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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역사와 문화 II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에라스무스가 알을 낳고 루터가 이를 부화시켰다'라고 말 할 수 있다. 네덜란드의 인문주의는 흔히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으로 대표되었다. 1477년 성서가 네덜란드어로 번역되면서 기독교 비판은 급속히 네덜란드지역에 확대되었다. 칼 5세의 통치시기 종교개혁운동으로 인한 신교탄압은 너무도 유명한 것이었다. 16세기초 빈부격차와 물가상승등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네덜란드인들은 자연스럽게 신교운동를 받아들였다.
특히 루터의 카톨릭과 면죄부에 대한 비판이 전해지면서 루터주의가 확산되었다. 루터주의를 신봉한 1523년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승 2명이 안트워프에서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루터주의는 1524-5년 독일 농민전쟁이후 '오로지 신앙'만을 위한 신앙의인론에 입각한 현실타협적인 방향으로 '성찬형식론자'로 나타나게 되면서 근면하고 정직한 네덜란드인은 이를 반박하게 되었다. 주로 도시의 상류층, 지식인들이 이를 숭상하였다. 반면 하층시민, 노동자, 농민등 뿌티 부르주아지에게 급속히 퍼진 것은 제세례파였다. 그들은 상업적인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바탕으로 계급투쟁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들은 천년왕국론을 신봉하고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침례파 교도였다.
네덜란드 각지에는 루터,쯔빙글리, 캘빈, 제세레파등 모든 신교의 물결이 넘쳐났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는 이러한 반 카톨릭세력에 대한 대대적으로 가혹한 탄압을 지속적으로 가하였다. 1521년 칼 5세는 보름스 의회를 통해 신교탄압을 공식으로 천명하고 네덜란드에 종교재판제도를 도입하여 수많은 신교도를 처형하였다. 특히 1550년 그의 포교는 '피의 포교' 불릴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부의 네덜란드인은 황제의 칙령을 무시하고 1540년 중엽이후 켈빈주의로 무장하고 이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발전과 쇠퇴
필리페 2세의 시대
1555년 종교회의의 결과 당시 55세의 칼 5세는 그의 아들 필립 2세에게 스페인과 일부 네덜란드지역(벨기에 지역 포함)의 통치권을 승계한다. (칼 5세는 면죄부판매를 비판하는 루터를 보름스에서 직접 심문한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유했던 이 지역은 강력한 황제의 군대를 유지하는 재정적 보루가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항시 스페인 군대가 주준하여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이고 카톨릭을 국교화시켰다. 필립 2세의 이복 여동생 Margaethe는 1559년부터 1567년까지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군림하였다. 북부의 대다수의 중산층은 캘빈의 영향을 깊게 받고 타락한 카톨릭과 합스부르크왕가에 대항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물론 신교의 탄압과 과도한 세금징수는 16세기 후반이래 30년 종교전쟁이 끝나고 1648 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가 독립할 때까지 80여년 동안 필리페 2세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독립 전쟁의 주 원인이 되었다.
