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18:19-25 하나님의 심판과 공평 22.9.18주일낮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평’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권이 바뀌고 사람이 바뀔 때마다 기대감이 있습니다. 투표할 때마다 기대가 큽니다. 그러나 늘 기대감에 미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실망하게 되고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닙니다. 미국이나 영국도, 프랑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도 완전한 인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정치인, 완전한 지도자도 없습니다. 오직 완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온전하시고 흠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세계 평화를 내세우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세계 단일 정부를 꿈꾸는 단체인 프리메이슨, 일루미나이티에 속한 자들은 완전한 인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완전한 재판관, 완전한 해결자, 완전한 치료자, 완전한 구원자, 완전한 인도자가 되어주길 원하여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신에 버금가는 인간, 신과 동일한 인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희망과 기대와는 달리 이러한 것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헛된 교만일 뿐입니다. 과학문명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자연의 질서와 세상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고 벗어나려고 하지만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살고 구원받는 길입니다.
오늘 에스겔 18장에서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공평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먼저 사람은 각각 자신의 죄로 죽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19,20절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않고 각각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될 것을 말합니다. 2절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주를 먹으니 아들도 이가 시리다는 속담이 있지만 3절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할 것을 말씀합니다. 흔히 말하는 연좌제! 아버지가 빨갱이면 아들도 빨갱이, 아버지가 노비면 아이들도 노비가 되는 법, 과거에 대역죄인은 3족을 멸했습니다. 여태까지는 이 속담을 썼지만 이후에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언제부터입니까? 예수님의 대속 죽음이후부터 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으로 인한 죄, 즉 원죄를 우리 주님이 십자가 죽음의 형벌을 담당하므로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을 대신하심으로 죄 값을 다 치루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담의 죄만 아니라 우리 개인의 죄(자범죄)도 다 담당하셨습니다. 내 죄만 아니라 부모님의 죄도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죄가 더 이상 연관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각각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습니다. 죄를 사함 받은 것은 개인의 신앙으로 됩니다. 즉 아들이 죄를 지었는데 어머니가 대신 회개 기도한다고 아들이 용서받고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기도가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기도로 하나님이 아들의 마음을 움직여 뉘우치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교회 가자고 하면 우리 집사람이 교회 열심히 다녀서 내 죄도 대신 회개하니까 나는 집사람 치마 붙잡고 천국 가면 된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 아들딸을 교회 잘 다니게 했으니, 매일 가서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나한테 좀 봐주실 거라고, 나한테도 지분이 있는데 설마 지옥에 보내겠느냐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약속은 성경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죄 문제는 각각입니다. 회개도 각각입니다. 각각 돌이켜 회개하고 각각 예수님을 영접해야 구원받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 때문임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 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한 죄 용서받고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들이 예수님을 잘 믿어도 아버지의 죄가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공의도 자기에게 돌아가고 죄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각 회개하고 각각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나를 용서하신 나의 구주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그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실 재판장이신데 심판을 앞둔 하나님의 마음이 본문에 드러나 있습니다.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23절입니다.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세상에 죄악이 만연하므로 심판을 행하실 때도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 직전까지도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2절에도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마땅히 죽을 죄인이라도 그대로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나처럼 원수라고 멸망받기를 원하여 내버려두는 분이 아닙니다. 니느웨이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기 시작하니까 요나는 도리어 배가 아프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때 요나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욘4:10,11) 너는 수고도 재배도 아니한 박 넝쿨도 아꼈거늘 내가 좌우를 분간 못하는 저 십이만이나 되는 생명을 아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오른편 강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강도로서 당연한 형벌을 받고 죽어가지만 오른편 강도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회개함으로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강도의 구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강도라도 그대로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도 돌이켜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또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도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며,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며 잔치를 베풀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못마땅해 했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과 형제 마음의 차이입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이라도 그 죄로 인해 심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죄인이라도 돌이켜 살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결론은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천사들 앞에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겔22:30이하에도 보면 하나님이 성을 심판하려고 할 때도 그 성을 막아서서 무너지지 않게 할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이 당시에 이스라엘의 상황이 어떠했느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찌꺼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연금술사들이 금을 뽑아내고 남은 찌꺼기, 은과 동을 뽑아내고 남은 찌꺼기라고 이스라엘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비록 그런 찌꺼기 같은 이들이 죄를 범하고 사는 성을 심판하려 할 때도 그 성벽을 막아서서 무너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자를, 심판을 말리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며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의 심정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3.또한 24절입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이 말씀은 즉 우리가 회개하고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살며 심고 쌓은 것이 있다할지라도 다시 세상 가운데로 돌아가면 심어놓은 것이 헛되고 쌓다가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열심히 충성하다가도 어느 순간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떠나버리면 그동안 쌓아둔 공력은 불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일 잘 한 사람들이 이스라엘백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잘 쌓다가도 무너뜨리고 돌아왔다가 떠나고,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한결 같이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과거에 어떤 죄를 쌓았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죄를 다 무너뜨리고 덮어버리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다시는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43:25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1:18에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라고 합니다. 도말하다는 말은 덧칠하다는 말입니다. 언제 이렇게 덧칠해주십니까. 우리가 회개할 때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믿음으로 쌓은 것을 무너뜨리는 자가 아니라 죄를 무너뜨리는 자가 되길 축복합니다.
4.끝으로 하나님의 공평에 대한 말씀입니다. 25절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29절에서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 자기 길이 공평하지 않으면서 주의 길을 탓합니다. 즉 바르지 않다고 자를 탓하지 말고 자기 눈을 탓해야 합니다. 내 눈을 자한테 맞추려고 해야지 내 눈이 자보다 더 정확하다고 우기면 되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바르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마치 군함이 등대를 향해 비켜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럼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세상의 법으로 우기려 하면 되겠습니까.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도 도리어 자기가 옳다고 우겼습니다. 바리새인들도 늘 자기들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틀렸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저울에 달아보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저울에 달아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바른 저울입니다. 때로는 다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지만 우리가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고 높고 깊어서 오묘하기 때문입니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이해할 수 없듯이 인생이 어찌 영원을, 영원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틀렸어도 하나님이 틀린 것이 아니라 인간이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심판하심도 공의롭습니다. 공평하게 판결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따르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