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1부: 2014년 3월 21일 ~ 6월 15일 2부; 2014년 7월 2일 ~ 9월 28일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
주요작품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1446년 반곽 23.3×16.6cm
훈민정음은 크게 예의(例儀)와 해례(解例)로 나누어져 있다.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은 글로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해례는 정인지(鄭麟趾)와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 이선로(李善老) 등 세종을 보필하여 한글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례를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웠던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글은 예의의 첫머리에 있는 서문을 우리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흔히 『훈민정음 언해본』이라 부른다. 서문을 포함한 예의 부분은 무척 간략해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월인석보(月印釋譜)』 등에 실려 전해져 왔지만, 한글 창제 원리와 용법이 소상하게 밝혀져 있는 해례는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예의와 해례가 모두 실려 있는 훈민정음 정본이 1940년에 발견되었다. 그것이 이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 중 가장 집요하고 악랄했던 것은 우리말과 글에 대한 탄압이었다. 한 나라와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은 바로 언어와 문자이다. 말과 글이 사라진다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고유의 관점, 즉 독자적인 세계관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제는 진정으로 우리말과 글이 사라지길 바랐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제에게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러나 간송은 각고의 노력과 엄청난 대가를 치루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품었다. 그리고 수년간 비밀리에 지켜오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불러 세상에 공개하여 한글이 인체의 발음기관을 상형화한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 있었다. 이로써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화장실 창살 모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 해례본이 없었던 시절 제기된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한 허무맹랑한 주장들을 일소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에 의하면 1446년 9월 상순에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늦어도 음력 9월 10일에 이 책이 출판된 것으로 추정되어, 이 책의 출판일을 기념하여 한글날이 제정되었다. 인류 역사상 문자가 그 만든 목적과 유래, 사용법, 그리고 창제의 원리와 세계관을 명확히 밝혀 만들어진 예는 없었다. 훈민정음이 유일무이하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문화의 전개에서도 엄청난 성과이자 족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한글의 위상과 의미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훈민정음해례본』이다. 1962년 12월 해례본은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금동삼존불감(국보 73호)
11세기 전체높이 17.8cm 불상높이 9.7cm 대웅전 안에 석가삼존상을 모신 형태의 소형 원불(願佛: 몸에 지니고 다니며 소원을 비는 불상)이다. 불감이라고 부르는 소형 대웅전 건물 높이가 17.8센티미터이니 얼마나 작게 축소해 지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건물을 통해서 당시 대웅전 건축양식을 짐작할 수 있다. 용마루 양쪽 끝에 치미(?尾) 즉 망새가 높이 솟아있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의 형상이 있다. 주심포(柱心包) 집으로 외도리가 돌출돼 있다.
삼존불상은 주불좌상을 두 보살입상이 협시하고 있으니 석가여래와 문수, 보현 양대 보살일 것이다. 석가여래상은 수미단 위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시무외인(施無畏印)?촉지인(觸地印)을 짓고 있는데 의복은 두벌을 입어 옷자락을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에서 교차시키니 옷자락이 두 발을 덮었다. 불상은 두상(頭相)에서 육계(肉?)와 나발(螺髮)의 표현이 분명하고 계주(?珠)의 표현까지 확실하여 문종(文宗, 1047-1082)시대의 시대양식을 보여준다. ,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