한편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절대주의는 칼 5세의 아들 필립 2세 (필리페 2세)(1556-1598)때 전성기를 누리고 쇠퇴하였다. 칼 5세가 신교탄압에 실패하고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가 이루어지자 자신의 영지였던 스페인과 스페인영 네덜란드, 나폴리왕국 그리고 기타 유럽 및 해외식민지을 필리페 2세에 물려주고 수도원생활로 여생을 마감하였다. 필리페 2세는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지중해세력 장악에 나서 터키세력과의 전쟁을 치뤘다. 그는 '무적함대'를 통하여 1565년 말타와 1571년 베네치아영 키프로스에서 승리하고 레판토해전에서 결정적으로 터키세력을 물리쳤다. 1580년 그는 포르투칼을 병합하여 '스페인 왕의 영토는 해가 지는 일이 없고, 스페인이 움직이면 전세계가 두려워한다.'라는 역사가의 말처럼 절대주의의 황금시대를 이뤄냈다. 당시 막대한 부와 재화가 해외식민지로부터 스페인에 흘러들어왔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 예술을 보호하는 군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이래 국가가 보호하고 방관하던 해적행위는 스페인과의 자존심 대결로 나타났다. 특히 F. Drake드레이크가 이끈 해적선단의 행위는 스페인의 식민지 멕시코를 유린하였고 스페인의 무역과 상업에 큰 피해를 주었다. 따라서 1588년 필리페 2세는 카톨릭의 세계 통일과업을 수행할 목표로 리스본에 정박하였던 무적함대를 동원하여 영국을 타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국의 해군력은 근대적 기술을 바탕으로 전근대적인 무적함대와는 달랐다. 결과적으로 무적함대의 패배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결정적인 쇠퇴원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강력한 해군국가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고, 스페인의 국제적인 위치는 현저하게 낮아졌다. 이후 30년전쟁을 계기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는 재기를 노렸지만 프랑스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베스트팔렌의 강화로 스페인의 영지인 네덜란드의 독립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에 많은 이권 (자메이카, 덩케르트의 할양등)을 양보하였다. 또한 이탈리아의 스페인 영지였던 나폴리왕국도 1647년 마사니엘로 Masaniello 폭동으로 지배권이 흔들렸고, 포르투칼에서도 독립을 위한 반란봉기가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결국 스페인은 '거인의 해골'에 불과한 몰락의 길을 제촉하였다. 따라서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영광은 막을 내리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와 프랑스 부르봉가의 전성시대가 도래하였다.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필립 2세 (필리페 2세)는 1559년 부류셀을 떠나 스페인 합스부르크 통치시대를 열면서 터어키세력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하는 강력한 군주로 군림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은 필립의 이복 누이 마르가레타(Margaretha van Parma)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녀는 주로 귀족층으로 구성된 국가위원회의 자문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가장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평민출신 대주교 흐란벨러(Granvelle)였다. 같은해 '교회 재조직령'이 발표되자 귀족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왜내하면 교회법과와 신학교를 졸업한 이들만 사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64년 귀족들은 동맹을 맺고 대주교의 사퇴를 필립에게 청원하여 흐란벨러를 퇴진시켰다. 이로써 네덜란드 지역은 점차로 대귀족들의 지배가 강화되었지만 캘빈주의를 신봉하던 소귀족들과 중산층 시민들의 불만은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 이시기 캘빈주의는 네덜란드지역의 빈곤층에 크게 확대되어있었다.
필립 2세는 마침내 1565년 몰타해전에서 투르크를 크게 격파하고 다시금 신교세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통해 네덜란드의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당시 신교세력을 대변하던 빌럼은 (자신의 후원세력은 신교파 소귀족들) 국가위원회를 통해 신교탄압에 대한 관대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캘빈파는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을 카톨릭세력의 우상숭배와 부패때문이라고 믿게되면서 더욱 더 반스페인 합스부르크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1566년 식량난에 허덕이던 빈민층의 켈빈교도들은 서플람스지역(벨기에)를 필두로 플란더런, 부라반트, 아르테시아지역에서의 성상파괴운동을 확대시켰다.
마르가레타는 군대동원대신 임시적 유화책으로 농촌지역에 대한 신교의 예배를 허용하여 사태를 무마하려하였지만, 반란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마침내 그녀는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 진압하면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신교의 지도자 빌럼(오렌지공 Willem 1세)은 독일로 망명하여 재기를 노리게 되었다. 그러나 1567년 필립 2세는 네덜란드지역의 신교를 뿌리뽑을 작정으로 무자비한 새로운 총독 Alba 공작을 임명하고, 스페인의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저항세력을 탄압하였다. 알바공은 폭동재판소를 설치하여 1100명을 사형시키고, 9000명는 궐석재판으로 처형키로 결정하였다. 이 때 에흐몬트백작와 호른백작등 금양모기사단의 지도자도 처형 당하였다. 따라서 네덜란드의 귀족동맹은 남부의 이탈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켈빈파 귀족은 스스로 'Geusen: 거지들' 이라 칭하며 무력항쟁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의 종교적 독립전쟁은 본격적인 막을 올렸다.한편 1568년 윌렘의 군사적 저항은 초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독일 Nassau: 낫사우에 망명하여 재산을 처분하고 용병을 통한 반 스페인투쟁을 전개하였지만 준비부족등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알바공의 탄압정책이 심화되자 저항운동은 남부의 카톨릭세력을 포함하여 범국민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총독은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를 통해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등 시민들의 경제사정은 심각하였다.
