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반의 경제 기반은 과전, 녹봉, 그리고 자신 소유의 토지와 노비 등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지주였으며, 주수입원은 토지와 노비였다. 특히, 양반 소유의 토지는 비옥한 토지가 많았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규모가 커서 농장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양반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노비에게 직접 경작시켰다. 그러나 토지의 규모가 커서 노비의 노동력만으로 경작할 수 없으면 그 주변 농민에게 생산량을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병작반수의 형태로 소작을 시켰다. 양반은 자기 토지가 있는 지역에 집과 창고를 지어 놓고 직접 노비를 감독하고 농장을 살피기도 하였지만, 대개 친족을 그 곳에 거주시키면서 대신 관리하게 하였다. 때로는 노비만 파견하여 농장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농장은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욱 증가하였다. 농장주들은 유망민을 모아 자신 소유의 노비처럼 만들어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다.
조선 전기에 양반은 10여명에서 많게는 300여명이 넘는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비를 사기도 하였지만, 주로 자신이 소유한 노비가 출산한 자녀는 노비가 되는 법에 따라 노비 수를 늘리기도 하고,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양인 남녀와 혼인을 시켜 늘리기도 하였다.
양반은 노비에게 가사를 돌보게 하거나 농경에 종사시키고, 옷감을 짜게 하였다. 다수의 노비는 주인과 따로 살며 주인의 땅을 경작하거나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양반은 이들 외거 노비에게 매년 신공으로 포와 돈을 거두었다. 이런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양반은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녹봉 지급량 : 대략 정1품은 곡식 97석, 삼베 21필, 저화 10장을, 종9품은 곡식12석, 삼베2필, 저화 1장을 받았다.
조선 전기 양반의 토지 소유 규모 : 대략 200~300마지기 정도이나 2000마지기 이상의 소유자도 있었다. 대체로 논 한마지기의 넓이는 200평이다.
노비 신공 : 노(남자)는 면포 1필, 저화 20장, 비(여자)는 면포 1필, 저화 10장이다.

☜ 양반 가옥
(의성 김씨 종택 모형)

☜ 전답 매매 문서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정부는 세력가들이 농민의 토지를 빼앗는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고 농업을 권장하였다. 농민도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한 결과, 농민 생활은 이전보다 나아졌다.
정부는 개간을 장려하고, 각종 수리 시설을 보수, 확충하는 등 안정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사직설, 금양잡록 등 농서를 간행, 보급하였다. 특히, 농사직설은 우리 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하여 편찬하였다. 양반도 간이 수리 시설을 만들고, 중국의 농업 기술을 도입하는 등 농업에 관심이 높았다.
밭농사는 조, 보리, 콩의 2년 3작이 널리 행해졌으며, 논농사도 남부 지방에서 모내기가 보급되어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모내기는 봄가뭄에 따른 수리 문제 때문에 남부 일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시비법도 발달하여 밑거름과 덧거름을 주게 되면서 경작지를 묵히지 않고 계속해서 농사지을 수 있었다. 쟁기, 낫, 호미 등 농기구도 개량되었다. 목화 재배도 확대되어 의생활이 개선되었으며, 약초와 과수 재배 등이 확대되었다.
