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이야기
서 영 복
올해에는 서천이다.
우리는 공무원 은퇴자 공동체 마을의 상반기 신청에서 둘 다 선정되지 못했다. 경쟁률이 높아 별 기대를 안 하면서 하반기에도 신청해 보았지만 역시나 모두 탈락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신청한 서천 ‘두달살이’에 다행이도 대기자로 선정되었다. 기다리다가 뒤늦게서야 연금공단에서 개별 연락이 온 것이다. 우리는 망설일 것도 없이 8월 입주에 수락하였다. 그리고 충남 서천에서 어른 소꿉놀이가 시작되었다. ‘두달살이’의 숙소 값은 백만 원이다. 펜션의 하루 숙소 값을 생각하면 그리 비싼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인 중에는 멀쩡한 아파트를 비워두고 시골의 작은 숙소 값에 지출하는 돈이 아깝지 않으냐고 묻는 이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 전부터 꿈꾸던 캐나다, 지난 5월에 떠나기로 계획했던 밴쿠버 ‘두달 살이’가 하필이면 우리 둘이 똑같이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항공료를 환불받으며 날린 수수료를 생각하면 조금도 아쉬울 게 없다. 그렇게 꿩 대신 닭으로 낯선 곳 서천에 짐을 옮겼다. 숙소는 작년의 청도 전원주택보다 못했지만, 진주보다는 좀 나았고 우리가 사는 대전과도 멀지 않으니 여러모로 괜찮았다.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이지만 신성리 갈대밭과 한산 모시가 유명하고 1500년이나 전통을 이어온 소곡주가 마을 사람들의 효자 노릇을 하는 고장이다. 우리는 첫날 새벽, 아침 산책으로 숙소에 있던 자전거를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갈대숲이 있는 금강둑 길을 달려가 보았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은 둘째로 치고라도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넓은 갈대숲 위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마주하며 심호흡을 할 때 “고맙습니다”라
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자전거 전용길 양쪽으로 피어나는 갖가지 작은 들꽃들의 향기를 그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 서천에서의 시골살이는 매일 아침 남편과 금강둑 길을 자전거 타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3킬로 떨어진 소재지의 오일장에서 장보기도 하고 마트에 가면 없는 것 빼곤 다 있으니 집에서처럼 반찬을 만들어 밥을 해 먹으면서 근처의 서해안 볼거리들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저녁에는 이른 식사를 하고 동네 마실을 나간다. 마을 사람들은 낯선 우리를 보면서 말을 걸어온다. 고추밭에서 고추를 함께 따면서 시골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모시송편을 나눠 먹기도 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곳에 이사 와서 함께 살자는 이야기를 한다. 시골이 그리 도 좋단다. 시끄럽고 번잡한 도시에서는 살기 싫다고 하신다. 그래서 자녀들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골살이를 고집하는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라 우리도 시골에 있는 동안은 도시의 일정이 없으니 몸도 마음도 한가하기 짝이 없었다. 90 가까운 어르신을 모시고 고구마순을 따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함께 일을 도우며 말벗을 하였다. 남편과 나는 어렸을 적에 살던 고향처럼 여겨져 잠깐씩 하는 그런 일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일이 끝나니 그것을 한 아름 안겨주신다. 올여름 처음으로 고구마순 김치를 담가서 은퇴자 마을에 같이 입주한 옆방에도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마을에서 읍내로 가는 시골 버스를 타보았다. 내 나이도 경로석에 앉을 수 있지만, 정류장마다 학교에 가듯이 병원에 가는 노인들이 자꾸 늘어나서 나는 점점 뒷자리로 밀려 나갔다. 별로 늙지도 않은 운전기사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은 옆에 걸어둔 효자손을 옷 속에 넣어 등을 긁는다. 승객이 많았지만 아무도 그걸 이상히 여기거나 웃지 않는다. 나 혼자서 피식 웃음이 났다. 시골 버스의 정겨운 풍경이었다. 어느 날은 마당의 시원한 플라타너스 그늘에서 매미 소리를 들으며 새로 마련한 칼림바 연습을 하고 있을 때 마을 이장님이 다가왔다.
