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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道 여행기
*여행 첫째 날(2003년 2월 21일 금요일)
(광주 문화예술회관. 무등산. 5.18성역묘지. 장성호. 백양사. 정읍. 내장산)
지하철 참사로 슬픔과 통곡소리로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낀 대구를 벗어나서 88고속도로를 타고 오후1시 40분쯤에 동광주 톨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대구 지하철방화 참사를 슬퍼하는지 광주의 하늘도 잿빛이다. 맑게 개인 푸른 남도의 하늘을 보고 싶었는데, 바람까지 불어서 약간 쌀쌀한 날씨다. 점심때가 지나서 배가 고픈지 친구는 밥부터 먹고 여행 계획을 세우자고 했다. 톨게이트와 가깝고 주차하기도 쉬운 광주 문화예술회관 심포니 레스토랑에서 친구식의 영어발음으로 하면 스테키를 먹었다.
광주 문화예술회관의 아름다운 경치와 우리 옆자리 멋쟁이 아줌마의 세련된 멋에 반한 친구와 나는 한국이 아니고 파리의 멋진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후식을 들면서 자연스럽게 멋쟁이 아줌마로부터 광주 인근의 여러 명소들을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광주에서 처음 만난 남도미인의 아쉬운 작별 인사를 받으며 무등산으로 차를 몰았다. 광주에서 무등산과 5.18 성역묘지를 둘러보고 장성 백양사로 떠나기로 했다.
도로의 표지판을 보면서 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품을 팔면서 무등산(無等山)을 찾아갔다. 무등산 파크맨션 쪽에서 보슬비가 내리는 비탈길을 따라서 높은 지대로 올라가다보니 뿌연 안개 속에서 곳곳에 바위가 늘린 산이 나타났다. 무등산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20분쯤이다. 끝없는 너널지대(돌무더기)와 함께 바위들로 만들어진 천연의 예술품인 무등산이다.
무등산 명물인 무등산 수박(일명:푸랭이)을 보고 싶었는데 여름철이 아니라서 볼 수가 없었다. 고갯마루에서 차를 세워놓고 옛 무등성 터에 올라가서 한눈에 들어 온 광주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광주시내 전경을 한 번 더 감상하면서 무등산 순환도로를 서행해서 다시 광주시내로 내려왔다. 무등산을 뒤로 한 채 민주항쟁의 상징인 5.18묘지를 찾아서 시내로 들어왔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몇 번이나 헛갈렸다. 대구처럼 광주가 교통이 복잡한 도시는 아닌데도 초행길이라서 길 찾는데 꽤 애를 먹었다.
5시 30분쯤에 광주시 북구 운정동에 소재한 성역묘지 앞에 도착했다. 성역은 넓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보슬비가 옷깃을 적시는 민주광장을 지나서 민주추모탑 앞에서 향을 사르고 영정들을 생각하면서 다시는 이 땅에 비슷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며 묵념했다. 함께 묵념한 친구에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묵념했냐고 물으니까 친구는"그 당시 희생한 많은 사람들 중 시신을 찾지 못한 사람과 군인들은 여기에 묻히지 못했다"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의외의 대답을 했다. 나도 “그래, 명령대로 움직이는 군인들과 군인들의 폭압에 항거한 시민들이 무슨 죄가 있노! 죄는 일부 정치군인들과 정치인들한테 있지“..하면서 ... 유영봉안소의 묘지를 둘러보고 숙연함에 잠겨서 나오면서 엄청나게 많은 무덤 앞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놀랬다.
마지막으로 지하 역사공간으로 내려가서 그 당시 참혹한 희생자들의 사진과 영상물의 끔찍한 장면과 절규처럼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십 여 년이 지나서 다시 한 번 광주의 그때를 느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몹시 착잡했다. 역사공간의 참혹한 사진과 절규하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기에 너무 힘들어서 친구보고 이만 나가자며 재촉해서 황혼에 쓸쓸히 잠기는 5.18성역묘지를 뒤로 한 채 호남선 고속도로에 몸을 싣고 장성 백양사 쪽으로 달려갔다.
백양사 IC에서 내려서 1번 국도를 타고 담양 방면으로 어둠과 안개에 가린 길을 따라 가다보니 희미한 물안개 속에 큰 호수가 우측에 나타났다. 바로 장성호였다. 백암산의 깊은 계곡을 따라 흘러내린 황룡강의 상류를 막아 4개 시. 군. 구의 농토를 적셔주는 젖줄 구실을 하고 있다.(공사기간만 3년 3개월이 걸린 ,제 방 ≒ 길이 603m, 높이 36m---직선거리 ≒ 8km, 주위 24km ---폭 ≒ 상 10m, 하 178m ---담수량 ≒ 8,970만톤)을 자랑하는 인공담수호이다.)
백양사를 목적으로 달리다가 예정에 없던 명소를 지나치게 되어서 장성호는 비록 안개 속에서였지만 덤으로 구경하게 되었다. 장성호수 주변 도로가 끝나고 한참을 달려가다 보니까 내장사와 백양사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왔다. (도로: 1)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I.C에서 1번 국도로 진입 - 담양방면(9.4km)- 북하면 소재지에서 16번 군도를 따라 조금 가면 왼편에 백양주유소가 나오는데 주유소 맞은편 길을 따라 3km 정도 가면 백양사가 나온다.)