80년 독립전쟁의 경과
스페인 합스부르크에 대항하여 실질적인 전과를 올린 세력은 '해상거지들(Watergeuzen)'이라 불리던 해적들이었다. 그들은 스페인 선박은 물론 프랑스,독일, 영국등에서도 많은 노략질을 행하였다. 1572년 필립2세가 강력하게 영국의 해적행위를 규탄하자 엘리자베스 여왕의 명으로 영국에서 추방된 1100명의 해상거지들은 26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마스강 어구의 Briel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사테는 오히려 네덜란드인의 대 스페인 항전을 전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되었다. 당시 독일측은 반 스페인세력으로 윌렘을 지원하였고, 프랑스의 신교도도 이에 가세하였다. 영국의 엘리자 베스 1세는 초기에는 방관하다가 점차 반 스페인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네덜란드세력과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후원속에서 캘빈주의로 무장된 네덜란드인은 북부 도시를 중심으로 국민적 총력전을 전개하여 나갔다. 그들은 마스강 유역을 평정하고 , Haarlem을 방어하면서 스페인의 함대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중추세력이었던 홀란드와 제이란트의 주요도시인 암스테르담, 후스등 교역의 퇴조를 염려하여 적극적인 가세를 미루었다. 그러나 1572년 7월 빌럼은 자치의회를 통해 홀란드주의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총력전을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1573년 카톨릭에서 캘빈파로 개종하면서 더 많은 지지세력을 확보하였다. 할렘이 함락되면서 스페인의 군대는 점차 재정적 악화로 무력화되고, 필립 2세는 유화책으로 알바공을 실각시키고 온건파 레스퀸스(Resquens)를 신임총독으로 파견하였다. 독립세력은 1574년 Leyden시 방어전에서 끝까지 선전하여 결국 스페인군대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75년 홀란드 주요 군사전략지였던 Leiden에 최초의 네덜란드 대학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1575년 레스퀸스가 곧 돌연사하자 스페인군대는 폭동을 일으켜 안트베르펜등지에서 방화, 약탈 및 8000명의 양민을 학살하는 '스페인 광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남부 의 벨기에인을 포함한 전 네덜란드인들은 증오심이 폭팔하고 독립에 대한 새로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1576년 남북의 네덜란드인은 종교와 민족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적 스페인 세력을 축출키위한 헨트 'Gand' 협약을 체결하였다. 빌럼은 홀란드와 제이란트의 총독으로 인정받고 칼뱅교도의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한편 필립 2세는 이복동생 돈 후안(Don Juan)을 네덜란드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유화책으로 스페인군대의 철수시키려 하였지만, 카톨릭이 유일한 네덜란드지역의 종교라고 공표하였다. 이에 홀란드와 제이란트드의 캘빈주의자가 반발하자, 필립 2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정책을 계속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는 네덜란드인의 저항이 강화되는 원인이 되고, 마침내 후안은 사임하게 되었다. 필립 2세는 유능한 군사전략가이며 외교관이었던 마가렛트의 아들 알렉산더 파르네세 (Alexander Farnese)을 새 총독으로 임명하여 네덜란드를 카톨릭국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적 변화로 1579 년 북부 지역의 7개주 (Geldern, Holland, Zeeland, Utrecht, Friesland, Overyssel, Groningen) 대표들이 연합하여 Utrecht 동맹을 맺고 독립을 위한 연대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파르네세(A.Farnese 1545-92)는 남부 네덜란드인과의 교섭을 벌려 아트레히트(Atrecht)연합을 결성시켜 남부지역(지금의 벨기에지역)을 스페인의 통치지역으로 남게하였다.(남부의 스페인-네덜란드지역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결과로 나타난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영지가 되었다).
