付赦詔爲可。竟成其議云。巴將之厚吾東。豈料至斯。是關國運 [중략]
또 천청궁[天淸宮]이 이뤄지자, 예부[禮部]에서는 이에 대한 반사칙사[頒赦勅使]를 보내려 했으나, 파흘[巴迄]은 또다시 ‘조선[朝鮮]에 흉년[凶年]이 들었는데, 조사[詔使]가 돌아오자마자 칙사[勅使]를 또 보낸다는 것은, 단연코 먼 데 사람을 회유[懷柔]하는 길이 아니므로, 대군[大君]의 이번 사행[使行] 편에 반사[頒赦]하는 조칙[詔勅]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주장해서 의논이 그대로 결정되었습니다.”
파흘[巴迄]이 우리에게 후대함이 이에까지 이를 줄을 어찌 뜻했으랴. 이는 국운[國運]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중략]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은, 일상[日常]의 상식[常識]도 없으며, 한줌의 양심[良心]도 없는 자들이다. 명[明]나라의 마지막 황제[皇帝]인 남명[南明]의 영력제[永曆帝]가 거점으로 삼았던 곳은, 운남[雲南]과 귀주[貴州], 복건[福建], 광동[廣東]의 지역[地域]이다. 남명[南明]의 영력제[永曆帝]을 보필했던 이정국[李定國]은, 광동[廣東]으로 달아나서 죽었다.
그 이정국[李定國]을 처음으로 장사[葬事] 지낸 광동[廣東]의 그 지역[地域]에는, 후[後]에, 명[明]나라에 대한 이정국[李定國]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祠堂]이 세워졌고, 그 이정국[李定國]의 사당[祠堂]은, 오늘날의 광동[廣東]으로부터, 서[西]쪽으로 3000리[三千里] 떨어진 동남아[東南亞] 북부[北部]의 깊은 산악지대[山岳地帶]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현지[現地]인 맹랍현[勐腊县]에서 대대[代代]로 살아온 토착민[土着民]들은, 이정국[李定國]은 그 곳에서 죽었으며, 처음으로 장사[葬事] 지낸 곳이, 이정국[李定國]의 사당[祠堂]이 있는 지역[地域]이라고 분명[分明]하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역사[歷史]해설에서, 남명[南明] 마지막 왕조[王朝]의 멸망[滅亡]이, 지금의 운남[雲南]에서, 버마로 도망가서 끝났다고 설명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과 위선[僞善]의 산물[産物]일 뿐이다.
오늘날, 조선사[朝鮮史]의 왜곡[歪曲]과 거짓된 주장[主張]이 끝없이 활개를 치는 것은,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하고, 학자[學者]의 양심[良心]을 저버린 자들이 득세[得勢]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現在]의 북경[北京]이 명[明]과 청[淸]의 북경[北京]이며 연경[燕京] 이었다고 주장[主張]하는데, 한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연경[燕京]의 유명한 다리였던 노구교[盧溝橋]는, 남북[南北]의 인후[咽喉]가 되는 요충지[要衝地]에 있었다. 당시[當時]에 현지[現地]에서 살았던 사람은, 이 노구교[盧溝橋]에 대한 생생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숭정[崇禎] 연간에 유적[流賊]이 기내[畿內]의 남[南]쪽을 엿보므로 당사자[當事者]들이 의논[議論]하여, 이 성[城]을 쌓은 다음 파총[把摠]을 설치하고 군사[軍士]를 예속시켜서 그들을 진압[鎭壓]하게 하였다. [崇禎中 流賊窺畿南 當事者議築此城 設把總 隷兵鎭之],
성[城]에다 문[門] 둘을 내어 남북[南北]으로 오가는 길을 통[通]하고, 남문[南門]에는 영창[永昌], 북문[北門]에는 순치[順治]라고 했으니, 실은 칭송[稱頌]하는 뜻이요,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城祗二門 通南北往來 題門者 南曰永昌 北曰順治 實頌之 非有他也]라고,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역사[歷史]의 당시[當時] 기록[記錄]과, 오늘날 북경[北京]의 노구교[盧溝橋]라고 하는 다리와, 그 다리에 있는 성곽[城郭]을 살펴보면, 그 교활[狡猾]한 역사[歷史]의 거짓이 그 자리에서 탄로[綻露]나게 된다.
본래 연경[燕京]의 노구교[盧溝橋]와 그 다리를 보호하던 작은 성곽[城郭]은 철저히 파괴되어, 그 흔적[痕迹]조차 없어지고, 성곽[城郭]의 유지[遺址]만이 남아 있다. 지금도 그 남아 있는 유지[遺址]를 살펴보면, 역사[歷史]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당시[當時]에 남북[南北]으로 통[通]하던 그 흔적[痕迹]과 윤곽[輪廓]을 선명히 볼 수 있어서, 변조[變造]되지 않고 남아 있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사실[史實] 이었음을 실감[實感]하게 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는 불과 반세기[半世紀]만에, 풍지박산[風紙博山]이 되어 산산[散散]이 부서지고 말았다.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의 역사[歷史]를 지구상[地球上]에서 영원[永遠]히 지우려는 양이[洋夷]와 일제[日帝]의 사악[邪惡]한 음모[陰謀]와, 이에 기생[寄生]하면서,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는 자들과,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변조[變造]하는 자들에 의하여,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은 암흑[暗黑]속에 깊숙이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일만년[一萬年]을 도도[滔滔]히 흐르며 내려온 위대[偉大]한 역사[歷史]를, 숨기고 가리려고 하는 짓은, 손바닥으로 태양[太陽]을 가리려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천하[天下]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무상[無常]하며, 천하[天下]의 운기[運氣]는 천지[天地]의 대도[大道]를 따라 순환[循環]하는 것이 우주[宇宙] 불변[不變]의 법칙[法則]이며 대순[大順]의 진리[眞理]이다.
