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회에서 자유선진당 박선영의원 주최로 ‘어린이 근로정신대를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안산시 선감학원에 대한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대부도 옆 작은 섬, 선감도. 오랜 해식 작용으로 평탄한 남쪽 지형에 반해 북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형성되어 있는 이 아름다운 섬에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세워진 선감학원에 대한 객관적 고증과 이해를 돕고자 당일 토론회에서 정진각 선생이 발표한 <선감학원(仙甘學園)>을 3회에 걸쳐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최근 선감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흔히 영어마을, 어촌체험마을, 경기 창작센터 등으로 알려져 있을 뿐 일제강점기 감화원(感化院)으로 세운 선감학원의 실체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은 1923년 감화령(感化令)을 발표하고 감화원(感化院)으로 함경남도 영흥에 조선총독부 직속의 영흥학교(永興學校)를 설치하여 이듬해 10월 1일에 개교를 하였다.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8세에서 18세의 소년으로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자’를 감화시킨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1938년 10월에 전라도 목포의 고하도(古下島)에도 목포학원(木浦學園)이라는 감화원을 추가로 설치하였으며, 1942년 감화령을 보다 강화시킨 조선소년령(朝鮮少年令)을 발표하면서 안산의 선감도에도 선감학원(仙甘學園)을 세웠다.

물론 역사의 기록에도 선감도에 대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농사를 장려하였던 조선의 세종(世宗)은 선감도를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방목(放牧)할 만한 곳"이라 하여 농우(農牛)를 기르는 목장으로 지정하였다. 이후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한 조선시대 발간된 여러 지리서에는 소를 놓아먹이는 아주 조용한 섬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평화스러운 섬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은 1940년부터이다. 당시 90여 가구가 조용하게 살던 섬에 선감학원이 건립되며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선감학원의 이야기는 잊힐 만하면 일부 언론이나 방송에서 들춰내고 있지만 주로 아이들의 죽음에 관련한 이야기들만 거론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관심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뿐 아니라 아이들의 죽음에 관한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시간이 뒤엉켜진 채 '괴담'이 되어 떠돌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 존재하였던 '선감학원'에 대한 진실이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감화원에 대한 인식이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이다. 즉, 감화원이 아동을 보호․감화하는 곳이라는 긍정적 인식과 '부랑아(浮浪兒)는 곧 불량소년'이며 이들을 수용하는 감옥과도 같은 존재라는 부정적 인식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감학원의 경우 그 위치가 섬이라는 외딴 곳에 있고, 해방 이후에도 30여 년간 존속했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이 더욱 심화되었다.
선감학원의 실체를 확실하게 규명하기 위해서 우선 명확하게 구분하여 둘 것은 1942년 4월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약 3년4개월 존재하였던 '선감학원'은 해방이후부터 1982년까지 존재하였던 '선감학원'과 외형상으로는 비슷하게 운영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선감도에 민간인들이 살지 않는 폐쇄적 공간에서 운영되었고, 해방이후에는 민간인들이 섬 내에 같이 거주하며 반공개적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선감학원 안에서 벌어진 사실은 그곳에 종사하였던 극소수의 인원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농촌의 붕괴
일본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국의 공업화정책에 따른 식량 부족을 한국 내에서 충족시키고, 저임금 정책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세워 1920년부터 1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수리조합(水利組合)의 건설과 수세 징세, 농사 개량을 빌미로 한 비료대, 개량 농구대 등의 부담이 증가되었고, 이 비용은 소작농에게 전가되었다.
소작농은 50%가 넘는 소작료에다 부대비용까지 합하여 수확량의 70~80%를 짊어져 삶이 더욱 열악해졌다. 이로 인하여 소작 쟁의가 빈발하였고, 또한 중소 자영농민 마저 영세 소작농·화전민으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농촌의 환경이 열악해지자 1920~30년대에 농촌을 버리고 일본이나, 만주 간도 등지로 이주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일본 내에 농업공황이 나타나고 농민운동이 본격화되자, 일제는 1931~33년에 궁민구제(窮民救濟) 토목공사를 실시하며 회유하였고, 1932년부터는 농촌의 빈곤은 농민 탓이라고 하여 이른바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자작농지설정사업(自作農地設定事業)은 일제 시책에 호응하는 극소수의 자소작(自小作) 농민에게 장기저리자금을 융자해 평균 6단보의 농지를 마련케 한다는 선전효과만을 노린 것이었다.