이런 농업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농민 생활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지주제가 점차 확대되면서 농민이 자연 재해, 고리대, 세금 부담 등으로 자기 소유의 토지를 팔고 소작농이 되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이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로 수확의 반 이상을 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토지를 상실한 농민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되자, 정부에서도 대책을 마련하였다. 정부는 잡곡, 도토리, 나무껍질 등을 가공하여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동시에, 호패법, 오가작통법 등을 강화하여 농민의 유망을 막고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지주인 지방 양반도 향약을 시행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조선 전기 여러 가지 농기구류

☜ 농사직설

☜ 금양잡록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
조선은 고려보다 관영 수공업 체제를 잘 정비하였다. 전문적인 기술자를 공장안에 등록시켜 서울과 지방의 각급 관청에 속하게 하고, 이들에게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 공급하게 하였다. 관청에 등록된 장인(관장)들은 의류, 활자, 화약, 무기, 문방구, 그릇 등을 제조하여 납품하였다. 이들은 근무하는 동안에 식비 정도만 지급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량을 초과한 생산품에 대해서는 세금을 내고 판매하여 가계를 꾸렸다. 이 기술자들은 부역으로 동원되는 기간 이외에는 사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관영 수공업은 16 세기에 들어와 부역제가 해이해지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관영 수공업자 이외에 민영 수공업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농민을 상대로 농기구 등의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였고, 양반의 사치품도 생산하였다. 이 밖에, 농가에서 자급자족의 형태로 생활 필수품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이 있었다. 의류로서 무명, 명주, 모시, 삼베 등이 생산되었는데, 특히 목화 재배가 확대 보급되면서 무명 생산이 점차 증가하였다.
조선 초 공장(수공업자)의 수
- 경공장:2800여 명
- 외공장:3500여 명
양반과 평민의 경제활동] 상업 활동| 교과서 자료 [근세]
// 조선은 고려보다도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었다.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다.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이라 하였다. 또,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었다.
15세기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장시는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증가하였다. 농민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몰릴 것을 염려한 정부에서는 장시의 발전을 억제하였으나, 일부 장시는 정기 시장으로 정착해 갔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장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보부상은 장시에서 농산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등을 판매하여 유통시켰다.
한편, 정부는 조선 초기에 저화, 조선통보 등을 만들어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부진하였다. 농민은 화폐로 쌀과 무명을 사용하였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주변 국가와의 무역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명과는 사신이 왕래할 때에 하는 공무역과 사무역을 허용하였다. 여진과는 국경 지역에 설치한 무역소를 통하여 교역하였고, 일본과는 동래에 설치한 왜관을 중심으로 무역하였다. 그러나 국경 부근에서 이루어지는 사무역은 엄격하게 감시를 받았는데, 이 때 주로 거래된 물화는 무명과 식량이었다.
조선 전기의 상업
○ 장사꾼이 의복 등속을 판매하며, 심지어는 신, 갓끈, 빗, 바늘, 분(粉) 같은 물품을 가지고 무지한 백성에게 교묘하게 말하여 미리 그 값을 정하고 주었다가 가을이 되면 그 값을 독촉해서 받는다. 〈세종실록〉
○ 경인년(1470) 흉년 때 전라도 백성이 서로 모여들어 점포를 열어 장문(場門:시장)이라 칭하고,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목숨을 유지하였다. 〈성종실록〉
○ 임진왜란 이후 백성은 정해진 곳 없이 교역으로 생활하는 것이 마침내 풍속이 되었다. ……각 읍에서 장시가 서는 것이 적어도 3, 4곳이 되어 …… 한 달 30일 이내에 시장이 열리지 않는 날이 없다. 〈선조실록〉
양반과 평민의 경제활동] 수취 제도의 문란| 교과서 자료 [근세]
//
16세기에 이르러 수취 제도의 운영 과정에서 폐단이 심해지면서 몰락하는 농민이 증가하였다. 공납에서는 중앙 관청의 서리가 공물을 대신 내고 그 대가를 많이 챙기는 방납이라는 폐단이 나타났다. 방납이 증가할수록 농민의 부담도 증가하였다. 공물의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이 도망을 하면 그 지역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대신 내게 하였다. 이 때문에 유망 농민이 더욱 증가하였다.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공납의 폐단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거두는 수령도 나타났고, 이이와 유성룡 등은 공물을 쌀로 거두는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농민 생활이 어려워지고 요역 동원으로 농사에 지장을 가져오자, 농민은 요역 동원을 기피하였다. 이에, 농민 대신에 군인을 왕릉 축조, 성곽 보수 등 각종 토목 공사에 동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인도 이런 힘든 군역을 기피하였다. 장기간 평화가 지속되면서 관청이나 군대에서 군역에 복무해야 할 사람에게 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와 다른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하게 하는 대립이 불법적으로 행해졌다. 이에 군포 징수제가 점차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군포 부담의 과중과 군역 기피 현상으로 도망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적도 부실해졌다. 각 군현에서는 정해진 액수를 맞추기 위해서 남아 있는 사람에게 그 부족한 군포를 부담시키자, 남은 농민도 생활이 더욱 어려워 졌다.