갈참나무와 단풍나무가 도열하듯 서있는 숲길을 지나 白羊寺 입구에 도착하니 절 앞에는 계곡을 막아 만든 연 못, 뒤로는 운무와 어둠사이로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백양사마당 주차장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우측 샛길로 자동차를 몰고 올라가니 천진암 이라는 암자가 나왔다. 이 절이 바로 호남 유일의 비니니 도량인 것이다. 잠깐 시계를 보니까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부처님 도량이라 반가움이 앞서서 대웅전에 예배할 요량으로 절 마당으로 들어서니까 마루에 섰던 스님께서 어떻게 오셨냐고 묻길래..네..우리는 대구서 남도기행을 왔는데요..스님..예불이라도 드리고 가려고 올라 왔습니다 라고 하면서 대웅전 쪽으로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왠 늙은 처사님께서 나오시더니 지금은 너무 늦어서 대웅전에 들 수 없으니 다음에 오시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래서 백양사에서는 예불 드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큰절도 늦어서 아마 힘들걸요..말한다..친구와 나는 산비탈에 흐르는 맑은 샘물을 한 쪽박씩 마시고 다시 백양사로 내려왔다.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친구가 후라쉬를 꺼내서 켰다. 그 광경을 보는데 절로 웃음이 나왔다. 꼭 절에 뭐 훔치려 온 사람 같았다. 밝고 맑은 날 다 놔두고 안개 낀 어두운 밤중에 부처님 극량도량에 찾아왔으니...산중에 어둠이 짙어서 절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후라쉬 불빛 사이로 볼 건 다보면서 마치 귀중품을 찾는 밤손님처럼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리고 대웅전을 찾아서 만류하는 스님이 아무도 없는 틈을 찾아서 부처님께 무례한? 예불도 올렸다.
백양사는 내장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절로, 백제 무왕(632년)때 창건했다고 전한다. 거대한 바위를 배경으로 좌우에 맑고 찬 계곡물이 흘러내려 경치가 매우 빼어나다. 가을 단풍을 비롯하여 일 년 내내 변화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대웅전과 극락보전, 사천왕문과 소요대사 부도가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절 구경 마치고 걸어 나오는데 대학생들로 보이는 아베크 한 쌍이 정답게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절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동시에 "저 때가 좋을 때다!" 하면서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잠시 절 앞의 징검다리가 놓여있는 연못가에서 마음을 갈무리하고서 차를 타고 쌍계루를 지나서 산사를 빠져나왔다.
우리는 백양사 입구의 숙박업소를 이유도 없이?? 한 바퀴 휙 둘러보고 나와서 삼거리에서 49번 국도를 타고 정읍으로 달려갔다. 저녁 7시쯤 되니까 늘 규칙적으로 식사를 한 듯, 친구는 적당한 곳에서 뭘 좀 먹고 가자고 했다. 나는 불규칙한 식사에는 오랫동안 면역이 된 몸이라서 그런지 밥 먹는 때가 식사 때인 것이다. 그리고 차 안에서 이것저것 많이 먹어서 시장 끼를 느끼지 않았다. 정읍으로 오는 중간에 적당한 식당도 눈에 띄지 않고 해서 결국 8시 10분쯤에 정읍시에 도착했다.
오는 중간에 차안에서 정읍의 먹거리를 찾아보니까 "삼백집" 이라고 눈에 띄었다. 쑥국과 청국장이 별미라고 적혀있었다. 내가 추천을 하니까 친구도 흔쾌히 동의했다. 아마도 점심으로 먹은 심포니의 스테이크가 토종위장에 부담을 준 모양이다.
인터넷에서 뽑아온 자료에는 전화번호나 구체적인 약도가 없어서 결국 또 말품을 했는데 정읍에서는 꽤 유명한 집인 듯 묻는 사람마다 잘 알고 있는 듯 길을 일러주었다. 그런데 식당 입구에서 친구와 나는 서로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며 실망하듯 웃었다.
삼백집은 우리가 재래시장 구석진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작고 초라한 해장국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낡은 테이블에 손님2명과 주인내외가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청국장과 모주 한 사발을 시켜놓고 잠시 주인테이블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듣기 좋지 않은 말을 해서 기분이 많이 상했다.
우리가 대구서 왔다니까 주인 테이블에 앉은 딴 남자가 "이번에 지하철방화사고로 대구사람이 많이 죽은 것은 대통령선거 때 전국에서 대구사람들이 노무현이한테 표를 가장 적게 찍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투로 말을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친구가 "지금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데..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우리도 여행 오면서 먼저 광주 5.18묘지에 들려서 참배하고 왔다!“ 며 화를 내며 나무랬다. 그 남자가 또 무슨 말을 끄잡아 내려는데 연상으로 보이는 주인 남자가 그 남자를 나무라며 훈계해서 그 일은 더 확대되지 않고 끝냈다. 아무튼 지역감정의 골이 깊은 것 같아서 기분이 찜찜했다.
그러는 중에도 청국장은 말없이 끓어서 우리 앞에 대령했다. 청국장에 콩나물과 계란을 풀어서 끓었는데 맛이 구수하고 국물이 많아서 먹기 좋았다. 한약으로 빚었다는 모주도 맛이 일품이었다. 모주는 술이라기보다는 연한 한약에 사카리를 타서 마시는 느낌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길을 물으니까... 아까 엉뚱한 소리해서 우리 기분을 상하게 한 그 남자가 의외로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실언했다 싶었는지 표정이 미안해하는 듯 했다. 그러나 목소리만 커서 햇갈리는데 주인남자가 차분하게 상세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작은 종이에 길을 적어준 것을 받아 쥐고 여행 잘하라는 주인의 인사를 뒤로 한채 삼백집을 나왔다.
어두운 정읍 시내를 가로질러서 다시 내장산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우회도로를 달려서 가다보니 내장호수가 도로가에 있었다. 내장산 입구 표 받는 곳까지 차를 몰고 갔는데 표 받는 사람도 퇴근하고 산 입구의 정문도 굳게 닫혀있다. 시계를 보니까 밤9시를 가리키고 있다. 어둠속에 숨어있는 내장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를 돌렸다.
친구와 수의한 결과 일단 여기서 일박하고 내일 아침 일찍 내장산 초입까지라도 드라이브하고 다음 목적지로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입구와 가깝게 자리한 사랑방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TV를 켜니까 역시 지하철방화사건 뉴스가 흘러나와서 기분이 우울했다. 친구가 준비해온 캔 맥주를 한잔씩 나누어 마시며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10쯤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종일 운전한 친구는 몹시 피곤한지 눕자마자 코를 드르릉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南道 여행기
*여행 둘째날(2003년 2월22일 토요일)
(내장산. 내장사. 충무공원. 내소사. 격포해수욕장. 채석강. 변산해수욕장. 새만금간척지. 유달산. 목포국제여객선 터미널. 월출산)
봄비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보니 가랑비가 내려 땅은 촉촉이 젖어있다. 시간은 오전 8시 10분. 깊은 잠을 들어서인지 몸은 깨운 하고 기분도 좋다. 친구도 잘 잤다며 기지개를 쭉 폈다. 정읍에서 들어가는 내장산입구의 경치는 정말 아름다웠다.
