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연주대(戀主臺)를 다녀와서!
이젠 노인인구에 속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할 일이 있으면 해야
하는 이유는 건강한 육신이니 자존(自存)하고 있음을 깨닫기
위함이기도 하고 마땅한 투자처가 있어서 수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빈둥빈둥 놀면서 삼식이 노릇을 하자니 안사람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일자리를 찾아 아침엔 출근하고 하루를 의미있게 살았다는 흐뭇한
마음으로 퇴근해서 안온한 가정에 돌아와 쉼을 즐기는 날들이 이어지다가
겨울같은 엄동설한의 시기에는 일감이 동나서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봄
여름에 준동(蠢動)을 하다 겨울엔 동면(冬眠)하듯 집에서 겨울나기를
하자니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신세라. 그런 마음에 위로가 되는 곳을
찾아가야하는데 이제는 또 봄이 들아왔으나 마땅히 할일도 없는데
이 좋은 계절에 무료함을 어찌 달래나 생각을 하다가 다행히 젊은
청춘들이 보기에 노춘(老春)이라고 해도 좋을 사람들의 모임인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사람들의 산행동호회가 오늘도 관악산을
오르는 정기산행을 한다기에 오전 열 시 과천역에 도착하여 동행
하실 열 여덟분들과 함께 과천역 주변의 등산로를 밟아가듯 쉬엄
쉬엄 오르며 아직은 숲이레야 소나무 뿐인 풍경을 이젠 습성화
되버린듯 폰카에 담으며 오르다보니 어느듯 목적지의 정상인 관악산
정상에 올라 신자들의 108배에 불경이 암송되는 연주대에 들어가서
앞이 탁 트인 시야를 관망하고 좁은 내부의 정황들을 폰카에 담고사는
연주대를 나와 일행이 기다리는 관악사지 주변으로 급히 하산하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즐거운 나눔의 시간을 마치고 사당역을 향해가는
하산길은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산우들과 즐거운 이야기로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하며 잊지못할 추억(追憶)을 만드는 행복의 길이었
습니다. 사당역 주변의 보쌈집에서 뒷풀이를 하고 노래방에 가서 여흥을
즐기다가 집에 돌아오니 밤 열시였습니다.
내가 느끼는 한가지 아쉬움을 전합니다. 산행이나 길동무에 가면
폰을 들고 뒷걸음치면서 담아온 사진이 150~200컷 정도가 되는데
동호회 게시판에 선별해서 올릴 사진은 80컷 이하입니다. 좋은 기종의
카메라를 휴대하신 분들의 사진은 안그렇겠지만 저의 사진 선별은 도예가
들이 망치를 들고 가혹하다싶을 정도로 맘에 안들면 가차없이 깨뜨려 버리는
것처럼 더군다나 인물사진엔 심하게 선별을 합니다.그리해서 음악을
삽입하고 글을 쓰고 풍경사진 중심에다가 인물사진을 넣고해서
그 날의 산행이나 길동무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예술성
이 깃들여진 것 같은 게시물을 만들어 올리는데 보시는 분들은
찍힌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고 잘 읽을 수도 없고 동영상
외의 음악은 아예 들을 수도 없는 아주 협소(狹小)한 인터넷 공간인
스마트폰으로 딱 한 번 검색하고선 끝내버립니다. 물론 댓글이나
시급을 요하는 원정행 신청 댓글을 쓸 때는 휴대폰이 필수이긴 합니다.
집에 PC 즉 개인 컴이 없으신 분들은 할 수 없지만 집에 컴이 있으신
분들은 컴으로 보시면서 자신의 얼굴을 확실하게 보시고 음악도
들으시고 웅장한 형태인 풍경도 보시기바랍니다. 전문적으로
사진봉사를 하신 분들의 느낌도 같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관악산 연주암(冠岳山戀主庵)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관악산(冠岳山) 연주봉에 있는 절.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677년(문무왕 17)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관악사(冠岳寺)라 하였다.1392년(태조 1)에는 이성계
(李成桂)가 의상대를 중건하고 그의 처남인 강득룡
(康得龍)이 연주대라고 불렀다. 강득룡·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 등이 이곳에서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연모하면서 통곡하였기 때문에 연주대라는
이름이 붙었다.연주대는 경기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1396년에는 연주암을 신축하였고, 1411년(태종
11)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건하여 중건하였다.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태종의 뜻을
안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효령대군은 유랑 길에 올랐다가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원래의 암자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여 추억과 동경의 정을 끊을 수 없었으므로
현 위치로 절을 옮겼다고 한다.
그 뒤 두 왕자의 심경을 기리면서 세인들이 이곳을
연주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대웅전 앞에는
높이 4m의 고려시대 양식을 한 삼층석탑이 있는데,
효령대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절은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1868년(고종 5)에 명성황후
(明成皇后)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龍華殿)을
중수하였고, 1883년에 대방을 중수하고 기와불사를
하였다. 1886년에는 행문(幸文)이 법당과 나한전을
중수하였고, 1886년에는 역시 명성황후의 하사금
으로 전각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1918년에는 경산(慶山)이, 1929년에는 재운(在芸)이,
1936년에는 교훈(敎訓)이 중수하였다. 1975년송원
(松園)이 대웅전을 신축하였고, 1979년에 연주대와
삼성각을 중수하였으며, 1981년에 요사를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삼성각·선불전 등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
석탑은 고려 후기의 우수한 작품이다.
