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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 2014,08,09.맑음 최규식 경무관 동상;부산시 서구 동대신동에서 출생. 1968년 1월 21일 서울특별시 경찰국 소속의 경무로서 종로경찰서에 재직하던 중에 대간첩작전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옮겼으나 사망하였다. 당시 최규식 경무는 자칭 CIC대원이라는 거동 수상자 30여명이 세검정으로부터 지하방면으로 행진한다는 보고를 받고, 타격대 및 병력 출동을 지시하였다. 같은날 오후 10시 35분경 종로구 청운동의 노상에 긴급히 출동하여 빠른 속도로 행진해오던 일당을 정지시켜 배치경찰관으로 하여금 검문 검색하도록 하였다. 이에 CIC대원으로 사칭한 일당은 검문에 불응하고 최규식 총경의 팔을 붙잡으려고 하였다. 최규식 총경은 이를 뿌리치고 배치 경찰관들에게 이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하자 뒤에 따라 오던 일당이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 와중에 최규식 총경은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계속 현지에서 배치 경찰관을 지휘하며 격렬한 총격전을 전개하다 쓰러지며 간첩 1명을 사살하는 등 필사의 저지로 뒤따르던 간첩들을 분산시켜 청와대 기습을 완전 저지하였다. 그러나 최규식 총경은 부상을 입고 즉시 경찰병원으로 후송하여 치료하였으나 사망하였다. 그 뒤 1968년 1월 25일 공적을 높이 사 태극무공훈장과 경무관으로의 특진이 추서되었다. ) 북소문인 창의문은 자하문이란 애칭으로 널리 불리었다. 숙정문이 항상 폐쇄된 채 제 구실을 못하였기에 이 문이 그 문의 역할까지 도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창의문을 늘상 북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도성의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기에 이용도가 적지 않았다. 이 문 근처에는 자하가 많이 끼였는가 서울 내기들은 세검정 일대를 두고 <자문밖>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창의문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자하문은 4소문 중에서 그 원형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문이다. 등치로는 건축면적 49.587㎡(15평) 안팎의 조그마하지만 매우 단단하고 굳건한 기풍을 풍기는 건축물이다. 동소문 문루에 봉황새를 그려놓은 것이 여타 문과 다른 특색이듯이 창의문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 놓은 것 역시 다른 문과 유를 달리하는 모습이다. 그 까닭은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유사한 상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매달아 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1623) 이귀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북악산은 높이 342m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 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의 낙산(駱山, 125m)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일컬어졌다.
남산에 대칭하여 북악이라 칭했다. 조선시대까지 백악산(白岳山), 면악산(面岳山), 공극산(拱極山), 북악산(北岳山) 등으로 불렸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주로 백악 또는 백악산으로 불렸으며 일부 북악이라고 불렸다.
북악산은 북한산의 남쪽 지맥의 한 봉우리에 해당한다. 산경의 흐름을 보면 한북정맥(漢北正脈)의 끝자락인 북한산 보현봉에서 서남 방향으로 형제봉을 거쳐 북악터널 위의 보토현(補土峴)으로 이어진다. 이어 표고 328m의 봉우리와 팔각정 휴게소 앞 능선을 따라 북악 뒤편에 구준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울의 부주산(副主山)인 응봉(鷹峰)으로 이어져 경복궁의 배산인 북악에 다다른다. 북악산의 식물은 총 208종이고 그 중 나무는 81종이 있다. 교목류는 소나무, 팥배나무, 때죽나무, 산벚나무 등이 있고, 관목류는 진달래, 철쭉, 쥐똥나무, 국수나무 등이 있다. 침엽수로는 소나무가 대부분이며, 활엽수는 참나무 등 여러 종류가 섞여 자라고 있다. 그 외 성곽 주변에 아까시나무, 은수원사시나무, 리기다소나무 등 토사 유출을 막기 위하여 심은 나무와 최근 조경수로 심은 스트로브잣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팥배나무 군락은 숙정문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북악산에서 청계천이 발원하는데, 2005년 11월 종로구청에서 조사한 청계천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고개에 있는 최규식 경무관 동상에서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있는 약수터이다. 또한 북악산 동쪽 촛대바위 부근의 해발 245m 지점(동경 126°58′41.8″ 북위 37°35′34.4″)이 청계천의 최장 발원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인왕산ㆍ북한산ㆍ낙산ㆍ남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장벽의 구실을 한다.