길 양편으로 쭉 늘어선 이름 모를 나뭇가지 들은 꽃샘추위에도 새싹을 피우려고 자주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자주색 가지에 맺힌 봄비는 수정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밤에 산 입구를 완전히 막아놓아서 절이 없다고 생각 했는데 내장산 입구에는 내장사가 있었다.
많은 굴곡의 계곡이 양(羊)의 창자와 비슷해서 많은 인파가 몰려와도 계곡 속에 들어가면 어디에 그 많은 인파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아 마치 양의 내장(內臟)속에 숨어 들어간 것 같다하여 내장(內藏)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내장산국립공원의 품안에 안겨 있는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636년)에 영은 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한 때는 50여 동의 대가람이 들어섰던 때도 있었을 정도로 금산사와 함께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절이다.
내장산의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가운데에 자리 잡아 주변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특히 가을철 단풍이 들 무렵의 절 주변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문화재로는 내장사 이조등종이 보존되어 있다.(도로: 호남고속도로 정읍I.C.→정읍시내→사거리에서 오른쪽 우회도로→16km→내장사 입구)
절집으로 들어서자 한때 번성했던 고찰의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듯 했다. 아침의 맑은 정신으로 대웅전에 들어 가족을 위해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교회 집사이면서도 남도 절 기행이라며??묵묵히 절에 함께 동행한 친구를 위해서 절을 올렸다. 봄비에 젖은 사찰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산을 빠져나왔다. 우리나라 사찰주변의 자연경관이 다 빼어나지만 특히 내장사 입구의 길은 남녀의 데이트 코스로도 멋진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이름다운 길로 추천하고 싶다.
짐을 들고 나오려고 우리가 묵었던 여관 입구에 들어서는데 친구로 보이는 중년여성 두 명이 막 여관을 나서서 내장산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처럼 고등학교 친구거나 좋은 친구사인 모양이다. 친구는 코를 골면서도 들었는지, 어제 밤에 우리 옆방에 사람소리가 나더니 그 사람들일 것이라며 은근히 관심을 표시했다. 만 하루 숫놈 둘이 붙어서 여행하니까 벌써 여성이 그리운지 친구와 난 서로 쳐다보며 씩 웃었다. 어제 왔던 길을 돌아서 다시 정읍시로 나오니까 어느 듯 오전 9시 20분이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삼백 집을 다시 찾아갔다. 콩나물 해장국을 주문하고 또 모주를 한 사발 시켜서 친구와 정답게 나누어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위해서 건배했다.
삼백 집을 나서서 정읍시청 옆을 지나가는데 우측에 홍의문이 보이고 충무공원이라는 현판이 보이 길래 내가 친구한테 이순신장군이 정읍에도 계셨나보다 차를 잠시 세워서 안내문을 읽어보고 가자고 제의했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충무공께서 이곳 현감으로 2년 동안 봉직하셨다.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민족의 영웅은 봄비 따라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 공원 앞에서 공의 호국정신에 잠시 묵념을 올리고 정읍아산병원 삼거리 쪽으로 차를 달렸다.
다음 여행지는 내소사를 거쳐서 변산반도 쪽으로 잡았다. 자동차는 정읍 아산병원 삼거리를 지나서 줄포방향으로 곧장 달려갔다. 호남의 도로는 노면 상태도 좋을뿐더러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서 우리만 차 길을 전세 내고 달리는 것 같아서 연일 운전하는 친구한테 좀 덜 미안했다. 도로변의 붉은 황토밭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골 마을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생소한 길을 표지판에 의지해서 달리다보니 오전 11시쯤에 내소사 입구까지 도착했다. (도로 : 1) 서해안고속도로-> 부안나들목-> 고창방면 23번국도-> 15.2km -> 보안사거리 (우회전) -> 30번국도(10km) -> 석포리 내소사입구 (우회전) -> 2km -> 내소사 일주문)
전나무 숲길을 따라서 사천왕문을 지나서 절 마당에 들어서니 높이 약 20m, 둘레 7.5m의 약 천여 년 쯤 되는 군나무(할머니 당산)가 우리를 반겼으며, 봉래루 앞마당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수령 300여년으로 추정되는 거목 "보리수"가 봄비에 겨우내 마른 목을 축이며 서 있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창건 되었다고 전한다. 혜구(惠丘)두타 스님이 이 곳에 절을 세워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고 하였는데 그 중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대웅전 꽃살문양>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조선시대 때 건립된 것으로 전면에 꽃살 무늬를 조각한 문짝을 달았는데 이들은 모두 정교한 공예품들이며, 단청이 없어 더욱 자연스러운 고찰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내 후면 불벽에는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큰 것이다.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고 일어서서 나오려는데 안내하는 보살님께서 뒤쪽에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으니까 이쪽으로 와서 보라고 권한다. 관음보살상의 눈에다 눈을 맞추고 옆으로 걸어가면 관음보살 눈이 따라서 온다고 했다. 정말 관음보살상의 눈이 나를 쫓아왔다. 몹시 신기해서 대웅전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친구한테 말했더니 친구도 법당으로 들어와서 신비한 백의관음보살상을 참견하였다.
내소사 주변의 능가산 산세는 크게 웅장하지도 않고 위압적인 산세도 아니며 사람을 반기는 듯 비교적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다녀본 한국의 어떤 절보다도 내소사는 조용하고 아늑한 안정감이 흐르는 아름다움이 산사의 멋을 더욱 뽐내었다.