길고 긴 지나간 역사[歷史]속에서, 정도[正道]를 버리고 간교[奸巧]한 길을 간 사특[邪慝]한 자들의 그 길은, 영원[永遠]하지 못했다. 당대[當代] 뿐만 아니라 후대[後代]에도 그러한 자들은, 오욕[汚辱]과 오명[汚名]만을 가득히 남기고 있다는 사실[事實]을 역사[歷史]는 가르쳐주고 있다.
이정국[李定國]의 사당[祠堂]이 자리 잡고 있는 맹랍현[勐腊县]에서, 서북[西北]쪽으로 약 1500리[一千五百里]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수[數] 백년[百年]된 고옥[古屋]이, 깊은 계곡이 펼쳐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地域]에 이르면, 고원[高原]의 산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산중[山中] 호수[湖水]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서[西]쪽으로 백리[百里]가 조금 넘는 거리에, 지금의 미얀마와 중국[中國]이 국경[國境]이 지나가고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의 한라산[漢拏山]편에는, 한유[韓愈]의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를 인용[引用]하여, 해외[海外]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 유구[琉球], 모인[毛人] 등의 나라는 동남[東南]쪽으로 천지[天池] 가에 있다. 고 하였다. 이 지역[地域]의 고원[高原] 산중[山中]에 있는 호수[湖水]가 바로 한유[韓愈]가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 말하고 있는, 동남[東南]의 천지[天地]라고 부르는 그 산중호수[山中湖水]이다.
이 천지[天池]라고 부르는 호수[湖水]의 둘레는 약 15리[十五里]정도의 크기이며, 사방[四方]이 산[山]으로 둘러 쌓여 있다. 이 지역[地域]들의 전체가 대령[大嶺]이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모두 첩첩[疊疊] 산중[山中]이요. 태산준령[泰山峻嶺]들이 수[數] 천리[千里]를 굽이굽이 뻗어 내리고 있다.
이러한 산간[山間] 오지[奧地]에도, 수[數] 백년[百年]된 종사[宗嗣]와 종가[宗家]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선조[先祖]들의 전통[傳統]을 지키며, 조상[祖上]의 얼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금도 그 지역[地域]에서 수[數] 백년[百年]동안 대[代]를 이어 살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천지[天池]가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동남[東南]의 천지[天池]임을 확인[確認] 할 수 있는 것이다.
동남[東南]의 천지[天池]가에는 탐부라[耽浮羅], 유구[琉球], 모인[毛人] 등의 나라가 있었고, 전라도[全羅道]의 남[南]쪽에는, 우민[羽民], 사화[沙華], 과와[瓜蛙], 유구[琉球], 마라노[麻羅奴] 등 만이[蠻夷]들의 제국[諸國]들이 있었다.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의 서석산[瑞石山]에서는 제주[濟州]의 한라산[漢拏山]이 바라보인다고 하였다.
제주도[濟州島]는 남[南]쪽으로 유구국[琉球國]과 접경[接境]을 하고 있었고, 한라산[漢拏山]의 서남[西南]쪽으로는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이 가깝고, 북[北]쪽으로는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의 경계[境界]가 닿아 있다고 하였다. 한유[韓愈]의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서 말하는 내용과, 조선사[朝鮮史]의 수 많은 기록[記錄]들과, 대륙사[大陸史]에서 설명하는 역사[歷史]의 내용들이 모두 같은 지역[地域]을 말하고 있다.
탐라[耽羅]의 한라산[漢拏山]에 오르면, 유구[琉球]의 지경[地境]이 보이고, 서남[西南]쪽으로는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이 가깝다. 북[北]쪽으로는 강진[康津], 해남[海南]과 경계[境界]가 닿아 있어, 세상[世上]에서 수로[水路]가 9백 리라고 일컫지만, 실은 4백여 리라 한다. 제주[濟州]는 섬이라고 하지만 전라도[全羅道]와 육지[陸地]로 연결되어 있었다. 제주[濟州]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바다[海]와 섬[島]이라는 문자[文字]로 표기[表記]하고 있지만, 곳곳에 나타나는 여러 기록[記錄]들은, 제주[濟州]가 육지[陸地]와 떨어져 있는 섬이 아님을 증명[證明]하고 있다.
한라산[漢拏山]을 직접 오르고 남긴 유람기[遊覽記]에서는, 한라산[漢拏山]은 삼면[三面]이 바다라고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우리가 배워온 역사[歷史]에서 제주[濟州]는 큰 바다 속에 있는 섬이라는 인식[認識]이,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한국[韓國]의 역사[歷史]에 대한 현실[現實]을, 조선[朝鮮]의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에서 살고 있는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이 보고 있다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
지금 일본의 역사[歷史]에 대한 왜곡[歪曲]은, 반성[反省]은 고사하고 날로 그 도[道]를 더해가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한국[韓國]의 고명[高名]한 역사[歷史] 학자[學者]라는 사람들은 한마디 반박[反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반박[反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거짓과 왜곡[歪曲]의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라고 지금까지 가르쳐 왔으니, 유구무언[有口無言]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
전라도[全羅道]의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에서 한라산[漢拏山]이 바라보인다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사실[史實] 이었다. 십주기[十洲記]에서 영주[瀛洲]에 옥례천[玉醴泉]이 있다. 라고 했는데, 그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도 사실[史實]이었으며, 제주성[濟州城]의 동[東]쪽에 산중호수[山中湖水]가 있다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도 모두 사실[史實]이었다.
