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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천전(川前)] 의성 김씨의 내력
-퍼 온 글 -
- 사진은 대머리가 직접 촬영한 것 -
안동에서 동쪽으로 영덕 방면 국도 34번을 따라 12km 쯤 가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즐비한 반촌 마을이 있다. 반변천이 앞을 흘러가므로 지명을 내앞[천전(川前)]이라 한다.
-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
<안동의 동남쪽에 임하 천전은 곧 청송읍 시냇물 하류가 황강(黃江) 물과 합류하는 곳이다. 임하 천전에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살던 옛터가 있다. 문족이 번성하여 유명한 마을이 되었고 옆에는 몽선각(夢仙閣)과 도연(陶淵) 선찰(仙刹)의 좋은 경치(景致)가 있다.> 하였고
- 또 <영가지(永嘉誌)>에 이르기를 -
<천전촌(川前村) 또는 대현(大峴)이라고 한다. 현의 남쪽 4리에 있다. 증(贈) 판서(判書) 김진(金璡)이 여기에 살았다. 아들 셋이 문과(文科)에 오르고 둘이 생원(生員)에 합격하여 세상에 전하기를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한다.>
멀리 영양의 일월산(日月山)과 청송(靑松)의 주왕산(周王山)에서 흐르는 물이 진보(眞寶)의 합강(合江)에서 마주쳐 반변천(半邊川)을 이루고 길게 흘러 이곳 마을 앞을 지나간다.
내앞 마을은 달빛에 비단을 빨아 널어놓은 것 같다는 완사명월형국(浣紗明月形局)으로 하회(河回), 유곡(酉谷), 양동(良洞)과 함께 삼남(三南)의 사대길지(四大吉地)로 유명하다.
마을 뒤에 있는 광산(匡山)은 진산(鎭山)인데 앞에는 임하호 보조댐이 가로질러 항상 푸른 물이 넘실거린다. 호안(湖岸)을 따라 1km의 울창한 소나무를 개호(開湖)숲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을의 안산(案山)쪽이 허(虛)하므로 인공적인 비보(裨補)로 식재(植栽)한 일종의 조산(造山)이다. 이 소나무는 약봉(藥峰) 선생이 평해 군수로 재직 당시 그곳의 괄송(括松) 씨를 구해오고 학봉(鶴峰) 선생은 일본(日本) 사행(使行)에서 돌아 올 때 곡송(曲松)씨를 가져와서 심어 가꾼 지 4백 수십년 지금은 울창한 노송(老松)이 되었다.
그 앞 강 건너에는 백운정(白雲亭)이 있다. 처음엔 부암(傅巖)의 남쪽에 청계(靑溪) 선생이 마을의 자제(子弟)들을 가르칠 부암서당을 마련 하였다. 그 자리에서 약간 북쪽에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청계의 중자]이 백운정이란 정자를 세웠다.
‘백운정’이란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의 시구(詩句) <客中思親 云 白雲孤飛>에서 따온것인데 “저 흰 구름아래 부모가 계신다” <登高山 望白雲 思親在其下>란 뜻이다.
현판(懸板)은 미수(眉?) 허목(許穆)의 글씨이고 이락문(二樂門)과 조양문(朝陽門)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글씨다.
<題:白雲亭 > [靑溪:金璡]
鑿壁開亭翠?頭 : 푸른 봉 암벽 뚫어 정자를 열었더니
江山明媚佛人眸 : 강산이 명미하니 사람의 눈을 끄네
日臨鏡面魚紋動 : 햇살 붓는 강면엔 고기떼가 춤을 추고
雲掃天心雁字稠 : 구름 걷힌 하늘엔 기러기 떼 놀고 있다.
百里遊歌曾物色 : 나라안 돌고 돌며 인재를 찾아와서
一區花草亦光休 : 한 울타리 화초 되니 더 더욱 빛이 난다.
樽前知有無窮樂 : 잔을 앞에 놓고 한없이 즐기고 있다만
祗恐兒孫醉似劉 : 내 아손이 유령처럼 취할가 두렵구나
청계 김진의 영정
※ 참고[註]
내앞은 의성 김씨(義城金氏)의 총 본산(本山)이다. 신라 끝 임금 경순왕의 4자 의성군(義城君) 휘(諱) 석(錫)을 시조(始祖)로 하는 김씨의 한 갈래가 이 고장에 입향(入鄕)했다. 시조로부터 9세인 거두(居斗)와 그의 아들 천이 함께 벼슬을 버리고 안동의 풍산현으로 낙향(落鄕) 하였다.
그 뒤 천(?)이 풍산에서 안동 읍내로 옮겨 살았다. 그때는 고려가 무너진 뒤인지라 강개(慷慨)함을 누를 길 없어 마을 이름을 방적곡(邦適谷)이라 했다. 그 뜻은 ‘나라가 바뀌었으니 [방지혁의(邦之革矣)]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아안적귀(我安適歸)]’란 의미(意味)이다.
