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역 관악역에서 산쪽으로 해서 산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면 난곡옆을 지나 신림동으로 이어진다 산길이지만 그이후 도로가 닦여있다 이길을 중심으로 시흥의 달동네인 시흥2동과 신림동의 달동네인 난곡 그리고 빠리외방선교회의 세분의 순교자가 처음 묻친 삼성산자락을 지나고 있다.
산자락에 있는 달동네는 남산자락 해방촌처럼 마당이 없는 집으로 골목안은 공동화장실이 있다. 방문을 열면 골목을 볼수 있는 그런곳이다 시흥2동에는 초등학교가 있는데 그당시 반이상이 점심도시락을 살형편이 안되어서 굶는다고 한다
지금은 역명이 금천구청역인 시흥역은 전철이 개통되기전에는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기차역이다.역입구는 연탄공장 자동차운전학원과 한강다리를 지키는 부대가 있었다.
1997년 거기도 다른곳처럼 금융대란이 왔고 그 지역 유일한 대기업인 기아자동차소래공장은 무수히 많은 실업자를 배출했다.
쌀을 구입할수 없는 이들을 위해 성당복도에 뒤주를 만들어서 그곳에 쌀을 담아두고 가난한이들이 사람이 오지 않는 저녁에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했습니다. 일반 신자는 매 끼니때마다 먹는 쌀 일부를 들어서 일주일간 모았다가 뒤주에 붓는것이었다.
처음시작할때는 다들 반대했다 누가 쌀을 부어넣을것이며 사람이 없을때와서 스스로 정한 양만큼 퍼가게하면 쌀뒤주는 금방 바닥이 날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분명히 적지않는 사람이 퍼가고 개인별로 조금씩 담고있지만 쌀뒤주는 오히려 쌀이 늘어났어요 벌레가 생겨서 하는 수 없이 쌀로 백설기를 만들어서 주일 마당에 팔고 그 수익금으로 농협에 가서 푸대쌀을 구입하다 독거노인에게 나누어주었지요
시흥동골목안은 가난한이를 위해 무료병원과 노인들이 살수있는 집단주거시설이 있었다
성당뒤편에는 산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있고 그 사이에는 약수터가 있었고 계곡사이에는 물이 흐르고 있어서 춥지않는 날씨에는 언덕에서 구역.반모임을 하였다.
물건을 파는 자영업자들을 돕기 위해서 매달 한번씩 성당마당에는 벼룩시장이 열려서 여러가지를 팔았다. 아는 친구가 쌀집을 하여서 성당에서 주문받고 집에까지 배달해주었다.
그는 지방에서 대량으로 나락을 구입하다가 소규모도정기로 도정하고 포장해서 식당에 납품하고 있었다. 가난한동네사람들이 더 많은 주문을 하였다
골목마다 재래시장이 있었다. 즉석두부집과 즉석중화요리집이 있었다. 콩을 기계에 부으면 여러 공정을 거쳐 두부가 만들어지고
그리고 커다란국통에 짜장소스 짬뽕과 울면국물을 담아놓고 제면기로 국수를 뽑아 바로 삶아주는 음식점이 있었다.
신부님 우리들 사정을 아시는지 미사봉헌시간을 따로 두지않고 성당입구에 봉헌함을 두었다. 그리고 매달내는 교무금은 통장으로 내면서 익명으로 내게 되었는데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신도로 인해서 성당수입이 대폭 감소하는 바람에 성당은 오랜적자를 면치 못했다.
성당내에서는 자주 잔치를 열었는데 비용을 아끼느라고 국수와 김장김치와 약간의 반찬으로 식사를 하였다. 교우수가 많아서 많은 봉사자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금융대란의 아픔이 깊어지자 봉사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매님들이 직업전선으로 뛰어들어서 이런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가난한사람을 도울수있는 사람은 가난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수있다는것을 실감할수 있는 동네였다.
아나윔정신의 실천은 가난의 어려움을 겪는이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말고 작은것부터 실천해나가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