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음모 - 1
갑작스러운 발 소리에 노옥진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딸 미라가 2층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다가 내려온 것이다.
"엄마, 아직도 아파?"
팔뚝에는 아직도 링거 주사 바늘이 꽃혀 있고, 남편 허열은 옆 소파에 앉아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벽시계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8점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난 8년 전,
1964년의 비통했던 한 해를 추억하던 노옥진은 일곱 살의 첫 딸 미라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가슴이 비로소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백수웅이 8년 만에 다시 나타났다구? 대통령과 아버지를 테러하기 위해?
안 돼요. 그래서는 안 돼요.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런 무모한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내가 허열과 결혼한 것을 알았던가요? 그런 복수라면 내게 하세요.
내가 선택한 길이었으니까요. 하느님,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게 해 주세요.
이 가정을 버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제 소원을 들어 주새요.
하느님 , 하느님 소원이에요. 들어주시는 거죠?'
오른손으로 미라를 감싸 안은 노옥진은 입에서 또다시 오열이 터져 나왔으나 입술을 악물었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엄마, 아파?"
미라의 목소리에 허열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아내의 손을 잡아 주었다.
8년 전, 경주 신혼 여행 첫날 밤, 남편이 손 잡았을 때 느꼈던
그런 아주 오래 된 기억의 냉기가 감촉에 닿았다.
노옥진은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군. 정말이야, 그 백수웅이란 녀석 때문에 늦은 거야.
이 녀석, 꼭 잡아 죽일 테니 걱정하지 마."
1972년 3월 20일. 이 날은 월요일이며,
백수웅이 부산을 통해 잠입한 지 13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허열을 비롯하여 남성우, 최일우, 그리고 특별 배치된 또 다른 세 명의 수사 전문가들이 모여,
토요일 밤 양동에서 허열에게 상처를 선물로 남기고 사라진
백수웅을 체포하기 위한 수사 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돌출되어 체포 방법을 모색하던 중,
남성우로부터 서지아 처리에 대한 뜻밖의 의견이 제시되었다.
"허 검사님, 서지아를 양주 밀수범으로 만들어 체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래 가지고는 그 녀석이 위치를 드러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네, 있습니다. 제가 건달 애들 몇을 데리고 있는데, 동대문 시장 골목 주인들이죠.
이 아이들을 이용해 볼 작정입니다."
남성우로부터 자세한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허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방법으로 추진한다. 그 건달 녀석들에 대한 뒷일은 내가 책임지겠다.
자, 언론이나 외부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추진하라.
나머지는 동대문 시장을 에워싸고 백수웅을 찾아라."
수사 회의는 급회전해 서지아 처리로부터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스타다스트라는 협소한 공간에서의 되풀이되는 체포 작전이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
치사하지만,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좌충우돌하는 백수웅,
한번 꼬리를 감추면 도무지 찾아 낼 수 없는 녀석을 잡아 내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고 적절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 무렵, 서지아는 치안국 수사실에서 고통스럽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문당하고 얻어터진 아픔은 거의 사라졌지만,
지금쯤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백수웅 소식이 궁금해 견딜수가 없었다.
그렇게 초조하고 불안한 가운데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돌아왔다.
그녀를 연행했던 형사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정말 백수웅의 위치를 모른단 말이지!"
'하느님, 백수웅 씨를 살려 주셨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이 정도면 되지 않았어요? 모르는 걸 말하라면 거짓말밖에 할 것이 없잖아요. 끝냅시다."
남성우 형사는 이 당돌한 여인의 대답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하기는, 그 지독한 고문에도 한 마디 않던 여자였으니까
"좋소. 풀어 드리죠. 하지만 만일 백수웅이 다시 나타났는데도 신고하지 않으면,
그 때는 당신도 끝장나는 줄 아시오."
"철컥."
손에 묶여 있던 차가운 쇠사슬이 풀어졌다. 서지아는 손목의 근육을 풀며 형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손을 올려 형사의 빰을 갈겼다.
"개자식. 죄 없는 여자 또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으면,
다음에는 사타구니를 물어뜯어 평생 병신으로 만들어 놓을 거야.
여편네한테 이혼당하기 싫으면 조심하라구."
그리고는 획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안에서 와르르 웃어 대는 여러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아직도 쌀쌀한 바람이 불어 댔지만, 계절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지,
눈부신 오후 햇살이 화사스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서지아는 맑은 공기를 들이켜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길 몇개만 건너면 스타다스트 호텔이 나온다.
광화문을 지나 종로로 꺾어 들었다.
그리고 스타다스트 호텔의 '스타' 바를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오늘은 바의 문을 열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연행되었다는 것을 알았던 게 분명해.
