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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흘산 산행기
일 시 : 2011년 11월 12일
행 선 지 : 문경 주흘산
산행코스 : 문경새재주차장 - 1관문 - 2관문 - 3관문- 마패봉(마역봉927) - 부봉(917) - 2관문 -1관문 - 주차장
(약 16.5km)
산행시간 : 오전 9시 50분~오후 4시 30분 (7시간 산행)
7시에 교대역에 모여 주흘산을 향해 출발했다. 오늘은 전국 건축사 등산 동호회 행사로 주흘산 산행을 하는 날이다. 몇 주 전 오늘 산행에 참석 댓글을 올릴때부터 온통 회상에 사로잡히는 기분이었다. 그 구간이 바로 전에 걸었던 백두대간의 일부 구간이었기 때문이었다. 8시 5분 우리 일행이 탄 차가 호법 IC인근을 지날무렵 도로에 멈추듯 느리게 움직였다. 막바지 가을 정취를 느끼러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했다. 차창 성애를 닦아 밖을 보니 이미 갈무리가 끝난 밭이 고랑을 드러낸 채 텅 비어 있었다.
9시 45분 주흘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너른 주차장에 벌써 대형 버스가 많이 차 있었다. 앞으로 걸어가니 전국 각지에서 온 회원들이 주차장 언저리 등산로 입구 표지판 근처에 모여 분주히 행사 준비를 하고 있다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잠시 후 산행을 시작했다. 길 오른편에 식당과 기념품을 가게들이 열 지어 서 있었다. 그 안쪽으로 가다보니 다시 주차장이 보였다. 그 입구에 설치된 차단기 옆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 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 산맥의 가장 큰 등즐기인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길은 많지 않았다. 영주에서 원주 쪽으로 연결되는 죽령이 가장 먼저 열렸고 미륵대원을 지나는 하늘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가는 문경의 새재와 추풍령이 열렸는데 조선시대에는 새재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오늘 지나는 새재는 “새도 넘기 힘든 험한길” “새로 난 길”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새재를 이용하는 가장 빈번한 일은 과거 보러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새재와 그를 통과하는 곳곳에는 과거와 관계된 유적과 예기들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다시 안으로 걸어가다 보니 우측 길옆에 선비 상이 보였다. 옛날에 이곳을 지나던 선비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상징적으로 세워 둔 것 같았다. 그 앞에 조각 공원처럼 여러 부조상이 원형 마당을 둘러싸며 난간벽처럼 설치되어 있고 그 바깥쪽 벽면에 ‘선비’ 와 관계가 있는 좋은 글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중 앞쪽에 지봉 이수광(1553~1628) 선생의 글이 눈에 띠었다.
途 中
산길 접어드니 경치는 시 속의 그림이요
냇물 소리는 악보에 없는 거문고 가락이라
길은 멀어 가도가도 끝이 없는데
해는 멀리 서산마루에 걸려 있네
다시 안쪽으로 가니 우측에 신길원 현감 충려비와 옛길 박물관이 보였는데 옛길 박물관은 규모가 너무 커서 오히려 옛길의 정취를 떨어뜨리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조금 더 나아가니 제1관 주흘관이 보였다. 그 좌우로 성벽처럼 둘러쳐진 지형을 이어 성벽을 막아서 방어진지를 구축해 놓은 모습이었다. 성문 앞으로 다가가니 좌측에 공성 장비가 보였다. 성을 지키려는 자와 성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의 치열한 공방전이 연상되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뒤돌아보니 양옆으로 오르는 계단이 놓여 있었다.
새재는 조선시대 한양이 도읍이 된 후로 안동 등 남쪽 지방에서 한양 등지로 원활히 연결되게 하기 위해 길을 찾아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그 길이 결국 적군의 침입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 후 이 곳에는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그리고 제 3관문인 조령관 3개의 관문을 설치했는데 백두대간의 험준한 지형이 곧 성벽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겹겹히 놓인 관문은 새재의 통행을 통제하는 기능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전쟁의 대상이 없는 평시에는 공허하게 느껴지게 한다.