1580년 빌럼이 지도하는 반란세력은 필립 2세를 '기독교의 파괴자'등으로 내몰면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들은 1581년 '결별선언문'을 통해 필립 2세를 군주로써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스페인세력은 북부 네덜란드의 독립열망을 방해할 수 없었다. 필립 2세는 프랑스와 연합을 계산하여 새로운 네덜란드 총독으로 프랑스 앙리 2세의 막내아들 앙주공을 임명하였다. 1581년 북부의 7개주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앙주공은 1583년 안트베르펜을 무력침공하는등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자, 네덜란드 연방공화국과 스페인 세력간의 전쟁이 속개되었다. 1584년 스페인세력에 의해 Willem이 암살되었고, 같은해 앙주백도 프랑스로 귀환되고 죽게되었다.
파르네세는 1585년 안트베르펜을 다시 함락시켜 남부 네덜란드에서의 스페인 통치를 공고히 하였다. 이에 저항하였던 지식인, 상인과 종교세력은 북부의 네덜란드지역을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주세력은 후에 황금의 17세기를 청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588년 마침내 7개주로 형성된 네덜란드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이로써 더 이상의 외세에 의한 통치는 모두 거부되었다.
한편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는 영국과의 해전에서 패배하여 스페인 필리페 2세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실상 필립 2세는 포르투갈정복에 성공한 이래 네덜란드보다 더 로마교황와 이교도문제로 괄목하고 있던 엘리자베스의 영국을 제압하는 일이 우선시하였다. 1588년 영국원정을 위해 사령관 파르마공이 대기하고 있던 던커크(Dunkirk)에 도착한 무적함대는 크게 지쳐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해군이 130척의 무적함대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면서, 폭풍과 함께 영국원정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특히 영국의 선박은 기능면에서 낡은 스페인 함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무적함대의 패배로 네덜란드의 독립은 더욱 공고히 되었다.
이후 필립 2세는 1590년대 종교분쟁에 휩싸인 프랑스와의 3차례 전쟁을 통해 프랑스의 카톨릭세력의 약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특히 Willem의 아들 Mauritz(1567-1625)는 홀란트와 제이란트의 총독이자 총사령관으로써 유능한 군사적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1590/91년 유트레히트, 헬더란트, 오버에이썰의 총독도 겸하면서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었고, 브레다전투등 스페인군대에 승리하였다.
1595년 프랑스의 앙리 4세는 네덜란드, 영국과 동맹을 맺고 스페인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1596년 이러한 삼국동맹을 통해 네덜란드를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하는 최초의 조약도 체결하였다. 1598년 필립 2세는 사망하면서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였다. 스페인의 후계자 필립 3세는 지도력이 부족한 군주였다. 당시 33세의 마우리츠는 네덜란드의 상인을 보호할 목적으로 던커크의 해적들을 소탕하는 원정에서 승리하였다. 이에 그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1603년 에리자베스여왕의 사망으로 영국의 튜더왕가는 왕통이 끊기고, 스튜어드가의 제임스 1세가 등극하였다. 친카톨릭적인 그는 스페인과 조약을 맺자, 프랑스도 네덜란드의 통치권에 간섭하고자 하였다. 1607년 필립 3세는 재정을 도모할 목적으로 스페인 함대를 동원하여 네덜란드를 정벌코자 하였지만, 네덜란드 함대에 무참히 패배하고 말앗다. 결국 1609년 스페인은 12년간의 네덜란드와의 휴전에 합의하고 사실상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황금의 17세기
네덜란드의 상공업은 남부 안트워프의 모직물생산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이는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이었다. 따라서 16세기 상업의 최대중심지는 이미 증권거래소가 있었던 엔트워프였다. (1531년 동판화에 증권거래소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있다.) 이곳에서는 증권거래와 물품매매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매일 수천척의 배와 수레의 물품이 교환되었다. (예: 에스파니아의 레이스장식, 베네치아의 유리제품, 잉글렌드산 주석 동방의 향료, 플란더스의 미술품, 골동품 등)
그러나 북부 네덜란드지역은 1648년 네덜란드로 독립하여 남부와는 다른 독자적인 상공업 체제를 이루었다. 북부지역은 특히 해수면보다 낮은 저지대에 제방축조사업을 통해 발휘한 정신을 바탕으로 어업과 해운업을 발전시켜 해상왕국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들은 이미 15세기 한자동맹과 패권 경쟁을 하였고, 16세기까지 지리상의 발견으로 이들은 대서양, 북해, 발트해에 이르는 해상권을 바탕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는 열악한 조건속에서 경제적 번영을 이뤄낸 '근대사에 하나의 기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16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경제력은 장기간의 독립전쟁에도 불구하고 크게 신장되는 시기였다. 당시 상공업이 번창했던 남부지역으로부터 종교박해를 피해 망명한 이들을 통해 막대한 부와 기술 및 노동력이 북부지역으로 유입되면서 모직,견직의 직물공업과 제당 및 조선업등 산업이 크게 발전되었다. 이후 네덜란드인은 신대륙과 동남아시아의 해상식민활동과 동방무역을 통해 세계 제 1의 해상왕국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맞게 되었다.