그렇지 않았다면 백수웅 씨는 틀림없이 체포되었을 거야.'
서지아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담배 석 대를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백수웅의 뒷소식이 궁금했고. 자신의 앞날이 걱정 되었다.
그렇다고 백수웅을 밀고하여 자신이 살아 남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백수웅이 다시 나타난다면 정말 가게를 정리하고 함께 시골에 가서
푹 처박혀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저녁 6시가 되었다.
종업원 여자들에게 다시 출근하라는 연락을 하기 위해 다이얼에 손가락을 집어 넣으려 할 때,
바의 문이 벌컥 열렸다.
서지아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백수웅이 다시 돌아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백수웅이 아니었다. 세 명의 남자였는데,
얼핏 보아도 나이는 갓서른 정도 돼 보이는, 거칠어 보이기 짝이 없는 그런 사내들이었다.
"이봐, 위스키 한 병만 줘."
"아직 영업 준비가 "
"딱!"
느닷없이 주먹이 올라와 얼굴을 갈겼다. 구레나룻이 시커먼 사내였다.
서지아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오늘부터 이 바는 내가 접수한다. 하루 수입 중 50퍼센트를 바쳐야 돼."
"뭐가 어쩌구 어째? 이런 깡패 녀석들 , 어서 꺼져!"
"헤헤 , 누님. 우리를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아주 예쁘게 생기셨는데 연애나 한번 할까?
이 동대문 임꺽정이가 기분좋게 해 드릴게요."
단단하고 야무지게 생긴 사내 하나가 징그럽게 웃으며 다가왔고,
한 녀석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서지아는 깜짝 놀라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야무지게 생긴 녀석이 주머니에서 잭 나이프를 꺼내 '철컥' 날을 세웠다.
그리고 그 칼날로 전화기 줄을 잘라 버렸다.
"헤헤, 반항하는 게 아주 예쁘군, 어디 구경 좀 할까?"
칼끝이 블라우스를 북 찢어 놓았다.
찢어진 블라우스 속에서 두개의 젖무덤이 출렁이며 나타났다.
"으흐흐 , 먹음직스럽게 생겼군."
"뭐, 뭐하는 거야? 돌아가. 돌아가라구. 돈을 줄게. 원하는 만큼. 정말이야."
서지아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돈? 어차피 바와 너는 내 거야. 난 한번 욕심낸 걸 포기해 본 일이 없거든.
이 동대문 임꺽정이는 말이야."
"소리지를 거야."
서지아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유리창이라도 깨부수고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키 작은 녀석이 계속 덤벼들었다.
"까불지 마."
키 작은 녀석이 의자의 발을 잡더니 순식간에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그 의자를 서지아를 향해 힘껏 내리꽂았다.
서지아는 의자에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 '퍽' 하고 고꾸라졌다.
"형님, 재미보슈."
키 작은 녀석이 임꺽정이라는 건달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쨍그랑."
테이블 위의 술잔과 병들이 바닥으로 튀어나갔다.
이들의 보스인 듯한 임꺽정이란 별명의 사내가,
테이블 위를 마치 빗자루로 쓸어 내듯 손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놀란 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벌벌 떠는 서지아를 번쩍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번쩍' 불빛에 잭 나이프가 푸른빛을 내며 허공으로 들어올려졌다.
"너 오늘 기분 좋은 날인 줄 알아!"
다른 사내들이 의자들을 끌어다가 엉덩이에 걸치며 테이블을 둘러봤다.
칼날이 번개같이 날아와 스커트를 찢어 놓았다.
버둥거리던 두 다리가 허공으로 번쩍 들어졌고, 희고 탄력 있는 허벅지가 요동을 쳤다.
"저 , 정말 이럴 거야? 좋아, 너희들 조건 들어 주지. 하지만, 하지만 "
"늦었어! 버르장머리 없는 년은 꼭 맛을 보아야 순해진다니까."
이번에는 주먹이 날아들어 가날픈 서지아의 아랫배를 갈겼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서지아의 두 다리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녀는 손으로 배를 움켜잡았다.
낄낄대는 사내 녀석들의 웃음소리가 아득히 들려 왔다.
임꺽정이라는 녀석의 손이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블라우스가 벗겨지고 스커트가 찢어져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상의가 벗겨지고 브래지어가 떨어져 나갔다. 사내가 지아의 젖가슴을 주물러 댔다.
그럴 때마다 그녀를 둘러싼 사내 녀석들이 박수를 쳐 대며 낄낄댔다.
내가 손으로 그녀의 턱을 난폭하게 끌어당겼다.