서울 성곽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이 성은 1395년(태조 4)에 궁궐이 낙성된 뒤 같은 해 1월 기공식과 함께 착공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은 성저(城底)를 측정(5만 9500자)하고 이를 97구로 나누어 각 1구를 약 600자로 하였으며, 각 구마다 천자문(千字文)의 글자로 번호를 붙였다. 다시 말하면 북악산의 정상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일주하면서 천(天)ㆍ지(地)ㆍ현(玄)ㆍ황(黃)·……의 순서로 글자를 붙여나가다가 95번째 글자인 조(弔)자에 이르러 북악산에 도달하도록 하였다. 현재도 산 능선에는 옛 성벽이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 북악산 기슭은 왕궁 및 관청과 가깝고, 또 경치가 좋았던 관계로 왕족과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별서가 많았다. 그리고 많은 문인과 화가들은 이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그림과 시문으로 남겼다. 숙정문 북서쪽 약 400m 지점에는 촛대바위가 있는데, 일제 때 이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었고, 광복 후 이 바위의 쇠말뚝을 제거하고 우리 민족의 발전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우며 이름을 ‘촛대바위’라 정하였다. 현재는 쇠말뚝을 제거한 부분이 콘크리트 기중으로 마감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2007년 4월 2일자로 북악산 일대 170필지 3,682,738㎡를 사적 및 명승지 제10호로 지정하였다. 사적 지정 명칭은 조선시대 도성과 도성 축성의 개념인 내사산(內四山 : 백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 보존의 의미를 되살리고, 조선시대 각종 고지도 및 문헌 등 사료에 전하는 ‘백악(白岳)’의 지명을 살리기 위해 “서울 백악산 일원”으로 정하였다. 즉 일제 강점기 이후 불린 북악산이란 이름 대신에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불린 백악산으로 회복시키기로 한 것이다. 북악산 일원은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서울성곽(사적 제10호)과 서울부암동백석동천 유적(사적 제462호), 대은암(大隱岩)과 부아암(負兒岩) 등이 있으며, 한양의 후현무(後玄武), 북쪽 주산(主山)으로서 조선왕조가 도성을 정하였던 정치적 사상과 지형적 기본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鞍部 :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곳)에는 서울 4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 일명 자하문)이 남아 있다. 창의문에서 정릉의 아리랑고개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는 창의문, 팔각정, 풀장 등을 연결하는 관광도로로 울창한 숲과 서울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조망이 좋은 경승지이다. 북악산의 남동쪽 산기슭에는 삼청공원(三淸公園)이 있고, 동쪽에는 숙정문(肅靖門)이 있다. 숙정문은 조선의 도성 4대문 가운데 정북에 위치한 문이며 속칭 북문(北門)이다. 이 문은 태조 5(1396)년 백악산의 동쪽 고갯마루에 세웠는데, 도성 북쪽 방향을 출입할 때 이용하였다. 1968년 1ㆍ21사태 이후 북악산 지역이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던 것이, 서울성곽 백악산(북악산) 일원 전면개방계획에 따라 일차적으로 2006년 4월 1일 숙정문과 함께 삼청터널 북쪽 홍련사(紅蓮寺)에서 도성(서울 성곽)을 따라 촛대바위까지 약 1.1㎞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백악마루 정상에서의 조망 1.21사태;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民族保衛省)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사건.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군 31명은 1968년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金正泰)에게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하였다. 서부 전선의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하여 하룻밤을 숙영(宿營), 19일 밤 8시 30분경 임진강의 얼음판을 횡단, 당시 경기도 고양군 법원리의 삼봉산(三峰山)에서 2일째 숙영을 한 다음,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僧伽寺)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이날 밤 10시 서울시내 세검동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르렀다. 자하문 초소에서 경찰관의 첫 검문을 받게 되자, 일당은 “방첩대원들이다.”,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가자.” 등의 위협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으며 계속 행진하였다. 약 400여m를 더 행진했을 무렵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 병력과 첫 접전이 벌어졌다. 게릴라들이 먼저 자동소총을 쏘며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총경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때부터 게릴라들은 현장을 지나가는 버스 안에 수류탄 1발을 투척, 승객에게 부상을 입히는가 하면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이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되었다. 