친구와 나는 내소사의 멋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능가 산을 뒤로 한 채 변산반도 해안도로를 따라서 격포해수욕장과 채석강을 향해서 달려갔다. 12시 정각쯤에 위도로 가는 여객선터미널을 한번 둘러보고 채석강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에도 도로 막아놓고 돈 받는 매표소가 버티고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느낀 점인데 우리나라는 돈 받는 산길이 너무 많다. 나라와 불교에서 하는 짓이 산적같다! 도립공원으로 정해지면 산림입장료와 문화재 입장료를 같이 받는다. 경치 좋은 길목마다 막아놓고 입장료 받고 주차료 따로 받고...중국 같은 나라는 국민한테는 무료이고 외국인한테만 입장료를 많이 받는다던데...대한민국은 국민이 봉인지 우리나라 국민이 우리나라 산에 들아 가도 돈을 받는 나라이다.
아무튼 우리는 매표소 직원이 다른 차 요금 받는 틈을 타서 잽싸게 옆길로 빠져 들어갔다.ㅎㅎ.우측 길 해안도로를 따라 한참 들어갔다가 채석강 쪽으로 다시 와서 격포 해수욕장 앞에 차를 세우고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가 젖은 백사장을 걸어서 채석강 쪽으로 걸어갔다. 밀물에 젖은 모래사장에 발이 빠지지 않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채석강은 수만 권의 책을 쌓은 것 같은 수성암의 단층이 볼 만하다. 변산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멋진 곳이다. 12시 20분쯤 채석강을 떠나서 변산 해수욕장 쪽으로 달려갔다. 중간 중간 표 받는 곳이 눈에 띄었는데 우리는 무조건 앞으로 달렸다. 또 매표소가 나와서 투들 거리며 앞으로 달려가는데 막다른 길이 나왔다. 다시 차를 돌려서 해안도로 북쪽으로 차를 우회전하려는데 길모퉁이에 경찰차가 서있다. 도둑이 지발 저린다고 친구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설마 우리 쫓아오진 않았겠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냅다 우회전 꺽어서 쏜살처럼 도망갔다. 점심시간이 지난 1시 20분쯤에 변산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밥 먹을 장소를 둘러보니 바다구경이라는 횟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횟집 주인들이 앞에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해서 친구보고 선택하라고 했더니 아줌마가 손짓하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다구경 횟집 2층에서 바다구경하면서 백합죽을 먹었다. 가격은 한 그릇에 만원이다. 녹두 넣고 백합 넣고 끓었다는데 이름 그대로 담백한 죽 맛이었다.
소화도 시킬 겸 보슬비가 내리는 해수욕장 백사장을 친구와 우산을 받쳐 쓰고 여고동창생처럼 다정하게 거닐었다. 기분도 좋고 해서 끊었던 담배 한 대 피어물고 변산만 해안도로를 따라서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다보니까 새만금간척지가 나왔다. 전시관으로 들어가니까 막 영화관에서 10분짜리 새만금간척사업영상을 상영했다. 우리는 초등학생들 속에 섞여서 짧은 영화를 보았다. 새만금은 대단한 역사인 것 같았다. 환경문제의 개선점과 사업성과를 집중적으로 부각한 홍보영화였다. 간척도로를 따라서 차량통행 끝까지 갔다가 돌아 나왔다.
어느 듯 시간이 2시30분을 가러 키고 있다. 우리는 차 안에서 다음번 목적지를 결정해야했다. 수의 끝에 목포 쪽으로 내려가서 강진. 보성 쪽으로 돌아서 순천을 거쳐서 하동을 지나 마산에서 구마선을 타고 귀향하기로 결정했다.
고창IC에서 서해안고속도로에 차를 실었다. 서해안고속도로는 새로 건설해서 노면도 고르고 고속도로처럼 막히지 않아서 좋았다. 교통량도 많지 않고 도로 주변의 경치는 남도 특유의 붉은 황토 흙과 잘 가꾸어진 가족 무덤들이 장독간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목포에 도착하니 흐린 하늘 밑에서 저녁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목포에 왔으면 유달산과 뱃고동소리 울리는 여객선터미널은 가봐야 된다는 친구의 제의로 유달산 순환도로를 타고 조각공원과 노적봉을 돌아보고 목포 시내를 산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유달산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길에 일본식정원이라는 관광안내판이 보였었는데 나중에 영암까지 우리 차에 타고 길을 안내해준 아저씨 이야기로는 바로 그 집이 "야인시대" 일본 야쿠자 두목 "하야시"의 집으로 나오는 집이라고 했다. 미리 그런 사실을 알았으면 그 집을 둘러보고 올 것인데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6시쯤 목포국제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해서 중국 상해로 보따리 장사 떠나는 사람처럼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기웃기웃 살피다가 안내문 하나씩 들고 나와서 국내여객선 터미널에 들려서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섬으로 왕복하는 여객선 시간표를 읽어보면서 전라도에는 섬이 참 많구나 라고 생각했다.
목포 여객선터미널 옆 한화갑씨 지구당 사무실을 지나서 영암 쪽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섰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잠시 길을 묻는데 왠 아저씨가 그쪽으로 간다며 함께 타고가면서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관상을 보니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고 해서 운전석의 친구를 바라보니 반대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두 사람을 차에 태었다. 영암의 친구한테 술 한잔 하려 간다며, 그래서 차를 안 몰고 버스타고 가려는데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을 묻는 것 같아서 말을 붙여왔다고 했다. 아무튼 누이 좋고 매부 좋듯이 헛길 가지 않고 곧장 영암 쪽으로 달려왔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아저씨들은 내리면서 몇 번이나 월출산 가는 길을 다시 일러주었다.