환곡제는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곤궁한 농민에게 곡물을 빌려주고 10분의 1 정도의 이자를 거두는 제도였다. 그러나 지방 수령과 향리들은 정한 이자보다 많이 거두어 사적으로 사용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이런 변화 과정에서 농민 생활이 악화되어 각 지방에서 유민이 증가하였다. 유민 중 일부는 도적이 되어 양반과 중앙 정부로 바치는 물품을 빼앗기도 하였으며, 이들이 도성에까지 출현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명종 때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한 임꺽정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6세기 농민들의 처지
○ 백성으로 농지를 가진 자가 없고, 농지를 가진 자는 오직 부유한 상인과 사족(士族)의 집뿐 입니다. 〈중종실록〉
○ 근래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 공공연하게 노략질을 하며 양민을 죽이고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여도 주현에서 막지 못하고 병사(兵使)도 잡지 못하니, 그 형세가 점점 커져서 여러 곳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떼로 일어나 빈 집에 진을 치고 밤이면 모였다가 새벽이면 흩어지고 칼로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명종실록〉
○ 지방에서 토산물을 공물로 바칠 때, (중앙 관청의 서리가) 공납을 일체 막고 본래 값의 백배가 되지 않으면 받지도 않습니다. 백성이 견디지 못하여 세금을 못 내고 도망하는 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 군적 (육군박물관 소장)
호적을 근거로 만든 군역 동원 장부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과전법은 고려 말에 전제 개혁을 마무리한 토지 제도의 근간이다. 이 법에는 토지를 나누어 주는 규정, 조세의 규정, 땅 주인과 소작인에 대한 규정, 토지 관리 규정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과전법은 고려 말 세금을 내지 않던 농장에 대하여 과세함으로써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켰다. 이 법에서 토지를 나누어 주는 주요 대상은 왕실을 비롯하여 국가 기관, 지방 관부, 공공 기관, 관료, 벼슬이 없는 관인, 이(吏) 등이었으나, 사전 재분배의 중심이 된 것은 관료에게 나누어 준 과전이었다. 과전법은 농민의 생활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토지 소유권을 보장하고, 10분의 1조를 공정하게 하며 병작반수를 금하였다.
과전법에서는 과전의 지급을 경기도에 있는 토지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1417년(태종 17)에 과전의 3분의 1을 하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옮겨 나누어 주었고, 1431년(세종 13)에는 이것을 경기도로 환급함과 아울러 새로운 토지 분급법이 제정되었다. 이 결과, 과전의 결수가 감소하였다. 이후, 과전법은 유지가 어려워 폐지되고 직전법으로 바뀌었다. 과전법이 현직 관료와 퇴직 관료에게 토지를 지급하던 것과는 달리, 직전법은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또, 관료의 유가족에게 나누어 주던 수신전, 휼양전이 폐지되었다.
1. 과전법과 직전법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자.
2. 과전법에서 직전법으로 바뀐 이유를 설명해 보자.
|
//
○ 검소한 것은 덕(德)이 함께 하는 것이며, 사치는 악(惡)의 큰 것이니, 사치스럽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 농사와 양잠은 의식(衣食)의 근본이니, 왕도 정치에서 우선이 되는 것이다.
○ 우리 나라에는 이전에 공상(工商)에 관한 제도가 없어, 백성 중에서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자들이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백성이 줄어들었으며, 말작(末作:상업)이 발달하고 본실(本實:농업)이 피폐하였다. 이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경국전〉
1. 성리학적 경제관에 대하여 정리해 보자.
2. 성리학적 경제관이 당시 산업 정책에 끼친 영향을 정리해 보자.
//
조선은 사회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법제화하였다. 양인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유민으로, 조세, 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다. 천민은 비자유민으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천제의 원칙에만 입각하여 운영되지는 않았다.
