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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생에서 시작해서 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육신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이 생로병사하는 가운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로병사한다는 말이다. 범부들은 생사로 아는
것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변화한다고 말합니다.
유무에 변화한다. 마치 춘하추동과 같이, 춘하추동은 일년 단위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 예를 그렇게 들어
주신 것입니다.
봄에 맨 땅에 새싹이 쑥쑥 파고 올라 오는 것을 보면 희한해.
쑥쑥 차고 올라오죠 기운 있게. 애들이 죽죽 크는 것 보세요.
똑 같은 거잖아요. 여름은 막 우거지고. 가을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합니다. 나무에 단풍이 드는 거하고 사람이 단풍이 드는 것이 있죠.
검버섯이다. 단풍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수기가 빠져요.
나이를 먹으면 수기가 빠져서 잠이 안 오는 거예요.
나무도 여름에는 줄기에 물기가 많지만 가을에는 안에 말라 있습니다.
사람도 그래요. 수기가 다 없어지고 피부도 퍼석퍼석 해집니다. 그러죠?
그러다가, 딱 가을이 되면, 다 말라비틀어져 버린다. 없어..
찬바람 날 때는 언제 그랬냐 싶게 없습니다.
그럼 끝나냐? 봄에 귀신같이 나온다.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 육신의 생사도 마찬가지다. 영혼이라는 것은 실지는 생사가 없다.
영혼은 불생불멸이다. 그런데 육신은 생사가 있는 것이다. 그 생사를
한 번에 끝나는 단생관으로 바라보냐. 아니면 영생관으로 계속 변화하는
것으로 바라 보느냐? 여기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일원상을 아는
사람은 유와 무가 돌고 도는 것을 안다.
그럼 이것을 알면 어떻게 되요?
‘ ♫노새 노새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 ♫ ‘
이래야 될 것 같아요? 이것은 정말로 영생관을 모르는 것이다.
인과를 모르는 것이다. 그 노래를 부르는 놈은 죄 받을 것이다.
♪노새 노새 젊어서 놀아?
젊어서는 뭐 해야 해? 젊어서는 진리를 깨쳐서 사은에 보은하고
영생길을 개척해야지.. 놀자고 노래하는 사람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노래 가사를 써도 잘 써야 합니다. 복권 만드는 사람들도 죄 받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사행성을 조장하고 말이죠. 그러고는 미안하니까
어려운 사람들 도와준다고 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복권 사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것 보았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려고 복권 샀습니까? 어떻게 한 번 나도 재수 한
번 봐 볼까? 사람들에게 그런 사행심을 심어 줘야겠어요? 이소성대로
내가 노력해서 돈을 버는 것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노래를 하나 짓고 정치를 하더라도 이 변화의 원리 인과의 원리 진리를
아는 사람과 모른 사람은 정말 다릅니다. 직책이 높아도 재주가 있어도
이 진리를 아느냐 모르냐에 따라 그 사람이 크게 복록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크게 죄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죽을 때 다 웃으면서 죽겠네. 이것을 배웠으니까? 그래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떤 할머니가 병원에 치료하러 오더니, 직원에게
‘어이 젊은이,, 젊었을 때 놀러 다니소. 늙으니 못 가겠네..’
얼른 볼 때는 참.. 맞는 말이다. 근데, 그것은 한 편만 말하는 거죠.
뭔 말인지 아시겠어요? 젊어서 뭐 해야 해? 말해줄까요?
우리 남자분들, 여기 40대가 없잖아요? 별로? 왜 없는 줄 아세요?
안암교당만 없는 게 아니에요. 이제 결혼도 했겠다. 여자 얻었죠.
직장에서 경쟁 사회에서 내가 남자니까 때로는 명예감, 때로는 승리감,
때로는 자신감, 어떤 그 남자로써 우월성이 있습니다.
게임을 어떤 사람이 열심히 하냐? 머리 좋은 사람들이 열심히 합니다.
그 게임의 원리가 뭔지 아세요? 내가 너를 이겼다, 나는 너보다 잘났다.
이걸 확인 하는 게 게임이에요. 게임 좋아하지 말아요. 진 사람 맘
아프잖아.. 돈 잃은 사람은.. 네가 미련하니까 당해라?
