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먼저 새해를 맞이하는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회우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세월이 참으로 빠릅니다. 제 나이 85살이 되는군요. 실제 출생은 1930년 12월 31일생인데 호적에 양띠해인 1931년 1월 1일로 되어 있습니다.
새해엔 누구나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됩니다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강이 최고라고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체력적으로 남에게 덜 의지하고, 회우 여러분 모두가 주변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여 복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을미년은 청양의 해라고 합니다. 온순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도 활동성과 진취성을 가진 양의 특성대로 모든 회우분들이 건강하고 소망을 이루길 바랍니다.
특히, 금년은 광복 70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이고, 스마트방송환경에서 공영방송 KBS가 시청자 중심의 공적 책임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수신료현실화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 건강해 보이십니다. 평소 건강관리는?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노후 건강인 것 같아요.
나이 들면서 병원을 찾은 일이 아무래도 많아지고 있지요. 50살 무렵부터는 술, 담배를 거의 하지 않았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국내외 여행을 자주 다니려고 했어요.
80살까지도 가벼운 산행과 가끔씩 골프도 했습니다만 요즘은 기력이 약해져서 마음의 치유에 노력하고 가벼운 걷기 운동과 실내에서 자전거를 쉬엄쉬엄 타고 있어요.
그리고 건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두뇌활용을 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퇴직후 후학들을 위해 경희대학교와 청운대학교에서 10여년간 강의와 저술에 힘을 쏟은 것이 삶의 에너지를 불러 온 것 같아요.
● KBS와의 인연은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는지요?
1956년 4월 1일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공채제도가 없었어요.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할 무렵, 학교와 당시 국가기관이었던 KBS가 협의하여 추천을 하고, 정동에 있던 방송국에서 시험을 보았습니다. 당시 5급 공무원(기원)으로 들어왔지요.
그 무렵은 6.25전쟁 후라서 국가건설에 당장 필요한 후방요원(제 2예비역)을 확보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그 일환으로 초등학교 교사, 철도 기관사, 기상대 요원, 체신부 요원과 방송 요원 등 3,000명을 국무회의 의결로 뽑았지요. 임택근 아나운서도 이 때 국가 후방요원으로 편입되었지요.
그 후 의무복무기간 5년이 끝나갈 무렵에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나 전자공학을 공부한 인재들이 많지 않아서 금성사 같은 곳에서 전자공학과 출신이라면 모조리 데려가는 상황이었어요.
이때 KBS에 특례로 들어왔던 동기들이 하나 둘 산업계로 옮겨갔지만 나는 개인의 영달보다는 필수요원 제도의 취지는 물론 방송 현대화에 공헌해보자는 당초의 마음으로 KBS에 잔류하였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끝까지 KBS를 지킨 이는 나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내가 KBS와 일생을 같이 하게 된 계기는 대학 3학년 때 연희송신소(현 소래송신소의 전신으로서 KBS 1R 송출)로 실습을 나갔던 것도 인연이 된 듯합니다.
● 당시의 KBS 시설이나 환경은 어떠했습니까?
당시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일제 때 구축된 시설이 대부분으로 Radio 시설만 있었고 라디오도 대도시에서나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전국 중계는 반송전화 케이블로 연결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 소련 등 주변 국가로부터의 전파 영향으로 특히, 야간에는 공간파의 침투로 우리의 방송 전파환경이 열악하기 한이 없는 등 요즘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북한이 선전선동 목적으로 송신시설을 대폭 강화함으로써 주간에는 겨우 우리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으나 야간에는 북한 방송만이 들리는 형국이었습니다.
● 그래서 대대적인 방송망 확장사업을 추진한거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
그랬지요. 열악한 방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방송 송신출력을 소출력에서 중출력으로 확장해 나가면서 세계적 흐름에 맞추기 위해 보다 강력한 방송출력 강화계획을 세워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미국 웨스팅하우스 100Kw 송신기를 연희송신소에 도입했고, 그 당시 민간업체에 방송기술을 소유한 기술자가 전무한 상황에서 남양송신소(500Kw) 건설에 직접 투입되어 불철주야로 난관을 극복하여 성공적으로 준공을 하게 되었지요. 그 유공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어요.