관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던 양반은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의 신분으로 굳어져 갔고, 양반 관료를 보좌하던 중인도 신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간의 차별을 두는 반상 제도가 일반화되고,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정착되었다.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신분 이동이 가능하였다. 법적으로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고, 양반도 죄를 지으면 노비가 되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다.
//
양반은 본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양반 관료 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나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단 지배층이 된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지배층이 더 이상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들은 문무 양반의 관직을 받은 자만 사족으로 인정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
조선은 각종 법률과 제도로써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제도화 하였다. 무엇보다도 양반은 각종 국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중인은, 넓은 의미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 계층을 뜻하고, 좁은 의미로는 기술관만을 의미한다. 중앙과 지방에 있는 관청의 서리와 향리 및 기술관은 직역을 세습하고, 같은 신분 안에서 혼인하였으며, 관청에서 가까운 곳에 거주하였다. 양반 첩에게서 태어난 서얼은 중인과 같은 신분적 처우를 받았으므로 중서라고도 불리었다. 이들은 문과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간혹 무반직에 등용되기도 하였다.
중인은 양반에게서 멸시와 하대를 받았으나, 대개 전문 기술이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으므로 나름대로 행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역관은 사신을 수행하면서 무역에 관여하여 이득을 보았으며, 향리는 토착 세력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면서 위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 조선고평생풍속도 (朝鮮古平生風俗圖)
관리가 말을 탄 채 하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 평민, 양인으로도 불리는 상민은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 수공업자, 상인을 말한다. 나라에서는 이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지 않았지만, 과거 준비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으므로 상민이 과거에 응시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전쟁이나 비상시에 공을 세우는 등의 경우가 아니면 상민의 신분 상승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농민은 조세, 공납, 부역 등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세는 때에 따라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과중하였다.
수공업자는 공장으로 불리며, 관영이나 민영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상인은 시전 상인과 행상 등이 있었는데,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상거래에 종사 하였다. 조선은 농본억상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상인은 농민보다 아래에 위치하였다. 한편, 양인 중에도 천역을 담당하는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을 신량역천이라 하였다.
천민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비였다.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므로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일 때, 그 소생 자녀도 자연히 노비가 되는 제도가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선 시대 노비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속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속한 사노비가 있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 노비와 주인과 떨어져 독립된 가옥에서 사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는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에 신공을 바쳤으며, 공노비도 국가에 신공을 바치거나 관청에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신량역천 (身良役賤)
칠반천역이라고도 한다. 수군, 조례(관청의 잡역 담당), 나장(형사 업무 담당), 일수(지방 고을 잡역), 봉수군(봉수 업무), 역졸(역에 근무), 조졸(조운 업무) 등 힘든 일에 종사한 일곱 가지 부류
|
//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본 정책을 실시하여 농민의 안정을 꾀하였다. 국가는 양반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농번기에 안정적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각종 재해를 당한 농민에게는 조세를 덜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책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생활이 자주 어려움을 당하자, 국가에서는 의창, 상평창등을 설치하고 환곡제를 실시하여 이들을 구제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자치적으로 실시된 사창 제도는 양반 지주들이 향촌의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양반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료 시설로는 혜민국, 동·서 대비원, 제생원, 동·서 활인서 등이 있었다. 혜민국과 동·서 대비원은 수도권 안에 거주하는 서민 환자의 구제와 약재 판매를 담당하였고, 제생원은 지방민의 구호 및 진료를 담당하였다. 동·서 활인서는 유랑자의 수용과 구휼을 담당하였다. |
사회정책과 사회시설] 법률 제도| 교과서 자료 [근세]
//
조선 시대에는 관습법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한 고려 시대와 달리, 경국대전과 대명률로 대표되는 법전에 의해 형벌과 민사에 관한 사항을 규율하였다. 이 중에서 형벌에 관한 사항은 대부분 대명률의 적용을 받았다.