다시 안쪽 길을 걷다보니 좌측 개울 건너에 왕건 촬영 세트장이 보였다. 몇 해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 ‘왕건’을 촬영하며 지은 대규모 세트장인데 그 후 관광지화 된 곳이다. 앞쪽에는 민가들이 있고 뒤쪽으로는 궁궐이 배치되어 있었다. 인근을 지날 때마다 그 광고판을 보곤 했는데 직접 와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 곳을 지나 길이 좌측으로 에둘러 꺽여 지나가게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한동안 호젓한 흙길이 이어졌다. 좌측에는 맑은 개울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올려보이는 주변의 큰 산세가 바로 백두대간이다. 그러한 대간이나 정맥 들은 물줄기로 나뉘지 않고 이어진 곳이기에 옆에 흐르는 물줄기도 대간의 이쪽 저쪽으로 흐름의 골이 다르게 형성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즉 대간 줄기에서 문경 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물이 되고 산마루 너머로 고이는 물은 한강물이 된다.
‘문경세대’로 불리는 이곳은 문경에서 충주 쪽으로 마치 흡입기처럼 깊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애초에는 그 안으로 좌우 지형의 형세에 따라 난 길이 마치 미로처럼 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미로를 더듬어가듯 안으로 들어서 가면 큰 대간 산줄기를 넘어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듯한 흙길로 닦여져 있다. 이 길은 ‘과거옛길’로 불리기도 한다. 바로 영남지역에서 한양으로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다녔던 길이기도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길은 조선 시대 체취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다. 한양이 생기기 전에는 이곳으로 이동하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에 이런 길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아름 알고 오가는 인근 주민들은 있었겠지만 멀리서부터 찾아와 이곳으로 지나가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양에 볼 일이 생기면서 통행량이 많아졌을 것이다.
2관문을 향해 걸으며 전에 백두대간을 지났을 때 급히 꺾여가던 구간 지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희양산을 지난 후 대간 마루금이 책이 접히듯 걲여지는 지점이었다. 대간을 시작한 후 중간을 조금 못 미쳐 지날 때인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심리적으로 점차 지리한 느낌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대간 종주길 에서는 늘 완주의 종착지를 염두에 둔 채 걷게 되고 한시바삐 도중의 구간들을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목적지를 향해 뻗쳐가지 않고 횡보를 하며 늘어지는 구간을 가면서는 심리적인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속리산을 지나고부터 대간 마루금은 우측으로 태백산까지 한동안 갈지자걸음으로 꺾여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안을 향해 걷다보니 우측에 돌담이 둘러쳐진 건물이 보였다. 옆에 표지를 보니 조령원터였다. 그것은 조선시대 때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위해 세워 놓은 것이었다. 대문에서 보니 돌담 안에 건물이 한 채 보였다. 그 좌우에도 더 있었던 듯 초석이 보였다. 그 돌담 어귀에 낙엽이 많이 쌓여 있었다. 옆에 있던 여자분 둘이 땅에 시든 낙엽을 보며 “얼마나 붉었을까” 라고 말했다. 어느새 진 단풍잎마저 색이 갈빛으로 변한만큼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산을 올려보니 대부분 낙엽이 져서 앙상한 모습이었다.
다시 안쪽으로 가는 길옆에 맑은 소가 보였다. 그 곳에 송사리 떼가 스몰 거렸다. 옆에 서보고 계시던 분이 “한 사발 건져서 끓이면 좋겠다.” 고 했다.
좌측에 세워진 주막을 들여다보고 다시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니 우측에 교귀정이 보였다. 그 곳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임무를 인계인수하던 곳이라고 쓰여 있었다.
문경 세새
2011. 11. 12 김석환
걷다보면
우리 강산의 살가운 체취와
이 길을 지나던 사람들의 감회가
내 몸에 절로 베어든다.
그리움과 탄식이 엉겨
켜켜이 쌓여온 역사의 여운...
청운의 뜻을 안고
설렘의 발걸음을 걷던 과거객이나
화들짝한 도임 행차를 하던
경상 감사 부임의 포부도
길 어귀 한편에 아로 새져져 있다.