누운 채 몸부림치던 서지아가 눈을 똑바로 뜨고 사내를 쏘아보았다.
"너 , 동대문 임꺽정이라고 했지? 이 개자식, 잘못 물었어. 어디 하고 싶으면 해 봐."
서지아가 제 손으로 평크빛 팬티를 벗어 버렸다.
그리고 다리를 활짝 벌리며 사내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 서지아, 평생 술 팔아 먹고 살아 왔지만, 너희들 같은 거지자식들에게 당해 본 일은 없어.
자, 해 봐. 용기가 있으면 덤벼 보라구. 그 다음엔 너, 그 다음엔 네 녀석."
누운 채 한 녀석 한 녀석 얼굴을 쏘아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바지를 벗고 테이블 위로 기어오르던 사내 녀석이 주춤 행동을 멈추었다.
흘긋 서지아의 시선이 출입문으로 옮겨졌다.
웅성대며 들여다보던 호텔 종업원 두서너 명이 후닥닥 도망쳐 올라가고 있었다.
"왜, 왜 멈추는 거야, 이 버러지 같은 녀석아. 재미 좀 보자. 사타구니 힘 없으면 보스 자리 내놓아야 해.
어디 내가 맛 좀 보고 나서 보스를 결정할 테니 한 녀석씩 올라와 보라구."
아무리 돈 받고 명령받아 하는 짓이지만, 기분이 나지 않았다.
동대문 시장을 움켜쥘 때도 이런 지독한 계집은 본 일이 없었다.
"에이, 더러워,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계집 다 보겠네."
사내가 투덜거리며 테이블에서 내려와 바지를 추켜 입었다. 그리고 서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다. 오늘은 이 정도 해 둔다. 하지만 내일 다시 올 거야.
장사 곱게 하고 싶으면 말 잘 들으라구. 얘들아, 가자."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서지아가 벌떡 일어나 이빨로 끊어진 전화기 줄의 껍질을 벗기고 손으로 연결시켜 놓았다.
그리고 여종업원에게 전화했다.
"얘, 오늘도 휴업이다. 너, 옷 한 벌만 갖고 빨리 가게로 좀 와."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어둠에 파묻힌 스타 바에 간간이 흘러들어오는 간판의 형광등 불빛이 어른거렸다.
서지아는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여종업원이 옷을 가져오는 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타 바를 접수하려는 건달들 행동 같지는 않았다.
현재 무교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물장수들은 모두가 명동파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그런데 동대문 쪽 깡패들이 쳐들어왔다면 세력 싸움으로 보아야 하는데,
만일 이 스타 바에서 세력 다툼이 벌어진다면 호텔 종업원이 보고 그냥 있을 이유가 없다.
명동파에 연락하지 않았다면 이건 배후 조종자가 있다는 뜻이다. 그건 기관의 세력뿐이다.
'그래, 맞아. 나를 귀찮게 하면 백수웅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한거야.'
그렇다면 이건 정말 큰일이다.
바의 영업을 계속할 수도 중단 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빠진 것이다.
스타 바. 이 곳은 백수웅의 유일한 연락처이며 또한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당장 문을 닫는다면 다시는 그와 연락할 방법이 없다.
머리 좋은 백수웅이 집으로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종업원이 가져다 준 옷을 입고 다시 불을 켰다. 문 앞에는 임시 휴업의 간판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어쩔 작정이세요, 언니?"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여종업원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글쎄, 한며칠 지나 봐서 문을 닫을까 생각해. 하지만 버텨 볼 거야."
"깡패 녀석들 또 찾아오면 경찰에 신고해 버려요."
"신고? 그 녀석들이 그 녀석들인데 뭘 신고해. 됐어, 돌아가. 내일도 나오지 마."
여자 아이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울적한 마음으로 위스키를 털어 넣었다.
밖의 대형 간판 불이 을씨년스렵게 번쩍이고 있었다.
'당분간 나타나지 말아야 하는데 틀림없이 형사대들이 깔려 있을 거야.'
그 시간, 남성우 형사는 동대문 건달들로부터 첫 번째 보고를 받고 있었다.
남 형사는 허름한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한 술집구석에서 이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 그 년이 제 손으로 팬티를 벗어 버려 김이 샜다 이거지?"
"그랬다니까요, 형님. 세상에 그런 독종은 처음 보았어요."
"그래, 됐어. 한며칠만 그년을 괴롭혀.
만일 돌발적인 사태가 벌어지거나 내 지시가 떨어질 때는 그년을 없애 버려.
단, 사고사로 만들어야 돼. 사고사, 알았지?"
"뒷일은 형님이 책임지시는 거죠?"