범죄 중에서 가장 무겁게 취급된 것은 반역죄와 강상죄였다. 이 같은 범죄에는 범인은 물론이고 부모, 형제, 처자까지도 함께 처벌하는 연좌제가 시행되었다. 심한 경우에는 범죄가 발생한 고을의 호칭이 강등되고, 고을의 수령은 낮은 근무 성적을 받거나 파면되기도 하였다. 형벌은 태, 장, 도, 유, 사의 5종이 기본으로 시행되었다.
민사에 관한 사항은 제반 소송의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관찰사와 수령 등 지방관이 처리하였다. 초기에는 노비와 관련된 소송이 많았으나, 나중에는 남의 묘지에다 자기 조상의 묘를 쓰는 데에서 발생하는 산송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의 사법 기관은 행정 기관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중앙에는 관리의 잘못이나 중대한 사건을 재판하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그리고 노비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장례원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각각 관할 구역 내의 사법권을 가졌다.
재판에 불만이 있을 때에는 사건의 내용에 따라 다른 관청이나 상부 관청에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고, 신문고나 징을 쳐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굶주린 사람을 구휼하는 법
○ 굶주린 사람 중에서 나이가 많거나 병이 들어 관아에 나와 환곡을 직접 받아 갈 수 없는 사람은 가져다 줄 것.
○ 모자라는 구휼 곡식을 보충하기 위해서 더덕, 도라지 등 산나물을 많이 캐어서 섞어 먹도록 할 것.
○ 여러 날 굶어 쓰러진 사람에게 좁쌀 미음을 마시게 하면 즉사하므로, 먼저 죽물을 식혀서 천천히 먹여 허기를 면하게 한 다음 밥을 줄 것.
○ 깊은 산골과 외떨어진 곳의 굶주린 사람을 먼저 살필 것. 〈세종실록〉
신문고 제도
고할 데가 없는 백성으로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품은 자는 나와서 등문고(登聞鼓)를 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에서 상소하기를“서울과 외방의 고할 데 없는 백성이 억울한 일을 소재지의 관청에 고발하여도 소재지의 관청에서 이를 다스려 주지 않는 자는 나와서 등문고를 치도록 허락하소서. 또, 법을 맡은 관청으로 하여금 등문한 일을 추궁해 밝히고 아뢰어 처결하여 억울한 것을 밝히게 하소서. 그 중에 사사로이 (남에게) 원망을 품어서 감히 무고를 행하는 자는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하여 참소하고 간사하게 말하는 것을 막으소서.” 하여 그대로 따르고, 등문고를 고쳐 신문고(申聞鼓)라 하였다. 〈태종실록〉
대명률 (大明律) : 명나라 때 형벌에 관한 기본 법전
강상죄 (綱常罪) :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 윤리를 어긴 죄
|
향촌사회의 조직과 운영] 향촌사회의 모습| 교과서 자료 [근세]
// 향촌은 중앙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향은 행정 구역상 군현의 단위를 말하며, 촌은 촌락이나 마을을 의미한다.
향촌 자치를 위하여 설치한 기구가 유향소였다. 유향소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향촌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구였다. 경재소는 중앙 정부가 현직 관료로 하여금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는 제도로서,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향촌 사회에서 지주로 농민을 지배하던 계층은 사족(士族)이었다. 사족은 향안을 작성하고 향규를 제정하였다. 향안은 향촌 사회의 지배층인 지방 사족의 명단으로, 임진왜란 전후의 시기에 각 군현마다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사족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는데, 이들 향회의 운영 규칙이 향규였다.
사림은 도덕과 의례의 기본 서적인 소학을 보급하고, 가묘와 사당을 건립하며, 족보 편찬을 통해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족보는 가문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안으로 종족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밖으로 다른 집안이나 하급 신분에 대해 우월 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따라서, 족보는 혼인 상대자를 구하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향촌 (鄕村) : 군,현 아래 면,이(里) 등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몇 개의 자연 촌락으로 구성되었다.
면,이에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지 않았다.
