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16(토) 맑음
몸이 난자당한 것 같다. 뼈 사이로 기(炁)가 쪼개고 들어가 탱탱한 압력이 우리하게 느껴진다. 하루 8시간 좌선시간을 지킬 수 없다. 형편껏 정진해야겠다. 정진이 마음껏 안 되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다. 마음은 벌써 하늘을 나는 밀라레파 존자나 아라한의 경지를 넘보고 있는데 나는 개미처럼 같은 곳을 뱅뱅 기어 다니는 기분이다. 그래, 나는 개미나 벌레 같은 수행자인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지 별수 없다. 오늘 이만큼이라도 실천한 나에게 만족하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지혜이다. 이것이 인욕바라밀이라. 자신에게서 불완전함을 보는 사람은 타인의 불완전함에 너그러워진다. 우리는 다 똑같이 인간적인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할 일도, 용서하지 못할 일도 없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해하면 연민심이 생긴다. 연민을 가지면 한없이 내려놓게 되고 지극히 낮은 곳에서 생겨나는 따뜻한 위안이 있다. ‘그래도 괜찮아!’라는 위안 말이다. 하루가 갔다. 밤이 오고 어둠이 이불처럼 깔렸다. 세계는 잠들고 별들은 깨어서 세계가 잠드는 것을 알고 있다.
2013.11.17(일) 바람 부는 날
몸이 많이 유연해졌다. 요가 자세를 취하면서 유연성을 기른다. 기마자세를 한다. 다리근육이 퇴화되지 않도록. 바람이 분다. 그런대로 무문관 생활의 틀이 잡혔다. 미리 정해놓고 갖다 맞추는 식보다는 마음 내키는 대로 기분 나는 대로 생활하되 알아차림이 저절로 따라오게 한다. 가장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를 포착하여 좌선에 들어간다. 느슨한 가운데 기회를 잡는다.
2013.11.18(월) 첫 눈
어제 좀 무리해서 운동을 했나 보다. 몸이 결리고 무거워 아침 정진을 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올겨울 첫눈이 내린다. 보슬 눈인가 싶더니만 굵은 눈송이가 펄펄 내린다. 바람이 풍경을 때리는 소리가 뜰 앞에 쌓인 눈 풍경을 더 얼씨년스럽게 만든다. 이럴 때 방랑 김삿갓은 눈보라를 맞으며 어디쯤 가고 있을까? 한 점 온정의 불빛을 찾는 방락객의 무명 도포자락 속으로 스며드는 한기를 어떻게 견뎌낼까? 이럴 때 지리산 깊은 계곡에 은신한 게릴라전사 동무들은 어디서 어떻게 이 추위를 이겨낼까? 또 설산의 동굴에서 수행하는 밀라레파는 어떻게 지낼까? 배가 고프지도 않고 추위를 느끼지도 않으며 따뜻한 방이 있는 나는 얼마나 호사스러운가? 21세기형 은거 수행자의 삶이 여기에 있구나. 니체가 말한 <우아한 고독>인가? 나는 우아한 고독을 즐기고 있다. 닫은 창호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한다. 구름을 가르고 나온 햇살이 반짝이다가 다시 구름에 가려지기 되풀이한다. 구름은 구름이게 내버려 두라. 햇살은 비칠 뿐이다. 구름에 가렸더라도 가려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 햇살이다. 왜? 그는 빛이니까. 앎은 빛이다. 빛은 어둠에 물들지 않고, 어둠을 뚫고 나와 어둠을 밝혀주니까. 빛이여, 장하다. 몸과 마음을 밝혀서 빛 속으로 녹여다오. 열반하게 해다오.
첫댓글 건강히 마치시고 ........ 봄 햇살을 맞으셨는지요 수종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