잘 생각해보세요. 40대가 되면 이 공부 안 합니다. 원불교 다녔다는
사람도 잘 안 옵니다. 40대에 이 교당에 잘 나온 남자 있다면 나중에
잘하면 큰 도인 됩니다. 교당마다 40대가 없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천만의 말씀. 그 돈에 대한 욕심, 명예심, 자존심에 치
달려가는 거예요..
부모도 멀리하고, 친구도 멀리하고 오직 만나는 사람은 그 돈과 명예에
플러스 되는 사람만 만나고 있습니다. 물론 교당도 멀리합니다.
왜 그래요? 아까 변하는 것을 몰라.. 다 변화하거든요.
사업도 흥망 성쇠예요.
분명히 허망하거든, 나중에.. 그런데 그 생각 못해.. 여기 남자들 잘
들으세요. 결혼 딱 하고 나면 애기 낳았다고, 집 장만해야 한다고 회사
다니며 먹고 사는데 얼마나 바쁜지 아느냐고? 내가 그걸 모르거니?
다 알아.. 우리의 마음의 가치라는 것은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초월해서 이 진리를 각하면 그런 속에서도 아까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이 변화만 잘 알아 보세요. 포커페이스라고 하죠? 포거를 칠 때
이 변화를 잘 아는 사람은 페이스. 얼굴이 잘 안 바뀌어요.
‘좀 있다가 잘 들어 오겠지..’ 그런답니다.
이 변화를 모른 사람은 그것이 다 입니다. 그래서 금방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 알죠.
‘응 저 사람 안 들어왔구나.’
우리 서도안 아버지가 광우병 사태 났잖아요. 그때 소 값이 툭툭 왕창
떨어졌어요. 그러니까 도안이 아버지가 우리나라 축산업이 없어지지는
않겠지. 몇 배가 싼 소를 왕창 샀어요. 지금은 두 배가 넘었습니다.
이게 변화의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오르겠지.
주식도 하지 마세요. 아주 사행성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땀을 흘려서
돈을 벌어야지 주가가 오르면 돈 버는 것이 맞아요?
그것이 이 자본주의의 폐해입니다. 좋은 말로 꽃이라고 하는데..
주식을 해도 자발스럽게 이랬다 저랬다 하니까 다 잃어 버립니다.
가만히 있으면 보이지 않나? 나도 주식이 폭락 할 땐 그때 살려고…
그때 안 사야 도인일 텐데...
변화의 이치를 생각하면 우리가 살면서 그렇게 조급증 내지 않는다.
어떤 사장님은 조그만 가게를 시작했는데 손님이 안 오면 전전 긍긍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손님 더 안 오는 것입니다. 이 생로병사가 바로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 알고, 또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복숭아 안에 씨가 있죠? 인과 과가 그 안에 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다. 그래서 인과 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된다.
옛날에 진묵대사가 어떤 절에 갔어요. 밥을 달라고 했는데 진묵대사가
모양새가 별로였나 봅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골려 먹는다고 자기들끼리
종을 치면서 밥을 먹었어요. 진묵대사가 꾹 참았습니다. 밥을 먹고 난
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진묵대사가 그것을 주워 먹었어요.
그러니까 그것도 치우더랍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도인이에요. ‘너희 잘 했다’고 해야 도인이겠어요?
진묵대사는 별 뭐가 없죠. 그런데 진묵대사가 그 절을 나오자마자
거기에 번개가 때려서 스님들이 다 죽어버렸어요.
대종사님도 진묵대사는 대각하셨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음양상승이
사람과 사람간에도 있어지지만 큰 어른들은 직접 한해도 천지가 줍니다.
이것이 음양상승의 원리예요. 반대로 빈 마음으로 잘 하면 싹싹 다
풀립니다. 이것이 기도를 하는 원리이고 공심을 한 원리이고 이것이
복을 짓는 원리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기도를 하게 되어 있고 복을
짓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짓지도 않은 복을 누가 주겠습니까? 지어야 주는 거지요.