13세기 높이41.7cm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짧고 좁은 목과 반구(盤口)형의 구연부,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에서 굽까지 내려오는 유려한 S자 곡선을 지닌 고려식 매병이다. 굽은 얕고 낮게 깎았으며 바닥에는 태토받침의 흔적이 남아있다. 굽바닥을 제외하고 짙은 회청색의 유약을 씌웠는데 빙렬이 세세히 남아 있다. 문양 구성은 주문양대에는 운학문을 가득 시문하였다. 흑백으로 상감된 이중 원문(圓文) 안에는 상공을 향해 날아가는 학을, 원 밖에는 지상으로 내려오는 학을 배치하였다. 학의 형태는 크기와 형태가 거의 유사하고 여백에는 영지형 구름을 배치하였다. 구연부 아래에는 연꽃을 백상감으로 시문하였고 저부에는 가늘고 길쭉한 이중 연판문대를 흑백상감으로 둘렀다. 연판 안쪽에는 백색의 원 안에 흑색의 점을 찍은 연주문(連珠文; 구슬을 꿴 듯이 작은 원을 동그랗게 연결한 문양)을 베풀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이 매병의 주문양인 운학문은 장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고대의 신선사상과 관련이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처음 등장하여 당대(唐代)에는 주로 동경이나 금속제 합의 장식 문양으로, 대개 도교적인 문양소재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송대(宋代)에 들어서는 벽화나 금속기 및 도자기에도 운학문이 등장하였다. 고려청자에서 운학문은 12세기 상감청자 초기부터 꾸준히 등장하였다. 초창기에는 넓은 여백으로 서로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두세 마리의 커다란 암?수 학 사이로 같은 크기의 영지형(靈芝形) 구름이 시문되었다. 13세기 이후에는 점차 학과 구름의 크기가 줄어들고 대신 그 수가 증가하면서 여백도 축소되었다. 학의 표현도 일정한 크기와 형태로 정형화되었다. 흑백의 이중 원권 안에 학과 구름을 시문하는 형태는 주로 13~14세기에 나타난다. 이 매병은 13세기 중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그 질로 보아 고려시대 최고급 청자를 제작하였던 강진이나 부안 지역의 요장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자기린유개향로 국보 제65호
12세기 전반 높이 19.7cm 짐승 얼굴 형상의 3개의 다리로 받쳐진 낮은 원통형의 몸체 위에 고개를 돌려 앉은 기린이 조각된 뚜껑이 덮여 있는 향로이다. 몸체 측면에는 음각으로 구름 문양을 시문하였는데 여러 개의 짧은 곡선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구름의 중심에서 아래쪽으로 몇 개의 선을 그어 마치 여러 개의 구름이 위로 피어나는 듯하다. 몸체의 날개에도 세 송이의 구름이 시문되었다. 기린이 앉아 있는 대좌의 옆면에는 뇌문(雷文; 네모진 소용돌이 형태의 문양)을, 대좌 윗면에는 복판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을 둘렀다.
기린은 머리를 쳐들고 있는데 네 개의 발톱과 등 뒤에 붙인 소꼬리, 곱슬한 갈기와 수염, 부러져서 전체 형태를 알 수는 없으나 사슴뿔처럼 생긴 한 개의 뿔,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혀 등 세부까지 매우 정교하다. 기린의 눈은 음각으로 조각한 뒤 눈동자를 철화로 마무리하였다. 구름으로 장식된 몸체 위에 올라앉은 기린의 입으로 향의 연기가 나오게 하여 마치 서기(瑞氣)를 토해내는 듯한 효과를 노렸다. 몸체의 바닥에는 4개의 규석받침 자국이 남아있고 뚜껑 역시 내부에 4개의 규석받침 자국이 남아있어 번조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유약에는 약간의 유빙렬(釉氷裂)이 나타나있지만 유색은 전형적인 비색이다. 일찍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서긍(徐兢)과 태평노인(太平老人) 등의 중국 문인들이 극찬한 아름다운 비색이 이 향로의 유색이 아닐까 여겨진다.
고려시대 향로는 뚜껑에 사자(?猊), 용, 기린, 오리, 원앙 등의 다양한 동물을 상형으로 조각하여 부착하고 그 입에서 연기가 나오도록 하였다. 이 향로의 모델인 기린(麒麟)은 수컷을 기麒, 암컷을 린麟이라 하며 예로부터 왕도(王道)가 행해지면 나타나는 신성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 모습은 몸통은 사슴 같고 이마는 이리와 같으며 꼬리는 소와 같고 발굽은 말과 같다고 하였다. 또, 이마에 뿔이 하나 돋아있는데, 그 끝에 살이 붙어 있어 다른 짐승을 해치지 않으며 초목을 밟지 않는다 하여 인수(仁獸)라고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기와에 조각되었으며 고려시대 동경의 뒷면에도 새겨져 있다. 고려청자에서는 오로지 향로로만 제작되었다.
이 향로의 몸체와 유사한 청자삼족형향로는 강진 삼흥리, 용운리 10호 Ⅱ층, 사당리 및 부안 유천리 등에서만 발견되었다. 이 밖에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룡구(寺龍口) 월요지(越窯址)에서도 삼족 향로가 발견되어 고려청자 삼족향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사룡구요 출토의 삼족향로 중 기린유개향로와 같이 짐승발 형태의 다리가 달리고 몸체가 원통형이며 전이 넓게 벌어지는 형태는 북송초기부터 남송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단오풍정
신윤복(申潤福) 지본채색 28.2×35.6cm
이 그림은 단옷날 추천(그네타기)놀이를 나온 한 떼의 여인네들이 시냇가에 그네를 매고 냇물에 몸을 씻으며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넷줄을 드리울만한 거목이 있고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곳이라면 당시의 서울에서야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정릉(貞陵)이나 성북동(城北洞) 골짜기는 물론이고 삼청동(三淸洞)이나 인왕산(仁王山) 계곡을 비롯하여 남산(南山)이나 낙산(駱山) 주변의 여러 골짜기들이 이런 놀이에 적합했을 테니 말이다.
