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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2021년 8월 25일 수요일 새벽
최근 몇 년 동안 천국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30년 전에는 펄시 콜레의 책 ‘내가 본 천국’을 읽으면서 천국이 어떤 곳일까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천국을 생각하고 있다.
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다른 표현이며,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세상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땅’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간구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달라는 소원이며 소명이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시 115:16)고 노래함으로 시편 기자는 그 세계관을 소개한다. 시편 103편의 노래는 하늘의 모습을 좀더 선명하게 그려준다:
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03:19~22
하늘에서 하나님이 그의 보좌를 세우시고 이미 통치하고 계신다. 천군천사들도 하나님께 수종들며 송축하고 있다. 그런데 땅은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송축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선언하며 자기 영혼에게도 권면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늘과 땅은 본래 하나의 쌍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하나 없는 하나는 온전하지 못하다. 사람도 그렇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늘과 땅이 다시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하나님의 경륜(master plan)으로 소개한다: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9~10
하늘과 땅이 통일되는 것은 성전의 이미지를 암시한다. 성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다. 하나님이 거니시는 에덴동산은 성전의 원형이다.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이 앉아 계시는 자리다. 하늘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그리고 하늘을 통치하고 계신다. 땅에는 지성소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통하여 세계를 통치하실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새롭게 된 세상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때 이 세상은 마침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도시가 된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다(계21:1~2). 그렇기에 그 도시에는 성전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다. 이미 온 땅에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충만하여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되었기 때문이다(합 2:14). 마침내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응답되었다!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는 어떤 모습일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모습을 이렇게 소개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로 다투는 세상이 아니다. 천국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이다. 의는 공의롭고 당당하고 진실한 삶이며, 평강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삶이고, 희락은 기쁨 충만한 세상이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공동체 가운데 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0~21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성경말씀이 가리키는 지향점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로 올라가려고 힘쓰라고 가르치지 않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위해 힘쓰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에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을 정의롭고 생명 가득한 땅이 되게 가꾸라는 명령이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우리의 꿈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침내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충만하게 실현하시는 날을 사모한다. 그 날에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며,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실 것이다. 그렇게 낡은 세상이 새롭고 온전한 세상으로 바뀔 것이다. 그 세상을 가리켜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른다. 천국의 완성이다. 이렇게 보면, 천국은 하늘에 있는 세상이라기보다는 땅에서 완성되어야 할 세상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다음 구절들은 우리에게 천국을 천상의 집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을 주의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1~3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우리의 몸(육체)을 말한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나 우리 처소는 우리가 벗은 자들로 드러나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입을 옷과 같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몸이며 썩지 않을 것을 입게 된다는 말이다(고전 15:42~44).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의 이 말씀은 우리가 죽은 후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하늘 위에 어떤 처소(집)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4장도 생각해 보자: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4:1~3
이 본문에 대하여 톰 라이트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의 책,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Surprised by Hope)를 참조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many dwelling-places)이 많도다 하신 뜻이 무엇일까? 이 말씀은 흔히 사람이 죽어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며, 그 이후에 새로운 몸을 입고 다시 부활하게 된다는 의미는 외면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거할 곳’(monai)은 고대 헬라어로 볼 때 최종적으로 거할 곳이 아니라 여행 중에 잠시 머물 곳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께서 우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인,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와 매우 잘 들어맞는다. 오랫동안 오해를 불러일으킨 단어이기도 한 ‘낙원’은 유대인들의 문헌을 보면, 최종적인 종착지가 아니라 축복의 정원이며 편안하게 안식할 수 있는 평원을 가리킨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새 날의 아침이 밝기를 기다리며 기운을 차리게 된다.
이 문장의 요점은 강도의 요청과 예수님의 대답의 명백한 대조에 있다: 강도가 말하기를,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기억해주소서’라는 말은 먼 미래에 있을 일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 미래 희망을 현재로 가져왔다. 즉, 그의 죽음과 함께 하나님 나라는 오게 되지만 그 모습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과는 다를 것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물론 여전히 최종적인 부활은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 누가의 신학적 이해의 전반을 볼 때 여기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예수께서는 결국 ‘오늘’ 즉, 돌아가신 날인 성금요일에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주님과 주님 곁에 있는 그 강도가 바로 그날 낙원에 있게 되리라는 것을 사실로 이해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직 부활은 일어나지 않은 상태다. 예수님과 함께 미래의 희망이 현재로 들어왔다. 믿음을 가지고 죽은 사람들은 최후에 다시 부활하기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바울도 말하기를, ‘내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게 있는 이것이 더 좋다’고 했다(빌 1:23).