제주[濟州]의 성곽[城郭]은, 성곽[城郭]이 너무 낮아서 적[賊]을 방어[防禦]하기가 쉽지 않다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도 사실[史實]이었으며, 제주[濟州]의 애월포[涯月浦]가 한수[漢水]와 통해 있다는 말도 사실[史實]이었다. 한라산[漢拏山]의 삼면[三面]이 물로 둘러쌓여 있다는 기록[記錄]도 사실[史實]이었으며, 운남[雲南]에서 원[元]나라 사람들이 제주[濟州]로 많이 들어와 제주[濟州]의 4개 성씨[姓氏]가 되었다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도 모두 사실[史實]이었다.
지금의 운남[雲南] 지역[地域]에는, 지금도 곳곳에 해[海] 자[字]를 붙여 부르는 명칭[名稱]이 수 도 없이 많다. 산[山]이 끝없이 펼쳐진 곳은 산해[山海], 큰 호수[湖水]도 해[海], 큰 강[江]도 해[海], 유서 깊은 대찰[大刹]은, 남해[南海] 00사[寺] 이렇게 바다[海]로 부르고 있다. 또한 산간[山間] 오지[奧地]로 들어가면, 나평[羅平]이니, 나[羅]00이라는 지명[地名]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인데. 토착민[土着民]들에게 그 지명[地名]의 연유[緣由]를 물어 보니, 많은 지명[地名]들이 바뀌어져 있지만, 옛날에는 나주[羅州]의 관내[管內]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조선[朝鮮]의 전라도[全羅道] 서[西]쪽은, 제주[濟州]와 접경[接境]하고 있었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대고려왕 답 견훤서[代高麗王答甄萱書]에서, 강주[康州]는 남방[南方]에서 귀순[歸順]하였고, 나주[羅州]는 서방[西方]에서 옮겨와 귀속[歸屬]하였다. [康州則自南而來歸,羅府則自西而移屬]라는 말이 어찌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이 아니겠는가 ? 반도[半島]에 있는 전라도[全羅道]의 나주[羅州]가 서방[西方]에서 와 고려[高麗]에 귀속[歸屬] 되었는가 ? 또한 나주[羅州]가 거느렸던 40여개의 군[郡]은 어디로 갔을까 ?
우리의 역사[歷史]에 관계된 사료[史料]들을 살펴보면, 사료[史料]의 원전[原典]이 왜곡[歪曲]과 조작[造作]과 변조[變造]로 얼룩진 곳이 수도 없이 많다.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에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 하나의 예를 들어 연행록[燕行錄]을 살펴보면, 예외 없이 한양[漢陽]에서 압록강[鴨綠江]의 의주[義州]까지 1000여리로 기록[記錄]이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朝鮮]의 당시[當時]를 살았던 대유[大儒]인 다산[茶山]선생의, 경세유표[經世遺表], 천관 수제[天官修制], 군현분예[郡縣分隸]의 한 귀절을 보면, 서도[西道]와 북도[北道]는 지역[地域]이 넓고 아득한데, 감사[監司]가 경계[境界] 첫 고을에 앉아서 멀리 수[數] 천리[千里] 지역[地域]을 통제한다. 그래서 명령[命令]이 빠를 수 없고, 간악[奸惡]함을 살필 수 없으니 갈라서 두성[二城]으로 함이 마땅하다. [西路北路。壤地曠遠。監司坐於初界。遙制數千里之地。命令無以速。奸惡無以察。宜各分之爲兩省也]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나는 남[南]쪽 지방[地方]에 15년[十五年]이나 있었다. 그러나 능히 그 직무[職務]를 다하고 백성[百姓]의 뜻을 크게 두려워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각각 갈라서 두성[二城]으로 함이 마땅하다.[臣居南土十五年。未聞有能盡其職。大畏民志者。宜各分之爲兩省也]라고, 이렇게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 만약 반도[半島]에 조선[朝鮮]이 있었다면, 한양[漢陽]에서 의주[義州]까지 1000리[千里]밖에 되지 않는데, 서로[西路]와 북로[北路]의 수[數] 천리[千里] 영토[領土]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역대전고[歷代典故]
백제속국[百濟屬國]
남사고[南師古]가 말하기를, 백두산맥[白頭山脈]이 동[東]쪽의 대해[大海]로 들어가 일본[日本]이 되고, 남[南]쪽의 대해[大海]로 들어가 탐라[耽羅]가 되었다. 고 하였다. 또 세상[世上]에 전[傳]하기를, 그 땅이 바로 노인성[老人星] 분야[分野]인지라 오래 사는 사람이 많으며, 또 바로 방성[房星] 분야인지라 말[馬]이 잘 번식하며, 남방[南方]은 음(陰)이 통할하기 때문에, 이 지방에 여자가 많아서 1명의 남편이 10명의 아내를 가진 자도 있다. 이곳에서는 호랑이, 표범, 곰ㆍ담비, 승냥이, 이리 등 사람을 해치는 동물과, 여우, 토끼, 부엉이,까치 등이 없으며, 들 사슴이 많은데 어족[魚族]이 변화[變化]한 것이다. [중략]