향촌사회의 조직과 운영] 향약과 유교윤리의 보급| 교과서 자료 [근세]
//
지방 사족은 향촌 사회를 그들 중심으로 운영하기 위해 향약 조직을 만들었다. 향약은 중종 때 조광조가 처음 시행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본래 향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 풍습이 있었다. 향약은 이러한 전통적 공동 조직과 미풍양속을 계승하면서,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를 가미하여 교화 및 질서 유지에 알맞게 구성한 것이다.
향약은 조선 사회의 풍속 교화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향촌 사회의 질서 유지와 함께 치안까지 담당하는 등 향촌의 자치 기능을 맡았다. 향약의 보급으로 지방 사림의 지위는 강화되었으나, 지방 유력자가 주민을 위협, 수탈하는 배경을 제공하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16세기 이후 각 지방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서원도 향약과 함께 사림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었다. 서원은 유교 윤리를 보급하고 향촌 사림을 결집,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족보의 의미
내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종법이 있어 대수(代數)의 차례가 잡히고 적자와 서자의 자손이 구별 지어져 영원히 알 수 있었다. 종법이 없어지고서는 족보가 생겨났는데, 무릇 족보를 만듦에 있어 반드시 그 근본을 거슬러 어디서부터 나왔는가를 따지고 그 이유를 자세히 적어 그 계통을 밝히고, 친함과 친하지 아니함을 구별하게 된다. 이로써 종족 간의 의리를 두터이 하고 윤리를 바르게 할 수 있었다. 〈안동 권씨 성화보〉

☜ 해주 향약 (이이)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
| 향촌사회의 조직과 운영] 촌락의 구성과 운영| 교과서 자료 [근세]
// 촌락은 농민 생활의 기본 단위일 뿐만 아니라 향촌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자연촌으로 존재하면서 동(洞), 이(里)로 편제된 조직이다. 정부는 조선 초기에 자연촌 단위의 몇 개의 이(里)를 면으로 묶은 면리제를 통해, 그리고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가작통제를 통하여 촌락 주민에 대한 지배를 원활히 하고자 하였다. 오가작통제는 서로 이웃하고 있는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고, 여기에 통수를 두어 통 내를 관장하게 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 신흥 사족이 향촌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향촌 사회에는 주로 양반이 거주하는 반촌(班村)과 평민이 거주하는 민촌(民村)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의 향촌에서는 두서너 개의 씨족이 서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양반과 평민, 천민이 섞여 살았다.
촌락의 농민 조직으로 두레와 향도가 있었다. 두레는 공동 노동의 작업 공동체였다. 향도는 불교와 민간 신앙 등의 신앙적 기반과 동계 조직 같은 공동체 조직의 성격을 모두 띠었다. 주로 상을 당하였을 때에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 서로 돕는 역할을 하였다. 상여를 메는 사람인 상두꾼도 향도에서 유래하였다.
해주 향약 입약 범례문
무릇, 뒤에 향약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먼저 규약문을 보여 몇 달 동안 실행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헤아려 본 뒤에 가입하기를 청하게 한다. 가입을 청하는 자는 반드시 단자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뜻을 자세히 적어서 모임이 있을 때에 진술하고, 사람을 시켜 약정(約正)에게 바치면 약정은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좋다고 한 다음에야 글로 답하고, 다음 모임에 참여하게 한다. 〈율곡전서〉
//
① 인륜의 도는 진실로 삼강 밖에서 나오는 것이 없고, 천성의 참됨은 진실로 만대에 같은 것입니다. 마땅히 앞선 사람의 행실에 대한 기록을 모아 오늘의 모범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절개를 바치는 것은 하늘의 법칙에 근본을 둔 것입니다. 신하로서 이것을 하고 아들로서 이것을 하며 아내로서 이것을 하는 것은 순종하는 땅의 도리에 근원을 둔 것입니다. …… 중국에서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 동방 고금의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모두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효자, 충신, 열녀로 우뚝 높아서 기록으로 남길 만한 사람을 각각 110명씩 찾아 내었습니다. 앞에는 그림으로 그리고 뒤에는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모두 시를 붙였습니다. 〈삼강행실도〉
② 족보는 대개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록하였다. 우선, 족보 일반의 의의와 그 일족의 근원과 내력 등을 일족 중에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기록한 서문(序文)이 권두(卷頭)에 있다. 다음에는 시조나 중시조의 사전(史傳)을 기록한 문장이 들어가고, 다음에는 시조의 분묘도(墳墓圖)와 시조 발상지에 해당하는 향리 지도 등을 나타낸 도표가 들어가며, 그 아래에 범례가있다. 끝으로, 족보의 중심이 되는 계보표가 기재된다. 이것은 우선 시조에서 시작하여 세대 순으로 종계(宗系)를 이루며, 같은 항렬은 횡으로 배열하여 동일 세대임을 표시한다. 기재된 사람은 각 사람마다 그 이름, 호(號), 시호(諡號), 생몰(生沒) 연월일, 관직, 봉호(封號), 훈업(勳業), 덕행(德行), 충효(忠孝), 문장, 저술(著述) 등을 기록한다. 또, 자녀에 대해서는 입양관계, 적서의 구별 및 남녀의 구별 등을 명백하게 한다.