이를 계기로 날로 발전하는 방송기술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고, 당시 문공부 방송관리국에 발탁되어 그때부터 방송망확장계획을 마련하게 되는 기반을 닦게 되었지요.
1973년 3월, KBS가 한국방송공사로 개편되었을 때 기술관리부장으로 전국 방송망현대화계획을 수립, 본격적으로 추진했는데, 가장 먼저 해외방송 강화를 위한 김제송신소 건설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 확보 문제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어요.
자금 확보를 위해 경제기획원의 실무자에서부터 예산실장까지의 설득이란 당시로서는 가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과제였어요.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인맥구성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관계기관과 연계되는 학교동창, 선후배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국가적인 사업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지속적으로 설득하여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려웠던 정부 설득에 성공하여 당시로서는 거대한 14억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오늘날의 김제송신소가 탄생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제1차, 제2차에 걸쳐 전국 방송망확장계획을 마련하여 추진하게 되었고, 다소 미비했던 부분까지 보완을 거듭하는 등 전국을 가시청화하기 위한 제3차 계획으로 국내는 물론 국제방송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방송시스템을 완료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 추진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이나 아쉬움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었나요?
이와 같은 방송시설은 UN산하 국제기구인 ITU에 위치, 출력, 전파의 지향성, 운용시간, 호출부호 등을 국제 상호간에 혼신방지와 전파의 균등배분의 명분하에 엄격한 국제적 절차를 거쳐 등록되어야 비로소 합법적으로 운용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일제 강점기하에서 일본의 일부로서 인정, 등록 운영되고 있었기에 거의 황무지였었습니다.
ITU회의 참석(스위스 제네바, 1979)
국제전기통신연합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ITU], 전기통신업무의 국제적 관리 기구로서 1865년에 설립(한국은 1952년에 회원 등록)
ITU회의는 그동안 정부에서 독점적으로 참여해 왔었고 KBS는 사무적으로만 대처해왔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송망확장계획을 KBS가 계획에서부터 네트워크설계 등 세부적인 사항을 추진해왔기 때문에 그 방대한 사업내역을 일목요연하고 구체적인 데이터 등은 KBS가 아니면 이해도 되지 않는 방대한 사업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데이터를 중심으로 기술적으로 분석하고, 6개월간의 NHK연수, ABU기술회의 참가, ITU 준비회의 등을 통해 준비한 기본기술을 토대로 ITU회의에 직접 국가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그동안 준비한 방대한 자료를 제시하고 설득을 하여서 주파수체계를 마련하는 등 방송시설의 현대화계획을 추진하는 지난한 과정을 겪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합법적인 방송운영(ITU 규정)은 물론, 직원들과 일치 단결하여 방송시설 건설을 위한 재원확보 등을 KBS 주도로 추진하여 오늘날 KBS의 기반이 구축되었음은 실로 자랑스럽고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불철주야 뛰어 다녔던 젊은 날의 기억도 생생하고~~.
그때 공로로 두 번째로 대통령표창도 받았지요.
또 체신부와의 협상을 통하여 도 단위로 KBS 단독 M/W Link 확장과 체신부 M/W망 현대화에 힘입어 1983년 ‘KBS 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비롯한 전국 네트워크방송을 유연하게 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하였습니다.
아주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를 들자면, KBS가 방송망확장계획을 추진중일 때, 미국 웨스팅하우스 주도로 시험중에 있던 T-COM(약 700만달러) 사업으로 방송망현대화계획을 대체하라는 당시 정부기관 특수계층의 강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15명의 전자공학박사 등 전문가를 통한 연구와 세미나를 통하는 등 면밀한 검토를 하여, 기술적인 면은 물론 기상여건 등 제반 사항을 고려할 때 T-COM에 의한 방송망 확장(Radio, FM, TV방송의 양호한 방송권역 확보)은 부적합하다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청와대에 제시하여 추진방향을 정리했던 일이 있습니다. 결국 T-COM계획은 5차례의 국내 실험과정에서 강풍과 적설 등으로 인한 대형사고가 발생하여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상(賞)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후에 앞의 2차례 대통령 표창외에 타부처 소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신부장관 추천으로 국민포장(1986)을 받았어요. 이를 계기로 그때부터 KBS가 타부처 포상계획에 포함되기 시작했습니다.