한라산[漢拏山] 마루에 오르면 하얀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데, 곧 유구[琉球]의 지경[地境]이다. 서남[西南]쪽으로는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이 가깝고, 북[北]쪽으로는 강진[康津], 해남[海南]과 경계[境界]가 닿아 있어, 세상[世上]에서 수로[水路]가 9백 리라고 일컫지만, 실은 4백여 리라 한다. 토산물[土産物]로는 감, 귤[橘], 유자[柚子]와 여러 가지 향목[香木]과 약재[藥材]가 나오는데, 영릉향[零陵香], 안식향[安息香], 종유[鍾乳], 백랍[白蠟], 석결명[石決明], 빈주[璸珠], 앵무라[鸚鵡螺], 우황[牛黃], 총모[騣帽], 양대[梁臺] 등속이다. [중략]
해동역사[海東繹史]
탐라[耽羅]
탐라[耽羅]는 고려[高麗]의 여국[與國]이다. 원[元]의 세조[世祖]가 이미 고려[高麗]를 신하[臣下]로 복속시키고는 탐라[耽羅]가 남송[南宋], 일본[日本]과 통하는 요충지[要衝地]라고 여겨 주의를 기울였다. 원사[元史] ○ 삼가 살펴보건대, 원[元]나라 때에는 탐라[耽羅]가 이미 고려[高麗]에 병합되었으므로, 원사[元史]에 실려 있는 탐라[耽羅]에 대한 사실[事實]은 모두 고려기[高麗紀]에 편찬되어 있다. [중략]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역대전고[歷代典故]
백제[百濟]의 속국[屬國]
일찍이 원[元]나라 순제[順帝]가 천하[天下]가 크게 어지러운 것을 보고, 제주도[濟州道]에 들어가 보존[保存]하고자 하여 공장[工匠]을 섬 안에 보내 크게 궁실[宮室]을 짓도록 하였다가, 계획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명[明] 나라 군사에게 몰려 북[北]쪽 개평[開平]으로 달아났다. [중략]
공민왕[恭愍王]이 영전[影殿]을 짓는 역사[役事]에 원[元] 나라 공장 원세[元世] 등 11명을 제주도[濟州道]에서 부르니, 개성[開城]에 이르자, 원세[元世]가 재상[宰相]에게 말하기를, “원[元] 나라 황제[皇帝]가 토목공사[土木工事]를 일으키기 좋아하다가 민심[民心]을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천하[天下]를 보전[保全]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에 우리들로 하여금 제주[濟州]에다 궁궐[宮闕]을 짓게 하였습니다. [중략]
그런데 섬에 들어와 보전[保全]하기도 전에 나라는 망[亡]하고 몸은 도망쳐 우리들을 이 모양으로 의식[衣食]을 잃게 했습니다. 원[元] 나라는 넓은 천하[天下]를 가지고도 백성[百姓]을 수고롭게 하다가 패망[敗亡]하였습니다. 고려[高麗]가 비록 크지만 인민[人民]을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공[諸公]은 임금에게 아뢰소서. 하였다. 동문광고[同文廣考] [중략]
기언[記言]
범해록[泛海錄]
十六年九月。余遊海上。辛亥。宿於三千舊鎭。乘早潮入海。海上月高數丈矣。海中舟人。西指露梁。其南岸有忠愍祠。前有南海大戰碑。又北岸有萬曆中皇明征倭將士題名。蓋水兵都督陳璘。嘗駐兵於此云 [중략]
16년9월[十六年九月], 바다를 유람하였다. 신해일[辛亥日]에, 옛 삼천진[三千鎭]에서 숙박하고 새벽 밀물을 이용해 바다로 들어가니 바다 위로 두어 길 정도 높이에 달이 두둥실 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뱃사람이 서[西]쪽으로 노량해협[露梁海峽]을 가리키면서 남[南]쪽 해안에는 충민사[忠愍祠]가 있고 그 앞에 남해대전비[南海大戰碑]가 있으며, 또 북[北]쪽 해안에는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倭賊]을 정벌한 명[明]나라 장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수군 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이곳에 주둔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중략]
遇馬群。多騂驪文騮。而入山者多駿云。或曰。有神馬。往往雲霧間時見云。夕復登舟。泊南海之梯嵒。其人以舟爲室。善沒海取蠔。鶉衣而極貧。此臝蟲誌所謂蜒蠻。其性變譎 [중략]
무리를 지은 말 떼를 만났는데 각종의 훌륭한 말들이 많이 보였고, 산속으로 달아난 말 가운데에도 준마[駿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그 가운데 신마[神馬]가 있어 운무[雲霧] 사이로 왕왕 그 모습을 보인다고도 하였다.