축축하고 어두운 밤길을 달려서 저녁7시40분쯤에 월출산 천황사 입구에 도착했다. 밤은 깊었고. 더구나 어두운 산중이라 날도 흐리고. 차로 천황사 입구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월출산 온천호텔 방향으로 달렸다. 친구가 호텔로비까지 잠시 걸어서 갔다 오더니 여기는 식사할만한 곳이 없다면서 다시 차를 몰고 식당을 찾아 나섰다. 배는 고프고. 길은 낯설고. 비는 추적추적 오는데. 날은 벌써 저물고. 그래도 자동차는 고장 없이 잘도 달리니 정말 차한테 고마웠다. 친구가 늘 자기차를 BMW라고 하더니 친구의 오래된 소나타는 진짜 좋은 차였다. 신형 그랜즈 자동차를 놔두고 구형 소나타를 몰고 나오길래 나는 속으로 의아했는데 친구는 이 자동차에 오랜 친구같은 애정을 느끼고 있는듯 싶었다. 쉬지 않고 2천리를 달려도 씽씽하니까... 내가 대구 도착하면 차바퀴에 막걸리라도 한통 뿌려주어야겠다고 하니까 친구도 자기차가 자랑스러운 듯 씩 웃었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달려 가는데 길가에 산초갈비식당이라는 간판이 나왔다. 저기서 갈비탕이나 한 그릇 먹고 가자며 들어갔는데...이 식당이 우리를 놀라게 할 줄이야...!!친구나 나는 둘 다 육식을 별로 안 좋아하는 체질이라서 친구가 화장실 가는 사이에 내가 메뉴판을 보고 육천원 짜리 정식을 시켰는데, 세상에 반찬이 자그마치 28가지가 나오는데..큰 상에 다 차리지 못해서 맛도 보기 전에 일부는 들고 나가고.. 아무튼 김천 직지사 근처 경동식당의 만원짜리 산채정식보다 반찬 가지 수가 훨씬 더 많이 나왔으니 놀랄 수 밖에...친구는 연신 낭비다...진짜 낭비다... 하면서도 맛있게 먹었다.
나올 때 계산하면서 카운터의 주인아주머니에게 반찬 그렇게 많이 주고 남아요? 하고 물으니까 아주머니는 인정스러운 모습으로 살며시 웃으면서 않남아요~!`했다. 저녁 먹고 나오니까 밤8시 50분이다. 오전에 도갑사에 들리기로 하고 근처에 숙소를 정해서 자기로 했다. 르레상스 모텔 붉은 간판 속으로 차를 밀어 넣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골아 떨어졌다.
南道 여행기(셋째날)
<2003년 2월 23일 일요일)
(월출산. 도갑사. 보성 강산마을. 보성 다원 차밭. 순천 .낙안읍 민속마을)
눈을 뜨고 일어나니 새벽 5시다. 어제밤 늦게 잠들었는지 친구는 아직 곤하게 자고 있다. 아침뉴스가 궁금해서 핸드폰으로 연합뉴스를 크릭해 보니 오늘도 여전히 대구지하철 방화참사에 관한 긴급보도가 대부분이다.
창문을 열어보니 바람은 불지 않는데 밤새 가랑비가 내렸는지 자동차 지붕이 빗물에 젖어있다. 아침뉴스를 보면서 따뜻한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있으니까 실컷 자고 일어난 친구는 느닷없이 새벽에 누구한테 문자 보냈냐며??...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친구는 아까 내가 핸드폰으로 뉴스 보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엉뚱한 상상을 한 모양이다. 친구가 씻을 동안에 배 하나 깍아서 먹으면서 슬슬 짐을 챙기며 이동할 준비를 했다.(無錢여행 경험이 많은 친구는 온갖 먹거리를 다 챙겨왔다. 잠시 소개하면, 사과.배.오징어.삶은땅콩.커피.유과.약과 기타 등등...)
오늘이 여행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부지런히 움직여서 남도의 명소를 한곳이라도 더 가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자동차에 짐을 챙겨 싣고서 부슬비가 내리는 벚나무 길을 따라서 영암읍에서 목포 방향으로 8km 정도 달려가니 구림사거리가 나온다. 그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군서장터를 지나 약 4km 정도 오르다 보니 도갑사에 이르는 벚나무 길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벚꽃 필 때와 단풍들 때 오면 주변 산봉우리들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구림천 계곡 옆길을 달려가는데 그 길목 오른편 주지봉의 산중턱에 백제의 왕인박사가 수학했다는 문산재가 있다는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도로안내 : 호남고속도로 광산IC - 13번 국도 - (53km) - 영암읍 라이온스탑앞 삼거리 - 나주입체교차로 - 왼쪽 13번 국도 - (1km) -오리정 오거리 - 오른쪽 819번 지방도로 - (8km) - 구림 사거리 -좌회전( 도갑사 진입로) - (3km) - 도갑사 입구 주차장)
도갑사 일주문 바로 앞에 자동차를 세우고 도갑사 일주문을 지나 100미터 가량 걸어 들어가니 국보 50호로 지정된 해탈문이 나온다. 조선 성종 4년(1473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로 건축양식이 대단히 독특하다.해탈문 좌우 앞쪽 칸에 금강역사상이 다음 칸에는 보물 제 1134호인 문수동자와 보현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석조 5층 석탑, 수미왕사비가 있고, 절 100미터 위 미륵전에는 보물 8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100 미터 더 오르면 절을 창건한 도선국사비와 중창한 수미왕사비가 웅장하게 서 있다. 조선 세조 3년(1473년) 신미, 수미 두 왕사가 중창했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총 규모가 966간에 소속된 암자가 12개나 되었으며, 상주한 승려 수가 730명에 달했던 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6.25동란을 겪으면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단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대웅전 뒤 빈터에는 주춧돌이 선명하게 군데군데 박혀있고, 앞뜰에 5미터에 달하는 스님들이 마실 물을 담아 두는 석조의 크기가 도갑사의 옛 사세와 승려수를 말없이 전해주고 있었다. 대웅전에 옆문으로 예불하려 들어가려는데 늙은 누렁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나이 든 공양주 보살 뒤를 따라서 비 맞은 개꼴로..ㅎㅎ 아침 보행을 하고 있다. 예불을 올리고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보니 대웅전 네 모서리에 기둥을 받쳐 놓았다. 지붕의 무게를 견디게 임시방편으로 장치를 해놓은 것 같았다. 절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친구가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찾아봐도 친구가 보이지 않아서 절 뒤쪽 등산로를 따라서 산세 구경을 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도선국사 성보전 건물 쪽으로 걸어가는데 절 남쪽 담장 앞에 가랑비를 맞으며 새빨간 얼굴을 내민 동백아씨가 나를 보고 얼른 숨는다. 남정네들의 눈길이 수줍은 듯 푸른 잎 새 속에 쌓여 봄비에 젖은 붉은 꽃잎이 마치 갓 시집 온 새댁의 볼처럼 그렇게 이쁠수가 없었다. 도선국사 성보전은 우천관계로 개방하지 않아서 유물을 관람할 수 없었다.