험지 더딘 발걸음에
먼 하늘로 솟구친 작은 새가
큰 마루 고갯길을 아득히 넘어간다.
그 곳을 지나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산길이 아닌 평평하고 완만한 길인데도 2관문이 금세 나타나 보이지 않았다. 길 우측에 홈통처럼 나무속을 파내고 물길을 만들어 둔 것이 보였다. 나무와 나무 이음부에는 더 통통한 나무를 물확처럼 파내어 물이 고여 흐르게 되어 있는데 그 곳으로 물이 생기 있게 괄괄 넘쳐 흐르고 있었다.
다시 조금 더 올라가니 우축에 폭포가 보였다. 아까 지난 나무통 물길은 바로 그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흐르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앞쪽에 2관문이 보였다. 그 앞은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를 건너가려다 뒷걸음질을 치며 적당한 구도를 잡고 스케치를 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니 너른 공터에서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한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 같은 학생들에게 ‘과거길’로 불리는 이곳이 좋은 체험학습 장소가 될 것 같았다.
다시 안쪽으로 걷다보니 녹음기를 통해 ‘문경새재 아리랑’ 가락이 들렸다.
문경 아리랑
작자미상
문경 새재 물박달 나무
홍두께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께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아기 손길에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 새재 넘어를 갈 재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조금 더 가니 우측에 바위굴을 알리는 화살표를 새겨놓은 바위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 안내표지에 그 바위굴에 얽힌 설화가 쓰여 있었다. 옛날 갑작스런 소낙비로 이 바위굴에 들어와 우연히 만나게 된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을 받자 아버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깊은 산골 주막에서 우연히 자신의 사연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 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 구도에서 이효석 선생이 쓴 '메밀꽃 필 무렵'이 연상되었다.
다시 가다 우측으로 꺽여지는 지점에 ‘이진터’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 곳은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이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이곳에 진을 치고 정탐할 때 대치하던 신립장군의 군대가 충주 달천으로 가 배수진을 치면서 허수아비 초병을 세워 두었는데 그 허수아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위장임을 눈치챈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천혜의 요새 조건을 갖춘 곳에서 지키는 것이 전투에 훨씬 유리했을 것을 미리 적에게 내주는 꼴이 되고 만 것이어서 그 때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곤 한다. 만약 이곳에서 적을 막았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다시 조금 가다보니 우측에 산장 같은 분위기의 동화원이 보였다. 그 앞을 지나는데, 전에 친환경 아카데미 수업에 함께참가했던 이보경 건축사가 안에서 나오다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주변을 보니 경기도 소속의 그 동료 회원들이 함께 가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3관문을 향해 앞서 걷다보니 과거 급제 길이 나왔다. 거기서 좌측의 옛 길과 나뉘어 있어서 좌측 옛길로 들어서니 잠시 후 낙동강 발원지 표지가 보였다. 대개 태백의 황지 연못이 발원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도 그 근원지 가운데 하나여서 그리 표시한 듯 했다.
완만히 경사진 길을 더 올라가다 보니 ‘소원성취탑’이 보였다. 그 돌탑 둘레에는 지나던 사람들이 소원을 빈 듯 소원지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옛날 과거길 에 오른 선비들도 저 소원탑 돌틈에 소원지를 끼워두고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 옆 정자에서는 다른 일행들이 점심을 먹으며 한가롭게 쉬고 있었다. 그 곳을 지나가다 땀이 많이 나서 이른 아침 쌀쌀한 기운에 껴입고 나왔던 옷을 벗어 배낭에 넣으니 배낭이 더욱 불룩해졌다.
다시 올라가다 아까 갈라지던 길이 다시 합쳐진 곳으로 나오니 금의환양길’이라는 표지가 놓여 있었다. 거기서 조금 가다 보니 3관문이 보였다. 대개 관문은 양옆 협곡을 막아서듯 세워지는데 여기서는 백두대간 능선에 세워져 있는데 가장 앞에 놓인 1관문부터 이곳까지는 6.5km 정도나 되었다.