1.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국가에서 삼강행실도를 편찬한 목적을 말해 보자.
2. 위의 자료와 관련하여 족보를 만든 목적을 정리해 보자.
|
|
//
우리 나라는 일찍부터 한자를 써 오면서 이두나 향찰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유 문자가 없어서 우리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맞으면서도 누구나 배우기 쉽고 쓰기 좋은 우리의 문자가 필요하였다. 더욱이, 조선 한자음의 혼란을 줄이고 피지배층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 양반 중심 사회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 문자의 창제가 요청되었다.
이에,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였다(1446).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으며, 자기의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자를 만드는 원리가 매우 과학적인 뛰어난 문자이다.
조선 정부는 한글을 보급시키기 위하여 왕실조상의 덕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 부처님의 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등을 지어 한글로 간행 하였다. 또, 불경, 농서, 윤리서, 병서 등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편찬하였다. 그리고 서리들이 한글을 배워 행정 실무에 이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채용에 훈민정음을 시험으로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민족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가장 좋은 도구 중의 하나는 자기 민족의 고유 문자이다. 우리 민족은 고유한 문자인 한글을 가지게 됨으로써 일반 백성도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고, 문화 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 문화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 훈민정음(언해본)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민족 문화의 융성] 교육기관| 교과서 자료 [근세]
//
조선은 고려의 교육 제도를 이어받아 서울에 국립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두었다. 이는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였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의 4학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또, 사립 교육 기관으로 서원과 서당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계통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각각 독립된 교육 기관이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진사를 원칙으로 하였고, 4학은 중학,동학,남학,서학이 있었다. 향교는 중등 교육 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부·목·군·현에 각각 하나씩 설립되었다. 향교에는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 한편, 서당은 초등 교육을 담당하는 사립 교육 기관으로서,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와 평민의 자제가 교육을 받았다. 교육받는 자의 연령은 대개 8,9세부터 15,16세 정도에 이르렀다.
서원은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시초이다. 서원에서는 봄·가을로 향음 주례를 지냈고,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르쳤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고, 유생이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여 전국 각처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다.

☜ 향음주례 (鄕飮酒禮)
향촌의 선비나 유생이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된 손님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의례(儀禮)의 하나이다. 어진 이를 존중하고 노인을 봉양하는 의미를 지닌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선조 때에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광해군 때, 북인은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당하고,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여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각 학파는 대동법과 호포법 등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이 무렵 예는 양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어, 학문은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예치가 강조되었다.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어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의리 명분론 : 도덕성에 기반하여 의리와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의 이론
척화론 (斥和論) : 청과 화의를 맺는 것에 반대하는 주장
예치 (禮治) : 개인,사회,국가를 예로 다스리는 것으로, 예를 가르치는 예교와 예를 배우는 예학을 통해서 실현된다.
|
//
성리학이 주도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 불교계는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원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회수하여 집권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두터이 하고자 하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가 되고자 하는 출가를 제한하였다. 세종 때에는 교단을 정리하면서 선종과 교종 두 종파에 모두 36개 절만 인정하였다.