절 뜨락에 앉아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절 뒤쪽 등산로를 약 1키로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왔다면서 진짜 산세가 아름답다며, 대구에서 얼마든지 당일코스로 올 수 있는 거리라며, 다음에 꼭 등산을 오고 싶다고 말하면서 친구는 금새 산세에 반한 모양이다. 차를 몰고 도갑사 입구를 벗어나서 모퉁이를 도는데 삼거리에 왕인박사 유적지 팻말이 눈에 들어 왔다.
바로 옆에 있으니 보고가자며 가볍게 생각하고 차를 몰고 동네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유적지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찾기도 그렇고 해서 지나가는 사람한테 길을 물어보며 잘 닦여진 국도에 몸을 싣고 강진방면으로 차를 달렸다. 고속도로 같은 국도를 따라서 신나게 달리다 보니 강진을 스쳐 지나서 고흥을 지나,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벌교를 지나서 茶香의 고장 보성 쪽으로 접어들었다.
보성군이 가까워지니까 이쪽은 지금 한창 4차선 국도 공사를 진행 중이다. 다시 길은 2차선으로 좁아지고 도로가의 마을들이 차창 가에 스쳐 지나갔다. 약간 커브길 공터에 차를 세우고 동네 매점 아줌마한테 서편제 마을인 강산마을을 물어 보니까, 조금만 더 올라가면 마을 입구가 나온다는 말만 듣고 한참 가도 강산이라는 안내 표시가 나오지 않아서, 비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떤 아저씨한테 또 길을 물으니까 또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나온 다 하길래 계속 올라가도 강산이라는 팻말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삼거리에 차를 세우고 근처 카센터 젊은 주인한테 다시 길을 물었더니 왔던 길로 다시 올라가라고 한다. 허허..친구와 나는 헛갈리기 시작했다. 반신반의 하면서 다시 왔던 길로 올라갔다. 한참 가다보니 고개가 나오고 그 고개 밑에 좌측으로 들어가는 좁은 진입로가 나와서 카센터 주인이 알려주는 데로 무조건 달려갔다.
길을 쉽게 찾지 못하니 나는 친구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한때 김영희친구 덕분에 정선아리랑을 배우고, 또 요즘은 남도창(서편제)을 배우려는 것을 안 친구가 갈 길이 바빠도 내가 남도창의 유래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줄 알고 불평 한마디 없이 나를 위해 배려하는 마음을 아는 까닭에 내 마음이 급하니 자꾸 길이 어긋나서 다. 산골 길가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둘이서 머리를 굴리다가 또 말품을 팔기로 하고 가랑비를 맞으며 집집마다 다니면서 사람을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애구~~쏙 타~네~`
점심때가 지났는지 아랫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물어 보려 해도 야속한 차들은 그냥 핑핑 지나간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마침 택시가 동네 쪽으로 들어가서 다시 나오길래 무조건 앞을 막아서면서 손을 들었다. 오십 넘은 중년 아저씨인데 첫눈에 사람 좋아보였다. 역시 나이든 택시기사는 뭔가를 보여주었다. 인근의 길을 손바닥 안에 담고 있는 듯 강산마을로 가는 길을 상세하게 일러주었다. 차를 몰고 내 뒤만 따라오는 친구한테 체면이 서는 순간이다. 십 여분 동안 가랑비 맞으면서 기여코 길을 알아냈으니....ㅎㅎ.
강산마을 앞을 스쳐 지나가는데 친구가 마을 입구의 팻말을 본 모양이다. 다시 차를 후진했다. 동네 경로회관 앞 큰 돌에다 강 산 마 을 이라고 쓰여 있다. 그냥 시골 마을 이였다. 회관 마당 앞에 서편제 소리의 창시자로 알려진 박유전의 이력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그 내용을 잠시 소개하면....
<<박유전은 헌종·고종 때의 명창으로,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보성 강산에서 살았다. 나무를 하다가 넘어져서 한쪽 눈을 다쳐서 애꾸눈이 되었다. 목청이 좋아 천구성(타고난 명창의 성음)의 칭호를 받았던 박유전은 흥선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는데 <적벽가>와 <심청가>에 능하였고 <춘향가>중 이별가와 새타령을 잘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강산마을에는 박명창의 일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산에 혼자 소리공부하려 갈 때는 꼭 주먹밥을 두 개 가져가서는 한 개는 본인이 먹고 다른 한 개는 산신령에게 목을 터달라고 정성으로 바쳤다고 전한다. 박 명창은 말년에는 산중에서 굶어 죽었다.>>
* 여기서 서펴제와 동펴제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면, 서편제」는 판소리의 전승지역과 전승인맥에 의해 형성된 판소리 유파중의 한 가지를 말한다. 판소리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승되어 왔는데 전라북도, 전라남도를 거쳐 남해로 흘러가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인 광주, 나주, 보성과 같은 곳에서는 서편제가 많이 불렸고, 동쪽의 운봉, 구례, 순창과 같은 곳에서는 동편제가 많이 불렸다. 서편제의 음악적 특징은 정교하고 감칠맛이 있으며, 부드럽고 굴곡 많은 남해와 서해의 해안선처럼 부드럽고 여성적인 소리로 나타난다고 한다.
따라서 서편제 명창들은 슬픈 소리조인 계면조(양악의 단조에 비유됨)에 능하다. 또한 서편제 소리는 수식과 기교가 많고 장단의 붙임 새에 변화가 많은데 사설과 장단이 서로 엇물리는 '엇붙임'을 많이 쓴다.
