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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6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누가복음 18:1-8
하나님도 그렇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루어 질 것을 믿으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21:22) 물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씀 하신적도 있으니, 한 구절만으로 이런 정의를 쉽게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애타게 간구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구하는 모든 기도가 정말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 모든 목회자들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우리 교우님의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목회자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모든 기도가 항상 원하는 대로 응답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중환자실에 누운 환자와 가족을 위해 목회자들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지만, 모든 환자가 다 회복하고 일어서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까운 병상 곁에서 정말 무기력하게 서있었던 경험을 가진 목회자들은 “기도가 정말 이루어집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그리고 그 대답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믿고 기도했더니, 원하는 응답을 얻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가 이런 말을 만들었습니다. “가끔씩 개입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러야겠다고 말입니다. 직장에 어렵사리 취직하거나, 중요한 시합에서 승리했을 때, 혹은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에 자기의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외국의 낯선 도시에 차를 몰고 들어가서 주차를 해야 하는 데, 정말 한 군데도 주차할 곳이 없어서 십여 분 째 빈 자리 하다 달라고 기도하면서 빙빙 돌다가 겨우 한 자리를 발견했을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외친 적이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이런 때 자동반사적으로 외칩니다. “하나님께 감사!(Gott sei Dank!)”
오늘의 주제인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의 결론부분에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두시겠느냐?”(7절)라고 말입니다. 그 의미는 “끈질기게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응답을 받지 못한 기도는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고만 것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기도와 응답에 대한 “최종결론”을 내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서론 부분에서 이미 다 드러났지만, 기도와 응답은 다 생각하기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드리려는 말씀은, 지금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드러나는 기도의 의미입니다.
이 비유를 읽고 나면, 이 비유가 매우 압축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크게 열려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한 마디로 해석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주인공이 둘 중 누구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아주 끈질기게 달려든 과부 여인이 주인공일까요? 아니면, 하나님도 그리 하실 것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행동한 재판관이 주인공일까요? 그리고 이 비유가 끈질기게 요청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교훈을 주는 비유일까요? 아니면, 결국 믿음이 이 세상에 부족해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결론을 낸 것은 아닐까요? 8절에서 이렇게 주님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우선 우리는 누가복음의 언어에 주의해야 합니다. 과부가 재판관에게 요청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과부란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누군가에게 그나마 있던 자기의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에게 집요하게 요구합니다.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뉘앙스가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원수를 갚아달라는 말로 들리니까요. 원어인 에크디케오(εκδικεω)는 사전에 보면, “보복하다”는 뜻도 있지만, “변호하여 보호하다”는 뜻도 있고, “권리를 요구하다” 또는 “구출하다”의 뜻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과부가 당한 억울한 사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빼앗긴 것인지, 아니면, 억울한 행패를 당했는지, 혹은 과도한 모욕을 당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재판관에게 와서 이 사건을 바로잡아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끈질긴 요청을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요즘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변호사가 주인공인 경우가 세간의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사실 법을 잘 아는 전문가는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데 매우 중요한 인재입니다. 요즘 드라마 중에 <천원짜리 변호사>라는 것이 있는데, 그 설정 자체가 재미있습니다. 그는 변호비용으로 단돈 “천원”만 수령합니다. 그러다보니 힘없고 돈 없는 의뢰인들이 드라마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천원짜리 변호사”는 통쾌하게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제가 봐도 참 멋있는 사람입니다. 도처에 그런 법조인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나오는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6절에서는 아예 이 재판관을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낱 가난한 과부의 요청 따위는 귓전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하도 귀찮게 요청하고 또 요청하니까 결국은 과부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상황에 대하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라.”(6절)라고 말입니다. 재판관의 행동을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재판관이 혼자 중얼거린 말은 이것입니다.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5절) 그러고 나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말하면, “하나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도 이 재판관의 말과 똑같다는 뜻이지요.
결국, 이 과부와 재판관 비유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권리 회복을 끈기 있게 요청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의 정황은 억울한 일이 회복되기를 소망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끈기 있는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억울한 일들 때문에 내가 겪는 고통 가운데에서도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끈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또 궁금합니다. 누가복음 18장 앞부분인 17장 20절 말씀은 바리새파사람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18장에 나오는 이 비유는 억울한 현실에 살면서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이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기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총독이나, 헤롯 가문의 분봉왕들이 자기들 편한 대로 다스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존경해 마지않는 종교지도자들에게도 보호를 받지 못하는 백성들이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끈기 있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평화를 위해 계속해서 끈기 있게 기도하지만, 더 많은 전쟁의 희생자들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나치에 저항하다가 체포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베를린 테겔(Tegel)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기 직전 체코 국경에 있는 플로쎈뷔르그(Flossenbürg)로 이감되어 처형당했습니다. 그때 쓴 기도를 보면,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기도는 그의 목숨을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부터 끈기 있게 기도해야할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의 삶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청하고, 구하고, 두드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때로는 좌절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계속 믿는 것이다.”(Fred Craddock, 에모리 대학교 신약교수) 기대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더라고 인내하면서 끈질기게 기다리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그 끈기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믿음이란 상대방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맞지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과부 여인이 그 재판관의 무관심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면, 그것은 신뢰를 접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포기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깊은 속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접는 순간, 하나님은 내가 그 마음을 버렸다는 것을 아십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신앙에서 신뢰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신앙의 세계에서 나와 하나님은 서로에게 “신실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하신 말씀은, 그 불의한 재판관이 오래 시간을 끈 것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을 걱정하는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가 사라지게 될 것을 염려하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과부여인처럼,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그러나 도움의 길과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라와 민족의 안타까운 현실로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전 지구적인 문제도 되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를 모두 고려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과 같은 기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다가 중간에 지친다고 멈출 수 있겠습니까?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 멈추지 않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러시아의 침략을 비난하던 사람들이, 유럽의 에너지 부족문제가 현실화되고, 엄청난 물가상승으로 인해 경제적인 압박의 고통을 당하기 시작하자, 이제는 끝까지 버티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전쟁이 끝나게 해달라는 기도여야 하지, 자신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늦지 않게 우리를 도와주실 것을 포기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빠른 응답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가 기도로 참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억울한 과부의 끈질긴 요청 앞에서 불의한 재판관도 마음을 열고 말았는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는, 당연히 주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날까지 믿음을 잃지 않는 끈기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평화목 교회 교우 여러분들께서는 그런 기도의 과정 속에서 이미 우리 마음에 다가오시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맛보고,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가시기 간절히 기원합니다.
첫댓글 거의 많은 기도가 구복적인 것 입니다
하느님은 개개인의 기도를 다 들어줄 여유가 없읍니다
이 우주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데 어찌 여유가 있겠읍니까?
우리는 기도가 당장 응답 받기를 원하기 보다는 그런 고난은 우리의 일상에 있을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담담하게 견디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기도를 하면 좋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