1관문부터 3관문까지 과거 임진왜란때 적이 쳐들어온 길목을 철저히 차단 할 수 있게 해 논 것이었다. 적에게 당한 경험이 이토록 집요함을 낳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관문은 그 후 전쟁을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현대전에서 그 같은 방벽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3관문 앞에서 스케치를 하며 백두대간 종주때 느꼈던 감회를 잠시 회상했다. 깜깜한 밤에 조령산 산행을 시작해 동이 튼 후 아침을 먹고 이곳으로 내려왔었다. 그리고 대간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주흘산을 거쳐 가기 위해 일행보다 앞서 진행했었다. 그 때 대간 길을 지나오다 이곳에 이르러 읍성 어귀 같은 분위기를 느꼈었다. 그리고 호기심에 충주 쪽으로 성문을 들어서니 그 쪽에도 주막시설 등이 안내되어 있었다.
잠시 후 우측의 마패봉을 향해 올랐다. 거기서부터 마패봉까지의 거리는 0.9km였다. 이 길이 바로 백두대간 마루금이다. 길 입구에 대간 길을 표시하는 리본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길에 접어들며 오랜만에 백두대간을 다시 걷는 감회가 일었다. 길옆에는 3관문부터 이어지는 성벽이 뿌리만 남은 채 놓여 있었다. 그 성벽은 조선시대 이전, 삼국시대 때 축성된 것일 수도 있다. 이 마루금이 바로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선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뿌리부분이 당시 고구려 영토 쪽에 다듬어진 것으로 보아서 신라가 쌓았을 것 같았다.
잠시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3관문 건너에 조령산의 윤곽이 안개 속에 희뿌옇게 보였다. 급히 경사진 길을 올라 가다보니 앞서가던 다른 일행이 보였다. 그들이 길을 비켜주어 앞서 걷게 되었다. 잠시 후 마패봉에 올랐다. 표지석에는 마역봉(927)으로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지나쳤던 일행이 뒤따라 올라와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그 일행이 갖고 온 동동주를 나눠 마셨다. 그 중 한분이 북한산을 좋아한다고 해서 반갑게 예기를 나눴다.
다시 이정표를 보며 진행할 방향을 찾았다. 하늘재 방향으로 가다 부봉삼거리에서 2관문으로 가면 될 것 같아 그 곳을 목표로 걸었다. 마역봉에서부터 부봉삼거리까지 거리는 4km였다. 전에 백두대간 종주때 지났던 길이지만 낯이 설었다. 아마 전 구간을 다시 걷는다 해도 눈에 익은 큰 산세와 지리를 제외하고는 그처럼 많은 곳이 낯설게 느껴질 것 같았다. 어두운 밤길을 걷기도 하고 비가 내릴 때 등 시야가 흐릴 때도 많았다.
대간 능선을 음미하듯 한동안 묵묵히 걸었다. 대간 마루금은 가장 높은 지대이지만 그 곳을 걷는 동안은 실감이 잘 나지 않게 되었다. 그저 길만을 하염없이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험준함이 느껴지곤 했다. 걸으면서 부봉까지 거리가 제법 멀게 느껴졌다.
걷다보니 우측 멀리 부봉이 희뿌옇게 보였다. 지나는 길이 험한 편이라 바위를 로프를 잡고 오르내리며 지나는 곳도 있었다. 좀 더 가다보니 우측으로 부봉 연봉이 좀 더 가까이 보였다. 부봉이란 이름은 하늘에 떠 있듯 하다는 의미일 것 같은데 실제 지나며 보는 느낌이 그렇게 느껴졌다. 그 부봉은 제1봉부터 제6봉까지 6개의 봉우리가 연이어 놓여 있다. 지도를 보니 그 연봉을 거쳐 2관문쪽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부봉삼거리에 닿았다. 그 곳은 바로 제1부봉을 오르는 중간 지점이다. 거기서 곧바로가는 길이 하늘재로 이어지는 대간 무루금이고 부봉 정상을 넘어 제2관문으로 나갈 수도 있는 지점이었다.