80년 독립전쟁으로 당시 소금등을 비롯한 기존 무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포르트갈과 스페인은 쇠퇴하고 네덜란드는 새로운 무역과 상업의 중심 해상국가로 부상하였다. 네덜란드의 식민지경략은 북미,남미에서도 이뤄졌지만 주력은 동인도지역이었다. 1602년 네덜란드인은 동남아시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스페인과 포르투칼 상인의 독점권에 도전하고 쟈바.수마트라,몰루카등지의 상권을 확립하였다. 1619년 그들은 그곳에 Batavia를 건설하여 동남아경략지를 마련하였다. 1626년에는 지금의 뉴욕에 New Amsterdam을 건설하였고. 1641년 말레니지아의 Malacca지역에 상업적인 요새를 구축하였다. 또한 이후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1648)를 개척하여 중계무역을 바탕으로 동양의 해상권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국제무역을 통한 상업자본의 축척은 네덜란드가 사회적 분업을 촉진시키고 시장교환경제를 발전시켜 초기 공업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는 세계대전이후 식민지는 모두 독립하고 카리브해 연안의 안틸레스 제도만 네덜란드 속령으로 남아 있다.)
17세기 초 암스테르담은 Schelder강이 봉쇄로 안트베르펜(안트워프)가 항구의 기능을 상실하자, 네덜란드 최대의 항구로 발전되면서 교역과 산업(조선업, 어업, 염업, 직물업, 제재업등)의 중심지역할을 하였다. (당시 인구는 10만명 수준) 또한 1609년 이도시에는 북유럽 최초의 공립은행이 설립되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동인도회사를 위한 금융업무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암스테르담은 '독점적 집산시장:(Stapelmarkt)'의 중심지로 대규모적으로 수입품을 저장, 가공, 생산하여 수출하면서 세계적인 상업과 무역, 금융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나갔다. (암스테르담에는 1613년 주식시장이 개설되면서 외환업무의 기능도 크게 확대되여갔다.)
네덜란드인들은 16세기 후반(1583년 Jan Huygen, 1595년 C. de Houtman, 1598년 O.van Noort등)이 인도로의 모험항해를 통해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과 해외시장개척으로 대결하였다. 1602년 올던바르너벨트(Johan van Oldenbarnevelt)는 유럽인 최초로 현재 다국적기업의 역할과 비슷한 유한회사 성격의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동인도와의 교역확대는 물론 대스페인세력과의 투쟁을 목표로하였다. 이러한 동인도회사는 의회로부터 독립성을 인정받고 특히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자카르타에는 바타비아(Batavia)라는 중요한 교역사무소가 설립되어 실론,일본, 남아프리카등의 동인도회사와 연계하였다. 회사경영은 17인위원회를 통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네덜란드내에는 암스테르담등 5개의 교역소가 설치되면서 인접국과의 수출입등 중계무역이 성행하였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및 많은 식민지 경략에 성공하여 급속히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인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시민사회를 성숙시켜 나갔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새로운 르네상스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은 과학적, 합리적, 실요적인 르네상스 정신을 바탕으로 미술 및 건축등 예술분야와 사상, 언론, 학술, 자연과학등의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인쇄술은 유럽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17세기는 황금의 시대만은 아니었다. 네덜란드는 1620-60년대 지속적으로 나타난 흑사병의 공토에 떨어야하였다. (예; 1636년 암스테르담에서 총인구 12만명중 17000명이 흑사병으로 죽었고, 1664년에도 전체주민의 12-15%가 사망하였다.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였다.(1636년 Haarlem에서는 사망률이 20%이상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미신이 만연해지는등 민심이 혼란케되고,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어 수 많은 외국인이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내분
네덜란드는 독립전쟁이후 정치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계를 이루지 못하였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연방국가로써 7개의 지방분권세력의 연합에 불과하였다. 7주의 대표자로 구성된 전국회의 (개최지:헤이그)도 제 기능을 발휘 할 수 없었다. 사실상 군사권을 장악한 국가원수에 해당되는 네덜란드의 총독직책은 윌렘이후 오렌지가에 세습되었다(윌렘, 모리츠, 헨드릭). 특히 정치경제적으로 공화국의 절반이상을 차지하였던 홀란드주는 공화주의를 채택하고 총독의 권한강화를 반대하였다 (공화국 초기 지도자 J. Oldenbarnevelt: 1547-1619; J.Dewitt: 1625-72) 사실상 네덜란드는 오렌지가 중심의 중앙집권적 군주제를 지지하는 귀족과 농민세력과 지방분권적 공화제를 지지하는 도시의 상공업자세력등으로 2분화 되었다. 따라서 정치는 연방제를 중심으로 유능한 지도자가 필요하였고 또한 타협과 대화의 원칙이 요구되었다.