군경합동수색진은 일당 가운데 김신조(金新朝)를 발견, 생포하는 한편,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그날 밤 게릴라 5명을 사살한 데 이어,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들이 장비한 습격용 무기는 기관단총(PPS) 31정(1인당 1정씩 휴대), 실탄 9,300발(1인당 300발씩 휴대), TT권총 31정(전원 휴대), 대전차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방어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단도 31정(전원 휴대)이었다. 북한 민족보위성은 김일성(金日成)의 이른바 ‘항일빨치산전술’을 근거로 하여 대남적화공작에서 적극적인 유격전 활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결정, 1967년 4월 정찰국 산하에 유격전 특수부대인 ‘제124군부대’를 조직하였다. 이 특수부대는 일반 군부대에서 선발된 척후병·통신병·운전병·특무장(特務長) 등과 제283군부대 및 집단군 도보정찰소에서 엄선된 정예병 2,4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연산(延山)과 상원(祥原) 일대의 8개 기지에 300명씩 분산되어 훈련을 받았으며, 특수교육의 내용은 적배치상황이론, 지뢰 극복을 위한 정찰병 기본 동작, 지형학, 사격, 침투훈련 등이었다. 8개 기지 가운데 제6기지에서 서울·경기도 지역에 대한 유격 파괴공작을 담당하였는데, 1968년 1월 2일 민족보위성으로부터 청와대·미대사관·육군본부·서울교도소·서빙고 간첩수용소 등을 일제히 습격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제6기지 유격대는 장교 25명의 유격대원을 엄선하여 그 해 1월 5일부터 황해도 사리원으로 이동, 노동당 도당청사를 청와대로 가상하고 청와대 정문 사진과 전경 사진을 익히면서 습격훈련을 실시하였다. 1월 13일 정찰국장 김정태는 이 훈련장소를 방문, 독려하면서 습격 대상을 청와대로 지정하였다. 특공대 규모는 처음의 25명에서 31명으로 증원되었으며, 전원 함경도 출신의 장교들로 충원되었다. 이들은 1월 14일부터 이틀 동안 집체 사격훈련을 받은 뒤 남파되었는데, 기습계획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습격시간은 밤 8시이며 당일로 복귀한다. 습격 소요시간은 3∼4분간이며 증원군의 추격을 받지 않도록 한다. ② 습격 전날 북악산 부근에 숙영하여 청와대를 관측, 정찰한다. ③ 전원 사복으로 갈아입고 취객(醉客)을 가장하여 접근, 유격대원끼리 시비를 걸다가 기회를 포착, 청와대 초소를 기습한다. ④ 제1조는 청와대 2층을 기습, 기관단총으로 무차별 사격하여 인원을 살상하고 수류탄을 투척한다. 제2조는 청사 1층, 제3조는 경호실, 제4조는 비서실, 제5조는 정문 보초 및 기타 보초 등을 맡아 살상, 파괴한다. 운전조는 차량을 탈취하여 탈출 준비를 완료한다. ⑤ 습격이 끝나는 즉시 분승하여 문산 방면으로 도주, 그날로 복귀한다. 정부는 사태가 발생한 다음날 국회국방위원회에 사태의 진상을 설명하였다. 또한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되는 사건이 돌발하였다. 1월 24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261차 군사정전회의 본회담에서 유엔군측 수석 대표는 푸에블로호사건과 함께 북한 게릴라 부대의 서울 침투와 그들의 민간인 살상 등 만행을 규탄하였다. 북한측은 한국이 휴전 당사자가 아니므로 1·21사태는 본회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등 무리한 답변으로 그들의 만행을 호도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남북대화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이 사태가 좌경 극렬분자의 행동이었음을 시인하였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의 창설을 서두르게 되었다.
숙정문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위치하였다. 1395년(태조 4)에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왕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마침내 창의문(彰義門, 일명 紫霞門)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東小門)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 두었다. 다만 한재(旱災 :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崇禮門 : 南大門)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서 나온 것으로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하였다.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俗說)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이 문이 음방(陰方 :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조금 동쪽으로 옮겨 세웠는데 이 때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건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76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서울시에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해 문루를 건축하고 ‘肅靖門(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어느 때부터 무슨 이유로 숙정문으로 개칭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종실록≫ 이후 역대 각 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어 숙정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락 없는 암문(暗門)인 것이 특색이다.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창의문을 이에 대신해 흔히 북문이라고 하였다.