사원에 대한 국가적 통제는 강하였으나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욕구는 완전히 억제하지 못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왕족의 명복을 비는 행사가 자주 시행되어 불교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세조 때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보급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 진흥책을 펴서 일시적으로 불교가 중흥되기도 하였다.
성종 이후 사림의 적극적인 비판으로 불교는 점차 왕실에서 멀어져 산간 불교로 바뀌었다. 명종 때에는 문정 왕후의 지원 아래 일시적인 불교 회복 정책이 펼쳐진 결과, 보우(普雨)가 중용되고 승과가 부활되기도 하였다. 16세기 후반, 휴정(서산대사)과 같은 고승이 배출되어 교리를 가다듬었고, 임진왜란 때 승병이 크게 활약함으로써 불교계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사원의 경제적 기반 축소와 우수한 인재의 출가 기피는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 석보상절
수양 대군이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풀이한 책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불교와 민간신앙] 도교와 민간 신앙
|
도교 역시 크게 위축되어 사원이 정리되고 행사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제천 행사가 국가의 권위를 높이는 점이 인정되어 소격서를 설치하고, 참성단에서 일월성신에 제사 지내는 초제가 시행되었다.
한편, 풍수지리설과 도참 사상이 조선 초기 이래로 중요시되어 한양 천도에 반영되었으며, 양반 사대부의 묘지 선정에도 작용하였다. 무격 신앙, 산신 신앙, 삼신 숭배, 촌락제 등은 백성 사이에 깊이 자리잡았다.
특히, 계절에 따른 세시 풍속은 유교 이념과 융합되면서 조상 숭배 의식과 촌락의 안정을 기원하는 의식이 되었다. 불교식으로 화장하던 풍습이 묘지를 쓰는 것으로 바뀌면서 명당 선호 경향이 두드러졌다.
//
조선 초기에는 사원 위주의 고려 건축과는 달리, 궁궐,관아,성문,학교 등이 건축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건물은 건물주의 신분에 따라 크기와 장식에 일정한 제한을 두었는데, 그 목적은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건국 초기에 도성을 건설하고, 경복궁을 지었으며, 곧이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세웠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창경궁 명정전과 도성의 숭례문, 창덕궁 돈화문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은 고려의 건축 기법과는 다른 방식을 채택하여 발전된 조선 전기의 건축을 대표하고 있다. 반면에, 개성의 남대문과 평양의 보통문은 고려 시대 건축의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을 지니면서 조선 시대 건축으로 발전해 나가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왕실의 비호를 받은 불교와 관련된 건축 중에서도 뛰어난 것이 적지 않다. 무위사 극락전은 검박하고 단정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당시의 과학과 기술을 집약하고 있다. 세조 때에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이 시기 석탑의 대표작이다.
16세기에 들어와 사림의 진출과 함께 서원의 건축이 활발해졌다. 서원은 산과 하천이 가까이 있어 자연의 이치를 탐구할 수 있는, 마을 부근의 한적한 곳에 위치하였는데, 교육 공간인 강당을 중심으로 사당과 기숙 시설인 동재와 서재를 갖추었다. 서원 건축은 가람 배치 양식과 주택 양식이 실용적으로 결합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주위의 자연과 빼어난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경주의 옥산 서원과 안동의 도산 서원이 있다.
☜ 종묘 정전 (서울 종로)

☜ 보통문 (평남 평양)
☜ 덕천 서원 (경남 산청)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
① 주화(主和) 두 글자가 신의 일평생에 허물이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신은 아직도 오늘날 화친 하려는 일이 그르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의 노여움을 사고, 끝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지천집〉
②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은 우리 나라에는 부모의 나라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1. 위의 주장이 제기된 사상적 배경의 차이를 조사해 보자.
2. 위의 자료에 나타나는 인식이 반영, 계승된 정책이나 문화 내용을 조사해 보자.
| // |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