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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복궁 남부 지역 cafe 원문보기 글쓴이: kanda
천주성화 2주년 기념, 참부모님의 북남미 업적과 발자취 조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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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섭리의 순간들 (상편)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문선명 천지인참부모 천주성화 2주년을 맞이하여 본지는 세계평화와 인류의 미래를 향한 참부모님의 위대한 여정 중 북남미 섭리 발자취를 상편과 하편으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잊을 수 없는 섭리의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1965년 6월 25일, 참아버님께서는 제1차 세계 순회 여정 중 미국 게티스버그 (Gettysburg)에서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과 요담(要談)을 나누셨다. 참아버님께서는 도덕적·영적 각성을 주는 통일원리운동 소개하고 공산주의보다 더 높은 이념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일어설 수 있는 도덕률에 기초한 더 강력한 도덕적 힘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원기 왕성한 청년들로 하여금 지적하신 일을 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은 자신의 개인 집무 실 위층에서 전시되어 있는 모든 선물들의 출처와 그 의미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참아버님을 아무리 잘 대해 주어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1972년 6월 발생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은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사건의 영향력은 다음 해까지 이어져 미국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참아버님께서는 1973년 10부터 시작한 미국 21개 도시 순회강연을 멈추고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가 미국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해달을 달라고 심각하게 기도하였다.
참아버님께서는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통일교회 식구들에게 미국을 위해, 특히 닉슨 대통령과 모든 상하의원들을 포함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금식할 것을 요청하셨다. 더 나아가 참아버님께서는 1973년 11월 30일부터 시작해서 미국 50개 주 전역에서 발간되는 주요 일간지에 전면 광고로 ‘미국의 위기, 워터게이트에 대한 해답: 용서하라, 사랑하라, 단결하라!’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셨다.
1974년 2월 1일, 참아버님께서는 닉슨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해 깊은 대화를 나누셨다.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를 구하고, 스스로를 버리고 오직 인류의 평화와 하늘의 뜻만을 향한 진심을 국민들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참부모님께서는 미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신학대학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셨다. 이를 위해 교회는 뉴욕 시로부터 90마일 정도 북쪽에 위치한 뉴욕 주 베리타운의 성요셉사범학교를 구입하였다. 허드슨 강가에 250에이커의 경치 좋은 부지로, 종교 교육과 기도 그리고 성찰에 적합하였다. 참부모님께서는 김상철 박사를 초대 총장으로 헌신하게 하셨다. 신학교는 통일신학대학원(UTS)이라고 명명되었고, 1975년 9월에 개교하였다.
참아버님께서는 통일신학대학원 설립 초기 초종교적·초종파적으로 학생과 교수들이 함께 공부하며 교류할 수 있는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뜻에 따라 신학교가 개교할 당시 교수진은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을 폭넓게 수용하여 감리교, 개신교, 그리스도 교회,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유대교 등을 대표하는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1976년 참아버님께서는 미국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며 6월 1일에 양키 스타디움 대회를 계획하셨다. 전 세계에서 온 국제부흥단이 대회의 승리를 위해 전력투구하였다. 그런데 대회 당일 강풍과 폭풍우가 몰아쳐왔다.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박보희 총재는 참아버님께 달려가 급박한 행사장의 상황을 전하였다. 그러나 참아버님께서는 전혀 동요하지 않으셨고 박 총재에게 “걱정하지 말게나. 대회는 예정대로 진행 될 거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박 총재가 행사장으로 돌아갔을 때,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하였다. 담대한 식구들을 중심으로‘ 당신은 나의 햇살’이라는 찬송을 부르며 하늘 앞에 비를 멈춰 줄 것을 호소하였고, 이에 감동한 청중들이 찬송에 하나 둘 합류하기 시작하였고 찬송 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어떤 험한 날씨도 하늘의 축복을 받은 이들의 모임을 방해할 수 없다. 마침내 하늘은 이들의 흥겨운 찬양에 응답하였다. 비는 멈췄고, 바람은 물러갔다.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양키 스타디움에 모인 수만 명의 청중들은 기쁨에 환호하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험악했던 날씨는 양키 스타디움 대회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참아버님께서 단에 올라 ‘하나님의 소망과 미국’이라는 주제로 대담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연설하셨다. 청중들은 이 시대에 하늘이 주신 구원의 말씀에 깊이 감동하였다.
참부모님께서 미국에서 시작한 첫 번째 언론은 뉴욕에서 창간한 뉴스월드(News World)다. 1976년 초가을부터 헌신적인 식구들을 중심으로 창간을 준비하였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식구들은 대부분 기자 경험이 없었다. 신문을 만드는 일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비좁고 허름한 사무실에서 낡은 군수품 책상과 중고 타자기로 글을 썼다.