여기가 어느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로서는 퍽 깊은 계곡이어서 인적이 끊어진 후미진 곳이었기에 여인네들이 마음 놓고 의복을 훌훌 벗어 던지고 냇물에 들어가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에는 산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바위틈에 숨어든 동자승 둘이서 이 기막힌 풍경에 희희낙락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혜원은 짐짓 화면의 초점을 딴 곳으로 옮기려고 그네 뛰는 여인에게 화려한 의상(衣裳)을 입히고, 머리 손질하는 여인에게는 엄청나게 큰 다리머리를 모두 풀어놓게 한 모양이다. 다홍치마에 반회장 노랑 저고리만으로도 지극히 선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백설 같은 속곳들이 반 넘어 내 보이는 것은 반라의 여인들에게서보다 훨씬 더 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앉은키보다도 더 큰 다리머리에서도 당시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계집종인 듯한 여인이 유방을 드러내 놓은 채로 옷보따리를 이고 오는 것으로써 화면은 상하의 연결이 이루어져서 혼연(渾然)한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백자박산향로 보물 제238호
12세기 높이 8.0cm 고려시대 백자는 초기 요지인 용인 서리를 비롯해서 상감청자 전성기의 부안 유천리, 고려 말기의 서울 관악산 요지 등지에서 제작되었다. 그러나 청자만큼 제작 수량이 많지 않고 기종도 단순한 편이다. 또한 고려백자는 같은 백자이긴 하지만 조선백자보다 태토의 강도가 약하고 굽는 온도가 낮아 조선백자와는 완연히 다른 그릇이다.
이 백자향로는 둥근 사발형의 몸체와 삼족의 대좌 위에 중첩된 산모양의 뚜껑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런 향로를 일찍이 중국에서는 박산향로라 불렀다. 박산향로라는 이름은 전한대의 저작으로 알려진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최초로 보이나 책 자체가 후대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전국시대 저술된 것으로 보는 『산해경(山海經)』 중 『오장산경(五藏山經)』에 신산(神山) 산맥으로서의 박산이 나타나고, 이후 동진(東晋, 317-418)의 장창(張敞)이 저술한 『진동궁구사(晉東宮舊事)』에 정식으로 등장한다.
박산향로는 금속제 향로도 제작되었고 도자로는 남북조 시기 월주요 청자 향로를 비롯해서 수대(隋代) 백자 박산향로를 거쳐 당대(唐代)에는 청자와 당삼채로 제작되었다. 이 <백자박산향로>는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진다. 크기는 작고 뚜껑과 몸체가 원형을 이루고 있고 세 개의 다리가 달려있다. 반구형의 뚜껑 정 중앙에 별 모양의 커다란 투공과 측면에 6개의 작은 산모양의 투공이 있어 향연(香煙)이 나오도록 하였다. 투공 주변에는 청동기 박산향로의 복잡한 장식을 단순화시킨 동일한 형태로 양각된 작은 산들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큰 산을 이루도록 하였다. 세 개의 다리는 향로에서 많이 보이는 동물형 다리를 단순화하여 윤곽선만 드러내게 하였다. 몸체 바닥 중앙에는 굵은 모래받침 흔적이 있어 몸체는 원형의 도침을 받쳐서 구운 것으로 보인다. 완연한 청백색의 유색과 투조 형태 등이 12세기 중국 송대 경덕진(景德鎭) 백자와 유사하다.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국보 제66호
12세기 후반 높이 37.2cm ‘정병(淨甁)’은 ‘맑은 물을 담는 병’이라는 의미이다. 승려가 두타행(頭陀行; 심신을 맑게 하기 위한 승려들의 고행)을 떠날 때 반드시 지녀야 하는 열여덟 가지의 지물 중 하나이며 불전에 정수를 공양하는 공양구이다. 또 자비를 상징하는 관음보살의 지물이기도 한다. 고려시대 정병은 금속기와 도자기로 모두 만들어졌는데 그 조형이나 장식소재가 거의 유사하다.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은 반듯한 조형과 비색의 유색이 그대로 느껴지는 수작이다. 병은 환대(環帶)가 부착된 기다란 목과 옆구리에 별도의 주입구가 달린 몸체로 이루어졌다. 병의 어깨는 풍만하게 벌어졌다가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다 외반하는 형태다. 몸체 어깨 한쪽에 작은 주입구를 부착하였는데 주입구의 구연부 형태와 고리 모양의 귀가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뚜껑이 있었을 것이나 남아있지는 않다. 긴 목 중간에는 환대를 두고 환대 윗목은 팔면으로 되어 있다. 물은 어깨의 주입구를 통해 담고 첨대를 통해 따라냈던 것으로 보인다. 기형이나 세부표현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제92호 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과 같은 금속기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문양은 첨대에는 위에서부터 운문, 선문, 당초문을 시문하고 환대의 윗부분에는 운문을, 목 부분에는 간략하게 표현된 모란을 앞뒤로 한 송이씩 시문하였다. 몸체에는 버드나무와 갈대가 서 있고 원앙이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는 연못이 있다. 연꽃은 꽃잎이 작고 가늘어 소박한 느낌을 주며,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큰 원앙의 눈은 유일하게 흑상감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물가 풍경은 고려시대 금속기나 청자에 자주 나타나는 문양 소재로 회화적이고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294호)