한양 도성;일명 설성(雪城)이라고 불렀던 한양 도성은 도읍지의 성이라는 뜻이다. 설성은 이 태조가 눈이 내린 자국을 보고 이 성을 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풍수지리상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이 되는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연결하여 쌓았는데 궁궐, 종묘사직과 관아를 지키고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도읍지의 필수적 시설이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높은 곳은 12m에 이르며 동서남북에 4대문(大門)을 두었다. 그리고 그 중간 중간에 4소문(小門)을 두어 팔괘(八卦) 방위에 배치하였다. 도성은 총 18.9Km이며 태조 4년(1395년) 도성 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서북면, 동북면 등지에서 동원된 118,700명의 장정을 투입하여 1396년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일부 쌓았다. 농번기에 공사를 잠시 중단하였다가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197,400명이 동원되어 완성하였다. 총 공사 기간은 98일이 걸린 셈이다. 남산에서 인왕산까지 32만2천4백 명을 동원하여 석축으로 고쳐 쌓았다. 또 숙종 때는 인왕산 동북쪽에서 낙산까지 쌓았는데 장방형의 돌을 꼭꼭 맞추며 규격이 정연하게 쌓았다. 아주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지금까지 한 곳도 기초가 물러난 곳이 없어 조선 축성술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튼튼한 성벽을 가지고도 전쟁 때마다 한번도 도성을 지켜내지 못해 아이러니 하다. 1910년 조선을 침략한 일제는 서울을 수도로 인정하지 않고 일개도시로 취급하면서 도시계획이란 미명아래 곳곳의 도성을 파괴하였다.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일대의 성벽은 거의 이때 없어졌다. 목은 동쪽이므로 풍수지리 적으로 약한 동쪽을 보완 해주기 위해 흥인(興仁)이라 하고 지(之)자를 더 넣었다. 또 옹성을 쌓아 허함을 보강하였다. 서쪽에는 중국과 통하므로 중국과 의리를 더욱 돈독히 한다는 의미다.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불로서 다스린다는 의미고, 불이 잘 타오르도록 세로로 현판을 하였다. 이 문은 사람의 출입을 위하여 사용한 적은 거의 없이 수 백년 동안 닫혀 있었다. 이 문을 열어놓으면 북쪽은 수기(水氣) 즉 음기(陰氣) 많아 장안의 부녀자들이 풍기가 문란해지고 놀아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도 엄숙히 음기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지었다. 그러나 실제는 이 문이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과 종묘의 주산인 응봉으로 통하기 때문에 지맥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문을 닫아 놓았다. 혜화(혜화)란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인데 여진족의 사신이 출입하던 곳이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한다는 의미에서 이름한 것이다. 여진족 사신의 숙소인 북평관(北平館)이 그 근처에 있었다.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이라고 하였다가 창경궁의 정문 이름이 홍화문이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바꾸었다. 그런데 이 문루 바닥에는 용이 아닌 봉황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 일대에 새떼가 많아서 새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새 중의 왕인 봉황을 그렸다고 한다. 성종 때 부왕인 예종 왕비의 시호를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 하면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소의문(昭義門)으로 바꾸었다. 소의(昭義)란 옮은 것을 밝힌다 또는 덕과 의를 숭상한다라는 뜻이다.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 곤방(坤方)에 위치하고 있으며 의주로 넘어가는 길이다. 조선조 때 도성에서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두 문으로만 관이나 상여가 나가게 되어 있는데 남소문인 광희문과 서소문인 소의문이었다. 북대문은 항상 닫혀 있었고 대신 이 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북문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 건방(乾方)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문 위에는 나무에 새긴 닭을 걸어두었는데 성문 밖의 지형이 마치 지네와 같으므로 지네의 상극인 닭을 메달아 그 기를 누르기 위함이다. 창의(彰義)란 의를 기리고 표창한다는 뜻이다.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 손방(巽方)에 위치하며 도성의 청계천 물이 이곳으로 빠져나가므로 수구문이라 하였고, 서소문과 함께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나가는 문이므로 시구문이라 불렀다. 광희(光熙)란 광명을 뜻하지만 조선왕조 마지막 연호인 광무(光武)와 융희(隆熙) 앞 뒤 글자를 합한 것과 같아 이것이 시체처럼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조선왕조 종말을 뜻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삼청각;1972년 건립된 1970년~1980년 요정정치의 산실로 대표되던 곳이다. 여야 고위정치인의 회동과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손님이 줄어들어 1990년대 중반 이름을 예향으로 바꾸고 일반음식점으로 전환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99년 12월에 문을 닫았다. 문화재 보존여부에 대한 판단문제로 건축허가 결정이 유보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 5월 22일 서울특별시가 삼청각 부지와 건물을 도시계획시설상 문화시설로 지정하였으며, 리모델링 공사를 끝낸 후 2001년 10월 새로운 전통 문화공연장으로 문을 열었다. 운영은 세종문화회관이 맡고 있다. 대지 5,884평, 연건평 1,331평이다. 6채의 한옥이 있으며, 건물마다 원래의 이름을 그대로 살렸다.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연중 전통공연이 열리고 있다. 일부에서는 한국 기생요정문화의 상징인 삼청각에서 외국인을 위한 공연을 하는 것이 요정문화를 부활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산행구간;창의문-백악마루-숙정문-와룡공원-혜화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