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이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확실하게 이별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어디를 봐도 완연한 봄이다. 봉수면사무소 정원에서 칼바람을 이겨낸 배롱나무가 파릇파릇 새순을 밀어 올리고 있다. 얼마 전 새로 부임한 면장님이 조경업체를 불러서 수 연간 손질하지 않아 시름시름 앓는 볼품없는 배롱나무를 손질하게 했다. 잡풀을 뽑아내고 웃자라 제멋대로 뻗은 가지들을 단정하게 자르고 넉넉하게 거름도 주었다. 봄비가 내리는 날 정원을 거닐며 말끔해진 배롱나무를 보니 잎과 가지가 튼튼하게 새로 돋아서 보는 이의 마음이 절로 즐거웠다. 대관소찰로 자세히 보니 가지치기 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배롱나무는 보란 듯이 젖은 잎을 반짝이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회복이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확실하게 이별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라 했다. 작년과 확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푸른 잎을 밀어 올리는 배롱나무를 보며 회복(回復)이라는 한자를 생각해 본다.
돌아올 회(回)는 큰 땅의 둘레를 뜻하는 에울 위(囗)에 사람을 의미하는 입 구(口)가 결합 된 한자이다. 사람을 울타리와 같은 둘레에 에워 싸두니 그 속에서 한 바퀴 돌아온다. 흡사 물이 일정한 곳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형국을 본뜬 글자이다. 육십일 세를 의미하는 회갑(回甲)은 돌아올‘회’가 제대로 사용된 용례이다.
회복할 복(復)은 자축거릴 척[彳(두인변)]에 돌아갈 복(复)을 짝지운 글자다. 전자는 길을 여행하다 먼 곳에서 돌아올 때, 다리에 힘이 없어 가볍게 다리를 절며 걸어오는 모습을 표현했다. 후자는‘알리다’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모양자에 날 일(日)과 뒤 쳐져 올 치(夂)로 파자해 볼 수 있다. 종일 걷다가 날이 저물어 돌아갈 시점을 알려주는 해를 보고, 맥없이 남들보다 뒤 쳐져 돌아가는 모습을 포착한 글자이다. 세월이 흘러 회복할 복은 갔던 길을‘다시’되돌아온다는 데서, 다시 부로 뜻이 더해졌다. 한자의 육서 중 전주의 한 예다. 원상태로 회복됨을 의미하는 복구(復舊)가 회복할‘복’의 용례고, 쇠했던 것이 다시 흥함을 의미하는 부흥(復興)이 복의 전주자 다시‘부’의 용례다.
우리는 살면서 크든 작든, 자의든 타의든 실수를 한다. 그럴 때마다 후회하며 원상태로 회복하려고 한다.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은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둘째 형 매심 정약전의 서재, 매심재(每心齋)에 대해 쓴 기문을 소개한다.
뉘우침에도 방도가 있다. 만일 밥 한 끼 먹을 짧은 시간에 불끈 성을 내는 잘못을 한 후, 얼마 뒤에 구름이 허공을 지나간 것처럼 잘못을 잊어버린다면 이것이 어떻게 뉘우치는 방법이겠는가? 소소한 허물은 고치고 나서 잊어버려도 좋다. 하지만 큰 허물은 고친 뒤에 하루도 뉘우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뉘우침이 마음을 키움은 똥이 싹을 북돋움에 진배없다. 똥은 썩고 더러운 것인데 싹을 북돋아 곡식으로 만든다. 뉘우침은 죄와 허물에서 나왔으나 이를 키우면 덕성을 완성하니 그 이치가 한가지다. 똥은 피하고 싶은 물건이지만 잘만 이용하면 곡식을 기르는 거름이 된다. 뉘우침은 실수나 잘못에서 비롯되지만 덕성을 키우는 자양분이 된다. 더럽다고 똥을 싫어하면 쭉정이만 생산하게 되고, 보기 싫다고 허물을 덮으면 덕성을 함양할 수 없다. 허물이 잘못이 아니라, 뉘우침이 없는 것이 잘못이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한층 성숙해가는 피조물이다. 우리가 뉘우쳐야 하는 잘못은 다산이나 매심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회복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허물과 확실하게 이별하고 새롭게 도전해 가는 것이라고 했다.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아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야겠다. 올여름 의령군 국사봉 자락에서 화려하게 꽃피울 배롱나무를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