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성이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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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리스트=서형욱] 접전 끝에 막을 내린 2011년 아시안컵 결승전.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은 한국 혈통의 일본 국가대표 이충성, 혹은 일본어 발음으로 리 타다나리였다. 몇 해 전, 축구를 위해 일본으로 귀화한 그는 연장 전반 8분, 공격수 마에다를 대신해 교체 투입된 지 11분만에 그림 같은 발리슛으로 호주의 골네트를 흔들었다. 2002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지네딘 지단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골을 9년 뒤 카타르 도하에서 재현한 것이다. 일본의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채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벤치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등에는 영문 이름 ‘LEE’가 선명하게 반짝였다. 리. 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바로 그 성씨다. 경기가 끝난 뒤, 독일의 축구 전문지 [KICKER] 공식 홈페이지는 일본의 아시안컵 우승 소식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을 이렇게 지어 내걸었다. "Koreaner" Lee schießt Japan zum Titel (한국인 이충성이 일본의 우승을 쏘아 올렸다) 하지만, 결승전이 끝난 뒤 한국 취재진들과 만난 이충성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닌 축구인으로 시합에 임했습니다." 얼마전 블로그에 남긴 글과도 다르지 않다. "僕にとっての祖国は日本・韓国の2つです" (나에게 조국은 일본-한국 둘입니다.)
※ 이하 글은 저자의 동의 하에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 (신무광 지음, 2010년 왓북刊)에서 내용을 발췌, 편집하였습니다.
운명을 바꾼 한 마디, “반쪽바리”
재일 한국인 4세 이충성은 일본 도쿄에서 나고 자랐다. 증조부가 1926년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 이충성 집안이 일본에 터를 잡은 계기다. 이충성의 아버지 이철태는 재일 3세로, 수비수로 실업 축구 선수 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이런 아버지의 피와 지원을 받은 이충성은 일찍부터 기량을 뽑냈다. J리그 FC도쿄의 유망주로 프로 데뷔전을 치른 이충성은 2004년 대한민국 20세 대표팀 합숙에 소집된다. 부푼 가슴으로 한국으로 건너온 그는 파주 대표팀 트레이닝 센터에서 진행된 짧은 합숙 훈련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자신을 “반쪽바리”라 부르는 동료들의 배척 속에 크게 고전한 것이다. 일본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이질감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1주일 뒤 대표팀에서 탈락한 이충성은 일본으로 돌아와 고민에 빠진다. 이충성은 당시를 회고하며 “한국 대표팀에서 뛰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서 버렸다”면서 “내 자신이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에서 돌아온 그는 머리가 깨지도록 정체성과 장래를 고민했다. 재일교포(이하 자이니치[在日]) 최초의 도쿄 대학 교수이자 자이니치의 정체성에 관한 저서로 유명한 강상중 교수의 책을 모조리 읽으며 자신의 처지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축구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천성이 긍정적인 이충성은 한국 방문에서 얻은 끔찍한 경험을 “축구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홍명보와 노정윤의 등번호를 따내다
이후 이충성은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 2005년에는 FC도쿄에서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해 서서히 주전 자리를 꿰찼다. 당시 이충성이 가시와의 이적 제안을 수락한 데에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선수였던 홍명보의 영향이 컸다. 2002년 월드컵에서 홍명보의 활약을 보며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웠다는 이충성에게 가시와는 매력적인 팀이었다. 이충성은 가시와에 입단하면서 단 한 가지를 요구했다. 홍명보가 가시와에서 뛸 때 달았던 등번호 20번을 배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후 4년 반 동안 가시와의 20번은 이충성의 몫이었다. 그리고, 2009년 여름. 이충성은 오래 몸담았던 가시와를 떠나 산프레체 히로시마로 완전 이적했다. 히로시마로 옮길 때도 이충성은 가시와 입단 때와 비슷한 내용을 요구했다. 등번호 9번을 배정해달라는 것. 히로시마의 9번은 한국인 최초의 J리거인 노정윤이 원년부터 달았던 등번호다. 9번을 손에 넣은 이충성은 히로시마 입단식에서 위대한 선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활약을 펼치겠다고 다짐했다.