저녁에 다시 배에 올라 남해[南海]의 제암[梯嵒]에 정박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배를 집 삼아 살고 잠수를 잘하여 조개를 잡아 생활하는데, 누더기 옷에다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이들은 나충지[臝蟲誌]에서 이른 단만[蜒蠻]에 해당되는 미개인[未開人]들로서 그 성질이 변덕스럽고 간사하다. [중략]
微雨。至錦山。環山周以石築。舊遠不知其年。而古時蓋畜馬於此。其傍有曲浦權管舊壘。於山下賞橘 [중략]
가랑비 속에 금산[錦山]에 도착하였다. 산 주위로 석축[石築]이 쌓여 있는데 오래되어 어느 해에 쌓은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옛날에 이곳에서 말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곡포 권관[曲浦權管]의 옛 보루[堡壘]가 있다. 산 아래에서 귤[橘]을 감상하였다. [중략]
海中多洲島。間有煙臺,戍壘。如巨濟,閑山,蛇梁,赤梁,黔魅,娜羅。其外外洋。煙霞蓐芝。在外洋。蠻夷所泊。東南望日本。西則耽羅而海遠常多暗。一歲再三見。見則大雨 [중략]
바다에는 섬이 많고 그 사이에는 연대[煙臺]와 수루[戍壘]가 있었다. 그 가운데 거제도[巨濟島], 한산도[閑山島], 사량도[蛇梁島], 적량도[赤梁島], 검매도[黔魅島], 나라도[娜羅島]가 있다. 그 섬들 바깥은 외양[外洋]에 해당하는데, 연하도[烟霞島]와 욕지도[蓐芝島]가 외양[外洋]에 있으며 만이[蠻夷]들은 이곳에 와서 정박한다. 동남[東南]쪽으로 멀리 일본[日本]이 있고, 서[西]쪽으로는 탐라[耽羅]가 있다. 바다 멀리 있어 보이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고 1년에 고작 두세 번 보이는데, 보이게 되면 큰 비가 내린다. [중략]
其南則海外諸蠻夷。測其方。如羽民,沙菙,瓜蛙,琉球,麻羅奴。外夷誌。皆在海中。天下之東南。作南海中感懷詩二首。 詩見拾遺 [중략]
그 남[南]쪽에는 해외[海外]의 만이[蠻夷]들의 제국[諸國]들이 있는데, 그 나라들을 살펴보면 우민[羽民], 사화[沙華], 과와[瓜蛙], 유구[琉球], 마라노[麻羅奴] 등이며, 외이지[外夷誌]에는 이들 나라가 모두 바다 가운데 있으며, 천하[天下]의 동남[東南]쪽에 위치[位置]한다고 하였다. 남해중감회시[南海中感懷詩] 2수를 지었다. 시[詩]는 습유[拾遺]에 보인다. [중략]
해동역사[海東繹史]
산수[山水]1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한라산[漢拏山]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라산[漢拏山]은 제주[濟州]의 남[南]쪽에 있다.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가 있다. 세속[世俗]에서는 이 산을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운급서(雲笈書]에 이르기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부라악[浮羅岳]에 내려왔다.” 하였고, 한유[韓愈]의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 “해외[海外]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 유구[琉球], 모인[毛人] 등의 나라는 동남[東南]쪽으로 천지[天池] 가에 있다.” 하였다. 탐부라[耽浮羅]는 지금의 제주[濟州]이니, 부라악[浮羅岳]은 과연 한라산[漢拏山]을 가리키는 것인가? [중략]
해사일기[海槎日記]
십사일 갑오[十四日甲午]
經年異域。得見素昧之我國人。我心猶多慰喜。況漂民輩乎。漂民等以爲萬死之餘。得逢上典主。如見父母。男女或有流涕驚喜之。人情烏得不然 [중략]
해를 넘긴 이역[異域] 땅에서 평소에 알지 못하던 아국인[我國人]을 보아도 마음에 오히려 위로되고 반갑거늘 하물며 표류민[漂流人]이랴. 표류민[漂流民]은 말하기를, “죽을 고비 수없이 넘긴 나머지에 마님[上典主]을 만나 뵈니, 부모를 뵌 듯합니다.” 라고 말하고, 어떤 남녀[男女]는 눈물을 흘리면서 반가워하였는데, 인정상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 [중략]
三房各出藥果饌物等。使之分食。女人中有臨產者云。故帖給我國醬藿。使之生朝鮮民後。喫朝鮮之物云爾。則厥女流淚而受之。五六歲十餘歲童穉輩。並皆納拜有喜色。還可異矣 [중략]
삼방[三房]이 각기 약과와 찬물[饌物]을 내어 나눠 먹였으며 또 여인 중에 해산을 앞둔 이가 있다고 하므로 우리나라의 간장과 미역을 주면서, 조선[朝鮮] 백성[百姓]을 낳은 뒤 조선[朝鮮]의 음식을 먹도록 하라.’고 하였더니, 그 여인[女人]은 눈물을 흘리면서 받았고 대여섯 살, 여나믄 살 난 어린이가 모두 즐거운 얼굴로 들어와 절을 하니 이상한 일이다. [중략]
聞漂民輩以康津居民。詭言於彼人云。蓋以濟州人與琉球國。曾有結怨之事。故或慮報復。濟州漂民。輒皆詭言於日本云。而旣非琉球國。則何慮之有也 [중략]
들으니, 그 표류민[漂流民]들이 왜인[倭人]들에게는 강진(康津)에 사는 백성이라 속였다고 한다. 제주인[濟州人]과 유구국[琉球國]과는 일찍이 원망을 맺은 일이 있기 때문에 보복[報復]을 당할까 염려하여 제주[濟州] 표류민[漂流民]들은 누구나 일본인[日本人]들에게 속여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유구국[琉球國]이 아닌데 무슨 염려가 있겠는가. ? [중략]
해동제국기[東諸國記]
서[序]
竊觀國於東海之中者非一而日本最久且大其地始於黑龍江之北至于我濟州之南與琉球相接其勢甚長厥初處處保聚各自爲國周平王四十八年其始祖狹野起兵誅討始置州郡大臣各占主治猶中國之封建不甚統屬[중략]
