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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포드에서의 라이드의 인기는 굉장히 빨리 치솟았고, 그들은 제리코 타번(펍)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옥스포드 아카데미의 윗층에 있는) 코-옵 홀(Co-Op Hall)에서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 그건 그 당시 지역 밴드들에게는 굉장히 흔치않은 일이었다.
앤디 : 점점 일이 커지고 있다고 느꼈어. 가능성이 크게 느껴졌고, 동네 꼬마들이 길거리에서 너를 알아보고 찾아온다던가 그런 거. 그건 굉장한 일이었고 끝까지 쭉 그럴 것만 같은 느낌이었어. 내 목표는 우리 밴드가 음악과 타협하는 바 없이 싱글이 차트 탑에 오르는 크게 성공한 밴드가 되는 거였어. 우린 완전 야심찼었다고.
그 당시에는 영국 인디 씬에서 꽤 인기있었던 밴드, 더 수프 드래곤즈를 서포팅하게 되면서 그들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라이드를 옥스포드 지역 밖의 영국 관객들에게 노출 시키고, 영국 음악계 언론의 주목을 받게 한 것 이외에도, 크리에이션 레코드 사장인 앨런 맥기와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크리에이션사는 라이드의 많은 영웅들의 소속사였고 근방에서 가장 쿨한 레이블이었으니까.
마크 : 내 생각엔 밴드 수프 드래곤즈의 션이 우리에게 그들을 서포트해달라고 말했던거 같고, 이런 연결고리를 통해 데이브와 워너 브라더스사가 그때 만날 수 있었지. 난 우리가 매일 밤 공연마다 수프 드래곤즈를 능가해서 무대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고, 이 때가 앨런이 우리의 매일 밤 공연마다 찾아와서 매 공연마다 우리에게 말걸기 시작한 때였어. 엄청났던 시간이었어.
로즈 : 내 생각엔 그때 우리 공연은 그냥 미대 학생들의 투어 공연이었지만, 투어가 늘 갖는 그런 색다른 느낌을 주었던거 같아. 그때 스티브는 꽤 성숙해서 그때 "여자친구"라고 하는 걸 갖고 있었어. 그때 앤디와 나는 종종 사진을 찍거나, 테이프를 듣거나, 종종 우리 스케치북에 스케치를 하곤 했었던 거 같아. 마크는 곧 닥칠 스타덤을 위한 준비에 대해서 아늑한 상태로 보였지... 그땐 모든게 즐겁고도 이상했어.
앤디 : 그들(수프 드래곤즈)은 친절하게도 우리가 그들의 장비를 쓰도록 허락해줬어. 그래서 우리는 작고도 작은 콤보 앰프를 쓰는 대신에 마샬 스택 앰프를 쓰게 되었지. 우리는 그 투어에서 첫 국내 음악 잡지에 실리게 되었는데, NME, Melody Maker, Sounds지에 실렸었어. 우리가 굉장히 크게 연주했었던게 생각나!
앨런 맥기를 팬으로 두는 건 분명 굉장한 기분이었을 것 같은데.
앤디 : 원래, 우리는 4AD(영국 인디 레이블)와 계약하려고 마음 먹었었어. 왜냐하면 크리에이션은 너무 뻔해 보였거든. 하지만 그때, 실제로 테이블 위에서 크리에이션사의 계약 제안이 들어왔을 때, 우린 바로 계약하기로 마음 먹었지. 맥기는 굉장히 좋은 사람 같았고, 완전히 밴드에 미친 사람으로 보였거든. 하지만 그 후 한참 뒤까지는 그와는 아무런 교류도 없었어. 우리는 데이브를 통해서 우리 음반과 음반 재킷 등등을 그에게 보냈고, 데이브가 다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받아 갖고 오는 식이었으니까. 그 후로, 맥기는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한명이 되었지만 그건 라이드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야.
마크 : 앨런은 빠르게 내 가족처럼 되었고 난 여전히 그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 그는 우리를 상당히 많이 지원해 주었고, 우리가 만들고 싶었던 앨범을 만들도록 해주었어. 그리고 곁에서 개인적으로 나와 우리 모두를 지도하고 방향을 잡아주었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준 다른 굉장한 음악들을 접하도록 말야.
