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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도행전 27 : 22-25 요나 1: 11- 12
제목: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지 마세요 로마행 배를 타시지요
일시: 2015. 10. 18
장소: 라이프찌히교회
I. 오늘 본문은 둘이다. 하나는 요나에 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두 스토리를 끌어 들인 이유는 두 사람 다 사람의 생명을 요구하는 거친 폭풍우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대풍들은 두 사람이 탄 배에 다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요나의 케이스와 바울의 케이스에 있어서 그 의미는 서로 완전히 달랐다. 요나와 함께 배를 탔던 사람들은 사실 겪지 않아도 될 폭풍의 고난을 받게 되었고 바울과 함께 배를 탔던 사람들은 잃을 수 밖에 없었던 생명을 바울로 인해서 건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스 폭풍을 만난 요나와 함께 배를 타고 가겠는가? 아니면 로마로 향해 가다가 유라굴로 태풍을 만난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가겠는가?
II. 요나와 함께 배를 탄 사람과 바울과 함께 배를 탄 사람들은 운명공동체이다. 우리는 한 배를 탔다라는 표현을 한다. We are in the same boat 라고 영어에도 표현을 한다. 배를 타는 것보다 비행기를 더 많이 타는 요즘에는 We are in the same plane 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번은 한국에 가다가 아는 어느 한 자매를 비행기에서 만났다. 탑승하기 전 시간이 있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이렇게 말한다. “목사님이 탔으니 안심해도 되겠어요. 비행기가 안 떨어지겠네요!” 종종 비행기를 타지만 이륙하거나 착륙할 때 얼마나 긴장이 되는가! 그의 말 안에는 “하나님께서 택한 종에게 할 일을 주셨는데 어찌 지금 죽이시겠는가”라는 신앙의식이 있는 것이다. 물론 요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난 죽었네”라고 생각해야 하겠지만. 어디 한쪽에서 졸고 있거나 이륙하는데 눈 감고 있는 사람을 유의해라. 그게 We are in the same plane 인 것이다.
요나와 함께 same boat를 탔던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이다. 큰 폭풍을 만나고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신사적이었던 사람들이다. 큰 폭풍으로 인해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을 때 그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이 폭풍의 원인자를 가리게 되었다. 요나가 그 제비에 뽑히게 된다. 제비를 뽑자고 했을 때 이미 그는 자수했어야 했다. 마침내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다가 이런 일을 만나게 되었다고 실토를 한다. 그리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 내가 아노라”고 한다. 이쯤 되면 뱃사람들이 얼른 던져버릴 수 있었을텐데 그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요나 같은 사람과 인생이 엮여지면 괴롭다. 안 만나도 될 폭풍을 만난 것이다. 다들 다시스로 편안히 갈 수 있었는데 요나로 인해 그 Hund muede(개고생)하게 된 것이다. 요나로 인해서 사람들은 안 봐도 될 손해를 보았다.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욘1:5)” 죽음의 위기 속에 안 처해도 될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다.
바울의 케이스는 다르다. 바울은 가이사 앞에 서야 할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행 배를 타게 된 것이다. 그 여정에서 배가 미항이라는 곳에 정박했을 때 바울은 이런 충고를 한다.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그러나 그 배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신용했다. 선장과 선주는 좀 더 빨리 항해해서 이익을 남기기를 원했고 특히 미항은 작으니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여 그쪽으로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게 되는가? 미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을 만나게 되고 사람들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사투를 벌인다. 짐을 바다에 풀어버린다. 이익을 보려던 것들을 오히려 다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후에는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인간적인 노력에도 풍랑은 그칠 줄을 모르고 구원의 여망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에 바울이 등장하여 위로와 용기를 준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행27:22). 그 배에 있는 276명의 사람들은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로 인해서 살게 된 것이다. 바울은 죽을래야 죽을 수 없었다.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야 했고 서신서들을 기록해야 했기에 유라굴로 광풍에서 죽을 수가 없었다. “바울아 두려워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행27:24)고 하신다. 배가 멜리데라는 섬에 도달했을 때 군인들이 모든 죄수들을 죽이고자 했을 때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려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했다.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 배를 무리하게 항해했던 선장과 선주 그리고 함께 배를 탔던 모든 사람들, 또한 다 현장에서 죽임을 당할 수 있었던 죄수들도 바울 때문에 살게 된 것이다.
III. 요나나 바울이나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스로 가는 요나가 탄 배는 요나로 인해서 불행한 배가 되었다. 역으로 로마로 가는 바울이 탄 배는 행운의 배가 되었다. 다 누구 때문이고 누구 덕택인가? 바로 한 사람 때문이다.