뉴스월드의 가장 파격적 보도는 1980년 11월 4일 아침이었다. 이 날은 미국 40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과 현직 대통령 민주당의 지미 카터가 경쟁하였다. 뉴스월드는 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에 1면 헤드라인에 ‘레이건 대통령의 압도적 득표’를 예언했다. 미국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선거가 박빙이라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고 보도했지만 우리는 과감하게 레이건의 승리를 자신하였다.
다음 날 선거 결과가 나타났다. 너무 박빙이어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주에서 레이건이 카터를 이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개표가 끝나자 뉴스월드가 예측한 대로 레이건은 4개 주를 제외하고 모든 곳에서 이겼다. 다음 날 뉴스월드의 해드라인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옳았습니다’였다.
1981년 8월 유럽을 순방하시던 참부모님께서는 워싱턴 DC에 있는 보수계 신문인 워싱턴스타(Washington Star)가 파산을 신청하고 영구적으로 폐간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참아버님께서는 박보희 사장에게 워싱턴에는 자유와 신앙 그리고 가정에 대한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문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지시를 받은 박보희 사장은 타당성에 대한 연구와 시장 조사를 하였고, 한 개의 팀을 구성해서 건물, 설비, 편집인, 기자 등을 찾았다.
1982년 5월 17일, 워싱턴타임스는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신문 산업의 현실을 알고 있는 종사자들은 워싱턴타임스가 6개월에서 1년 정도 지나면 폐간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틀렸다. 워싱턴타임스는 2014년 5월 17일 창간 32주년을 맞이하였다.
레이건 대통령이 공산주의의 확장에 반대하며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했을 때, 워싱턴 DC 에서는 소련의 위협에 대한 미국의 적절한 대응이 무엇인가에 관한 치열한 논쟁이 진행 중이었다. 워싱턴타임스는 깊이 있는 해설, 객관적인 뉴스와 정보를 통해 지도자들에게 공산주의 폭정의 가혹한 현실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많은 이들이 전략방위구상을 반대하며 막으려고 노력할 때 워싱턴타임스만이 유일하게 이를 지지하였다. 몇 년 후, 전직 소련 고위 관료들은 세계적화야욕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던 것은 미국의 SDI 개발 결정이었음을 인정하였다. 마침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크리스마스 전날, 74년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소련 제국이 붕괴되었다.
국제카우사(CAUSA) 운동은 1980년부터 1991년에 걸쳐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11년간 오대양 육대주를 풍미하며 세계도처에서 세계적화를 노리고 질주하는 공산세력을 수세에 몰았다. 소련의 세계적화전략을 붕괴에 이르게 한 또 하나의 쾌거였다.
소련은 미국의 턱 밑에서 쿠바의 공산혁명을 일찍이 성공시킨 뒤, 쿠바를 기지로 하여 드디어 공산혁명의 불길은 중남미대륙에 상륙하였다. 만약 멕시코가 적화되면 이는 미국의 목에 비수를 갖다 대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참부모님께서는 한국과 일본에서 성공하고 있는 승공운동의 세계화를 추구하셨다. 그러나 반공이라는 단어조차꺼리는 서구 세계에서 승공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 카우사(CAUSA)라는 말이 등장되었다. 카우사는 Confederation of Associations of Unification of Society of Americas(중남미사회통일연합)이란 말의 약자를 딴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카우사라는 말이 스페인어로 ‘제1원인 곧 하나님’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카우사 운동은 곧 하나님운동인 것이다.
1984년 7월 20일, 참아버님께서는 커네티컷 주에 있는 댄버리 연방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하셨다. 참아버님께서 수감 되시고 5일이 지난 뒤인 1984년 7월 25일, 미국 전역으로부터 모인 약 1,000여 명의 종교 지도자들은 백악관 길 건너에 위치한 라피엣 공원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였다.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참아버님의 무죄를 선언하고 “미국이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플랜카드를 들었다. 성직자들은 자신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만약 정부가 문선명 목사를 투옥시키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감옥에 보내라”는 구호를 외쳤다.
성직자들은 동고회라고 불리는 하나의 모임을 형성해서 이에 호응했다. 동고회는 워싱턴 DC 에 있는 캐피탈 가든 빌딩에서 일주일 기간의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성직자들은 세미나 일주일 기간 동안 문선명 목사와 함께 옥중 생활에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세미나에 참석했다.
동고회 세미나들은 미국 내에서 통일교회 교인(식구)들과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 사이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했다. 나아가 이 세미나를 통해 미국 내의 7만 여 명의 성직자들이 카우사 이념 교육을 받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세미나들은 미국 내에 마르크스주의가 확대되는 것을 막은 강력한 힘이 되었다.
참아버님께서는 모범적인 수감생활로 5개월 감형을 받아 1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시고 1985년 8월 20일 석방되셨다. 이날 미국 내의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워싱턴 DC에 있는 옴니 쇼람 호텔에서 개최된 ‘하나님과 자유의 만찬’에 참석하여 참아버님의 출감을 환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