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고 할까, 수필 강의를 시작할 때 맨 먼저 던지는 질문이다. 그렇게 물으면 열이면 열 돌아오는 대답이 ‘네’다. 맞다. 수필이 문학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당연한 질문으로 수필이 문학임을 환기시켜야 하고, ‘수필은 문학이다’라는 말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글쓰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내는 것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인 버킷리스트 항목이 되기도 한다. 이때 글을 잘 쓰고 싶다는 것은 시나 소설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적고 싶다는 뜻이다. 거기에 가장 적합한 게 수필이고, 편지 정도만 쓸 수 있는 실력이면 된다고 여긴다. 그 용기가 가상타. 그래서 문학 장르 가운데 가장 공부하지 않고 쉽게 덤비는 분야가 수필이다.
하여 발표되는 수필작품 가운데는 수필이 과연 문학인가 하는 회의를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겪은 지난날의 신변잡기거나, 가족들의 이야기, 남들에게는 관심도 없는 너무나 개인적인 넋두리, 혹은 감성은 풍부하지만, 이성과 논리가 없는 감상기에 불과한 작품이 버젓이 수필이라는 이름을 달고 활자화되는 것을 보면 괜히 부아가 난다.
더 문제는 이름 있는 연예인이나 정치가 중에는 문학성보다는 상품성을 담보로 라이프 스타일의 자전적 수기나 자기계발서 따위의 책을 내면서 표지에는 어엿이 수필집이라고 표시한다. 그리고 나면 수필작가라는 타이틀까지 얻는다. 수필이 문학이라면 이제 이런 수필 같은 수필 말고, 문학으로서의 수필을 써야 한다.
일찍이 수필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윤오영(1907-1976) 선생은 말하기를 ‘잘 썼든 못 썼든 소설은 소설이고 시는 시로 봐준다. 하지만 수필은 잘 쓰면 수필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잡문이 되고 만다.’라고 했다. 수필은 부단한 고뇌와 창작 정신으로 빚어낸 품격 있는 문학이다. 따라서 잘 쓴 작품이라고 평가받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수필이 문학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문학성(文學性)이 담보되어야 한다. ‘문학성’이란 ‘문학으로서 가져야 하는 성질’이다. 이런 문학적 성질은 작품의 예술성으로 드러난다
. 그럼 예술성은 무엇인가? 예술은 미(美)의 세계다. 그러므로 독자에게 미적감동(美的感動)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미적감동이란 한 편의 수필 속에 작가의 인격과 사상 그리고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창작예술로 귀결된다. 수필은 그래야 한다.
제2장 창작보다 독자가 되는 것이 먼저다
누구나 청소년 시절에는 한번쯤 문학에 심취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을 읽으며 상상의 세계를 꿈꾸었다.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하고 애타는 그리움으로 붙이지 못하는 편지를 썼다가 지우기를 얼마나 했던가. 그렇게 하면서 문학소년이 되었고 문학소녀가 되었다.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위장해서 소설을 읽던 그 뜨거움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의 일생 중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시기는 공부하기 바쁜 학생시절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문학소년의 낭만도 문학소녀의 순수함도 동시에 졸업하고 만다. 어른이 되고나니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달나라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독서실태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10명 중 4명은 1년 동안 책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수필가가 되고 싶다면 먼저 수필을 읽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이 다 시인이거나 수필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인(수필가)이란 ‘창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소비하는 사람’ 곧 시(수필)를 읽는 독자도 시인(수필가)이다. 문학작품이란 작가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창작품이지만, 그 작품을 독자가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는 또 다른 창작품이다. 그러기 때문에 훌륭한 작가만큼 훌륭한 독자가 있어야 작품이 완성된다.
독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작가가 될 수 없다. 독서하라. 수필가의 기본은 폭 넓은 지식이고 그 지식은 책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굳이 책을 볼 필요가 있는가. 인간의 두뇌보다 훨씬 용량이 큰 컴퓨터가 있는데 라고. 전혀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컴퓨터는 사람이 저장시킨 자료를 재생할 뿐이지 거기에 창의성까지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는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 쉽게 이해되고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책은 다르다. 책은 영상매체와는 달리 우리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글자만 제공할 뿐이다. 눈으로 장면을 볼 수 없고,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모든 상황은 독자의 머릿속에서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상상력의 세계다. 그게 책을 읽는 이유다.
수필가가 되고 싶다면 1주일에 수필 1편은 읽으십시오. 운전을 많이 해본 사람이 운전을 잘하듯이, 수필을 많이 읽은 사람이 좋은 수필을 쓸 있 수 있다. 수필을 읽지 않는다면 수필가의 꿈을 접으십시오.