* 동편제 소리의 특징은 호방하고 남성적인 분위기의 우조 선율(양악의 장조에 비유됨)을 많이 쓴다. 따라서 쭉쭉 뻗는 소리인 '목으로 우겨내는 소리'를 구사하며 소리에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잔가락을 적게 붙이며 매 귀절의 끝마침을 명확히 한다. 장단을 붙이는 방법으로는 한 장단 안에서 사설과 장단이 딱 맞아 떨어지는 '대마디 대장단'을 많이 사용한다.
우여곡절 끝에 강산마을을 견학하고 서편제의 창시자 박유전 명창의 일대기를 읽어보고 서편제의 선율처럼 구비진 산길을 따라서 다시 보성으로 가는 큰길로 나왔다. 다음 목적지는 보성차밭으로 정하고 도로가의 팻말을 살피면서 차를 달렸다. 10여분 정도 올라가니 보성다원 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길가는 사람한테 물어보니 약 8키로 정도 가면 다원이 나온다고 일러주었다.
보성은 차의 고장이다. 보성읍에서 18번 국도를 따라 회천면 황성산 붓재를 넘으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녹색의 차밭이 펼쳐진다. 84만여 평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차밭이 모여 있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차 잎을 따기 시작하는 5월 초에는 쇼핑으로, 구경으로, 또는
사진 촬영 등 다양한 목적으로 보성에 들어오고 있다. 보성은 대한다업등 기업화 되어 있는 거대한 다원이 약 9- 10여개 있는데 작은 개인 농가까지 합하면 약 120여개 농가가 차 재배에 종사한다고 한다.
산비탈을 개간하여 조성한 차밭의 차 잎 따는 아낙네들의 풍경은 이젠 보성의 대표적인 모습이 되고 말았다. 고개에는 다향각 이라는 정자가 있어 보성의 차밭을 한눈에 조망할 수도 있고 쉬어갈 수도 있다. 바닷가 쪽으로는 율포가 있는데 해수욕장과 포구를 겸한 곳이다. 특히 이곳에는 보성군이 직접 운영하는 율포녹차 해수 온천탕이 있는데 녹차욕과 해수욕을 둘 다 끌어안은 욕심 많은 온천탕이다
붓재 고갯길로 올라가는 중간 중간에 푸른 차밭의 구릉이 눈에 띄었다. 고개 정상까지 올라가니까 붓재 고개라는 팻말이 나왔다. 가파른 산비탈 전체가 파란 차밭으로 덮여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본 꼬불꼬불한 푸른 봉답 논처럼 정말 아름다웠다. 고개 밑으로 내려가면서 보는 푸른 차밭의 구릉진 풍경도 장관이었다. 친구는 연신 감탄사를 발하면서 "이런 곳에 여자들 태워서 드라이브 시켜주면 오줌 줄줄 쌀 것이다 라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ㅎㅎ..
다향각에 올라가서 다시 한 번 더 차밭 전경을 감상하고 녹차 끓여먹는 다기통을 몇 개 사서 차 드렁크에 챙겨 넣고 순천으로 달려갔다.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 먹거리 거리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벌써 시간이 오후1시가 지났다. 시장기를 느꼈지만 참고 낙안읍성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배고픈 주인의 심정을 아는지 가속도가 붙은 친구의 검정색 애마는 남도의 봄바람을 가르며 순천으로 순천으로 달려갔다.
순천시에 도착해서 도로 표지판을 보니까 낙안읍성으로 가는 화살표가 눈에 보였다. 그래도 강산마을 찾으면서 고생한 경험 때문에 검문하는 전경한테 길을 물어서 좁은 찻길을 따라서 올라가다 보니 중간쯤에 선암사로 가는 안내표지가 보였다. 상당히 오래 달려왔는데도 낙안읍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전라도 이정표는 뭐 이렇게 뭐노!..하면서 비탈진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까 고개 마루가 보였다. 짐작에 고개만 넘으면 큰 들판이나 고을이 나올 것 같다고 친구한테 말하면서 내려가니까 잠시 후에 탁 트인 낙안읍성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오며 남도여행의 마지막 기착 점을 향해 달려 온 우리를 반겨주었다.
낙안읍성은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東內里) ·서내리 ·남내리에 걸쳐 있는 조선시대 성곽 유적이다. 장군 임경업(林慶業)이 15세 때 하룻밤에 쌓았다는 전설이 있으나.....?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으로 긴 직사각형이며, 체성(體城)의 축조나 적대를 구비한 점에서 조선 전기의 양식이다. 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옹성은 남 ·서문 터에서만 흔적을 볼 수 있다. 성곽은 커다란 자연석으로 쌓고, 돌과 돌 사이에는 작은 돌로 쐐기 박음을 했지만 아직도 견고하다. 남문 터는 마을 안 골목길에 있는데, 네모진 바위를 3단으로 쌓아올린 성문 벽이 길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성 안에는 1536년(중종 31)에 지은 객사(客舍)가 온전히 남아 있고, 대성전(大成殿) 등 9채나 되는 향교가 보존되어 있다.
날씨가 흐린데도 성 밖에는 많은 관광객이 거닐고 있었다. 전라도에서는 꽤 유명한 관광지인 것 같았다. 매표소에서 표를 받아서 성문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 어릴 때 고향처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성안 풍경이 정겹게 우리를 반겨주었다. 성안은 옛날 돌담을 비롯하여 관아 등이 비교적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늦은 점심부터 떼우고 성을 구경하기로하고 가마솥에 장작불이 타는 초가집으로 들어가서 장터국밥과 빈대떡을 시켰다. 오후가 되니 바람이 불고 날씨가 꽤 쌀쌀했다. 옛날 시골생활을 생각하면서 초가집 방안으로 들어서니 국민학교 동창인 듯한 중년 남녀가 마주 앉아서 동동주를 비우며 옛날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밥이 들어 왔는데 주모는 나이가 아주 이 들어 보이는 할매다. 국은 소고기국이 아니고 돼지국밥이었다. 친구가 장터국밥 시켰는데 왜 돼지국밥이냐고 하니까 할매 주모께서 여기서는 이게 장터국밥이란다. 허허허...!!!