일본 귀화, 운명에 도전하다
가시와에 입단할 무렵, 이충성은 일본 올림픽 대표팀 소리마치 야스히루 감독으로부터 귀화 제안을 받는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올림픽 본선 출전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귀화한다고 해서 꼭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이충성은 귀화를 택한다. “만일 베이징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다면 축구선수로서는 물론이고 인간으로서도 끝장이라는 각오였다.” 이충성의 귀화는 일본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자이니치가 귀화해 일본 축구대표팀 선수가 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각종 매체에서 이 소식을 다뤘고 심지어 리 타다나리 개인 평전이 출판되기도 했다.
큰 위험 부담을 안고 내린 선택이었지만, 실은 그보다 더 굳은 다짐이 있었다. 한국에서 받은 충격으로 한국 대표팀에 대한 꿈을 버려야 했지만, 귀화를 한 뒤에도 자신의 성씨를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민족 출신임을 드러낼 수 있는 표식이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절대 버릴 수가 없었다. “저는 제 ‘성’을 역사에 각인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꼭 올림픽에 출전해야 했죠. 귀화를 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했어요.” 힘든 결단이었지만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일본 팬들은 “조센징은 필요없다”고 욕했고, 한국인과 재일인들은 “배신자”로 매도했다. 이충성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이충성은 더욱 축구에 매진했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에 살아남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는데 성공한다.
‘이충성’ - 이름을 버리지 않은 이유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이충성이 귀화를 하면서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충성의 이름은 지금도 이충성(李忠誠)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이름인 ‘리 타다나리’는 李忠誠을 일본 식으로 읽은 것이다. 이충성은 일본 대표팀 유니폼에 자신의 성씨인 LEE를 새겼고, J리그 정식 등록명은 LEE CHUNSON으로 적었다. 소속팀 유니폼에도 이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이충성에게 귀화는 축구를 위한 남다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이니치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 사는 비슷한 환경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희망의 증거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일까. 지난 2010년 이충성은 인생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급부상한다. 후반기 연속 경기 골을 터뜨리는 등 쾌조의 득점력을 과시하며 시즌 11골을 터뜨렸고, 신임 자케로니 감독의 눈에 들어 아시안컵을 앞둔 일본 대표팀에 전격 합류한 것이다.
귀화를 택한 것이 후회스러운 적은 없느냐는 질문에 이충성이 내민 답은 단호했다. "후회한 적도, 선택을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제 인생에 보람을 느끼고 있고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이 정도를 내가 못 이길 줄 알아?'라고 생각해요. 제가 선택한 운명과 끝까지 맞서야 하는 거죠." 이충성은 자신을 알아보고 "성씨가 참 드물다"고 말을 거는 일본 팬에게 생기발랄한 말씨로 이렇게 답한다. "자이니치예요. 뿌리는 한반도에 있고 일본에서 나서 자랐지요."
이충성은 일본인으로 귀화를 하기에 앞서 한 가지 맹세를 했다. 적어도 30살까지는 현역으로 뛰고, 자신처럼 사는 길이 있다는 것을 단 한 명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끝까지 최선을 기울인다는 것. “저는 스타가 아니라 길이 되고 싶어요. 별은 사라지지만 길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잖아요. 그게 제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게 '길'이 되고 싶다는 스물 여섯살 이충성은 오늘만큼은 가장 환히 빛나는 '별'이 되었다. 이제 그 별은 자신이 정한 길을 더욱 더 환하게 비춰줄 것이다.
첫댓글 추성훈, 정대세, 이충성...이들에게 최전선은 그라운드나 매트 위가 아니라 주민등록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향해 매진하는 그들의 어떠한 선택에도 기꺼이 박수를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