KBS를 떠난후에는 방송기술 발전에 공헌한 사람을 대상으로 ‘KBS방송기술인협회’에서 수여하는 ‘한덕봉 상’(2005)을 비롯하여 ‘한국방송협회’로부터 제12회 한국방송대상 개인상(기술상,1985)을, ‘방송위원회’로부터 ‘한국방송대상 특별상(방송주파수확립 유공, 2003), ’한국전파진흥협회‘로부터 공로패(2009) 그리고 ’한국방송공학회‘를 주도적으로 설립하여 한국 방송기술의 발전과 국제화에 기여하였다는 공로로 공로패 등 많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 방송국에서 근무하신 이력은 어떻게 됩니까?.
1956년에 공무원으로 특채되어 중앙방송국 수원송신소, 이리송신소장, 남양송신소 계장, 문화공보부 방송관리국 시설계장(1956~1973), 한국방송공사 기술국 시설부장/ 기술관리부장/ 기술부장(1973~1978), 기술국장/시설국장/남양송신소장/남산송신소장(1978~1981), 기술본부장(1981~1983), 방송기기종합정비소장/기술정책개발국장/종합조정실(1983~1986)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이후 1986년 12월, 전국 공·민영 방송송신시설이 KTA(현 KT)로 이관, 운용되던 시기에는 KTA방송망사업본부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8년 5월에 다시 각 방송사로 환원됨에 따라 KBS로 돌아와 그해 연말까지 KBS 방송연수원 교수실 기술위원(교수)로 있다가 퇴직했으니까 방송업무에만 32년간 근무한 셈이지요.
또 1991~1993년과 2001~2003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대통령으로부터 “KBS 이사”에 임명되어 활동했습니다.
오랜 재직중에 그 많은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된 것은 개인적인 피나는 노력과 더불어 사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어려움을 참고 함께 한 동료들과의 팀워크가 공동으로 이룩한 결과였음을 지금도 가슴깊이 한분한분, 하나하나를 생각하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퇴직 후에는 경희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1999~2002), 청운대학교 방송산업학과1997~1999),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1999~2001)의 겸임교수와 초빙연구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 한국 DATA통신(주) 기술위원(1989~1991), 한국방송개발원 상임이사와 상임고문(1991~1996), (주)DSM (Dacom Satellite Multimedia System) 상임고문(1997~2000)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 故박정희 대통령의 공무 수행중 마지막 악수를 하셨는데요?.
시설국장이었을 때인 1979년 10월 26일, 故박정희 대통령께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후 당진송신소에 헬기로 이동, 당진송신소 준공식(당시는 보안시설로서 외부에는 보도되지 않았으며, 당진송신소는 현재 KBS한민족방송을 송출하고 있음)에 공식 참석하였어요.
이날 오후에 송신소 준공식과 기념식수를 마친 후 준공식 시설안내와 설명을 한 저에게 수고했다고 격려 악수를 하시고 귀경을 하였습니다. 이 악수가 결과적으로 공식행사에서는 故박대통령의 마지막 악수였고 제가 그 악수를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1980년 4월 22일, 당진송신소 앞 정원에서 박근혜(現 대통령)님이 참석한 가운데 “故박정희 대통령 마지막 일자리” 추모비 제막식과 기념식수 행사를 가진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또, 그동안 모아둔 방송관련 소장 도서 약 7,000여권을 서울대학교, 청운대학교를 비롯한 관계기관에 기증하고, 또 책을 필요로 하는 산·학계 후배들에게 분야별로 나누어 주었던 일도 의미있는 일로 기억에 남고...
이외에도 체신부가 주관한 정책자문위원회, 통신진흥협의회 전파이용분과위원회, 전파기술연구개발사업심의평가위원회를, 방송위원회의 방송제도연구위원회, 공보처의 종합유선방송추진위원회와 남북방송개방추진협의회, 문화부의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상공자원부의 영상산업개발민간협의회, KBS와 EBS의 경영평가위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현재까지도 대한전자공학회, 한국통신학회, 한국방송학회, 한국언론학회 및 한국방송공학회의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KBS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KBS와 사전에 조율을 하여 공사 정책에 도움이 되도록 했던 일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 방송관련 저술과 연구활동을 많이 하셨는데요?