사람들이 종종 알아차리지 못하는 "The Ride EP"의 기념비적인 의미는, 그것이 크리에이션 레코드사의 앨범들 중 첫 번째로 차트에 오른 앨범이라는 것이다. 천천히 올라가기는 했지만 특별한 의미로 71위까지. 이 컬트 레이블은 이후 끝내 더 큰 성공에 이르도록 할 변화점에 이르고 있었다. 나중에 그들의 경력에서, 라이드의 앨범 판매 실적은 크리에이션이 다른 아티스트들에 의해 얻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운영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이 EP의 녹음은 카울리 로드(Cowley Road)를 벗어난 유니온 스트리트 스튜디오(Union Street Studios)에서 이루어졌고, 네 곡을 녹음했다. "Chelsea Girl"은 불어닥치는 소용돌이와 같았고, 맑은 파워 팝이었다. "All I Can See"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몽환과 버드(Byrd)에 의해 영감을 얻은 멜로디의 경쾌한 매쉬였다. "Close My Eyes"는 음울하고 서서히 타오르는 고딕 찬가(gothic hymn)였다. 그리고 "Drive Blind"는 가장 밝게 불타오르는 곡이었다. 음악적 진눈깨비와 천둥을 알리는 폭풍의 소리였고, 황량하고 낭만적인 니힐리즘으로 뒤덮인 노래였다.
앤디 : 밴드의 엔지니어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소리를 내게 하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어. 옥스포드에 있는 어느 누구도 우리가 원하는 기타 사운드로 녹음하려고 하지 않았고, 마치 다른 나라 말로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니까. 우린 끝내 그럭저럭 만족했지만, 내 생각엔 세션을 위해 돈을 지불했던 워너 브라더스사의 캘리 칼로맨(Cally Caloman)이 우리가 제대로 믹스하도록 도와줬던 거 같아. 대체로 말하자면, 다른 모든 레코드사들은 적에 가까웠지만, 캘리와 앨런 맥기는 달랐어. 그들은 우릴 보다 잘 이해해 줬고, 그래서 우리의 버블에 함께하도록 한거지.
마크 : 나는 우리 엔지니어인 캘빈이 우리 곡들을 믹스하려고 하면서 했던말이 생각나. 그는 "기타 사운드랑 화이트 노이즈가 너무 심해서 아무 것도 안들리는데."라고 했었어. 우린 모두 "잘됬네. 그냥 그렇게 둬."라고 답해줬어.
처음으로 밴드의 첫 녹음한 앨범을 들어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로즈 : 스피커를 통해서 사운드가 전달될 때, 그게 제대로 녹음된 게 맞더라도 "정말 다른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 그리고 그 "정말 다른 것"이 네가 들어봤던 것 중에 가장 멋진 소리라면, 그건 네가 느낀 바대로 실제로 최고로 멋진 것에 거의 가깝다는 거야.
팬들, 평론가들, 그리고 새 팬들은 완전 빠져들었다.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라이드의 굉장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존 스피라(Jon Spira)의 곧 개봉할 옥스포드 뮤직 씬에 대한 영화(*"Anyone Can Play Guitar")에서, 밴드 탈룰라 고쉬의 싱어 아멜리아 플레쳐(Amelia Fletcher)는 아워 프라이스 레코드사에서 잠시 일할 때, 같이 일하던 스티브가 밴드에 전념하기 위해서 이 직장을 떠난다고 해서 놀랐던 기억을 회상한다. 그런 종류의 일은 보통 옥스포드 뮤지션들에게는 생기지 않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라이드의 성공은 6년간 지속되었고, "Tarantula"앨범을 내면서 해체되기 전까지 네 장의 스튜디오 정규 앨범을 냈고, 수많은 차트 히트곡들과 몇몇 월드 투어를 돌았다. 해체되던 그 시기는 밴드와 크리에이션 레코드사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앨런 맥기는 크게 허탈해했고 지쳐있었다. 그러나 밴드의 해체를 둘러싼 이런 모든 씁쓸함들은 빠르게 잊혀져갔다.
라디오헤드나 슈퍼그래스와 같은 이후 다른 옥스포드 밴드들의 길을 미리 닦아 놨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드는 그들의 역할을 덜 중요하게 보이고 싶어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들은 사람들이 옥스포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그 다른 밴드들이 자신들의 밴드보다 중요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앤디 : 라디오헤드는 그 모든 걸 "Creep"으로 시작한 밴드야. 그 때가 바로 음악계에서 "옥스포드 씬"이라는 개념이 생겨날 때고. 그리고 몇 년후 옥스포드에 와서 계약하겠다는 밴드들이 늘어났지. 나는 그 당시에 우리 라이드가 그 정도로 이 지역을 자극시킨 적은 없다고 봐. 우리가 당시에 지역 언론이랑 라디오에 주로 등장했던 건, 우리 공연을 보러 온 관중들이 타운 홀(Town Hall)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다던지 해서 우리가 언론에 무시당하고 까이거나 뭐 그런 정도. 우리가 한창 뜨고 있을 때 우린 옥스포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안달이었어. 왜냐하면 이 곳이 세상에서 가장 졸리운 곳처럼 느껴졌거든.
로즈 : 아마 그땐 "그래, 넌 진짜 해낼 수 있어."라는 분위기가 돌고 있긴 했지만, 라디오헤드와 슈퍼그래스는 물론 그 후로도 많은 일들을 헤쳐나가야 했을 거야.