이 현세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데리고 있는 직장 동료한테
함부로 하면 뭐가 옵니까? 함부로 한 만큼 옵니다. 함부로 해 보세요.
저녁에 술 마시면서 계속 안주 발 날라옵니다. 화살로…
‘사장 지가 사장이면 사장이지.. XX같은 X이..’ 막 합니다.
그러면 그 사장이 잘 될 것 같아요?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습니다. 민심이 동하면 하늘이 도와 줍니다.
음양상승의 이치는 인과보응의 이치와 같이 맞물립니다.
원래 인과보응은 불교에서 말한 것이고 음양상승은 유교에서 말한
것인데 대종사님은 하나로 딱 합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음 기운이라고
해도 그 안에
한 여름에도
또
금목수화토의 관계가 서로 치기도 하고, 서로 도와주기도 합니다.
이 관계 속입니다. 그러다 팔괘 64 이렇게 나갑니다.
대종사님은 하나로 뭉퉁거려서 인과보응의 이치는 음양상승과 같이 된다.
이렇게 해 놓으셨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수렴을 기른 어떤 영감이 있었는데 하루는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수염을 이불에 넣고 자, 빼고 자?’ 할아버지는 생각 없이
잤는데, 그 다음부터 고민이 되었다. 뭐냐? 음양상승의 이치는
무위이화다. 자기가 넣고 자는지 빼고 자는지 모르고 그냥 잤습니다.
또 눈을 감았다 뜨는 것도 내가 눈을 감아야지 눈을 떠야지 하면서
깜박입니까? 호흡을 들여 마셔야지 뱉어야지 그럽니까?
스스로 자동입니다. 그래서 음양상승은 무위이화라고 합니다.
자동입니다. 자동.. 묘합니다.
사업을 해도 큰 사업을 한 사람은 사업 망해도 웃을 수 있다.
왜 그러죠? 왜 웃을 수 있냐? 노자가 마누라가 죽으니까 북을 치고
좋아했죠? 왜 그래요? 변화를 알거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속에서
경험했고, 혹시 사람 관계 인연 관계 잘 지었는가, 혹시 내가 대중 앞에
도움을 주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하다. 왜 그것은 분명히 음양상승으로
싹이 되어 나오거든..
그런데 설사 내가 아무리 돈을 번다 해도 사람들 마음 긁어놓고 때로는
꺼꾸로 해 놓았으면 그것이 싹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면 당장 좋지만
나중에 골치 아프다.
가난하다고 너무 기 죽을 것 없고 잘산다고 너무 우쭐할 것도 없다.
사실 알고 보면..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것인 줄을 알리로다.>고 했죠?
일원상 수행에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고
그랬죠? 원만이라는 건 뭐예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분별성,
즉 계교심을 톡 놓잖아요? 툭 터져 하나가 되요. 이게 원만이에요.
그래서 다 차.
구족이라는 것은 뭐냐? 바로 그 툭 틔어진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온다. 지구도 우주도, 달도, 은하계도 다 그 안에 들어온다.
다 갖추어져 있다.
지금 제목소리를 듣고 아는 실체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허공과 같은 나로써 허공으로써 나와 하나라는 것을 알 것
같으면.. 그것이 바로 이 허공에는 다 갖추어 있잖아,
우주도 지구도 싹 갖추어져 있잖아, 우리의 마음도 허공과 같이 툭
트이면 그 안에 다 갖추어져 있다.
지공무사는 그대로 설명 한 것입니다. 뭐냐? 지공, 지극히 공변 되서
공과 사는 서로 반대 개념입니다. 대체적으로..
그런데 이 공이라는 것은 뭐냐? 공즉공 이거든요. 이것은 공즉전 입니다.
똑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공무원 그러죠, 공금 그럽니다. 공도자, 공익심,
그럽니다. 그럴 땐 이 공公을 써 줍니다. 공이라는 것은 전체를
말합니다. 전체를 공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전체가 되냐? 이런 나라는 부분이 있으면 전체가 안 된다,
비워버려야 공이 된다. 그럼 전체가 된다. 지극히 비워서 전체가 돼서
사가 없다. 사실은 무사가 지공입니다. 같은 말이다. 무사라는 것은
지공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는 개인 사라고 합니다. 또는 부분 사라고도 합니다. 부분이란
나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또는 나다. 또는 소아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나에 집착 하는 마음이다. 그것을 상(相)이라고도 한다. ‘이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 이것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공이다. 결국은 대종사님이나 스승님은 어떻게
사신 것이냐? 그대로 지공으로 사신 것이요, 무사로 사신 것이다.