주요 저술로는 방송기술총람(송재극, 커뮤니케이션북스, 2003), 한국방송 70년사(공동집필, 한국방송협회, 1997), 위성방송(한국언론연구원 총서, 1993), 한국방송총람(방송문화진흥회편 공저, 도서출판 나남, 1991), 뉴미디어기술입문(산업도서출판공사), CATV 기술(송재극, 임춘규 공역, 가남사, 1985)등이 있습니다.
주요 연구 논문으로는 “남북 방송 시스템의 상이성과 극복방안”(송재극,진용욱. 방송연구 1990년 여름호), “방송 전파의 현황과 효율적 이용방안”(방송연구 1991년 여름호), “CATV와 방송환경의 변화”(한국통신학회지 제7권 4호, 1990), “CATV의 역사적 발전 단계와 각 국의 현황”(한국언론연구원, 1989), “HDTV의 의의 및 개발현황”(한국언론연구원, 1989), “통합 디지털화에 따른 변용구도”(한국언론연구원,1989), “북한방송개방, 기술적 과제”(방송협회,1998), “한국방송기술의 발전과 전망”(한국방송공학회, 2000), “TV수상기 발달사, 발전과정과 향후전망”(방송위원회 방송21, 2001)등이 있습니다.
또한, 책임연구원이나 연구원으로서 참여하여 연구·발표한 내용으로는 남·북한 통신 방식의 비교 연구(1990-1991), 위성방송 시대를 대비한 남북 TV 방송방식 통합에 관한 연구(1991-192), 남북통일을 대비한 방송정책 기본방향에 관한 연구(1991-1992), 방송전파의 효율적 이용방안 연구(1992), 종합유선방송국 규모별 시스템 구성(1992), 직접위성방송(DBS) 도입을 위한 정책 연구(1992), 남?북한 방송교류를 위한 제반기술과제 연구(1992), 통일에 대비한 방송체계(한국방송개발원,1995), T-COM과 방송망 구성의 꿈(문공회, 2007)등이 있습니다.
● 80평생을 살아오면서, 삶의 좌우명이라면?
생활 신조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듯이 주어진 작은 힘이지만 항상 겸손하고 감사하면서도 최선을 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려고 했습니다. 솔직히 주어진 일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해 준 많은 선배, 동료, 후배들과의 팀워크였음을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KBS에서 일하는 동안 다양한 일을 경험하고 실력을 튼튼하게 쌓기 바랍니다.
엔지니어 경우에도 기술뿐 아니라 다른 업무로도 폭을 넓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일을 맡거나 처리해야 할 경우에도 할 수 있고 적응도 할 수 있습니다.
● 가족은?
1955년 결혼했으니 내년이면 60주년, 回婚이 됩니다. 2남 1녀에 2명씩, 6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는데 어느새 3명은 취직해서 사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빠른 거지요
특히, 사위가 KBS에서 내가 걸어 온 방송기술인의 길을 걷고 있어 흐믓하고 자랑스럽습니다.
● 사우회와 회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KBS는 ABU회장社를 연속 3회째 하고 있는 등 세계적인 방송기관으로서 자리매김해가고 있고, 사우회우도 3,000여명에 육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큰 발전입니다.
사우회를 중심으로 우리 모두가 그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쌓아온 귀중한 경험과 축적된 지혜 그리고 고귀한 노하우를 사회에 공헌함은 물론, 현직 사원과 공동 보조를 맞추어 사회적인 발전과 문화융성 강국으로의 발전을 견인하는데에 최선을 기울이는 새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한국은 이미 초고령사회, 100세 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점차적으로 노령화 되어가고 있는 회우들의 갖가지 바램들을 큰 그릇에 담고 소화시키기 위한 원동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을 다해 온 정근춘 KBS사우회 회장님을 비롯한 역대 회장님, 모든 회우님들의 수고가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KBS한국방송이 사회적인 역할을 더욱 충실하고 활발하게 만들어 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범 KBS가족 모두의 건강과 가치의 공유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새해에 회우 여러분은 물론 KBS임직원 모두가 더욱 더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