"아따 이 녀석들, 걱정도 팔자다. 이 형님이 허튼 소리 하는 거 보았어?
내 뒤에 아주 큰 분이 계셔.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이 계집애가 우리 어른하고 며칠 호텔에서 엔조이를 했나 봐.
그런데 이게 같이 살자구 치근대니, 내가 가만 있을 수가 있어 야지."
"까짓 년, 트럭으로 확 밀어 버리지 그냥 둬요? 운전 기사 며칠 들어갔다 나오면 그만일 텐데."
"그렇게 단순한 게 아냐. 자, 오늘 수고했다. 브라보."
"브라보는 제길, 재미도 못 봤는데."
사내들이 낄낄대며 소주를 털어 넣었고, 남 형사는 이들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시간, 허열은 반도 호텔 306호 특수대 본부에 혼자 앉아 있었다.
십여 바늘 꿰맨 상처 때문에 활동이 여의치 못했던 것이다.
아내 노옥진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녀석을 체포할 작정이었다.
지금 남성우는 동대문 건달들과 만나 보고를 받는 중이며,
최일우 형사는 현지 형사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서지아의 집 부근에서 잠복 근무를 하고 있다.
나머지 세 명 중 두 명은 호텔 종업원으로 변신한 채 스타다스트 호텔에서 대기 중이며,
남은 한 명의 형사는 지난 토요일 밤 자신과 격렬한 결투를 벌였던 백수웅을 뒤쫓기 위해
그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양동 일대를 수색하고 있다.
허열은 백수웅과 아내의 과거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가, 백수웅이란 테러리스트가 출현했다는 말에 놀라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는 오히려 승리의 미소까지 지었던 허열이다.
'건방진 자식, 남북 회담 장소를 테러한다고? 잠입한 지 열흘도 못 돼 꼬리를 드러내고 쫓기는 녀석이?
제길, 약하긴 내가 그런 녀석 손에 죽을까 봐 정신까지 잃어?'
그토록 차갑고 냉정하게 지내던 지난 8년 세월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역시 부부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보고가 들어온 것은 동대문으로 파견된 남성우 형사로부터 였다.
"접니다. 남성우입니다."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한 것으로 보아 공중 전화가 분명했다.
"그래, 어찌 되었나?"
"일차 협박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3-4일간 지속적으로 괴롭혀 보다가,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희생시킬 작정입니다.
녀석은 절대 처박혀 있지만은 못할 겁니다. 한 시간 후 본부로 "
"아니, 오늘은 그냥 퇴근하라구. 그 대신 내일 다섯 시까지는 본부로 나와야 돼."
"감사합니다."
이것이 남성우가 수립한 전략이었다. 백수웅이 의지하는 단 한 곳,
종로 1가의 스타다스트 호텔의 부속 바 '스타'의 서지아를 괴롭히거나 희생시키면
녀석은 눈이 벌개서 복수를 다짐할 것이며,
어디든 나타나기만 하면 이번에는 숨통을 조여 버릴 것이다.
'독종, 8년 전에 작살을 내는 건데.'
남성우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모처럼의 시간을 이용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해 둘 작정으로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보고는 서지아의 집에서 왔는데, 밤 10시가 되도록 서지아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서지아는 지금 바에 있어. 그 쪽도 철수하라구.
그 대신 내일 새벽 통금 해제 10분 전에 가택 수색을 해 봐.
양주 밀수 제보가 있었다고 핑계대고 알았지?
아무튼, 튀는 데는 귀신 같은 녀석이니까 몸조심 각별히 하고."
세 번째로, 양동 일대를 검문하던 형사로부터 마지막 보고가 왔다.
백수웅이 투숙했던 그 무허가 하숙집의 새벽 결투 이후
그의 종적은 찾을 수 없다는 절망적인 보고였다.
그러나 허열은 실망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녀석은 손바닥 안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체포나 사살은 시간 문제일 뿐, 그가 치러야 할 대가는 오직 죽음뿐이라는 데는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허열은 부하들을 모두 귀가시켜 버렸지만, 자신은 도무지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노범호 장인 어른이나 이후락 정보부장의 호출이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때 문이 열리며 남성우 형사가 들어섰다.
"왜 퇴근하지 않고?"
"아닙니다. 허 검사님이 계시는데 혼자 쉬면 무얼 합니까. 자정까지 옆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언제 보아도 듬직하고 믿음직스럽고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남형사 자신이 이번 임무를 끝내면 크게 발탁되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허열은 누구보다도 남 형사의 앞길을 틔어 주고 싶었다.
"고맙네. 자, 한 대 태우게."
"감사합니다."
