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세대의 시각차가 사회와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로 확전되는 양상을 띤다. 특히 종교에 대한 의견차는 쉽게 좁혀지기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세대간의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 예술만큼 좋은 장치는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렘브란트(Rembrandt)의 그림을 본다고 치자.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렘브란트는 평생을 성경그림에 헌신한 화가였고 기독교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우리가 렘브란트를 살핀다면 그의 삶과 예술의 구심점인 진리체계에 대해 알게 되고 그가 어떻게 수많은 명화를 제작해냈는지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 것이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보며 “복음서 전체가 그속에 담겨있고 내 인생 전체가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의 <큰 잔디 덩어리>(1503)는 마치 거목을 그린 것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가 보여준 자연세계에 대한 충실한 관찰은 훗날 망원경에서 현미경까지 인간의 시각을 향상시키는 발전을 가져왔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뒤러가 이렇듯 잔디 하나하나를 세세히 그린 것은 창조주가 지으신 세계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야생화, 백합 등의 식물과 부엉이, 산토끼, 코뿔소, 다람쥐, 심지어 사슴벌레의 자태까지 묘출하였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적극 지지한 화가답게 그는 피조계를 지으신 창조주의 황홀한 솜씨에 매료되었다. 연필 또는 수채로 그린 그림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사고를 활짝 열어준다.
그런데 문제는 예술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건만 정작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저조하다는 사실이다. 지각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위의 세상에 대하여 항상 열려 있어야 하며,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에도 등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즉 세상과 동떨어진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다른 세대와 소통하려면 매개물이 필요한데 예술을 멀리하면 할수록 그만큼 기회의 폭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인근의 전시장을 방문하여 작품을 감상하고 그 소감을 서로 나누면 어떨까.
캐나다의 미학자 시어벨트(Calvin G. Seerveld)는,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스토리를 말씀하는 것을 기뻐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 ‘무지개’를 만든 것을 기뻐하셨고 성령님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예술적 선물’을 주신 것을 기뻐하셨다고 했다. 시어벨트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무지개’나 성령님이 주신 ‘선물’이나 ‘비유들’을 자의적으로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우리의 몫이란 예술이 인간에게 어떤 도움을 주며, 주님이 왜 이러한 달란트를 우리의 피조계에 허락하셨는지, 과연 예술이 거룩한 ‘무지개’의 성격을 보유하는지 아니면 ‘신기루’로 그치고 마는 것인지 하는 물음 따위이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나온 회화로 정물화의 첫 시도로 불리운다. 그중에서도 ‘바니타스 정물화’의 대표적인 화가 피테르 클레이즈(Pieter Claesz)는 <해골이 있는 정물>(1630년경)(그림2)에서 으스스한 화면을 선보였다.
탁자 위의 해골도 그렇지만 꺼진 촛불과 엎질러진 유리컵, 시계 등은 일제히 전도서의 ‘헛됨’(Vanitas)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해진 고서는 지식이 다른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임을 암시한다. 이 그림이 12년 휴전 기간 말(1619년 경)에 제작되어 전쟁의 공포와 관련되어 있다거나 네덜란드에 창궐했던 페스트 공포 때문에 제작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제일 유력한 근거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대비하여 세상 유혹과 욕망을 경계하라는 당시의 기독교적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면서 우리의 삶과 현실, 그리고 내일, 지상적 삶 너머에 대해 토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그림들은 은유와 암시의 풍부성을 잃어버림으로써 무미건조한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예술품이 관객의 지식 정도를 측정하는 ‘감독관’처럼 변질해버린 경향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예술을 경시하거나 멀리하는 이유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꾸준히 “왜 예술은 영적인 동경과 영원한 질서에 대한 비전을 상실하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면서 현대 문화의 딜레마에 대한성찰과 열띤 논의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의 양식 이면의 가치체제인 문화를 떠나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이럴 때에 기독교 세계관은 소통을 위한 튼튼한 기반을, 미술작품은 소통의 통로를 제공하게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