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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전 15:35~49 ] 하늘에 속한 자로 살라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2023년 2월 12일(주일) 주일설교 고린도전서 15:35~49 '하늘에 속한 자로 살라' 새찬송가 165장 주님께 영광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주일설교
오늘은 고린도전서 15:35~49 말씀을 중심으로 ‘하늘에 속한 자로 살라’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간단히 살펴보면 바울은 부활과 관련하여 동물의 몸, 천체의 다양성을 들어 부활의 가능성과 부활체의 변화를 말합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으면 영의 몸도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흙에 속한 아담과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를 대조하여 몸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아시다시피 고전도전서 15장은 부활장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여러 증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온 인류의 부활이 사실임을 분명하고도 강력하게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에 반대하는 그럴싸한 반대에 대해서 답변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자들은 35절에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일어날까? 또한 무슨 능력으로 일어날까?’라는 질문은 그 당시 이방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사상이며, 그 중 사두개인들은 죽은 인간을 부활시키며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범위에 있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반대하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죽은 자들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라고 믿었습니다. 또 부활을 반대하는 다른 하나는 부활한 몸의 성질입니다. 즉 “부활한다면 그 몸은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같은 몸으로? 같은 모양으로? 같은 크기와 지체로? 같은 성질로 오느냐 여러 성질로 오느냐?”는 물음표였습니다. 먼저의 반대는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의 주장이었고, 후자는 호기심으로 의심하는 자들의 반대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들이 반대 사상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고 반박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께서 알맞은 형체를 주십니다(35~38절).
바울은 본문 35~38절에서 ‘씨앗의 비유’을 통해 부활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매년 씨가 죽고 다시 살아나는 신령한 능력과 같이 죽은 자도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36절에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라고 말합니다. 씨는 다시 살아나기 전에 썩어야 합니다. 씨가 죽은 후에 싹이 돋아나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매년 씨앗이 살아나는 그러한 힘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것을 상상치 못함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것이 첫째 반대질문에 대한 바울사도의 ‘씨앗의 비유’로 인한 답변입니다. 우리가 자연세계에서 씨가 죽은 것이 살아나서 싹이 나고 열매 맺는 것을 매일 보면서 죽은 자를 일으킬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제 바울은 둘째 반대 질문에 대해서 더 상세하게 대답합니다. 이제 바울은 씨가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37절에서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밀이나 알갱이 뿐이라고 합니다. 37절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그 분의 뜻대로 씨들에게 맞는 형체를 부여하십니다. 이는 서로 다른 종류를 구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뿌려진 모든 씨는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정해주신 대로 이미 그 안에 고유의 형체를 가지고 있고, 그 종류에 알맞은 성질과 모양을 가집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일어나는 가를 사람이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씨앗이 죽어서 이렇게 엄청난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그것을 ‘뿌린 자의 능력’에 의한 것도 아니고, ‘식물의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며, ‘우연히 일어난 일’ 역시 아닙니다. 씨앗의 종류대로 그에 알맞은 형체를 입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하나 하나 종류에 맞는 형체를 이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심긴 씨앗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능력에 의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듯이 부활 후에 사람의 육체도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의해 새롭게 될 것입니다. 38절에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적용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 나에게 알맞는 형체를 주셨음을 믿으십니까? 또한 내가 부활로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형체는 무엇입니까? 적용해보세요.
2. 예수님처럼 심어야 살아납니다(39~44절).