17세기 초 Leiden대학의 신학교수 Franciscus Gomarus: 호마루스와 Jacobus Arminius: 아르미니우스간의 운명예정설을 놓고 벌어진 논쟁은 국내의 분열을 촉발시켰다. 다수파를 대변하였던 호마루스가 모든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에게서 점지된 것으로 주장하였다. 반면 아르미니우스는 운명예정설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이라 반박하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나 선택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캘빈주의는 물론 에라스무스의 인본주의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대립은 급기야 종교회의가 소집되면서 유트레히트 연합내부의 정치적 분열을 야기시켰다. 1610년 올던 바르너벨트의 중재로 종교논쟁은 금지되었고, 1614년 의회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결정을 하게되었다. 그러나 영진영의 불신이 깊어지면서, 마우리츠를 지지하던 호마루스파는 교회에 일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홀란드주의 지도자 올던바르너벨트가 이를 묵살하자 종교분쟁은 정치적 대결로 변모하였다. 결국 1619년 마우리츠는 올던바르너벨트를 국가반역죄로 다뤄 사형에 처하면서, 정치적 분쟁은 호마루스파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의 강화
12년간의 스페인과의 휴전기간 동안 국제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마침내 1618년 전반부에 유럽 전체는 종교적 국제전쟁으로 신구교의 제후들이 충돌하였던 30년 전쟁(1618-1648)의 소용돌이에 휩쌓이게 되었다.
개신교세력의 지도자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합스부르크군대에 패배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하자, 스페인은 네덜란드 침입을 감행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앙리 4세의 죽음으로, 영국은 제임스 1세의 친 카톨릭세력으로 네덜란드와의 동맹관계를 이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스웨덴(1614)과 덴마크(1621)과 동맹관계를 맺고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한편 1621년 스페인의 필립 3세가 후사없이 사망하고 알베르투스(스페인-네덜란드 총독)마져 사망하자, 모든 권한이 필립 4세(알베르 투스의 아들)에게 계승되었다. 스페인의 육군과 해군은 예상외로 강력하여 네덜란드군은 패배를 면치 못하였다. 1625년 홀란드의 지도자 마우리츠가 죽자 스페인군은 브레다를 점령하여 승리하게 되었다.
1625년 핸드릭(Frederik Hendrik)이 마우리츠의 후계자가 되어 5개주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마우리츠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는 영국과의 동맹을 맺고 스페인해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점령된 도시들은 하나식 해방시켜 나갔다. (이로써 핸드릭은 '도시의 해방자'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1627년이후 필립 4세는 무리한 이탈리아원정을 통해 막대한 재정적, 군사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제 네덜란드를 위협하였던 스페인세력은 더 이상 공격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는 구교세력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를 지원하면서 막대한 국력을 소비하였기 때문이었다.