그러면 진리작용은 어떤가? 진리의 작용도 똑같다. 진리의 작용도
그대로 사가 없이 그대로 나타내어진다. 즉, 복 지은 사람은 복 받게
해주고, 복 안 지은 사람은 복 안 받게 해주고. 이것이 그대로
지공무사의 작용입니다.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하죠? 다릅니다. 저 사람이 우리 김씨 집안이야.
저 사람이 우리 동문이야. 저 사람이 우리 동문회야. 저 사람이 언제
봉투 좀 갖다 줬어. 이렇게 해서 지공무사가 아니죠. 원근친소에 끌리면
지고우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원상이라는 것은 지공무사다. 원래 사라는 것이 어딨냐?
이 말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나가 어딨냐? 이 말이다.
무엇이 나냐? 나가 없기 때문에 공과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가
내 집이고 우주와 내가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이 원만구족 지공무사다.
이것이 사실 그대로다. 일원상은 원만구족 지공무사. 틀린 말이 아니고
그대로 똑 같은 말이다.
그래서 육근 작용에 어떻게 해야 하냐? 설사 이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 동안의 습관과 업력이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에 또 공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 앞에 것은 각의 표준이다.
즉 이것을 알며 그랬잖아요?
그 다음에는 쓰는 것이다.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쓰는 것이다. 여기서
안이비설신의라는 것은 결국은 마지막 마음에 부림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대종사님은 작은 원상으로 해 가지고 각각을 유념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 드리면 눈을 사용할 때 쓰는 것이다라는 것은 그대로
쓰라는 것이다. 눈에다 셀로판지를 대거나 색안경을 쓰거나 자기의
착심을 가지지 말고 사실 그대로를 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원만구족
지공무사입니다. 눈을 쓸 때는…
아까 나타난 시공간을 볼 것이냐? 시공간을 초월한 그런 마음의 눈으로
볼 것이냐? 그것이 정견으로 본 것이다. 이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보는 순간 영점 몇 초 내에 선입관이 들어선다고
합니다. 아 좋다. 아이 씨이~. 이러면 벌써 끝난 것입니다. 면접 볼 때나
손님 대할 때. 아이 씨이~ 하면 벌써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 합니다. 거기다 잣대를 대요. 미추의
잣대. 선악의 잣대. 자기의 선입관의 잣대를 딱 댑니다. 그것이 정견이
아니라 사견이다. 그러니까 웃기죠. 제 눈에 다 짝이라고. 내가 볼 때는
아닌데 저 사람을 좋아해요. 그것이 제 눈에 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쓰자는 것이냐? 바로 바르게 보자.. 그런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 책상을 열었어요. 어때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저런 도둑놈이 있나? 또 어떤 사람은 나한테 친근하게
생각한 사람이구나. 혹시 그 사람은 필요한 것이 있거나 선물 넣어
줄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친하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걸 보는 눈이
어떤 눈이냐? 그 말이다. 사람 따라 다르다.
귀. 귀는 어떻게 들어야죠? 귀 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제일 귀 밝은 사람이 있어요? 귀가 제일 큰 사람인가요?
그게 아니라, 충고 잘 듣는 사람이다. 그만큼 귀에서 걸림 망 작용을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맞는 말인데, 자기의 자존심이 있어서 못 듣는다.
바로 들어야 하는데. 제대로 듣지 못한다.
강의를 들을 때나 회의를 들을 때.. 제가 많이 보았습니다. 참 희한해요.
어떤 사람의 주장이 맞아도 평상시에 나하고 감정이 안 좋으면 찬성 안
해 줍니다. 분명히 저 말이 맞는데. 이게 뭐냐면? 그 내용을 내용으로
듣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게 주착심이죠.