삼가 살피건대, 동해(東海) 가운데 자리 잡은 나라가 하나뿐이 아니지만, 그중에서 일본[日本]이 가장 오래되고 또 큰 나라입니다. 그 땅이 흑룡강[黑龍江] 북[北]쪽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제주도[濟州島] 남[南]쪽에까지 이르러서 유구국[琉球國]과 서로 접경[接境]을 이루게 되어 그 지세[地勢]가 매우 길다랗습니다. 초기에는 각처에서 부락의 집단 체제로 나라를 세웠던 것을 주평왕[周平王] 48년에 그들의 시조[始祖]인 협야[狹野]가 군사를 일으켜 쳐부수고 비로소 주군[州郡]을 설치했으나, 대신[大臣]들이 각각 점령[占領]하여 통치하다보니, 마치 중국[中國]의 봉건제후[封建諸侯]처럼 되어서, 제대로 통속[統屬]되지 않았습니다. [중략]
목은집[牧隱集]
자안내의하평운남표[子安來議賀平雲南表]
한라[漢拏]의 산빛이 아스라이 푸르스름한데 漢拏山色望蒼然
그 아래로 만리 길 금릉으로 배 떠나네 下有金陵萬里船
물길은 희부옇게 끝도 없이 펼쳐지고 水道微茫不知畔
돛단배는 경주하듯 경쾌하게 내닫누나 風帆飄忽似爭先
힘으로 육조[六詔]를 개통시킨 운남[雲南] 지역이요 力通六詔雲南地
위엄이 삼한[三韓]을 진동시킨 해외의 바다로세 威振三韓海外天
백성의 풍속 유례없이 바꿔 준 이 시대 맞아 盛代移民超萬古
늙은이 길게 읊조리며 시[詩]를 또 하나 지었도다 老翁長嘯得新篇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이목구심서 3[耳目口心書三]
漢挐山新晴之日。遙望江南界。則申方天外。有山如火。脫松江府金山界而浙商所傳也。山東界戌亥間。且有島嶼而不可識也
한라산[漢拏山]에서 날이 맑게 갠 날 멀리 강남[江南]쪽을 바라다보면 신방[申方] 하늘 밖에 산이 있는데, 마치 그 모양이 타오르는 불과 같다. 그것은 송강부[松江府]와 금산[金山]인데, 절강[浙江]의 상인들이 전[傳]하는 말이다. 술방[戌方] 과 해방(亥方] 산동계[山東界]사이에도 섬이 있는데 알 수가 없다. [중략]
점필재집[佔畢齋集]
송이목사수생부제주[送李牧使 壽生 赴濟州]
긴 바람 쌀쌀한 가운데 부서를 헤쳐 가서 長風淅淅擺扶胥
문득 누선에서 내리어 가마에 올라 보면 却卸樓船擁笋輿
취락들은 절반이 용호를 따라 모이었고 聚落半隨龍戶集
계산들은 참으로 신선이 사는 곳과 같으리 溪山眞似羽人居
누각 안의 녹기금은 울렸다 막혔다 할 게고 閣中綠綺鳴還澁
주렴 밖의 높은 깃발은 말리고 펴지곤 하리라 簾外高牙卷又舒
한수[漢水]가 멀리 제주의 애월포[涯月浦]와 통하였으니 漢水遙通涯月浦
가을이 깊어지면 응당 북[北]으로 어류[魚類]가 올라오리라. 秋深定有北來魚
동춘당집[同春堂集]
첩황차[貼黃箚] 정유동[丁酉冬]
竊聞帝室之胄尙有偏安於廣福之間者。天下大統。不全爲魏賊之所竊。而我國漠然不得相聞。于今幾年 [중략]
듣건대, 명[明]나라 황실[皇室]의 후사[後嗣]가 아직 한쪽 구석인 광동[廣東]과 복건[福建]에서 종사[宗社]를 지키고 있다 하니, 천하[天下]의 대통[大統]을 위적[魏賊]에게 완전히 도둑맞은 것이 아닌데도, 우리나라는 전혀 듣지 못하고 지낸 지가 지금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중략]
臣竊聞中朝民士之逢我人者。必流涕而言曰。大明之覆亡。專由於錦州之淪陷。錦州之淪陷。專由於你國之精砲云。臣每念至此。心膽墮地。古語云。楚雖三戶。亡秦必楚蓋言其痛冤之甚。報應之必然也。嗚呼。尤可懼哉。尤可懼哉 [중략]
신[臣]이 듣건대, 중조[中朝] 백성이나 선비가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명[明]나라가 망한 것은 오로지 금주[錦州]가 함락된 데서 연유하였고, 금주[錦州]의 함락은 오로지 조선[朝鮮]의 정예한 포병[砲兵]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고 하니, 신[臣]은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간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중략]
臣竊聞之。濟州一島。遮據南海之中。凡漢船行商而往來海外諸國者。率多過濟而去。遇風泊岸。淹遲數日者比比有之。爲守臣者。慮其難處。輒縱之使還云。以是觀之。似可因此爲便而濟 [중략]
신[臣]이 듣건대, 제주도[濟州島]는 멀리 남해[南海] 가운데 위치하니, 행상[行商]하기 위해 해외[海外] 여러 나라를 왕래하는 한[漢]나라 선박들은 대부분 제주[濟州]에 들렀다 가며 태풍을 만나서 며칠씩 해안[海岸]에 정박하여 지체하는 경우도 흔히 있는데, 그 고장을 지키는 신하[臣下]는 처리하기 곤란한 것을 염려하여 매번 돌려보낸다고 합니다. 이로써 보건대, 이들을 인편[人便]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략]
又地遠海隔。可以祕事密幾。不煩瞻聽。今須先擇一從臣才誠兼至。忠信可仗者。授以濟任。俾令周旋營幹。不限遲速。要得先通其水路。然後朝廷繼以使价。則我朝君臣上下數十年痛迫冤鬱之誠意。或可一朝而達于天朝矣 [중략]
그리고 제주[濟州]는 또 먼 지방인 데다가 바다로 막혀 있으므로 사람들의 이목에 뜨이지 않고 비밀[秘密]스럽게 일을 추진할 수 있으니, 지금 먼저 시종신[侍從臣] 중에서, 재능과 성실을 겸비하고 충신[忠信]을 지닌 믿을 만한 사람 하나를 골라서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하여 그로 하여금 주선해 경영하게 하되, 시일의 지속[遲速]을 한정하지 말고 먼저 그 수로[水路]를 통하게 한 뒤에, 이어 조정[朝廷]에서 사신[使臣]을 보낸다면, 우리나라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수십 년 동안 통절[痛切]하고 억울했던 성의[誠意]를, 혹 하루 아침에 천조[天朝]에 진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략]
然所謂先通水路者。若或不利。漂泊於淸人地方。則必致疑詰。挑禍於無事之中。豈不重且愼歟。此亦在濟牧之密運如何。恐不須別用奇計 [중략]