"자넨 백수웅이란 테러리스트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잘 알죠. 학생 시절 제가 직접 신문했으니까요. 한 마디로 사상이 강하고 성격이 곧은 독종입니다.
쉽게 함락당할 녀석은 아닌데, 8년 동안 일본에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체포해서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녀석은 틀림없이 평양에 가 있다가 돌아왔을 겁니다."
'아니다.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녀석이 평양의 지령으로 자행하려는 테러라면 거기에 박성철을 포함시킬 이유가 없지.
녀석은 미친 녀석이라구. 곧 일본에서 자세한 정보가 입수되겠지만,
녀석은 프롤레타리아(무산자주의)가 분명해. 녀석은 최소한 빨갱이는 아냐.'
허열이 머리를 끄떡였다.
"놈의 목적은 대통령이야. 평양 지령이 분명해, 목숨이라도 걸고 체포하라구.
이번 임무 끝나면 자네와 최 형사를 중앙정보부에 추천하겠네.
최고 권력 기관이니까. 그러니 충성을 다해."
앉아 있던 남성우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카펫 바닥 위에 넘죽이 엎어졌다.
천하의 노범호 사위. 이후락 정보부장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는 젊고 야심만만한 허열 검사의 추천이라면,
현찰도 못 미더워 한국 은행 총재가 직접 서명한 돈이나 마찬가지 인물이다.
허열이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자, 내 걱정 말고 퇴근해. 그리고 이번 서지아 건 잘 처리하라구."
남성우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정각 11시였다. 그는 허리 굽혀 인사를 한 후 반도 호텔을 빠져나왔다.
치안국에서 특별히 차출한 자신의 전용 검정색 지프에 몸을 싣고 시동을 걸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라이트를 켜는 순간, 어둠 저 쪽에서 빨간색 오토바이 하나가 황급하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그럼, 백수웅?'
지난 토요일 밤, 양동 무허가 하숙집에서 백수웅의 오토바이에 한 번 혼이 난 남성우다.
강박 관념처럼 머리에 달라붙었던 오토바이가 지프차 저 쪽 앞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까지 ? 가자, 절호의 기회다!'
남성우는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고 튀어나가듯 힘차게 출발했다.
차들이 그리 많지 않은 때여서, 깜깜한 한밤이라도 오토바이 추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트바이는 을지로 1가 네거리에서 남대문 시장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고,
남성우의 지프는 신호등이나 차선을 무시한 채 무서운 속도로 뒤쫓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양동 창녀촌에서 습격을 받았던 그 빨간 오토바이는 남대문을 돌아 다시 퇴계로로,
퇴계로에서 남산을 향해 무섭게 돌진해 올라갔다.
남성우는 핸들을 움켜쥔 채 옆구리 권총을 다시 확인했다.
특수대가 조직된 이후 한 번도 옆구리에서 떨어져 본 일이 없는 권총이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행운이었다. 백수웅 그 녀석을 단독으로 추적하다니,
이제 출세길은 훤히 트인 셈이다. 오늘 밤 저 녀석 허벅지에 총알을 박아 쓰러뜨린 다음,
허열 검사에게 끌고갈 것이다. 그렇게 잡지 못해 애태우던 백수웅을.
남산 드라마 센터 앞을 윙윙대며 오르던 오토바이의 속력이 처음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
지그재그로 된 길이어서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남성우는 마지막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죽을 힘을 다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윙---."
엔진음이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핑 소리가 날 만큼 힘차게 언덕으로 돌진해 올라갔다.
저 앞에 오토바이가 보였다. 오토바이의 사내가 허리를 잔뜩 굽힌 채 달리고 있었다.
"탕---."
첫 번째 총성이 울렸다. 어둠 속에서, 그것도 달리는 차 안에서
달리는 목표물을 맞힌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총알은 오토바이를 훨씬 비켜 갔다. 두 번째 총알을 쏘았지만,
그것 역시 불을 토하며 어둠만 갈라 놓았을 뿐, 녀석의 생명을 빼앗는 데는 실패했다.
남산 야외 음악당을 거쳐 팔각정 가까이 다다르자,
비로소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와 있음을 알았다.
그 이상 자동차는 갈 길이 없지만,
오토바이는 좁은 길이라도 마음놓고 휘젓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개떡 같은 자식!"
팔각정 북향, 그 높디높은 돌계단을 오토바이는 미친 듯 내리 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산에서 심야에 들려 온 두 방의 총성은 남대문 경찰서와 중부 경찰서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첫댓글 쫓고 쫓기는 저 추격전이 언제면 끝날까?
잘봤읍니다~
감동깊게 보았습니다 수고하셔습니다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좋아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