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원
전남 구례 땅, 황 의원은 바쁘다.
쫄쫄 굶고 왕진하러 갔다가 헉헉대며 고개 넘어 돌아와 밥을 먹다가도
또 누가 아프다고 하면 수저를 던지고 일어난다.
사동 노릇을 하는 열다섯살 막내아들은 한 손에는 왕진 가방을 다른 손에는 삶은 감자를 들고
제 아버지를 따라다니는데 어떤 때는 하도 바빠 맨발로 나설 때도 있다.
산독으로 누워 있는 풍산댁 둘째 며느리를 진료하고 일어서는 황 의원에게 막내가
“아버지, 얼마 받을까요?” 하고 묻자 황 의원은 “보아하니 끼니도 제때 못 챙기는 것 같구나”라며
주머니에서 열냥을 꺼내어 걱정스럽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풍산댁에게
“산후에는 잘 먹어야 하는 법, 이걸로 당장 장에 가서 미역도 사고 닭 한마리도 사 오시오” 하며
오히려 돈을 주고 돌아왔다.
서른두살 맏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의술을 배우고 있고 이남과 삼남은 약초꾼이다.
천석꾼 부자 노 참봉네 집사가 황 의원을 모시고 갔다. 사랑방에서 노 참봉의 사연을 들었다.
천 서방의 열여섯살 셋째 딸을 사왔는데 밤일이 안된다는 것이다.
황 의원이 노 참봉의 팔목을 잡고 진맥하며 “기가 많이 허해졌소이다” 하자
노 참봉은 “도대체 밥맛이 없어요. 갈비도 민어탕도 맛이 없고…” 라고 했다.
황 의원이 알 듯 모를 듯 슬쩍 미소를 흘렸다. “처방전이 세가지 있는데 첫째는 너무 비싸고.”
황 의원의 말을 가로막으며 노 참봉이 물었다. “첫째는 무엇이며 값은 얼마요?”
한참 뜸을 들인 황 의원이 헛기침을 뱉더니
“중국에서 몰래 들여온 경면주사와 토번국에서 흘러온 동충하초”라고 말하는데
또 말을 끊은 노 참봉이 “도대체 얼마요?”라고 묻는다.
“문전옥답 세마지기는 팔아야 할 것이오”라며 황 의원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약효가 없으면 약값을 토해내시오.” 노 참봉이 겁박을 줬다.
노 참봉네 집을 나와 돌아오며 막내가 황 의원에게 얘기했다.
“보릿고개에 어린 딸을 노 참봉에게 판 천 서방은 못할 짓을 했다며 술독에 빠져 산대요.”
이틀 뒤 탕제 세첩을 막내가 노 참봉네 집에 전해줬다. 황 의원이 씩 웃었다.
‘아편과 할미꽃 뿌리를 넣었으니 파드득 힘이 솟지만 내상이 깊어져 골병이 들 것이다.’
노 참봉 같은 부자에게는 왕창 바가지를 씌우고,
어려운 환자에게는 무료로, 때로는 돈을 보태줘 보양하도록 도왔다.
이러니 고을에서 이름난 의원이라 항상 환자가 우글거리고 왕진 다니느라 바쁘지만
집안에 돈통은 바짝 말랐고 외상장부만 늘어났다.
황 의원이 드러누웠다. 왕진 갔다가 비를 쫄딱 맞고 오더니 여름 고뿔에 걸린 것이다.
맏아들이 온갖 약재로 탕제를 끓여 올려도 별 차도가 없었다.
한달이 지나도 일어날 줄 모르고 기침에 피까지 섞이더니 피골이 상접했다.
황 의원은 아들 넷을 불러 모았다.
“맏이는 내가 의술을 가르쳐줬으니 이 집에서 의원을 하거라.
둘째와 셋째는 변함없이 약초꾼으로 살아라.
맏이는 세간 난 둘째·셋째에게 매달 서른냥씩 주거라.
막내는 나를 도와줬듯이 큰형을 도와주거라.”
황 의원은 ‘후’ 큰 숨을 쉬더니 “외상장부를 가져오너라”라고 말했다.
막내가 다락 속에서 먼지가 쌓인 외상장부 열두권을 가져왔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안마당에 내려가 화덕 위의 약탕관을 들어내게 하더니
사형제가 울부짖는 것도 아랑곳없이 외상장부를 모두 태워버렸다.
사흘 후 황 의원은 이승을 하직했다.
고을 사또가 호상이 돼 칠일장을 치르는데 문상객이 구름처럼 모였다.
발인날 만장 깃발이 십리나 이어졌다.
고인의 유언대로 사십구재를 지내고 탈상하고 나자,
둘째·셋째가 선친의 유언을 무시하고 지리산에서 캔 산삼이다 하수오다 온갖 비싼 약재를 형한테 주지 않고
구례장·산청장·남원장에 내다 팔았다.
황 의원은 문을 닫았다.
맏아들은 화병을 얻어 주막에서 술독에 빠져 살더니 노름판에도 끼며 살림 다 까먹고 길바닥에 나앉게 됐다.
둘째는 산양삼을 산삼으로 팔아 사기죄로 감방에 갇혔고
셋째는 남의 유부녀를 건들고 도망 다니고 있었다.
막내가 사또를 찾아가 울면서 호소했다.
고을 곳곳에 방이 붙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자 고을사람들이 자진해서 외상값을 들고 황 의원 집으로 구름 떼처럼 몰려왔다.
황 의원이 선친의 유언대로 다시 문을 여는 날,
고을 이방이 주도하여 사물패가 꽹과리를 치고 상모를 돌리며 잔치판이 벌어졌다.
막내는 두툼한 새 외상장부를 마련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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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