18세기 높이 42.3㎝ 조선 초기부터 중국의 화려한 청화백자나 알록달록한 오채 그릇이 유입되어 중외에 파다하게 퍼졌지만, 절검(節儉)을 중시했던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들은 약간의 장식이 있는 소박한 느낌의 백자 사용의 전통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경시대(숙종-정조) 들어 수요층의 기호가 변화하면서 조선백자에도 절제된 화려함이 시도되었다. 백자에 두 가지 이상의 안료를 사용하여 장식한다든가 문양을 양각이나 투각으로 조각하고 그 위에 채색을 가하여 한껏 멋을 낸 것들이었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은 이러한 시대 상황을 잘 반영하는 수작이다. 목이 길고 몸체가 달항아리처럼 둥그런 유백색의 병으로 산화코발트, 산화철, 산화동 등을 모두 안료로 사용하여 청색, 갈색, 홍색으로 장식하였다. 먼저 푸른색을 내는 청화는 산화코발트가 주원료로 중국에서 수입하여야만 사용이 가능했다. 청화의 색상은 온도에 민감해서 밝은 청색에서 검정색까지 다양하기 때문에 적당한 발색 온도를 찾기 위해서는 오랜 연구와 실험이 절대적이다. 다음 국내산인 철화백자에 사용되는 산화철 역시 번조온도 및 번조시간, 번조 분위기에 의해 그 색상이 크게 달라진다. 17세기 이후 등장한 붉은 색조의 동화는 산화동이나 탄산동이 주원료로 실제 사용할 때는 보조제와의 혼합과 유약의 두께 조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처럼 이 세 가지의 안료는 모두 성질이 달라 소성 온도와 가마 분위기에 따라 발색이 좌우되어 제작에 있어 상당한 기술이 요구된다. 이런 복잡하고 고난도의 소성 과정 때문에 이 작품처럼 제대로 구현된 작품은 극히 일부로 명품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백자의 주제 문양인 초충도는 겸재 정선의 초충팔폭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전체 구도는 둥그런 병의 몸통에 우측으로 비스듬히 올라간 국화문과 좌측으로 가느다랗게 뻗은 세 줄기 난초가 주를 이룬다. 양각으로 처리한 국화는 동화로 채색되었으며, 국화 줄기와 잎은 철화로 장식되었다. 난초는 청화로 장식되었는데, 그 발색 또한 상당히 선명하다. 공간을 구획하는 선이나 종속 문양대가 없으며 대형의 병임에도 목 위로는 문양이 시문되지 않아 번잡하지 않다. 국화의 좌측 상단에 동화로 채색된 곤충은 여백을 메워 잘 짜여진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초충문은 그 의미상으로 볼 때 길상문의 일부에 속하고 채색에 있어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또한, 전체 화면 구성상 생명이 짧은 곤충이나 일년생 국화가 주문양을 차지한 것은 자손 번영과 영원한 생명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유백색(乳白色) 유약이 전면에 시유되어 단정한 느낌을 주며 굽다리에 내화토를 받쳐 구운 흔적이 발견되었다. 1936년, 간송 선생이 경성구락부 경매에서 일본인 골동상과 수장가들을 제치고 지켜낸 조선후기 도자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그외 혜원 신윤복,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 서화 등 132여점
이상 출처;간송미술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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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간송미술관은 성북동 어디 한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간만에 에코 님의 글을 읽습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문화 무식쟁이 제가 공부를 많이 합니다. 자기들이 참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간송유물들 잘 구경했습니다.
6월1일에 간송전을 갑니다. 많은 신청 부탁합니다.
회비는 5만원, 법원앞 8시 출발. 010-4519-0379 제가 스크렙해서 갑니다.
왠 광고? 동양고전연구소 회원들을 위해 순수한 의도로 올린 글 입니다. 의도가 훼손되지 않도록 협조바랍니다!
@에코 광고 아닙니다. 이동민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는 그림사랑회입니다.
서울 전시회에는 동양고전연구소 회원도 다수 가시는 관계로 댓글 단 것입니다.
불편하시면 삭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