그러나 먼저 수로[水路]를 통하는 일이 혹 뜻대로 되지 않아 청[淸]나라 지방으로 표류[漂流]하게 되면 반드시 저들의 의심[疑心]을 사서 무사한 가운데 화[禍]를 돋우게 될 것이니, 어찌 신중히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또한 제주목사[濟州牧使]가 은밀[隱密]히 운용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으니, 별도로 기계[奇計]를 쓸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중략]
只可具辦行資。載船發送。略爲公文。如販貿官用於兩湖者然。以爲一行之信。至如通問中朝之書。亦用濟牧文字。而但及奉遵朝令。先爲通路之意。密藏堅持。設有不幸。必無漏洩。則事雖不成。便與漂海行商無異。保無他虞矣 [중략]
단지 노자[路資]를 마련하여 배에 실어 보내되,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으로 관용품[官用品]을 무역하러 가는 것처럼 공문[公文]을 만들어 일행의 신표[信標]로 삼고, 중조[中朝]에 통문[通問]하는 글도 제주목사[濟州牧使]의 문자[文字]를 사용하되 단지 ‘조정[朝廷]의 명[命]에 따라 먼저 수로[水路]를 개통 한다는 뜻만을 언급하여 은밀[隱密]히 간직해서 설령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누설[漏泄]되지 않게 한다면 일이 비록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다에 표류[漂流]한 행상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다른 염려가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중략]
其他揀得行人。與其到彼應變。探知中國事情等事。皆在於濟牧潛思默量。處置得宜而已。有不可一一遙度者。今聞濟牧瓜滿在近。因此擇命。密賜指揮。尤似無迹。惟聖明熟量而財處焉 [중략]
그 밖에 떠나보낼 사람을 고르는 일과 그곳에 도착하여 변화[變化]에 응대하며 중국[中國]의 사정[事情]을 탐지하는 등의 일도 모두 제주목사[濟州牧使]가 깊이 생각하고 잘 헤아려 알맞게 처리하기에 달렸으니, 멀리서 일일이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듣건대, 제주목사[濟州牧使]의 과만[瓜滿]이 가깝다 하니, 적당한 사람을 골라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해 은밀[隱密]히 지시하신다면 더욱 흔적[痕迹]이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는 깊이 헤아려 처결하소서. [중략]
貼黃此事。不宜宣洩。臣敢親筆寫進。眼昏手顫。字不端楷。臣尤不勝惶恐竢罪之至。臣按朱子奏箚中。多用此例。
첩황[貼黃]에 기재된 이 일은 누설[漏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신[臣]이 감히 친필[親筆]로 써 올립니다. 눈도 어둡고 손도 떨려 글씨를 해서체로 반듯하게 쓰지 못하므로 신[臣]은 더욱 황공하여 죄를 기다립니다. 신[臣]이 살펴보건대 주자[朱子]의 주차[奏箚] 중에도 이런 사례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중략]
침략[侵略]과 수탈[收奪], 약육강식[弱肉强食]으로 얼룩진 제국주의[帝國主義]자들의 사악[邪惡]함으로 만들어진 식민사학[植民史學]에 의하여, 역사[歷史]의 혼[魂]과 맥[脈]을 잃어버리고, 식민사학[植民史學]인 반도사관[半島史觀]에 세뇌[洗腦]되어, 역사[歷史]가 아닌 역사[歷史]를 국사[國史]로 배우고, 이러한 것이 우리의 역사[歷史]로 인식[認識]되고 머릿속에 각인[刻印]된 사람들에게,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광활[廣闊]했던 1만리[一萬里] 대륙[大陸]의 역사[歷史]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실상[實狀]에서, 누구나 자유롭지 않다. 그 동안 공교육[公敎育]을 통하여 일제[日帝] 식민잔재[植民殘在]의 추잡하고 사악[邪惡]한 산물[産物]을, 세대[世代]를 뛰어 넘어 국사[國史]라고 가르쳐 왔으니, 왜[倭]놈들이 심어놓은 조선[朝鮮] 병탄[倂呑]의 음흉[陰凶]한 모략[謀略]은, 지금도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왜적[倭賊]들이 참으로 기뻐하지 않겠는가 ?
조선[朝鮮]의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인 탐라[耽羅]가,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으로 통하는 요충지[要衝地]라고 말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모두 사실[史實]이다. 역사[歷史]에서 중국[中國]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 나라들의 실체[實體]는, 조선사[朝鮮史]의 실체[實體]가 밝혀지면서, 그 적나라한 모습이 모두 들어나게 될 것이다. 중국[中國]으로 불리는 역대[歷代]의 나라들과 그들의 남방[南方] 지역[地域]은, 탐라[耽羅]의 서[西]쪽과 서남[西南方] 지역[地域]에 있었다.
그러므로 당[唐]나라의 퇴지[退之] 한유[韓愈]도 동남[東南]의 천지[天池]가에 탐라[耽羅]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거제도[巨濟島], 한산도[閑山島], 사량도[蛇梁島], 적량도[赤梁島], 검매도[黔魅島], 나라도[娜羅島]가 있다. 그 섬들 바깥은 외양[外洋]에 해당하는데, 연하도[烟霞島]와 욕지도[蓐芝島]가 외양[外洋]에 있으며 만이[蠻夷]들은 이곳에 와서 정박한다. 동남[東南]쪽으로 멀리 일본[日本]이 있고, 서[西]쪽으로는 탐라[耽羅]가 있다.