‘부활’ 그 자체는 언제나 그 단어가 의미하는 그대로이다. 고대의 이교도들처럼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도 있었고, 고대의 유대인들처럼 부활을 긍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부활이 ‘죽음 이후의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활은 사람이 죽은 후에 즉시 어떤 상태에 있게 되는지와 상관없이 새로운 몸을 입고 일어나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베드로전서 1장 같은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거기에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말할 때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지금 믿으면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는 말인가? 내가 보기에 여기서 서방의 기독교회의 자동적인 가정이 우리를 한참 그릇된 길로 이끌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본문을 읽으면서 생각하기를, 하늘은 우리가 이 ‘구원’을 받기 위해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그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이것은 복음서의 핵심 구절들을 읽을 때 심각하게 왜곡된 틀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나,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들을 왜곡하여 이해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서방세계에서 우리가 지금 그 용어를 이해하는 방식은 예수님과 그 청자들이 이해하고 깨달은 것과 완전히 다르다. 먼저, ‘하늘’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높여서 부르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쌓은 보물’은 ‘하나님 앞에 드린 보물’이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의 상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하셨다(눅 12:21). 그러면 이런 일차적인 의미로부터 생각을 해보면, ‘하늘’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미래에 쓰시려고 저장해 두신 장소가 된다. 그곳은 성도들이 살기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야 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성도들이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다가 땅에서 몸을 입게 되기까지 기다리는 곳이다. 만약 우리가 친구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주려고 냉장고에 맥주를 준비해 두었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가 맥주를 마시려고 냉장고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미래의 유산은, 썩어지지 않을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를 물려받을 새로운 몸인데, 그것은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산이 이 세상이나 아니면 새 하늘과 새 땅, 즉 내가 앞에서 말한 새롭게 된 세계로 들여오게 된다.
우리는 또한 베드로전서 1장이나 다른 본문과 관련하여, ‘영혼’이라는 단어가 초대교회 문서들에서 이런 의미로는 드물게 사용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헬라어 단어 프쉬케(psychē)는 고대 세계에서는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후기 기독교회와 불교에서 공히 자주 사용되기는 하지만, 신약성서는 그 단어를 ‘궁극적으로 구원받을 우리의 일부’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프쉬케는 히브리어 네페쉬(nephesh)처럼 인간의 내면에 있는 비육체적인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개인’이나 ‘인격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 베드로전서 1장에서 요점은 이 ‘사람’ 즉, ‘진짜 우리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어느 날 완전한 육신을 가지고 그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에 구원의 희망을 굳게 둔다.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벧전 1:3).
Wright, Tom. Surprised by Hope: Original, provocative and practical (pp. 164-165). SPCK. Kindle Edition.
위의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톰 라이트는 하늘 또는 우리가 말하는 천국을 안식처와 대기소 또는 저장고 등으로 이해하며, 진짜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부활할 때 새롭게 된 세상에서 누리게 될 세상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천국이라는 말은 다분히 ‘죽어서 하늘에서 누리게 될 행복과 그곳에서 영원한 삶’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바울 등 사도들이 가르치고 소망으로 제시한 하나님의 나라와는 다르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기 시작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우리가 몸으로 부활할 때 새롭게 된 이 땅에서 완성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1. 천국이라는 말보다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하자.
2.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말하기보다는 죽어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표현을 바꾸자.
3. 죽어서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기보다 죽어서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하며,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린다고 하자.
4.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세상임을 분명히 하고, ‘이 땅이 완전한 천국이 되기까지 충성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자.
5. 완성된 천국은 영혼이 누리는 천상의 세계가 아니라,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땅에 내려와 이 땅이 온통 하나님의 성전처럼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충만하게 되는 세상임을 꿈꾸자.
6. 그처럼 완성된 천국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되며, 그 의미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에덴동산의 이미지가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다시 그려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드러낸다.
7. 성도는 죽어 승천하며,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하다가, 재림의 날에 몸으로 부활하여 이 땅으로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활한 성도는 주와 함께 새롭게 된 땅에서 왕 노릇 할 것이다.
8.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처럼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드릴 때마다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자.
9. 이로써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주장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판단하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지향하며,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땅을 생명의 터전으로 가꾸는 일을 위해 지구적 협력과 연대에 동참하자.
10. 마찬가지로 휴거니 재림이니 하며 신자를 미혹하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왜곡된 종말론자들과 도피주의자들을 경계하고 책임 있는 지구시민이자 동시에 천국시민으로 살아가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