방적골은 방(邦)자의 음이 밤 율(栗)자로 변해 지금은 이곳을 율세(栗世)동이라 부른다. 그로부터 천(?)의 증손되는 만근(萬謹)공이 해주(海州) 오씨 가문(家門)에 장가들어 처가와 가까운 이곳 천전(川前)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곳에 정착한 만근의 손자 청계(靑溪) 김진(金璡)은 글을 좋아하는 선비로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했고 서당(書堂)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다.
그의 아들 5형제는 퇴계(退溪)의 문인으로 모두가 급제하여 사림(士林)은 문장 학행을 추앙하는 뜻으로 오룡(五龍)이라 불렀다. 곧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이다.
학봉은 퇴계학통을 이어받은 거봉으로 국사에 활약한 명신(名臣)이고 임란 때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한 운천(雲川) 김용(金涌)의 호종일기(扈從日記)는 보물로 지정 보존된다.
그밖에도 약봉의 손자 김방걸(金邦杰)은 대사간(大司諫)이고,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은 영남(嶺南) 유학(儒學)의 거장(巨匠)인데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함께 퇴계학맥(退溪學脈)의 삼고봉(三高峰)을 이루었으며 특히 제산은 화산풍우오룡비(花山風雨五龍飛)의 한사람으로 영조(英祖) 임금의 총애(寵愛)를 받은 분이다.
학봉의 후손으로 북천가(北遷歌)를 남긴 김진형(金鎭衡), 왜적(倭敵)에 항거(抗拒)하여 구국(救國)의 제단(祭壇)에 몸바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등 실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청계의 후예(後裔) 학봉(鶴峰)은 서후 금계, 운암(雲巖)은 신덕, 남악(南嶽)은 예천 금당실로 각각 분파(分派)되었다.
▣ 의성 김씨 종택[보물 제450호]
이 건물은 청계(靑溪)고택(古宅), 또는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평면은 ‘기(己)’자형으로 정면 11칸, 측면 8칸, 총 55칸인데 방마다 온돌이고 태양이 잘 들어오며 내당 마루는 3층으로 당시 가족제도(家族制度)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資料)를 제공(提供)해 주고 있다.
선조20년(1587) 겨울에 화재로 불타 버린 것을 학봉(鶴峰)이 중국의 재상가(宰相家)를 모방하여 한중(韓中) 절충식으로 건립한 것으로 특수한 건축기법(建築技法)을 지니고 있다.
건물의 평면은 ‘기(己)’자형이다. 이렇게 배치한 이유는 지리풍수(地理風水)설에 맞추어 맥을 자르지 않기 위함이다. 그래서 정침과 외당 사이에 기축(己丑) 일각문(一角門)을 두어 중문(中門)과 대문(大門)이 일직선으로 통하게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 집의 터는 늪[池]이었다고 한다. 동해에서 안동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이 못 속에서 길 막이 귀신이 나타나 행인을 방해하여 이에 놀란 사람들은 사망하거나 아니면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고 한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장담하던 안동부사가 낮에 여기를 갔다가 귀신을 만나 혼겁을 먹고 허둥지둥 쫓겨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후 나라에서 이 못을 메우기 위해 지나가는 행인들로 하여금 반드시 돌 한 개를 던져 넣도록 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가자 결국은 늪이 메워지게 되었다. 그 부지(敷地) 위에 종택이 건립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 귀봉종택(龜峰宗宅)[경상북도민속자료 제36호]
이 건물은 청계(靑溪)의 중자(仲子) 김수일(金守一)의 구택으로 세칭 귀봉종택(龜峰宗宅)이라 한다.
이 종가에는 세전(世傳) 가보(家寶)가 있으니 곧 경순왕(敬順王)의 옥적(玉笛), 문장검(文章劒), 연하침(煙霞枕), 매죽연(梅竹硯) 등 네가지다. 가보(家寶)에는 청계(靑溪)공의 유훈인 <寧須玉碎而不宜瓦全> “옥이 되어 깨어질지언정 기와가 되어 완전함은 옳지 않다.”는 정신이 깃들어져 있고 자손의 면학(勉學)과 장학(?學)을 위한 뜻도 있다.
운천(雲川) 김용(金涌)은 귀봉(龜峰)의 아들인데 그가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몽진(蒙塵)을 호종(扈從)하고 쓴 책인 호종일기(扈從日記)는 보물 484호이다.
1. 옥적(玉笛)
신라 경순왕의 분부로 제작된 청?황색 한쌍의 옥적(玉笛)이 있었다. 두 개의 옥적 중에 황색은 왕가에 보관하고 청색은 그의 넷째 아들[의성군(義城君): 석(錫)]에게 물려주었다. 전장 64cm 절죽형(節竹形)으로 6음계(音階)인데 경주남산 옥돌로 만들었다. 기이(奇異)한 현상(現象)은 어느 날 경주의 황색 옥적이 세마다로 절단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보관하고 있던 가보를 꺼내보니 청색 옥적 마저도 삼절(三絶) 되었더라 는 것이다.
영해부사를 지낸 김희주(金熙周)께서 보관(保管)하는 함(涵)을 만들고 그 뚜껑에 유래를 적으면서 <一傳千故都 一傳千孫也>라 쓰고 천년 구물이 삼절로 부러진 것은 매우 한스러운 일이나 자손들은 이것을 길이 보존해야 한다고 적었다.
