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
【시 원문】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시집 <님의 침묵>(회동서관,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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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가요, 지사요, 사상가요, 불교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애국적이요, 철학적이며, 종교적이다. 그의 시상(詩想)은 불교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고, 달관한 데가 있으며, 뜨거운 정열이 지열(地熱)처럼 산으로 흐르고 있다.
이 <님의 침묵>도 ‘침묵’이란 명상적 용어를 씀으로써 ‘님’을 밤하늘에 말리, 그리고 작게 깜박이는 하나의 별처럼 아득하게 느끼게 하면서도 아름답게 빛나게 하고 있다. 그는 3ㆍ1운동의 33인 중 불교계 대표였다. 3ㆍ1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의 좌절감이 어떠했으랴. 1926년에 발표된 이 시는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과 작가의 경력, 위치, 사상 등으로 보아 단순한 애정시가 아니라, 애국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님이 침묵하는 시대'의 '님'을 잃은 슬픔과 새로운 신념을 노래한 서정시로서, 시집 <님의 침묵>의 전체 주제를 함축한 표제시(表題詩)로서 서시(序詩)의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님'의 상징 의미를 알아야 하며 또 화자는 어떤 원리를 통해 '님'을 잃은 슬픔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여 보다 큰 만남을 성취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
첫댓글 님의 침묵....내가 좋아하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