잠시 후 급경사진 길을 지나 제1부봉에 올랐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안개가 끼어 휠출하게 시야가 펼쳐지는 않았다. 이정표를 보니 2관문까지 길이 제법 멀었다. 연이너 2, 3, 4, 5봉을 지나갔디. 경사가 급하여 큰 바위를 로프를 잡고 오르락 거리는 곳이 많았다. 기암괴석 사이서 홀로 선 소나무와 멀리 배경으로 보이는 산세가 멋진 풍경을 이루는 모습도 보였다.
5봉에 올라 길을 가늠하니 6봉을 거치지 않고 2관문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2관문까지 도착하려면 아직도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2관문쪽으로 가는 동안 맞은편 능선이 보였다. 지금 지나가는 능선과 그 능선이 함께 협곡을 이루고 있었다. 그처럼 위에서 주변을 조망하니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대치하던 형국이 떠올려졌다.
한동안 걷다보니 아래쪽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아까 지났던 새재길이 가까워진 듯 했다. 잠시 후 2관문에 도착해 그리로 들어서던 길을 따라 밖으로 나오다 다시 뒤돌아서 성문을 바라보며 올라올 때 하던 스케치를 좀 더 마무리 했다. 대구 회원 분들이 옆을 지나다 서로 인사를 나눴다.
나오면서 과거급제길 언저리서 만났던 경북 회장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식당 위치를 물어 보았다. 1관문 밖으로 내려오다 좌측에 있다고 했다. 식당까지 거리가 멀었다. 벌써 주변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1관문을 지나서 내려오다 보니 아까 올라갈 때 길가에서 모과 등을 팔고 계시던 할머니가 보였다. 하지만 자리에 펼쳐놓은 고구마 등이 그대로여서 별로 판 것 같지 않았다. 지나쳐 오다 다시 가서 고구마를 사고 식당을 찾아 들어섰다.
식당 정문으로 들어서려니 주인이 식사를 아직 안했으면 되로 들어가라고 했다. 알려준 대로 뒤로 가니 안쪽에도 다른 건물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니 서울 회원들이 어디까지 갔다 왔냐며 어서 식사하라고 자리를 권했다.
빈 좌석에서 앉아 식사를 했다. 앞에 앉은 대구 회원 분들과 식탁위에 놓인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식사를 하고 나오다 보니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행운상에 당첨 되었다면 신종복 사무총장이 잘 포장된 선물을 주었다. 나는 “이게 왠일이냐“며 즐거운 기분으로 선물을 받았다. 연이어 당첨자가 호명될때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렸다.
5시 30분경 식당 밖으로 나오니 땅거미가 몰려오며 금새 어둑해졌다. 타고 온 차령에 올라보니 낯선 분들 4명이 타고 있었다. 이곳에 다른 차편으로 왔다 서울로 올라가는 차편의 편의를 얻게 된 것으로 여기며 인사를 했다. 차가 출발하려던 참에 박형규 대한 건축사 등산동호회 회장이 올라와 살갑게 배웅을 해 주었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뒤에 타신 분들이 제주에서 올라오신 두 회원 부부라고 했다. 전국 행사로 모인 날에 그처럼 다른 지역 회원 분들과 동행한 것도 좋은 의미로 여겨졌다. 주말인데 걱정한 만큼 차가 막히지 않아서 9시경 출발지인 교대역에 무사히 도착해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20111112)
첫댓글 정말로 멋진글''해박한 새재지식'''잘 감상하고 갑니다''''아자아자!!
늘 자연과 역사속에서 새로움을 느끼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안치규 건축사님 이번 행사 치루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태환 건축사님 대간 많이 진행 되셨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즐겁고 안전한 산행길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석환 건축사님의 산행기를 읽노라면, 정말 대단 하다는 느낌과 함께, 반성하는 느낌이 무지 듭니다! 경치는 잠깐이요, 걷는데 억수로 힘들다는건데, 정감있는 글과, 멋진 그림까지....시 한수도 멋지네요 !
졸필과 졸열한 스케치에 별말씀을요... 안건축사님 뵐때마다 항상 침착하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사려 깊은 인상이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