계속해서 바울은 39절에서 식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처럼 육체에도 여러 종류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사람의 육체’도 있고, ‘짐승의 육체’도 있고 ‘물고기의 육체’도 있고, ‘새의 육체’도 있습니다. 모든 종류에는 고유한 형체가 있어서 서로 다른 것입니다. 또한 40절에 바울은 ‘땅에 속한 육체’도 있고, ‘하늘에 속한 육체’도 있음을 알려줍니다. 땅에 속한 육체와 하늘에 속한 육체가 서로 다른 것처럼 ‘땅의 속한 것의 영광’과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의 참 영광은 지위와 상태에 적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땅에 속한 육체는 하늘에 어울리지 않고, 하늘에 속한 육체는 땅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의 육체 중에도 여러 영광이 있습니다. 41절에 보니 “해의 영광도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도다” 그랬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하는 이유는 죽은 자의 부활도 그 육체가 완전히 변하여 하늘에 적당하게 될 뿐 아니라 해와 달과 별들의 영광이 다르듯이 죽은 자의 부활도 여러 영광이 있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재료에서 여러 종류의 식물과 육체를 만드시는 것과 같이, 죽은 자와 썩어진 육체를 일으키는 능력도 하나님께 있음을 바울은 암시합니다. 태양과 별들도 지구와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으나 하나님의 교묘한 기술로써 만들어진 태양과 별들의 신비함은 말로 표현할 수 가 없습니다. 보통 하늘에 빛나는 별은 ‘항성’이라고 하는데, 이 항성은 우주에서 ‘은하’라고 하는 집단을 만들고 있는데요. 은하에는 약 1000억개 정도의 항성(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주에는 그런 은하가 1000억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엄청난 주의 별이 하늘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같은 재료에서 그렇게나 많은 것을 만드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없겠습니까? 바울은 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다’고 말합니다. 썩어질 씨앗에서 식물이 자라는 것과 같이 죽은 육체가 하늘의 육체를 입게 됩니다. 또한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이 다른 것과 같이 다시 사는 육체도 그 영광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42절 하반절에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그랬습니다. 즉 죽은 자를 묻는 것은 마치 식물의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육체는 썩어지며 부서지기 쉽지만, 우리가 다시 살때에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다시는 썩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성도의 부활을 가리켜 43절에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그랬습니다. 인간은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참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선 인간은 육체적으로 연약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병균 하나에 평생 병원신세를 지지 않았던 장정이 쓰러집니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입니까? 누군가의 따끔한 눈짓 한번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조그마한 근심 걱정들로 인해 밤잠을 자지 못합니다. 오히려 강해 보이는 사람일 수록 정서적으로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천하의 나폴레옹도 집에 들어오면 고독을 견딜 수 없어서 아내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고 합니다.
또한 인간은 영적으로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시험과 도전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만하면 번듯한데 돈 앞에 가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시험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에는 아주 의로운데 이성 앞에서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성 앞에서는 깨끗한데 명예 앞에서 주저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인듯 보이는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가 싶어서 쳐다보면 참으로 교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충성하는가 싶은데 물질에는 인색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하면 풍성히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 싶은데 언어생활에 날마다 실패합니다. 삶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요?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유명한 사도바울도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라고 고백할 만큼 평생을 질병으로 고통당했습니다(고후 12:7). 그러나 이런 인간의 이런 무기력함과 나약함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결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무기력과 나약함을 뛰어넘어 인간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하사는 유일한 폭군이 ‘죽음’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군왕’이요, 천하가 벌벌떠는 ‘정복자’라도 죽음 앞에선 모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힘없이 굴복했습니다. 죽음이란 왕이 찾아오면 아무리 할 일이 많고 중요한 직책을 가진 사람이더라도 그 사정이 참작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죽음은 인간을 어두움이 있는 죽음 저편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실제로 모든 인생에 왕노릇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류의 원수인 사탄이 죄라는 미끼로 모든 인생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 데 성공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인생에 절대적 권세로 군림하는 죽음의 원인을 제거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섭고도 괴로운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험한 십자가에 달립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모든 죄인을 대신해 죽음으로 그 죗값을 대신 치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사흘 만에 천하무적이던 죽음의 쇠사슬을 부활의 권능으로 끊어냅니다. 또한 부활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악한 사단의 모든 권세와 폭군적인 죽음의 공포를 말끔하게 제거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5-27) 따라서 우리는 나의 연약함을 말씀으로 다스림으로 심고, 나를 강하게 하실 부활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썩어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또한 이 땅에서 죄가 우리의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우리 자신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적용) 나는 나의 연약함 때문에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활의 예수님으로 인해 내가 죽고 강해진 것은 무엇입니까?