그래서 들을 때 어떻게 들으라는 건가요? 육근을 쓸 때 뭘로 써야 해요?
‘진공위체’라 합니다. 아까 텅 빈 마음으로 보고 들어야 한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나 안 드는 사람이나.
남편하고 부인하고 잘 싸웁니다. 싸움의 내용이
부인은 ‘당신은 표현이 왜 그래?’.
남편은 ‘내용을 들어.’ 그럽니다.
서로 그러고 있습니다. 지금 남자는 형식을 무시합니다.
여자는 그 형식이 중요합니다.
코를 쓸 때 어떻게 써야 하죠? 시골에 가면 똥 냄새 나죠?
파리는 좋다고 합니다. 파리는 거기만 찾아 다닙니다.
우리는 싫어하는데 파리는 좋아합니다. 우리는 냄새에 대한 좋고 안
좋은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이 배고플 때 통닭집을 지나갑니다.
어때요? 냄새에 끌리죠? 냄새의 좋고 싫어하는 것. 여자들 향수에 대개
민감하대? 비싼 것 찾는데.. 적당히 쓰세요..
자 입을 사용하는 건 두 가지죠. 하나는 말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 조절, 말하는 것 조절. 계문 중에 말이 참 많죠?
악한 말, 망령된 말, 비단같이 꾸미는 말, 집단에서 제일 나쁜 것이
이간질 하는 말. 과실을 말하는 것이 제일 안 좋아요.
총으로 팍 쏘면 상처를 입죠. 말로 팍 쏘면 가슴에 상처를 입습니다.
중생들은 상처를 입습니다. 불보살들은 상처가 없는 상처니까 괜찮은데
보통 사람은 상처가 오래가죠.
몸 사용입니다. 작게는 손 발을 어떻게 쓰는 가이지만 크게는 계문에
주로 해당 됩니다. 정의 행을 하느냐 안 하느냐.
마지막, 마음사용입니다. 마음에는 우리가 상전급 계문에도 탐심, 진심.
치심, 시기심 이렇게 있습니다. 마음 사용의 상태인데. 우리가 마음을
원만하게 쓰거나 밝게 쓰거나 상이 없이 쓰면 복을 무지하게 짓습니다.
돈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엄청난 복이 옵니다. 그러나 마음을 탐진치로
쓰면, 이것이 그대로 지공무사하게 옵니다.
지공무사를 잘 해석해야 합니다. 지공무사는 사실 자체가 지공무사요.
어떤 결과가 지공무사로 좋은 것은 좋은 대로 오는 것이 지공무사고
안 좋은 것은 안 좋은 대로 오는 것이 지공무사입니다.
인과가 포함된 것입니다. 지공무사를 잘 보실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은 제가 법어를 할 때 참 곤란한데,, 법어는 대종사님이 대각하신
그날에 앞에서 회장님이 읽게 되어 있습니다.
‘이원상을 각하면.. 이렇다.. ‘
대종사님은 결국 대각하셨다는 것은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소리와 다 똑 같은 소리입니다.
정산종사님이 삼동윤리를 말하신 것도 다 이것입니다. 삼동윤리 보세요.
삼동윤리는 뭐가 한 가지란 거에요? 이치가 한 가지, 사람도 다 한 가족,
종교도 하나고, 하는 일도 다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세계를 개척하자고 했어요. 얼마나 부앙부앙 합니까? 그게 사실이에요.
중생은 그게 부앙부앙하게 들리죠. 그러나 불보살은 그게 사실이고,
하나입니다.
왜? 시방 삼계가 다 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방 삼계가 전부 나와
다르다. 그것은 이 원상을 안 각한 사람입니다.
무시선법에는 육근을 어떻게 쓰라고 나왔죠?
육근이 유사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 양성을 해라.
육근이 무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해라.
라고 이것을 표현하셨습니다.
자 질문해 주십시오.
■ 질문 과 답변 =======================================
Q_
사업을 했다면 그 사람이 열심히 하면 인과의 이치에 따라서 잘 되야
하는 것 같은데 열심히 했는데 거기에 흥망성쇠가 들어가면 그것이
인과의 이치에 어떻게 맞아 들어가는지 궁금합니다.
