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애(千永愛) 시인
1968년 경북 경산 출생
1998년 <문예한국>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 『나는 너무 늦게야 왔다』
대구 달서구 월성동 월성우방아파트 102동 1409호
빗살무늬토기
- 천영애
햇살이 어른거리는 무늬라지. 몸 가득 내리쬐는 햇살, 어머니 분홍치마에도 내 아이의 꽃무늬 치마에도 가득히 쏟아지던 햇살. 천 개의 희망이 어른거리고 천개의 울음이 어른거리던 아가리 캄캄히 벌린 그릇으로 폭우 내리듯 쏟아지던 햇살. 빗살무늬 토기를 그리던 수 천년 전 도공의 머리 위에도 햇살은 아득히 내리쪼였을 테지
비틀거렸을 햇살, 휘청거리며 통곡 했을 햇살, 가난한 도공의 손이 떨리고 햇살을 그리는 마음에 비가 내렸을테지, 담을 곡식 하나 없는 마음으로 빚어야 했던 그릇. 어머니 낡은 저고리 위로 쏟아지던 햇살을 담아 지극한 마음이나 담아둘까. 달빛과 바람을 지나 간신히 도공의 손에 닿은 햇살. 햇살을 잡아 그릇에 담는다
어머니 분홍치마에 내리면 좋을 햇살, 내 아이의 꽃무늬 치마에 닿으면 좋을 햇살.
길
- 천영애
산으로 가는 길과
바다로 가는 길과
내 몸 속의 길이 다르지 않다
산으로 바다로 가는동안
내 몸 속에도 길 하나 생겼으니
바람은 모조리 길로 들어온다
사는 일은
내 몸 속에 길 하는 내는 일이었으니
그 바람 모두 갈무리하는 일이었으니
소나기
- 천영애
난데없이 하늘 울고
비 쏟아진다
화사하던 능소화 꽃잎 위로
하늘이 쏟아진다
캄캄한 하늘
마당에서 물방울 튕겨오르고
이제 비로소
사는 일 가벼워진다
길 가 약국
- 천영애
20여년전에도 같은 먼지를 쓰고
타락한 여인처럼 길가에 앉아 있던 약국 하나
덜커덩거리는 낡은 미닫이 유리문이
긴 세월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은 소읍의 길 가
사람은 가도 풍경은 그대로인가
좀처럼 문이 열리지 않던 길 가 오래된 약국은
지금도 그때의 간판을 지붕에 걸친 채
약국 주인은 이제 손님에게보다 자신이 먹을 약을
더 많이 조제해야 할 것이다
몇날 며칠이고
20여년만에 보는 약국의 익숙한 풍경이 신기해
그 집의 문이 뽀얀 먼지를 툴툴 털고
덜커덩 열려 세상과 말을 시작할까 하여
살펴보아도 드나드는 이 하나 보이지 않는 그 약국
어디에선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듯도 하여
살펴 보지만
숙천약국 옆의 숙천 반점 옆의 숙천 이발소
세월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은
낡고 촌스러운 간판들이 지금도 그렇게 배짱좋게 버티고 있음은
끊어지지 않는 우리의 목숨, 그 질기디 질긴 인연들
그 탓일게다
가을
- 천영애
드디어 너를 미워하여도 좋은 계절이 왔다
바람이 거리를 뒹굴고
나뭇잎들 바람에 실려 정처없는
차디찬 계절이 드디어 왔다
헐벗은 몸으로
거리를 다녀도 좋을
속절없는 계절이다
너를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여도 좋을
이 속절없는 계절
마음껏 소리 질러
이 헐벗은 마음을 위로해다오
너를 미워하는 것을 축복해 다오
그 동네
- 천영애
그 동네에 들어가면
가난이 무엇인지, 지독한 가난이 무엇인지
그대도 알게 되리라
자판엔 쭈그러진 과일이 팔리고
시골 오일장에서나 팔릴 옷들이 거창한 옷걸이에 걸려 팔리고
땟국 흐르는 포장마차에선
그보다 더 땟물이 흐르는 아이들이
거리낌없이 오뎅을 먹고 떡볶기를 먹는
그 동네에 가면
오늘 내 생이 얼마나 안온했는지 문득 알게 되리라
자정이 가까워도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들은
하릴없이 문구점 앞 불꺼진 오락기 앞에서
작동하지 않는 자판을 두들기며
두려운 밤을 보낼 것이다
어미들은 무참하고 무참한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아비들은 싼 술내를 풍기며 여기저기 뒹구는
아파트 앞 나무 아래에서는
아직 젖가슴이 채 여물지 않은 아이들이
선채로 키스를 나누고
사랑을 배울 것이다, 몸으로 나누는 사랑을 먼저 배울 것이다
전기가 없는 집에는 싸늘한 냉기를 몸으로 막으며
오랜 밤을 견딜 것이겠지만
가난이 그들을 절망케 하는 것은 아니었다
헤어날 수 없는 그 지리멸렬한 가난쯤은
이제 이골이 나지만
작동하지 않는 자판을 두드리는 아이의 멀지 않은 그 날
몸으로 나누는 사랑을 먼저 배우는 아이들의 내일의 사랑이 두려운 것이다
공원조차 싸구려로 변해 버린 그 곳에는
이 밤에도 잠잘 곳을 찾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추석 지난 달빛, 그 달빛을 품으며
채우지 못한 성욕을 위해
서로를 탐닉하고 그들의 정자와 난자에서 만들어진 아이들은
달밤에나 길을 나설 것이다
희망조차 죄가 되어버린
좁고 남루하고 누추한 동네
기찻길
- 천영애
기차가 달리지 않는 기찻길
푸른 풀들이 달린다
강을 거슬러 산을 오르던
기적소리 끊어진지 오래
쓸쓸한 기찻길 따라 강변을 달리면
한때 기차에서 손 흔들던 단발머리 학생의
야무진 꿈이 그립다
흐르는 모든 것은 멈추나니
기차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고
강물만 철길 따라 유장하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