마크 : 우리가 첫 EP를 발매했을 때, 우린 우연히 옥스포드 출신의 밴드로는 처음으로, 세계적으로 실질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였던 거야. 이것 이후론 많은게 바뀌었어. 기회는 열려있었고, A&R 맨(*레코드사에서 신인 아티스트발굴이나 레코드 제작 등을 담당하는 스탭)들이 도시에서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지역 펍이나 공연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친구들과 사람들이 밴드를 만들고, 예를 들어 슈퍼그래스나 라디오헤드 같이.. 그리고 BANG! 그리해서 지난 20년 간 옥스포드는 세간에 알려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흥미롭고 진짜 괜찮은 밴드들을 만들어내고 있지. 내 생각에 그런건 우리와 함께 생겨났던거 같은데, 우리와 같이 밴드들에게는, 옥스포드 출신이라는게 밴드가 활동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거고, 음악만 좋다면 세상에서 못할 게 없다는 거지!
밴드는 그들 스스로에게 모질게도 겸손한 태도였다. 라이드 이전에, 옥스포드 밴드들의 야망은 수수했고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그들의 영향과 영감의 증거가 되듯 지역의 성공이 지속적인 흐름으로 되었고, 그들의 사운드 또한 세계 곳곳의 밴드들에게 꾸준히 영향을 주게 되었다. 보통 말하는, 그리고 다른 모든 밴드들이 음악적 향수에 기대어 돈을 벌고자 다시 밴드를 재결합 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 우리는 이들에게도 64,000달러짜리 질문을 던져야겠다 : 라이드가 재결합할 날이 올까요? 대답은 아마도 애매모호할 것이 뻔하다.
마크 : 수많은 사람들이 미안해하면서 이 질문을 했다는게 참 재밌는 일이지! 재결합할 계획은 전혀 없어. 나는 요즘 개인적으로 내 믹싱 작업과 작곡, 그리고 프로덕션 작업에 푹 빠져지내고, 돌아와서 옥스포드에서 꽤 안정적으로 살고 있거든. 난 여전히 몽상가이고 내가 지금 참여하는 음반들이 어떻게 될까 항상 기대하면서 지내고 있어. 그리고 난 내가 잘 알고 있고, 이미 잘 되었고, 정말로 끝난 일에 대해서보다는 내가 아직 잘 모르는 일에 대해 더 흥미를 느끼니까.
앤디 : 난 언젠가 꼭 얘들과 함께 다시 연주하고 싶긴 한데, 날짜를 딱 정할 수가 없네.
로즈 : 우리가 꼭 그렇게 한다면 좋겠는데... 모든게 다 잘 맞아떨어져야 하는 일이니까!
사진설명 - 다음 페이지의 사진 : 그들이 있던 그대로; 1990년의 라이드.
* Anyone Can Play Guitar는 Jon Spira가 만든 지난 30년 간의 옥스포드 뮤직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제목 "Anyone Can Play Guitar"는 옥스포드 출신인 라디오헤드의 노래 제목을 따온 거죠. 옥스포드 출신 밴드들인 Radiohead, Supergrass, Foals, The Candyskins, Ride, Swervedriver 등을 다룬 필름이라고 하네요.
이 영화는 저도 꼭 보고 싶은데ㅠ ㅜ 아직 개봉은 안했고, 인디 영화라서 도네이션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미 도네이션은 마감이 되었고, 영상이랑 음악들을 재정비 해서 올해 여름쯤! 개봉할 거라고 합니다.
(끝)
미대생 앤디.. 사진 찍고 스케칭하러 돌아다니고ㅎㅎ 뭔가 어울리는데요
그리고 오올 시크하게 바빠서 라이드 공연을 스케쥴에 껴넣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는 앤디ㅋ
마무리는 씁쓸하게.. 어른들의 뒷모습으로 헤어지는 라이드네요.
오아시스가 해체했을 때.. 노엘이나 리암에게는 처음이지만 앤디는 이미 밴드의 해체를 겪어봤으니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았을까요.. 그냥 어떤 느낌인지 이미 알고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ㅋㅋㅋ 잘보고 가여 ㅋㅋ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봤어요^ㅇ^
라이드 ~
나중에 또 보려구 답글 달아요 ㅎㅎㅎㅎ
글 감사해요!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닼ㅋ!
Anyone Can Play Guitar 는아직개봉안한걸까요?ㅜㅜ.... 아 앤디말하는거이뿌당
올해 10월 31일에 개봉한다고 하네요.. 하지만 한국에 들어올리는 없겠져ㅠ
헐 그럼 어쩌면 들어올지도 ㅜㅜㅜ 들어올거같은데!!! 요즘 기타붐이니까 들어올지도몰라여 는 어거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