1629년 9월경 고립되고 포위된 스페인군대는 네덜란드에 대패하였다. 사실상 네덜란드의 항전비용은 네덜란드상인이 스페인 '은함대'을 공격하여 약탈한 금은보화로 충당되어졌다. 스페인 세력은 이후에도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163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공수동맹을 맺자, 스페인 육군과 해군은 여지없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639/40년 스페인은 마르마다의 패배와 포르쿠갈의 분리독립, 카칼로니아의 반란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다. 결국 1642년 스페인의 도자 구즈만은 네덜란드로부터 스페인 군대를 철수시켜야만 하였다. 1646년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함께 해적행위의 온상이었던 던커크를 점령하므로써 스페인의 잔재를 털어낼 수 있었다.
30년 전쟁의 결과가 베스트팔렌조약(1648)으로 나타나 스페인 합스부르크가는 결정적인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네덜란드의 독립은 공인되었다. 30년 전쟁은 오랜 종교개혁의 투쟁의 종착역이었다. 이제 유럽은 평등한 독립주권국가의 새로운 원칙에 따라 근대적 국민국가가 출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물론 네덜란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1646년부터 시작된 스페인과 네덜란드사이의 평화조약이 1648년 5월 15일 뮨스터에서 조인되므로써 80년간의 독립전쟁도 종료되었다.
사실상 독립전쟁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였고, 이는 네덜란드의 도시에서 부를 축적한 신흥귀족과 부유한 무역상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647년 헨드릭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빌럼 2세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그는 네덜란드 7개주중 6개의 총독을 겸하였다. 다만 1650년까지 프리즈란드는 독자적인 총독을 유지하였지만 빌렘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평화조약은 스페인왕이 네덜란드를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정복지였던 동,서인도지역의 항해가 금지되며, 스페인왕이 독일 황제가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노력할 것을 규정하였다.
유럽최초의 국제회의로 불리는 Westpfalen의 강화에는 국가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자연법사상에 근거한 국제법원칙이 크게 반영되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국제법 창시자 그로티우스(Hogo Grotius: 1583-1645)는 1625년 그의 저서 '전쟁과 평화의 법'를 통해 국가적 종교적 대립을 초월한 전시,평시를 막론한 자연법적인 국제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렘브란트와 스피노자
17세기 네덜란드의 문화는 칼뱅주의와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다양한 '시민문화'였고, 네덜란드인은 자유와 종교를 배경으로한 예술을 사랑하였다. 17세기 르네상스 회화는 북유럽의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바로크미술을 통해 다시 꽃을 피웠다. Rembrandt (1606-69)는 “세기의 화가”로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화풍을 철저히 이해한 당대 최고의 천재화가였다. 그는 형식미, 화려함을 배제하고 자연과 인간의 순수성에 몰입한 사실주의, 자연주의자였다. 풍속화와 집단초상화에 능하였던 렘브란트의 기법은 드라마같은 회화의 완성으로 빛과 원근법을 통한 역동성을 잘 표현하여 근대회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유명한 렘브란트의 작품의 하나인 '야경꾼'는 혼돈속에서 미를 추구하는 당시 네덜란드인의 시대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렘브란트와 더불어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사실주의화가는 Frans Hals였다. 그의 작품의 하나로 유명한 '이삭과 그의 아내'가 있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종교전쟁이후 공화주의 국가의 상징이었다.(1648년 당시 인구 15만명). 따라서 1655년에 위대한 건축가 깜뻔 (Jacob van Campen)에 의해 건립된 시청사도 권위로부터 탈출을 상징하는 단순한 건축물이었다. 또한 네덜란드의 회화는 종교화를 기피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대중미술의 시대로서 상업화 판매가 성행하였다. 작품은 주로 칼빈주의에 입각한 청빈, 엄격한 서민 생활, 도덕적 타락에 경고를 주제로 담고 있고 집단초상화가 유행되었다.
한편 16세기에 플랑드르화단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누린 루벤스는 종교화, 신화화를 통해 특히 카톨릭의 반종교개혁의 주제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대가로써, 그의 작품에서 보여준 곡선미와 현란한 색체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의 고향 엔트베르펜 성당의 “마리 드 메이시스의 생애”라는 작픔과 남편 '앙리 4세의 승천'은 세계 최대의 벽화중의 하나이다. 또한 벨기에출신 Van Eyck: 판 다이크(1599-1641)는 궁정화로서 초상화 인물화의 대가로서 17세기 런던화단을 지배하였다. Gend 대성당에는 그의 작픔 “신비한 어린양”이 있다.
