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적 상상력의 확장과 심화
― ‘푸른사상 시선 200’을 기념하며
맹문재
1.
푸른사상 시선은 사회학적 상상력을 꾸준하게 추구해 오고 있다. 개인의 문제가 사회 구조 및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그 관계를 탐구해 오는 것이다. 시인들은 일상은 물론이고 노동, 환경, 정치, 인권, 역사, 사회 문제 등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처한 삶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시인들은 거대담론보다는 자기의 체험을 토대로 삼고 이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개인 문제를 사회 전체와 연결해 본질적이면서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깊은 밤 잠 밖으로 나와
뼈들은 노래를 부른다.
어디론가 유배된 뼈들이 남은 뼈들에게
부서진 뼈들이 성한 뼈들에게
낡은 뼈들이 젊은 뼈들에게
잠들지 마라 잠들지 마라
의문을 꿰뚫어 본질을 보아라
싸우지 않고 빈 꿈만 채우려다
병신이 되고
침묵과 순종의 미덕으로
팔다리가 잘렸니라
우리들의 피 묻은 노래를 들어라
술상에서 밥상에서
순결한 꿈을 위해
망설임도 초조도 간단히 버리고
피에 젖은 작업복을 비벼대며
서로를 지켜라 지켜라
머리뼈는 목뼈에게
목뼈는 어깨뼈에게
어깨뼈는 갈비뼈에게
갈비뼈는 허리뼈에게
허리뼈는 엉치뼈에게
엉치뼈는 다리뼈에게
다리뼈는 발뼈에게
몸 밖의 뼈는 몸 안의 뼈에게
잠든 노래도 불러내 다시 부른다
― 김기홍, 「뼈의 노래― 뼈가 뼈에게」 전문
1980년대 이후의 한국 노동시를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온 김기홍 시인이 마침내 뼈의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시가 밥도 못 되고 희망도 못 되고 무기도 못 된다고 아쉬워하던 목소리를 심화시켜 노동자의 주체성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다. 노동자로서 겪은 절망과 고통과 울분을 허울 씌운 희망으로 타협하거나 체념으로 회피하지 않고 거대한 신자유주의 체제에 맞서는 것이다. 극단적인 탐욕과 개인주의와 근시안을 무기로 삼고 공격하는 자본주의에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려는 시인의 의지는 가족과 동료와 자연을 곡진하게 사랑하는 것이기에 깊은 감동과 연대의 힘을 준다. 그리하여 “유배된 뼈들이 남은 뼈들에게/부서진 뼈들이 성한 뼈들에게/낡은 뼈들이 젊은 뼈들에게/잠들지 마라 잠들지 마라”라고 부르는 화자의 노래는 서늘하고도 뜨겁다.
김기홍(金祈虹) 시인은 1957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1984년 『실천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해방시 동인, 순천 놀이패인 두엄자리, 주암문화연구회, 일과시 동인으로도 활동했고, 1984년 농민신문사 주최 제1회 농민문학상을 수상했다. 임진강 파평교, 주암댐, 상사 조절지댐, 창원·진해·진주 아파트 공사장 등에서 일했다. 시집으로 『공친 날』『슬픈 희망』『뼈의 노래』가 있다. 2019년 7월 26일 타계했다.
상행선 무궁화호
대나무 같은 아홉 개의 마디를 추슬러
서울로 가는 길 다잡는 사이
눈발 속의 차창 밖으로는 사람들 몇,
횡으로 누운 이 하나를 메고 와
오호 달구, 오호 달구 호곡(號哭)을 하며
언 땅에 집 하나를 짓고 있다
죽비가 되겠다는 건지,
몸 베어 날을 세우겠다는 건지
대나무 숲에서는 우-우
뜻 모를 소리 들려온다
살아서 마디마디의 평등한 뜻 이루지 못한
푸른 넋 겨울바람에 부르르
부르르 떨며 헛헛한 하늘을 향해 질러대는
끝도 없이 분분한 아우성 들려온다
죽비를 쳐줄까,
죽창을 세워 줄까
낫을 갈아 날을 세운 청죽(靑竹)의 창을 들고
자주 세상, 평등 세상 외치며
서울로 향하던
개남이의 병사들처럼
열차도 정읍 지나 청죽의 마디 같은
칸칸의 희망을 달고 서울로 가고 있다.
― 주영국, 「정읍 지나며」 전문
작품의 화자는 “상행선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 다잡는 사이/눈발 속의 차창 밖으로는 사람들 몇,/횡으로 누운 이 하나를 메고 와/오호 달구, 오호 달구 호곡(號哭)을 하며/언 땅에 집 하나를 짓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죽비가 되겠다는 건지,/몸 베어 날을 세우겠다는 건지/대나무 숲에서는 우-우/뜻 모를 소리 들려”오는 것도 듣는다. “살아서 마디마디의 평등한 뜻 이루지 못한/푸른 넋 겨울바람에 부르르” 떠는 아우성이라고 여긴다. “낫을 갈아 날을 세운 청죽(靑竹)의 창을 들고/자주 세상 평등 세상 외치며/서울로 향하던/개남이의 병사들”로 여기는 것이다. “개남”은 김개남으로 전북 정읍 출신이다. 동학의 수행과 포교에 힘써 1891년 두령, 즉 접주가 된 뒤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해 호남 지방의 동학 지도자가 되었다. 1894년 전봉준이 고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자 손화중과 함께 남원의 고을을 점령했고, 금산과 청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그렇지만 일본군의 화력을 당할 수 없어 퇴진해 1894년 12월 27일 체포되어 이듬해 1월 8일 전주장대에서 참수당했다.