전라도[全羅道]의 남해[南海]에, 만이[蠻夷]들이 와서 정박하고, 서[西]쪽으로는 탐라[耽羅]가 있으며, 남해[南海]의 제암[梯嵒]에는, 단만[蜒蠻]의 종족[種族]들이 살고 있었다. 금산[錦山]에는 귤[橘]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조선사[朝鮮史]에 관계된 역사[歷史]의 사료[史料]들을 살펴보면, 조선[朝鮮]의 영남[嶺南]과 전라도[全羅道] 지역[地域]에는, 귤[橘]나무가 수 없이 많이 자라고 있는 기록[記錄]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다만 제주[濟州]에서 생산되는 귤[橘]의 품질이, 전라도[全羅道]의 귤[橘]보다는 좋았다는 사실[事實]만 다를 뿐이다.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일대와, 미얀마 일부 지역[地域], 태국의 북부[北部], 라오스, 베트남 북부[北部] 일대에, 정조대왕[正祖大王]이 말한 구한[九韓]의 하나인 탐라국[耽羅國]이 있었다. 현재[現在]에도, 운남성[雲南城] 지역[地域]에 사는 일부 사람들은, 반도[半島] 한국[韓國]의 모자, 생활도구 등에 있어서, 판에 박은 듯이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다. 밀집으로 만들어 쓰는 맥고자는, 한국[韓國]의 농촌에서 만들어 쓰던 것과 아주 똑같아서, 옛날 한국[韓國]의 농촌에 와 있는 착각[錯覺]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 외에 맷돌이라든가 절구, 치 등은, 반도[半島]에서 운남[雲南]으로 가지고 간 것과 같다. 운남성[雲南省]에서 미얀마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지역에는, 반도[半島]의 고인돌과 같은, 고인돌의 유적[遺跡]이 이어져 있으며, 깊은 산속의 오지[奧地]에는, 그 오랜 옛날, 돌로 만든 사람 모양의 작은 석상[石像]들이 보존[保存]되어 전[傳]해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구한[九韓]의 유물[遺物]과 유적[遺跡]들이다.
또한, 이 탐라[耽羅]의 지역[地域]에 사는 옛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토착민[土着民]들과, 원[元]나라에서 탐라[耽羅]로 옮겨온 북방[北方]사람들이, 그 곳이 옛 조선[朝鮮]의 제주목[濟州牧]임을 증명[證明]해 주고 있다는 사실[史實]이다.
조선사[朝鮮史] 5000년[五千年]의 역사[歷史]에 대한 의문[疑問]은, 역사서[歷史書]를 따라 발길을 옮기며, 하나하나 그 역사[歷史]에 대한 기록[記錄]들을 규명[糾明]하고, 그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들을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하여, 소실[消失]되고 잃어버린 역사[歷史]의 맥[脈]을 다시 잇게 함으로서, 일만년[一萬年]의 장구[長久]한 세월을 도도[滔滔]히 흘러온 조선사[朝鮮史]의 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목은집[牧隱集]의 자안내의하평운남표[子安來議賀平雲南表]에서, 한라[漢拏]의 산빛이 아스라이 푸르스름한데 漢拏山色望蒼然,......... 그 아래로 만리[萬里] 길 금릉으로 배 떠나는구나 下有金陵萬里船,........ 힘으로 육조[六詔]를 개통시킨 운남[雲南] 지역이요 力通六詔雲南地,.......... 위엄이 삼한[三韓]을 진동시킨 해외의 바다로세 威振三韓海外天, 라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시[詩]를 지어 노래하고 있다.
구한[九韓]의 탐라국[耽羅國]은 바로 이러한 지역[地域]에서, 삼한[三韓]과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조선[朝鮮]과 역사[歷史]를 함께하며, 일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의 일원[一員]으로서, 대륙[大陸]의 남방[南方]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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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잃어버린 조선사!
빼앗긴 조선사!
후손들에게 망각된 조선사!
조선사는 조선인에 의한, 조선을 위한 조선사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반갑고, 놀라운 조선사의 생생한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세세합니다. 조선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신념아래 노력하시는 "환국고려"님께 다시 한 번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 기대합니다.
[서도[西道]와 북도[北道]는 지역[地域]이 넓고 아득한데, 감사[監司]가 경계[境界] 첫 고을에 앉아서 멀리 수[數] 천리[千里] 지역[地域]을 통제한다.]는 정약용 선생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반도의 지형지리로 보면 웃기는, 헛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반도 북방은 바로 국경인데, 그곳에서 수천리 지방을 통제한다는 말은 피부에 와닿지 않는 것이죠. 이러한 반복된 역사교육의 세뇌는 반도인들의 가슴을 아주 작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항상 제후국의 전하와 전하 백성으로써, 대국에게 사대하고, 주변국에서 수십만의 군대가 쳐들어 와도 백성이고 땅이고 모두 팽겨치고 도주하는 모습으로 세뇌됐죠.
인접국의 침략에는 도망하기에 여념이 없고, 백성이야 어육이야 되던 말던, 여인들이 침략군에게 끌려 가건 말건, 도망다니기에 바쁜 군주와 대신들! 그리고 지방 관찰사들의 두 마음을 갖고 눈치보기와 와중에도 싸움질로 날밤을 새는 정치권력자들! 이런 얼굴 뜨거운 역사설명이 바로 "반도사학과 식민사학"에서 전파하는 왜곡과 조작으로 얼룩진 조선사 이야기다. 정치권력가들과 학자들의 야합 뒤에는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정권의 나빨수로 학자가 총대를 매는 경우라면, 국민들을 속이는 일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아무리 부정해도 친일정권으로 탄생했고, 친일은 지금도 변함없이 자행되고 있다. 역사교육이 그 증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