‘농민의 소득을 증대시켜 생활을 안정시킨다’는 조선총독부의 목표와는 달리 일본인 지주와 일부 조선인 친일지주의 이익만을 보장하였기 때문에 많은 조선 농민은 화전민·세궁민(細窮民)·걸인이 되었으며, 탈농화(脫農化) 현상이 가속되어 농촌의 빈민은 도시로 가 토막민(土幕民)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수탈로 몰락하는 농민이 점차 늘어나고 이들이 도시의 빈민·토막민으로 전락하면서 일제에 대한 항쟁이 더욱 거세어졌으며,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만 갔다. 1940년 4월 12일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번영하는 경성(京城)의 암(癌). 격증하는 토막(土幕=움막집) 등살에 정리 사업을 단념"할 정도로 토막이 증가하였다.
일제의 태도는 1930년대 중반까지도 고아원, 감화원 등의 설립과 운영에 대해서 민간에서의 활동에 의지하는 소극적 자세를 보였고, 부랑아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지역에서의 추방과 단속만 하였으나, 193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달라져갔다. 당시 ‘부랑아’들은 전국적으로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는데, 일제는 이들을 검거하여 기존의 시설에 분산·수용하는 한편, 새로운 감화시설을 설립하여 그곳에 추가적으로 수용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1940년 5월 30일 경기도지사로 부임한 스즈카와(鈴川壽男)는 취임사에서 "경성에 있는 토막의 정리와 부랑아(浮浪兒)의 일소"를 제1의 목표로 내세웠다. 이에 대한 첫 조치로 8월 3일 총독부, 경기도, 경성부 각 경찰서장을 비롯하여 관계기관 협의회를 개최하고 경기도내 새로운 감화원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감화원의 첫 번째 후보지는 고양군의 일산역(一山驛)에서 5, 6킬로 떨어진 고양군 중면과 송포면에 걸친 수십만 평의 유수지대(游水地帶)였으나 홍수에 대비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무인도였던 굴업도(屈業島)가 두 번째 후보지이었으나, 역시 인천에서 배로 6시간이나 소요되고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후보지로 떠오른 것이 당시 부천군 대부면의 선감도였다.
이 세 곳을 면밀히 조사한 조사단의 자료를 바탕으로 1941년 1월 16일 경기도지사실에서 관계자들이 모여 숙의 끝에 감화원을 선감도에 두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제시된 보고서를 바탕으로 1941년 8월 26일 스즈카와(鈴川)지사가 선감도를 방문하여 살핀 뒤 최종적으로 선감학원의 설립이 결정되었다.
보고서에서는 선감도로 선정하게 된 이유로 모두 9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대부도와 일위대수(一葦帶水)를 이루고 있다.
(2) 인천에서 선박으로 두 시간 밖에 안 걸리고 전용선을 이용한다면 1시간 30분으로 단축할 수도 있다.
(3) 송산면의 마산포와는 전마선(傳馬船)으로도 다닐 수 있고, 이곳에서 수원으로 버스도 운행되고 있다.
(4) 섬 내에는 91가구에 529명이 살고 있다.
(5) 마을구성도 2구역으로 되어있다.
(6) 농경지가 비교적 비옥한 편이다.
(7) 전반적으로 점토질의 흙이 많아 벽돌을 굽기에 적당하다.
(8) 물이 풍부하여 1939년 전국적인 가뭄이 있었을 때도 피해가 적었고, 특히 마실 물은 떨어지지 않는다.
(9) 산은 몇 년 전 송충이의 피해로 나무가 모두 죽었기 때문에 현재는 심은지 얼마 안 된 어린나무와 풀이 자라고 있어 숲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