주영국(朱英局) 시인은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다. 2004년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제19회 오월문학상을 받았다. 공군 기상대에서 오랫동안 날씨 보는 일을 했다. 시집으로 『새점을 치는 저녁』이 있다. 2022년 10월 16일 타계했다.
2.
푸른사상 시선이 추구한 사회학적 상상력은 서정성 또한 중요시한다. 한국 문단에서는 서정시를 시의 한 갈래로 보기보다는 참여시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이분법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우리의 정치 및 사회 문화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문단도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서정시의 특성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정시는 서사시나 극시에 비해 시인이 자기를 우선으로 드러내는 특징을 지닌다. 자기의 생각, 감정, 기분, 열정 등을 주관적이고 개성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신을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한다. 서정적 감정으로 이 세계의 존재들을 배척하지 않고 포옹하는 것이다.
1
너에게서 나에게로 가는 저녁
경계가 지워지는 하늘
신선한 아침에 빛났던
너의 눈동자에 모래바람이 분다
너무 많은 밝음에서 너무 흔한 어둠으로
서로를 통과하며
흐린 고요를 남긴다
짝을 잃은
풍산개의 풀린 눈빛에 저녁이 담겨 있다
2
흰나비 떼가 날아오른다
오늘의 일기 앞에서
하늘을 물들이는 낯익은 새소리
철 지난 진달래 꽃잎
웃자란 새싹들
버석거리는 소나무 입술
쉴 곳을 잃어버린 바람이 내 뒤로 사라진다
먼 산에 하얗게 얼음이 덮인다
― 조숙향, 「오늘의 지층」 전문
화자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붉은 저녁 쪽으로 가고 있다. 가는 동안 길이 사라지기도 하고 어디쯤에서 길을 잘못 든 것 같기도 해 현기증을 느낀다. 길이 흐리고 어둡고, 허공이 커다랗게 다가오기도 한다. 제 그림자의 상처를 응시하고, 또 다른 나비의 죽음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비는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도,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도, “신을 이해하는 것”(「두텁게 다가오는 것-팡세」)에도 어려움을 갖는다. 하지만 나비는 되돌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견뎌내야 한다고 중얼중얼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기고, 이마에 땀방울이 벚꽃처럼 피기도 한다. 허공의 길을 끌어당기는 나비는 상처를 입은 채 언덕 위에 불끈 솟아 있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바람이 지나간 길에 햇살이 푸른 것도 발견한다.
조숙향 시인은 강릉 자조와리에서 태어나 스무 살 무렵부터 울산에서 살았다.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도둑고양이 되기』 『오늘의 지층』가 있고, 울산작가상을 받았다. 2024년 11월 15일 타계했다.
3.
푸른사상 시선은 실험시 또한 중요시한다. 실험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받아 해체시라는 개념으로 불리기에 이르렀다. 시의 형태를 파괴 및 변형하는 실험시는 전통 서정시의 문법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와 같은 실험시의 특성 역시 사회학적 상상력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시
오시
오시오
시오시오
시오시오시
오시오시오시
오시오시오시오
시오시오시오시오
시오시오시오시오시
오시오시오시오시오시
오시오시오시오시오시오
시오시오시오ㅅ님옷이시오
인도 라다크 알치alchi사원의 나무옷
― 고원, 「시옷」 전문
구체시 「시옷」, 이 시는 파스칼의 삼각형을 연상시킨다. (x+1)의 n승 계수를 n에 따라 나열하여 얻은 삼각형을 말한다. 파스칼을 얘기하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른다. 고원 시인은 갈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구체시를 쓰는 갈대이다. 그를 좌절시키는 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힘쓸 필요는 없다. 그를 낙심시키는 데에는 가벼운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하지만 주변에서 구체시를 폄하하더라도 그는 그들이 모르는 고귀함이 있다. 왜냐하면 한글 우주의 구체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의 분야 중에서 위상수학이 있다. 연속적으로 공간을 변형시켜도 바뀌지 않는 성질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원둘레와 원의 내부는 천지 차이다. 위상수학에서는 원의 내부에서 점 하나만 빼더라도 원둘레와 같다고 본다. 그만큼 내부에 빈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무한대와 1만큼 다르다고 본다. 고원 시인은 가로 세로 5줄로 이루어진 네모로 많은 구체시를 썼다. 이 시들은 가운데 빈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빈 공간이 있으면 시가 의미하는 바가 무한 가지 된다는 느낌을 준다. 빈 곳 없이 꽉 찬 것은 단순하고 단일한 인상을 풍긴다.
푸른사상 시선은 2019년 4월 25일 김자흔의 시집 『피어라 모든 시냥』을 101번으로 시작으로 2024년 11월 30일 정일관의 시집 『별』을 199번으로 간행되었다. 99권의 시집을 간행하는 데 5년 7개월이 걸렸고, 92명의 시인이 참여했다. 안준철 · 오새미 시인이 세 권의 시집을, 강태승 · 김용아 · 김정원 · 박석준 · 이애리 시인이 두 권의 시집을 시선의 목록에 넣었다. 이외에도 많은 시인의 별 같은 시집이 한국 시단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孟文在 | 문학평론가 · 안양대 교수
백무산
1984년 『민중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등이 있다.
맹문재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 『사과를 내밀다』 『기룬 어린 양들』 『사북 골목에서』 등이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제 카페로 모셔가서 찬찬히 읽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