A_교무님: 변•불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업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계속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생로병사와 흥망성쇠라고 하지만 내 마음은 변함이 없는
그 자리에 두고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또 거기에 열심히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에 전부다 바쳐버리고 변하는 것이 전체인 사람과
변하지 않는 내 마음의 체를 잡고 변하는 것을 전력해서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이치를 보는 사람은 흥망성쇠를 훨씬 더 연장 할 수 있다.
이치를 모르면 빨리 망합니다. 그러나 사업은 흥망성쇠하는 것이다.
지구도 성주괴공 하는데. 우주도 성주괴공 합니다. 만물은 전부
다 생로병사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흥망성쇠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여여자연 하고 무량세계를 전개 했습니다.
거기에 바탕 해서. 이 육신도 생로병사하고 사업도 흥망성쇠하고 우주는
성주괴공하는 이것을 탁 뛰어 넘고 바라보고 응용해서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교무님 변하는 것을 가볍게 알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그 변하는 것이 불변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무엇을 지적하고 있느냐? 사람들은 변하는 것만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업 망하니까 옥상에서 뛰어 내리죠.
한강에서 뛰어내립니다. 왜 변하는 것만 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안 하면 망하지, 당연히 인과의 이치에 따라서 그러나 열심히
해도 변하는 것만 보고 열심히 하느냐 아니면 변하지 않는 것을 체를
두고, 진공에 체를 두고 묘유로 용을 쓰느냐 이 차이입니다.
똑 같이 하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치를 알면 흥망성쇠에서 훨씬 여유 있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혹은 어떤 경계가 왔을 때 입장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원만구족 지공무사의 행이 달라집니다. 마음 씀이 달라집니다.
각을 한 사람은 몸과 마음을 쓸 때 조금씩 달라집니다. 습관과 업력에
의해서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제일 쉽게 말하면 자존심이 없어져요. 원불교 공부 잘못하면 자존심만
무지하게 세집니다. 빈 자리 공부하면서 자존심이 왜 세져?
그것은 차별의 세계 이분의 세계에 놀아나기 때문입니다. 진공의 세계
일원의 세계에서 놀면 그 차별을 선용하고 이용할 뿐이지 그 속에서
놀아나지 않아요.
원불교 만난 사람이 기뻐서 너무 죽겠고, 슬퍼서 너무 죽겠다는 사람은
원불교 공부 잘못한 것이다. 평상심이 뭔데? 놀아나지 않는 것이
평상심인데. 경계에 놀아나지 않는 것이다.
제가 예를 하나만 더 들께요.
폐위 시켜 버렸습니다. 일국의 절도사 즉 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의종군 시켰습니다. 그런데
않았습니다. 백의종군을 하시고, 나중에 백전 백승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돌아가시고 나서 선조가 제문에다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네.’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니까 해군 역사상 열 척 가지고 몇 백 척을 상대합니까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겁니다. 그 사심이 없고 우주의 하나되고 나가 없기
때문에 그 위력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진리를 신앙하는 것도 그런 위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직관의 세계에 들어가면 기가 막힌 자기의 위력을 자기가
체험하게 되요. 다 도와주고 다 되게 되 있다.
자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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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영상 서버장애로 편집하는데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여러분들께 죄송합니다. 다행히 길운교우님의 도움으로 동영상을 다운 받아 무사히 끝냈습니다. ^^
오.. 정원교도님.. 고생 많으셨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꼼꼼한 정리.. 이날 못가봐서 넘 아쉬웠었는데.. 궁금증이 풀립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열심히 불공하는 하루 되세요 ^^d
감사합니다~!
항상 들러주시니 고맙습니다. 은혜로운 하루 되세요 ^^v
이렇게 많은 양 정리 하실려면 힘드셨을텐데..감사드려요(저도 해보니까 힘드네요.ㅋ)
고맙습니다. 이젠 익숙해졌습니다. ^^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여전히 공부 열심히 하시네요.. 고맙습니다. ^^
"사심이 없고 우주와 하나되고 나가 없기 때문에 그 위력이 나오는 것이다."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