국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연신 코를 훌쩍거렸다. 밖의 찬 공기와 따신 차안 공기에 노출된 민감한 내 코가 탈이 난 모양이다. 세상에 공짜 구경은 없다 카더니......주린 배를 채우고는 성안을 슬슬 걸으며 여기저기 구경하면서도 친구는 자기가 갔다 온 일본하고 비교하면서 참 좋은 관광자원인데 너무 단순하고 볼거리가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각 지역마다 훌륭한 관광자원이 풍부한데도 이것을 좀 더 체계적으로 개발하여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던지면서 안쪽으로 올라가니까 골목 입구에 혼례식을 알리는 깃발이 보이 길래 전통혼례식을 구경하려고 마당으로 들어서니 벌써 혼례식은 끝나고 신랑신부 친구들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가 부모들이나 친척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까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나 있는 젊은 부부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객들이라고 해바야 신랑 신부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녀 열대여섯 명이 전부였다. 아무튼 신랑신부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그들의 초라한 결혼을 마음으로 축하했다.
성안을 대충 둘러보고 성문 쪽으로 내려오는데 할머니가 찰떡을 만드는 게 눈에 띄었다. 방금 만든 찰떡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데, 나는 좀 전에 국밥 먹은 것도 잊은 듯 목구멍에서 침이 꼴깍 넘어간다. 실망하는 할머니의 표정을 못 본채 하고 주머니에 남은 잔돈 이 천원을 꺼내서 주고 찰떡을 사서 친구랑 나누어 먹으며 낙양읍성을 걸어서 나왔다.
성문을 막 나가려는데 친구가 성루에 올라가보고 나가자고 권해서 낙안성 성루에 올라가서 옛날 조선시대 병사처럼 활 쏘는 시늉을 하면서 낙안면을 굽어보았다. 성문 앞에 돌로 만든 개가 양쪽에 두 마리 앉아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낙안읍성의 동.서.남 세군데 산세의 흉한 기운을 눌리려고 3마리의 石犬을 만들었는데 한 마리는 분실되고 두 마리만 남았다고 전한다. 나는 친구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마지막 찰떡을 먹으면서 이번 남도여행의 마지막 종착점인 낙안읍성의 성문을 나와서 차 쪽으로 걸어갔다.
구마선을 타려고 순천에서 마산방면으로 달려오는데 그림 같은 섬진강 하동포구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간다. 마음 같아서는 차에서 내려 섬진강의 맑은 강물냄새를 한껏 마시고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으로 후일을 기약하며 귀향길에 올랐다.
* 여행후기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각자 살아가는 삶의 철학이나 삶의 방식과 취미가 다르겠지만 누구나 좋아하는 것 중 한 가지가 여행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남자들은 친구 사이의 의리를 제일 중요한 인간성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윗글 남도여행기는 고등학교 시절 내 옆 짝을 했던 친구가 모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하면서 개교30주년을 맞이하여 “달성고三十年史”를 편찬하게 되어 편찬 책임자를 선임하지 못하여 고민하던 중 나를 찾아와서 부탁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의 입장은 건강이 몹시 나빠서 청도에 있는 암자에서 요양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에 하산하여 도낙회친구 사랑방손님으로 신세지면서 새로운 생활을 모색하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마음이나 처지가 한가한 입장이 아니었다.
친구의 진심어린 간절한 부탁도 거절할 수 없었지만, 그 몇 년 전에 아버님께서 갑작스럽게 별세하셨는데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가 토요일 밤 시골길을 물어물어서 성주 우리 집까지 문상 온 기억이 생각나서 내 처지나 입장만 생각하고 친구의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약 두 달 동안 지산동 도낙회 집에서 7호광장 부근 달성고등학교 동창회관까지 아침에 출근하고 늦은 밤에 귀가하는 생활을 반복하면서 총600페이지 “달성고30년사”를 출간하게 되었다.
책이 나오는 날 수많은 동문들이 동창회관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친구는 자기 임기동안 달성고등학교 역사를 기록한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을 정말 너무 대견하고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으며 전국의 학교와 교육청 그리고 우리나라 국회도서관에도 한 권씩 기증 할 것이라며 몹시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동문들이 꼭 알아야 될 이야기는, 여기 제 옆에 있는 이재윤편집위원장의 헌신과 노고가 없었다면 결코 이 책이 만들어 질 수 없었다”며 극찬을 하자 동문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그 순간 추운 겨울날씨에 두 달 동안 자료수집,사실확인,편집 과정들의 고생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날아 가버렸다.
그 후 몇 달이 지나서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덕산, 책 만드느라 너무 고생을 해서 몸이 많이 상했을텐데 우리 몸 보신도하면서 둘이서 전라도 맛 기행을 다녀오자”며 그리하여 뜻을 뭉친 우리는 2박3일의 고교동기끼리 남도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살면서 수많은 여행을 다녀봤지만 그 때 그 친구랑 함께 다녀 온 그 여행이 지금도 가끔 떠오르며 친구의 얼굴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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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치 사진 찍어 온 것을 보는 듯하구나..남도여행기 덕분에 안방에서 구경 잘했네..
참 좋은 추억을 만들었구나...부럽다 친구야~
마음이 담긴 추억의 여행기를 읽는것 갓다 ㅡㅡ
좋은 추억 많이 간직하고 왔네
나두 자주 여행 다녀도 사진 몇장 찍는게 모두 인데 ㅡㅡ
여행후기를 아주 자세히 적느라 고생햇다 ㅡㅡ
친구야 잘보았데이 ㅡ^*6
비가와서 마음이 우중충하고 울쩍했는데......
너의 글을 보니 마음엔 활짝갠 날씨
그동안 너의글이 올라 오지않아 궁급했는데
늘상 바쁜생활에 살다보니
진작 친한 친구와는 장시간 여행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넌 친구랑 단둘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많은 것을 생각 하고 많은것을 느끼고 돌아 왔구나.
부럽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 나도 꿈 속이요. 이것 저것이 꿈이로다~ 얼씨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