지난 주 수요일(14일)에는 눈이 왔다. 첫눈이었다. 어설프게 온 것이 아니라, 비록 쌓이지는 않았지만 함박눈처럼 왔다. 어찌 오게 되었는지 아는가? 온도가 낮고 하늘에서 뭐가 떨어지니까 눈이 되어 온 게 아니다. 그게 다 제 덕택인 줄 알라. 왜냐하면 저의 기도는 “주님 이렇게 으시시 추운 날 하늘에서 뭔가 오려면 눈이 되도록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의 생일 축하를 위해서 내려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가서 따끈한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슬이자매 이야기로는 권태희집사님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눈을 보내주신 것이라고 한다. 아마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해석을 내릴 것이다. 우리 각자의 해석대로라면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 눈은 바로 우리 각자로 인해서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배 한 구석에서 자고 있는 요나나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고 있는 바울이나 작은 한 사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온 배에 다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한 사람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 날른지 모른다. 요나의 문고리를 잡고 그를 여는 순간 집어 삼킬 것 같은 다시스의 폭풍을 만난 것이다. 살짝 열려진 요나의 문을 통해서 다시스 폭풍의 비바람이 들어오지 않는가! 하지만 바울의 문고리를 잡고 그를 여는 순간 구원의 여망이 보인 것이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절망한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문을 열면 죽음의 문일 수도 있고 생명의 문일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다. 광풍과 폭풍이 대작하여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광풍이 일어나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인생은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 배의 나침반이 되고 누가 우리 배의 선장이 되고 누구와 함께 배를 탔느냐하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광풍을 이겨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만남을 위해서 기도한다. 좋은 선생님, 좋은 배우자, 좋은 지체들을 만날 것을 축복한다. 요나와 함께 배를 타기보다 바울과 함께 배를 타기를 소망한다. 그러한 소망은 나와 함께 배를 탄 사람도 바라는 같은 소망이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줄 것인가 이익을 줄 것인가? 엮이면 피곤하게 할 것인가 평안을 줄 것인가? 행복을 줄 것인가 불행을 가져올 것인가 하면서 그들은 긴장스러운 마음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로를 바라다 볼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누가 요나일지 누가 바울일지를 살피면 배에 오르는데 그 요나가 내 자신일 수 있고 그 바울이 내 자진일 수 있다. 이제 시선을 바로 요“나”에게 돌릴 필요가 있다.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니가 이 애비 잘못 만나서 고생하는구나!” “당신이 나를 만나서 고생하네” 그런 말에는 상처를 별로 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진짜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는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나는 요나인가? 바울인가? 우리는 자신을 결단해야 한다. 요나가 될 것인가? 바울이 될 것인가? 우리는 던져 버려야 할 사람이 아니고 끌어안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살맛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죽을 맛을 주어서는 안된다. 어디 가든지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손해를 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기쁨과 평안과 화목을 주어야지 거센 풍랑과 같은 갈등과 아픔을 주어서는 안된다. 용기와 격려를 주어야지 좌절과 절망을 심겨주어서는 안 된다.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아깝고 사람들 앞에 아까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8-9월 파우제가 끝나고 10월부터 새로운 회기가 시작되면서 있던 지체들이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하고 새로운 지체들이 최근에 온다. 다른 도시에 있다가 이곳에 오거나 이곳에 있다가 다른 도시로 갈 때 목회자들은 교우들을 그 교회에 추천하기도 한다. 어느 목사님이 이곳에 자신의 지체를 보내면서 카톡을 썼다. 여간해서 개인적으로 카톡을 잘 안하는 분인데 말이다. “어지간해선 누가 떠나는 게 마음 아프지 않는데 이 친구들은 맘 한 구석이 내려 앉는 기분입니다” 이렇게 썼다. 이곳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하기에 마음에 각오를 늘 해서 어지간해선이라는 말을 쓴 것 같다. 그러나 얼마나 귀하고 아까웠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기도에는 눈물이 다 나올 정도였다. 누군지 부담이 될까봐 그리고 하나님을 믿어야지 사람을 믿으면 안되니까 하는 생각에 밝히지는 않지만. 아까운 사람이 있는 것이다.
IV. 우리 인생에 함께 “동행”하는 동반자가 있다. 내 인생의 동반자인 배우자와 가족, 내 직장동료, 목회자와 교우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이웃들이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인생의 동반자이다. 운명을 같이하는 동행자이다. 요나가 타고 있는 다시스행 배를 타지 마세요. 부디 바울이 타고 있는 로마행 배를 타기를 바란다. 그 배를 탈 때 사람들은 “나”를 바라 볼 것이다. 요나인지 바울인지를 보려고. 나는 나와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요나가 될 것인가 바울이 될 것인가? 죽을 맛을 주는 사람이 아니요 살맛을 주는 사람이 되라. 손해를 주는 것이 아니요 유익을 주는 자가 되기 바란다. 위기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회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불행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라는 표현을 쓰는 분이 있는데 참으로 만나서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드린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다 났다. 하지만 에필로그와 같이 말씀을 맺으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요나냐 바울이냐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요나는 왜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계획으로 즉시 일어나 다시스로 간 사람이었다. 반면 바울은 사람들이 그렇게 뜯어말렸는데도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듯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는 것이다. 요나인가 바울인가? 그 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자로서 살아가기를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