『명산고찰 따라』(이고운·박설산, 신문출판사, 1987)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서(由緖)깊은 연주대(戀主臺) 사연(事緣)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주봉 중 한 봉우리의 대(臺).
내용
경기도 기념물 제20호. 깎아지른듯한 바위 벼랑 위에 약간의 석축을 쌓고
30㎡쯤 되는 대가 구축되어 있어 이를 연주대라 하는데 거기에는 응진전
(應眞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불당이 꾸며져 있다. 그 뒤에는 우뚝 솟은
말바위(馬巖)이 있어서 이 바위에 올라타면 득남할 수 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왕조 개국 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권유를 듣고 태조는 도읍을 한양에 정함에 즈음해서 이 연주대에 친히 올라
국운장구를 빌며 원각(圓覺)·연주(戀主) 두 절을 짓고 서울을 비치는 화산
(火山) 불길을 진정시키고자 꾀하였다고 한다.
그 뒤 임금 자리를 아우인 세종에게 양보한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효령대군
(孝寧大君)이 이곳에서 놀았다 한다. 이때 양녕대군이 중에게 준 오언절구
“山霞朝作飯 蘿月夜舂燈 獨宿孤巖下 惟存塔一層(산노을로 아침밥을 짓고,
女蘿의 덩굴에 걸린 달이 불을 밝히네. 홀로 외로이 바위 아래 오로지 탑
한층만이 남아있네)”이라는 한시가 명시로 전하며 효령대군은 여기에서
오랫동안 수도하였기에 그의 초상화가 보존되어 내려온다. 세조 때에도
태조 때의 예에 따라 여기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 한다.
과천 관악사지(果川 冠岳寺址)
서울 관악구와 경기도 과천시·안양시의 경계에 있는 관악산
정상에 있는 산지가람(山地伽藍)이다. 《연주암지(戀主庵誌)》
의 기록에 의하면 677년(신라 문무왕 17) 화엄종의 개조(開祖)인
의상이 의상대를 지으면서 함께 관악사를 개산하였다고 한다.
1411년(조선 태종 11) 충령대군이 세자가 되자 양령대군과 효령
대군은 이곳 관악사로 올라가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한다
. 그 뒤에도 효령대군은 관악산에서 2년 동안 머물렀고 관악사를
원래 있던 장소에서 지금의 장소로 옮겨서
가람 40간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적어도 여섯 개 이상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한 번에 지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느 시기에 하나의
가람을 짓고 이것이 장마 또는 홍수에 피해를 입으면 주변으로
옮기거나 바로 그곳에 대지를 만들어 새롭게 가람을 지으면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8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도자기조각, 기와조각이 만들어진 시기가
15세기 전반에서 18세기까지에 걸쳐져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형식을 보여 주며 우리나라의 불교와
건축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2003년 4월 21일
경기도기념물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참조항목▶관악산, 중앙동
출처:(두산백과)
관음사(觀音寺)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관악산에 있는 절.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895년
(진성여왕 9)도선(道詵)이 창건하고 수도하였는데, 고려시대에는
어떠했는지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에서는
전 기간에 걸쳐 관음사가 존재했음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해서 『범우고』·『가람고』·『여지도서』 등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그리고 예로부터 관음사 아래에 있는 ‘승방벌’
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 앞에 승방고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관음사의 사세가 컸음이 짐작된다. 1863년(철종 14)에
행념(行稔)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김문근(金汶根)에게
1,000금을 희사받아 중수하였다.
1924년에는 주지 석주(石洲) 등이 대방(大房)을 중건하였으며, 1925년
에는 요사채를 중수하였다. 1929년에는 태선(泰善)이 칠성각을, 1930년
에는 산신각을 신축하였고, 1932년에는 용화전(龍華殿)을 신축하였으며,
1942년에는 극락전을 중수하였다.또한, 1982년에는 주지 종하(鍾夏)
가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993년 지하 강당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러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삼성각·용왕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연주대 가는 길
이석정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노래
지구레코드 ( 1970
끝없이 불러봐요 그대의 이름 어찌하다
슬픈 사연 간직 했던가 찾아내여 찾아서
만나야 할터인데 그리워서 울어요
아 ~ 연주대 가는 길은 멀기도 하오
구름에 물어봐요 그대 계신 곳 어찌하다
기약없는 이별 했던가 가신 그님 차라리
잊어야 할터인데 그리워서 울어요
아 ~ 연주대 가는 길은 멀기도 하오
관악산 연주대
경기도가 과천 관악산 연주대, 여주 신륵사, 화성 입파도
홍암 등 3곳의 '명승지' 지정을 추진한다.명승지는 자연경관이
뛰어난 명소나 역사ㆍ문화적 가치가 높은
지역을 문화재청이 지정한다.
19일 경기도에 따르면 문화자원 보존과 우수 관광 자원 확보
차원에서 '명승' 지정에 힘쓰기로하고 이들 3곳에 대한 명승
지정 추진을 관련 시ㆍ군과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도가 이번에 명승 지정에 나서는 화성 입파도 홍암, 관악산
연주대, 여주 신륵사는 그간 수려한 경관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