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내전 발생
16세기 말에 영국에는 가톨릭교를 바탕으로 칼뱅과 루터의 개혁 신앙이 혼합되어 있는 영국 국교회 신앙을 철저히 개혁하려는 청교도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청교도들은 가톨릭 예배 의식과 사제들의 복장, 사제의 면죄 행위 등을 폐지하고 종교의식을 간략하게 개혁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국왕과 의회가 정면 대립하면서 1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영국 전체가 청교도 혁명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게 되었다.
시기 : 1642년
인물 : 찰스 1세(Charles I)
새로운 왕조
1603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됐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정식으로 합병됐으나 스코틀랜드의 의회와 군대는 독자적으로 유지됐다. 제임스 1세는 권력 욕구가 강한 전형적인 전제군주였다. 그는 의회를 무시한 채 권력을 휘두르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국왕의 낭비와 사치스러운 생활로 엘리자베스 1세 때만 해도 금은보화로 넘쳐나던 왕실 국고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자연스레 의회와 국민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1625년에 제임스 1세가 병사하자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즉위했다. 찰스 1세는 말더듬이에다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의 아버지 못지 않게 사치스럽고 권력에 집착하는 인물이었다. 찰스 1세는 제임스 1세의 방식을 고스란히 따라했다. 왕실의 상품 독점권과 우선구매권, 매관매직 등의 정책을 남발했으며, 의회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세금을 징수했다. 선대 국왕들이 충실히 준수하던 대헌장마저 휴짓조각처럼 내팽개치고 말았다. 의회 귀족들은 제임스 1세보다 한층 심한 전제 정치를 펼치는 찰스 1세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의회가 국왕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서 의회와의 갈등이 격렬해지자 찰스 1세는 맞불 작전으로 의회를 아예 해산시켜 버렸다. 찰스 1세는 중세기부터 시작된 의회정치를 완전히 폐기하고 1629년부터 11년동안 한 번도 의회를 소집하지 않은 채 전제 정치를 펼쳐 나갔다.
내우외환
의회를 해산한 찰스 1세는 사사건건 자신의 일을 반대하던 의회가 사라지자 마음이 홀가분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는 사회 변화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은 행위였다. 당시 영국에는 점차 청교도 숫자가 불어나는 상태였다. 청교도는 본질적으로 잉글랜드 국교도로서 잉글랜드 국교에 남아 있는 가톨릭의 전통을 완전히 없애고 종교의식을 간략하게 하려는 청교도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왕의 권력은 신이 내린 것이라며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찰스 1세로서는 국교회에 간섭하고 세력을 키우는 청교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청교도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찰스 1세가 총애하는 윌리엄 로드(Willam Laud)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면서 분쟁의 소지는 더 커졌다. 윌리엄 로드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틀을 지키되 가톨릭교회의 전통회복을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로드는 매우 완고하고 전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청교도 수장을 잡아다 귀나 코를 자르는 악형을 서슴없이 가했다. 하지만 결과는 청교도 과격파들의 목소리만 키워준 데 지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639년에 윌리엄 로드는 국교회의 힘을 늘이기 위해 급진적인 청교도인 장로교가 세력을 떨치는 스코틀랜드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기에 반발한 스코클랜드가 반란을 일으켜 잉글랜드 북부 지역을 침공했다. 상비군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데다 외국 용병을 고용할 돈마저 없었던 찰스 1세는 패전을 거듭하다 마지못해 스코틀랜드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내전 발생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패한 사실은 한 나라의 국왕인 찰스 1세의 자존심을 짓밟고 말았다. 분을 삭일 수가 없었던 그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왕실의 국고는 텅 빈 지 오래였다. 결국 전쟁 준비에 필요한 군자금을 거두기 위해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의회의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1640년 마침내 11년 만에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의회는 국왕의 군자금 요구를 무시한 채 그동안 참아왔던 불만을 터뜨리며 스코틀랜드와의 휴전을 요구했다. 이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찰스 1세는 불과 3주 만에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때 소집된 의회는 소집일이 겨우 3주일에 불과하여 매우 짧았던 까닭으로 훗날 '단기 의회'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은 연일 승승장구하며 잉글랜드 북부 지역을 점령한 뒤 런던까지 쳐들어올 기세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찰스 1세는 11월 3일에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이때 소집된 의회는 1653년 4월까지 유지되어 훗날 '장기'의회라고 불렸다. 의회가 소집되자 의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국왕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국왕이 전제 왕권을 휘두르는 데 뒷받침이 되었던 고등재판소와 성실청을 폐지하고, 왕의 측근인 윌리엄 로드와 스트래퍼드 백작을 탄핵하여 처형시켰다. 또한 국왕이 의회 문을 닫지 못하도록 의회가 해산되면 적어도 3년 내에 의회를 소집하도록 규정하는 '3년 기한법'과 현재 열리는 의회는 자체 동의 없이 해산하거나 정회할 수 없다는 내용의 의회법 등을 통과시켜 왕권을 견제하고 의회의 권한을 크게 확대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왕과 의회는 점차 양립할 수 없는 극도의 갈등상태로 치달았다. 국왕과 의회의 대립은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의회는 왕을 믿을 수 없다며 지방의 민병대를 의회의 통제 아래 두도록 하는 법안을 결의할 것을 주장했다. 한 마디로 군사 통수권마저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동안 쌓여 온 왕과 의회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찰스 1세는 결의문 통과를 주도한 다섯 의원을 체포하고자 몸소 의사당에 난입했으나 의회는 왕의 요구를 면전에서 무시하고 법안을 결의햇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것이다. 왕의 군대가 의회로 들이닥치자 의회 편이었던 런던 시민이 민병대를 조직해 왕의 군대에 맞섰다. 1642년 찰스 1세는 자신을 따르는 왕당파를 이끌고 노팅엄(Nottingham)으로 갔다. 이로 말미암아 영국은 왕당파와 의회파로 갈라져 본격적으로 내전이 시작돼싿. 왕당파는 주로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스에서 세력을 떨쳤고, 의회파는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 기반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