이곳 마을이 행복 농촌 마을 만들기 콘테스트에서 충남 최우수 마을로 선정되었단다. 그러더니 얼마 전에는 전국 본선 대회에까지 나가서 입상하고 상금을 1,500만 원이나 받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마을이 집마다 갖고 있던 소각로를 없애고 영농폐기물이나 생활 쓰레기를 분리해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니 아닌 게 아니라 산책하러 나가보면 마을 길은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고 길가에 맥문동 꽃길이 조성돼있었다. 마을 안내판은 그림지도로 돼 있고 집집이 이곳 뚜벅이 체험 공방에서 만든 색다른 디자인의 문패를 달았는데 이름뿐만 아니라 별명까지 쓰여 있는 게 퍽 재미있다. 톡 쏘는 아낙네라고 문패를 붙인 S는 부산에서 귀촌해온 이곳 갈숲 마을 영농조합의 카페지기이다. 창문에서 빨강 머리 앤이 웃는 얼굴로 오가는 사람들을 기다리지만 온종일 심심한 고양이들만 오락가락한다. 어쩌다 한 번씩 카페 문을 밀어보는데 시골답지 않은 깔끔함이 그녀의 성격을 말해주면서 이래봬도 발효음료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전문가 수준급이다.
무엇보다 칭찬해주고 싶은 것은, 홀로 계신 마을 노인들에게 젊은이들이 기꺼이 양자 양녀를 맺어 반찬도 해 주고 눈이 오는 날은 마당도 쓸어주면서 멀리 있는 자녀 대신 병원에 모셔가며 기꺼이 운전도 맡아 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귀촌해온 사람들도 쉽게 어려움 없이 한 마을 가족이 되어 행복 농촌이 되었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하는 몇몇 사람들은 농촌 생활을 꿈꾼다. 그래서 요즘은 농촌 살아보기가 유행한다.
그러나 단순히 몇 달 살아보기만으로 쉽게 결정하고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귀촌했다가 실패한 사례들도 주변에 흔한 일이다. 대부분이 마을 사람들과의 원만치 못한 관계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마을의 이장님은 마을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많고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잘 따라주어 솔선수범하니 행복마을이 된듯하다.
나는 가끔 ‘한달살이’와 ‘두달살이’에서 새로운 고향과 새 친구를 얻는다. 이곳 서천에서도 귀한 친구를 얻었다. P를 처음 만난 곳은 아침 자전거길에서였다.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말을 하면서 지나가는 그녀가 낯선 사람 같지 않았다. 복잡한 수도권에서 유치원을 경영하고 은퇴하여 무작정 조용한 시골살이를 하려고 귀촌해왔다는데 자기 가진 진주를 흙 속에 묻지 않고 마을에 나누는 예쁜 마음을 가진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시골교회에서 무료한 노인들에게 미술 지도를 하면서 함께 어울려주는 사람, 이런 생활이 내가 꿈꾸는 시골 생활이다. 나에게 있는 재주는 결코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 그러니 소유권도 내게 없다.
언젠가 세계적인 명문대학 졸업식장에서 한국 유학생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동한 적이 있다. 그는 자기 이름의 빛나는 졸업장의 어느 한 부분은 학교의 교실에서 청소해준 미화원 아주머니의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나는 특별하게 잘하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러나 남들보다 조금 더 기능이 나아서 이웃에게 도움을 줄 정도의 몇 가지의 재주가 있다면 그것들은 오롯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주변의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28년의 공무원 생활은 내게 어떤 어려움도 없는 평화로운 인생을 갖게 해 주었으니 은퇴 후의 삶은 차곡차곡 갚아야 한다. 70년을 넘게 사는 동안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사람은 수없이 많다. 고무신이 종잇장처럼 닳아지도록 농사일하셨던 나의 엄마, 물질보다 값진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신 아버지.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 내 곁을 지나간 학교 선생님과 제자들, 직장동료들, 친구들, 내게 악기를 가르쳐주고 재봉을 가르쳐준 교실 밖 선생님들, 그리고 이웃들뿐 아니라 내가 모르는 그 누구에게든 죽기 전에 반드시 되돌려줘야 하는 빚이다.
내 건강을 지켜서 가지고 있는 작은 재능을 나누고 싶다. 서천에서 새로 얻게 된 친구는 내게 또 다른 활력소와 도전정신을 갖게 해 준 고마운 친구이다. 함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자전거를 함께 타며 이웃들에게 빚을 갚는 그런 친구로 지내고 싶다. 서천은 내게 그런 친구도 선물해 주었다. (2022년. 가을)
첫댓글 서영복님의 수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