부러진 청적을 후손 김종해(金鍾海)께서 임하면장 재직 당시에 안동군수의 도움으로 은(銀)으로 수리(修理)하여 지금은 완전한 적(笛)으로 종가에 보관되어 있다.
2. 문장검(文章劒)
문장검도 역시 경순왕(敬順王)이 물려준 것인데 칼의 모양이 창포잎 같이 생겨서 처음에는 창포검(菖蒲劒)이라 불렀다. 그후 시조의 16대 청계(靑溪)공이 문장검(文章劒)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문장이 뛰어난 자손에게 문장답과 이 칼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칼의 길이는 40cm로 양날 있는 칼로서 손잡이는 가죽으로 감싸 있다.
청계는 손자[김수일의 자]인 운천에게 그의 학문과 문장을 찬하여 처음 이칼을 물려줌으로서 적은종가인 귀봉종택에 보관되어 왔으나 애석하게도 일제(日帝)때 후손 김시창(金時昌)이 임시 보관 하다가 그가 납북(拉北)되는 바람에 분실하고 지금은 없다. 이로써 의성 김씨의 사보(四寶)는 이제 삼보(三寶)만 전할 뿐이다.
3. 연하침(煙霞枕)
운천(雲川)의 손자 경와(敬窩) 김휴(金烋)께서 금강산(金剛山)에 유람(遊覽) 갔다가 만폭동 청룡담(靑龍潭)에서 건져온 것이다. 나무뿌리가 물 속이나 땅속에서 천년을 지나면 침향이 되고 또 이것이 장구(長久)한 세월을 보내면 침석이 된다. 침석이 되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변화를 일으킨다고 하니 이 연하침은 바로 그 침석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연하침은 물속에 들어가면 뽀얀 안개를 뿜는다고 한다. 100여 년 전에 이것을 백운정 앞 소(沼)에 넣어 보았더니 갑자기 홍수가 일어나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후 1년여만에 대추벼루 소에서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이상하게 여긴 등짐장수가 건져내어 종가로 돌려주었다고 한다.
4. 매죽연(梅竹硯)
운천의 손자[휴(烋)]의 외조인 백암(栢巖) 김륵(金?)께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종황제(神宗皇帝)로부터 하사(下賜)받은 벼루이다. 길이 30cm, 너비 22cm에 바탕에는 일월(日月)형이 뚜렷한 중국의 단계석(端溪石) 벼루로 둘레에는 대나무와 매화가 새겨져있어 이름을 매죽연(梅竹硯)이라 한다.
이 벼루가 운천(雲川) 종가(宗家)에 전해오는 연유는 다음과 같다.
김휴(金烋)가 어릴 적 외가에 갔을 때 벼루가 탐이나 서 외조부께 졸랐더니 그냥 줄 수는 없으니 친손(親孫)이나 외손(外孫) 중에 누구라도 먼저 과거(科擧)하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다. 이로써 글재주에 능한 휴(烋)가 14살에 초시(初試)에 합격하므로 서 이 벼루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 몽선각(夢仙閣)
몽선각도 택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월탄(月灘) 김창석(金菖錫) 이 벼슬을 물러나 망천에서 청유(淸遊)할 때 꿈속에 소동파를 만나서 놀았다고 정자의 이름을 몽선각(夢仙閣)이라 했다. 1956년 사라호 태풍(颱風)으로 유실된 것을 1985년에 새로 말끔히 복원하였다.
▣ 협동학교(協東學校)
일송 김동삼 선생 생가
김대락 선생이 지은 집. 백하구려(白下舊廬)란 '백두산 아래에서 독립운동하던 옛 초막집'이란 의미로 지음. 김대락 선생의 업적에 대해서는 위의 안내판 사진 참조
이 마을에서 태어나 학문(學問)을 연마(硏磨)하고 나라 위해 봉사한 뭇 선인(先人)들이 심신(心身)을 달래어왔던 가산서당(可山書堂)의 옛터에 협동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현재는 없어지고 천전초등학교가 자리한다. 한말 우국(憂國) 충정(忠情)에 불타는 지사(志士)를 훈련하며 뜻을 키우려고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양 선생이 많은 애국 청년들을 불러서 조국광복을 위한 계책(計策)과 신학문을 가르치며 군사훈련(軍事訓鍊)까지 실시(實施)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1993년도에 <협동학교 기념비>를 세웠다.
첫댓글 정태 친구 대단하네. 자료 수집은 특등. 봄에 안동을 방문하였을때에 권영길의 안내를 받아 종택을 1시간 쭘 둘러보고 더 자료가 풍부한 내용을 알고 싶어 했는데 좋은 자료를 소개 해 주어서 너무나 반가워 내 불로그에 얼른 올려놓고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내 외가가 의성김씨이거든 그런데 못난 놈은 의성김씨에 대한것 '까막 눈, 이제 자세히 한번 의성김씨의 내력을 점검 해 볼란다. 고마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