17세기 위대한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포르투칼계 유대인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범신론자로 그의 저서 'Ethica'를 통해 데카르트주의와 종교적 열정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그의 사상은 영국의 경험론자 로크, 흄등과 독일 관념론자 칸트와 라이프니쯔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루이 14세와 네덜란드
유럽 최대의 절대주의 군주였던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네덜란드로 그의 지배권이 확대되길 원하였다. 그는 1659년 피레네 화의조약에 따라 스페인 국왕 필립4세의 장녀 Maria Theresia와 혼인하였다. 1665년 필립 4세가 죽자 그는 스페인영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의 상속권을 주장하였다. 사실상 루이 14세는 필립 4세의 차녀와 두 번째 결혼을 하여 아들 (후에 찰스 2세로 즉위)를 낳았다. 1667년 프랑스군은 스페인영 네덜란드에 침입하여 여러 도시를 점령하였다. 1668년 프랑스군이 네덜란드 국경지역 프랑슈-콩테를 점령하자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무역전쟁을 중단하고 영국,스웨덴과 3국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하였다. (사실상 17세기 상업과 무역의 헤게모니를 둘러쌓은 영국과의 대립은 1652 ~ 1667 년 두번에 걸친 해전으로 나타났고, 영국은 승리하자 새로운 해상왕국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결과는 루이 14세의 후퇴로 1668년 Aix-al-Chapelle조약이 체결하고 프랑스군은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국경지역의 11개 도시를 제외하고 철병하였다.이후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관세부과등 대립적인 정책으로 나아갔다.
한편 루이 14세는 스웨덴과 영국을 포섭하여 네덜란드와의 3국동맹체제에서 분리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672년 프랑스군이 전격적으로 네덜란드 국경을 침입하자 22세의 젊은 오렌지가의 윌리암공(윌렘공)이 지도하는 대규모 방위전쟁(1672-78)이 벌어졌다. 네덜란드는 수세에 몰리자 신성로마황제 레오폴드와 부란텐부르크의 선제후, 덴마크, 스웨덴, 영국등이 네덜란드를 지원하면서 프랑스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루이 14세는 1678년 Nijmegen, Nimwegen, Nemeguen조약으로 네덜란드 정복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프랑슈-콩테등 주요 전략적 도시는 계속 점령하였다. 영국이 1688년 명예혁명으로 오렌지공 윌리엄을 국왕으로 추대하므로서 프랑스는 더 이상 네덜란드를 경략하기가 어려워졌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네덜란드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적자 없이 죽게되자, 그는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공 필립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유언을 하였다. 이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의 단절을 의미하고 프랑스 부르봉가의 스페인 왕위계승을 의미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1701년 유럽의 실질적 지배자를 자처한 루이 14세는 또 다시 스페인영 네덜란드을 침입하자 네덜란드은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사보이등과 동맹을 맺고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 시작되었다. 1702년 영국왕 오렌지공 윌리암 3세가 죽자 Marlborough공 John Churchill(1560-1722)은 프랑스군을 1704-9년까지 네덜란드에서 몰아냈다. 마침내 1713년 Utrecht 조약이 성사되고 부르봉가는 스페인의 왕위계승권을 인정받았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합병하지 않는 한 루이 14세의 손자 필립 5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할양받게 되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국경 남부의 중요한 요새지역을 확보하여 프랑스의 재침을 방지하게 되었고, 또한 Scheldt강 무역의 독점권도 인정 받았다. 당시 영국은 전톤적인 유럽의 세력균형주의에 입각하여 프랑스를 강력히 견재하고자 하였다.
나폴레옹의시대
프랑스혁명으로 1795년 대불동맹에 가담하였던 네덜란드 공화국은 나폴레옹 군대에 항복하여 1796년 바파비아 공화국이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1세는 그의 동생 루이 나폴레옹을 구 스페인령 네덜란드(벨기에)국왕으로 임명하고 입헌군주정을 실시하였다. 나폴레옹의 1814년 엘바섬 탈출이후 백일천하의 위세는 여전하였다. 그러나 그의 군대가 워터루지역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대패함으로써 나폴레옹시대는 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