3. 하늘에 속한 예수를 바라보자(45~49절)
바울은 예수님을 첫 사람 아담과 비교하며 예수님은 땅이 아닌 ‘하늘에서 나신 분’임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육의 몸’을 가진 것과 같이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신령한 몸’을 기대합니다. 45절에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고,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둘째 아담인 예수님에는 생명이 있고 원하시는 자를 살리십니다. 우리는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신령한 몸’을 얻기 전에 첫째 아담으로부터 ‘육의 몸’을 가져야 합니다(49절). 49절에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이것이 섭리의 질서입니다. 우리가 살아있고 영적이며 불멸의 몸을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살리는 능력으로 받기 전에는 약하고 깨지기 쉽고 죽어야 하는 육체를 첫째 아담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즉 다시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섭리의 질서 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에 묻혀 죽어야 그 속에 있는 생명이 싹이 나고 자라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도 내 자아가 반드시 죽어야 비로소 내 속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싹이 나고 믿음의 열매들이 맺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은 믿는데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은 안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롬 6:4~6).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은 안 믿습니다. 내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열매를 못 맺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은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다운 성도는 ‘육의 몸’을 가진 것과 같이 ‘영의 몸’을 가질 것도 그만큼 확실합니다. 우리는 첫째 아담을 닮아 땅에 속했으며 둘째 아담을 닮아 하늘에 속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죽은 자들은 다시 살 아날 뿐 아니라 영광스럽게 변화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인류를 위한 구원사역을 마치시고 마치 출장 갔다가 본사로 돌아가듯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이 아닌 하늘에 머물러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 않고 죽음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몸, 곧 부활의 신비한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처럼 부활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게 될 실재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큐티인에서 본문의 내용으로 간증한 자매는 이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부활케 하시는 은혜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저희 부부는 그동안 살던 집을 팔고 이사하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발품을 팔다 적당한 집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은 내 놓은지 일주일이 지나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는데, 이사가고 싶은 집은 곧 매매가 될 것 같은 마음에 저는 계약금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 날 저녁에 뉴스를 보다가 부동산 가격 폭등을 막기 위해서 대출이자가 대폭 상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득 이러하다 우리 집이 팔리지 않아서 적지 않은 계약금이 날아갈 까봐 저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른 새벽에 일어나 행19장의 “예수의 도로 말미암아 에베소에 일어난 적지 않은 소동”에 관한 그 날 큐티 말씀을 묵상하면서 습관적으로 선동자가 되어 내 생각대로 급하게 행동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 날은 긴 가뭄 끝에 아침부터 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집이 안팔려요’하니, 남편은 “계약금을 날리게 되도 우리집은 그냥 있으니 안심하라”고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러다 오후에 큰 비를 뚫고 집을 보러 온 사람이 쓱 둘러보고는 바로 계약금을 보내왔습니다. ‘주님, 집이 팔렸어요’ 저는 그날 밤 이사 문제로 죽은 자처럼 되게 하시고 회개한 후 부활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35, 42절). 하나님은 이사 문제를 통해 독선적인 저의 본성을 죽이고 남편과 교회공동체의 질서에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늘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으로 심는 연약한 저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날마다 말씀으로 부활하게 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적용) 자녀의 진로와 결혼 등 중요한 일들을 남편과 공동체 지체들과 의논하여 결정하겠습니다. 이사간 집을 저의 소유로만 여기지 않고 교회 소그룹 모임 장소로 기쁘게 내놓겠습니다. 한 부부의 평범한 일상을 말씀드렸는데요. 세상의 유명한 사람들도 이와 같은 죽음과 같은 삶을 경험한 후에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러시아 유명한 작가인 톨스토이는 대학에서 계속 낙제점수를 받았습니다. 교수들은 그에게 ‘배우기를 포기한 젊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지혜를 얻은 그는 ‘전쟁과 평화’라는 세계적인 명작을 남겼습니다. 프랑스 조각가 로댕은 예술학교 입학을 세 번이나 거부당한 꼴찌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로댕에게 이렇게 통탄했습니다. “이런 바보가 왜 우리집에서 태어났는가.”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통탄을 극복하고 조각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정신발달이 느리고 환상에 사로잡힌 아이’라고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선생님의 무시를 극복하고 지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상대성이론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양자역학 이론의 발전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영국의 성직자 제레미 테일러는 “하나님은 꼴찌를 택해서 1등으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연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했기 때문에 위대한 일을 성취했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은 가장 알맞은 형체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때에 회복시키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고, 부활의 강한 것으로 살아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땅에서의 삶을 비관하며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와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이 세상 일로 인해 낙담하고 좌절하며 우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눈과 시야가 세상의 물질과 부귀영화를 보려고 하기에 너무도 좁아져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 소망을 품고 살기보다는 그저 하루 하루를 때우며 목표없이 육체의 쾌락을 좇아 즐기면서 삶을 살지는 않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늘에 속한 자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적용함으로 썩어질 것과 약한 것과 욕된 것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늘에 속한 자는 우리 주위에 썩어질 것과 욕된 것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전하여 구원과 하늘의 영광을 보도록 도와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늘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활할 그 날을 소망하며 ‘행복’이 아닌 ‘거룩’에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바라기는 하늘에 속한 자로 이 땅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