제3장
필사적으로 필사하라
1936년, 백석 시인은 100부 한정판의 시집 <사슴>을 발간한다. 가격은 다른 시집보다 2배 비싼 2원이었지만 곧 품절될 정도로 인기였다. 당시 쌀 한 가마니에 13원 할 때였다. 연희전문대 학생이던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빌린 시집을 밤새 필사했다. 그리고 필사본을 곁에 두고 날마다 베껴 썼다. 위대한 시인 윤동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100만 부 이상 팔리면서 밀리언셀러 작가가 된 신경숙 작가는 습작 시절 조세희 선생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통째로 베껴 쓰면서 공부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기독교인이 성경을 필사하고, 불자가 불경을 필사하는 일은 독실한 신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림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보고 그리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제대로 된 필사의 과정을 겪지 않고 시인이나 수필가가 되었다면 그 문학적 깊이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수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문장력인데, 이를 가장 빨리 그리고 명확하게 배우는 방법은 바로 필사(筆寫)에 있다. 문학의 습작기라면 바로 이 필사의 과정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 이론적으로 배울 수 없는 문체와 느낌, 문장의 구조, 사상과 철학을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익히게 된다.
필사는 느리게 읽기다. 눈으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읽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느리다. 느리다는 것은 단순히 따라 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쓰는 글이다. 생각하면서 글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수동적인 감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감상을 뜻한다.
글쓰기의 실력을 최단 거리로 발전시킬 수 있는 비법은 필사다.
텍스트가 될 만한 작가의 작품을 선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통째로 내 노트에 옮겨 적는다.
독서와 글쓰기를 이어주는 것은 필사다.
잘 모르는 어휘, 한자, 순우리말은 뜻을 찾아보면서 쓰자.
핵심적인 문장은 형광펜으로 표시하면서 쓰자.
필사하면서 만나는 좋은 문장은 별도로 메모하는 습관을 지녀라.
베껴 쓰기에서 바꿔쓰기로 점차 방법을 바꾸어 나간다.
필사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거나 어떻게 다 베껴 쓰나 하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자기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큼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조금씩 양을 늘려나가면 된다. 필사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의 과정이 아니라 정말 좋은 수필가로 괜찮은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필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필사하는 일이 귀찮다면 여러분은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좋은 글의 기본인 문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연습으로 익힌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제4장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쓴 글이 아니다.
수필이란 무엇인가?
수필의 사전적 정의를 먼저 살펴보자. 국어사전에서는 ‘일정한 주의가 없이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라 했고,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 사전》은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아니하고 생활 체험이나 느낀 바를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라고 설명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리태니커 사전은 ‘적당한 길이의 작문으로 작자가 선택한 주제로 별 부담 없이 취급한 글’이라고 말한다.
결국 수필은 ‘생각나는 대로 쓴 글’ ‘일정한 형식이 없는 글’ ‘부담 없는 글’로 요약된다. 1935년 김광섭(1905-1977)의 <수필 문학 소고>에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고 말한 후, 마치 이 말이 수필의 정의처럼 쓰여 왔다. 이때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란 ‘隨(따를 수)+筆(붓 필)’이라는 한자의 풀이에 불과하다.
글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유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면 문장은 문법적 질서를 지켜야 하고, 상대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야 한다. 그게 글이다.
우리가 간단한 편지를 쓴다 해도 아무렇게나 시작해서 아무렇게나 끝나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핸드폰 문자를 주고받을 때도 손가락이 가는 대로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짧은 몇 줄인데도 썼다가 고치기를 여러 번 하지 않는가. 그런데 하물며 문학작품이라는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쓴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오죽하면 일부 신문이나 잡지사에서 원고를 청탁할 때 수필가에게는 시나 소설을 청탁하지 않으면서, 시인이나 소설가에게는 수필을 당연한 것처럼 청탁하는 사례가 흔하다.
현대수필이 옛날 수필의 정의나 이론에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문학으로서의 수필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붓 가는 대로 쓰면
첫째, 독자의 감동보다는 자신의 넋두리나 신변사만 늘어놓게 되고
둘째, 주관적인 자기감정에 빠져 관념적인 산만성을 드러내게 되고
셋째, 정돈된 글의 내용보다는 멋스러운 단어에 집착하게 되고
넷째,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수필은 길이가 짧지만, 소설이 담겼고, 리듬은 없지만, 시(詩)의 운치가 느껴지는 품격 있는 문학이다. 그 속에 낭만이 있고, 철학이 있고, 우주가 담겨있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라고 했다.
수필을 쓰려는 사람이라면 꼭 이 말을 기억해 두자. ‘시(詩)는 울고 들어가서 웃으며 나올 수 있지만, 수필은 웃고 들어가서 울고 나오는 장르다.’ 그만큼 잘 된 수필을 쓰는 일은 소설이나 시보다도 어렵다는 반증이다. 붓 가는 대로 썼는데도 독자가 감동하는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대문장가의 경지에 이른 작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