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교와 문화 >
왜 나랏말싸미인가?
불자 감독 조철현
취재 | 전현자 (미주현대불교 한국주재기자)
기자: 나랏말싸미 영화 감독님! 뵙게 되어 매우 영광입니다.
감독: 저도 반갑습니다.
기자: 영화란 무엇입니까?
감독: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 저는 주로 한국 영화의 사극을 만들어 왔었습니다. 다른 영화인과 차별화가 된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러다 보니 역사적 사료라든지 자료 같은 것들에 늘 관심이 있고 많이 보고 우리의 전통에 대해서 늘 관심이 있고 삼국유사부터 시작해서 조선 왕조 실록이라든지 관련된 다양한 방계 사료들이 많이 있는데 뭐 영화를 정의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있겠지마는 저는 영화 역시 하나의 서사라고 봅니다. 간접적이고 직접적인 인생의 자료 그것이 역사적 자료든 학문적 자료든 아니면 우리 실생활에서 나온 어떤 기록이든 에피소드든 그런 모든 삶의 기록, 궤적을 소재로 삼아서 만드는 하나의 서사다. 내러티브. 그쪽에다 방점을 찍고 저는 영화를 지금까지 해온 것 같아요.
기자: 많은 사람들이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라고들 생각하는데 감독님께서는 서사다 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감독: 종합 예술이라고 보는 관점은 만드는 관점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영화라는 것이 한 사람이 골방에서 개인의 영감을 가지고 만드는 예술이 아니고 다양한 기술적인 테크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면서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종합적인 예술, 융합적인 예술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어 가는 인더스트리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메이킹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것 같고 제가 서사쪽에 방점을 찍고 영화를 규정하고 정의하는 것은 메이킹의 과정도 중요하지만 영화가 메이킹 되기 전에 형성이 되는 과정. 이야기로써. 그리고 현장에서 만들어지고 그리고 그것이 관객들에 소비되는 과정. 전체 과정을 봤을 때 서사라고 하고 서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영화가 사회적으로 하는 역할의 관점에서도 서사가 굉장히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서사를 단순히 이야기를 표현하고 형태를 형성하는 어떤 작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인생을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제게 있어요. 결국 살아서도 이야기가 되어 가는 것이고 죽어서도 어떤 사람의 인생은 이야기로 남는 점에서 서사로 봅니다.
기자: 영화는 더욱이 카메라, 무대 등등 또 옷, 음악도 들어가니까 종합 예술이 아닐까요?
감독: 저는 그런 것들을 영화의 서사적 도구로 본다는 것이지요.
기자: 그러면 나랏말싸미도 영화일 뿐인데 왜 그렇게나 영화를 보지 말라고 했답니까?
감독: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는 말은 저도 공감하기가 어려워요. 영화가 반드시 누구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그것이 목적이라고는 얘기하지 않지만 영화가 하는 역할이 단순히 영화는 영화라고 얘기했을 때 거기에는 영화 고유의 사회적 역할을 주장하는 대신에 약간 방어적인 그런 어떤 의도가 들어가지 않은가 라는 입장에서 그런 생각에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것이 쿨하고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 일면 너무 수세적인 것 아닌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런 관점에서 저는 누가 저를 커버해주기 위해서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라고 얘기했을 때 그 말이 그렇게 가슴으로 쑥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영화는 단순히 영화일 뿐이다라는 말은 동어 반복일 뿐이고 그게 뭔 소리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하하하.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 입장입니다. 심지어는 제가 내러티브라고 했을 때는, 서사라고 했을 때는 우리의 인식 구조가 외계든 자기 내면이든 그걸 인식하는 구조가 언어를 통해서 된다면, 물론 불교에서는 불립문자의 세계가 따로 있긴 하지만. 이미 인간이 어떤 사태나 상황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구조 자체가 서사적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게 아니고 예를 들어 육근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 안이비설신을 통해서 자기 자의식을 구축하고 많은 것들이 제8식에 있는 것 그리고 다시 8식과의 관계속에서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구상을 하고 그것에 집착을 하다보니까 고통도 생기고 하는 그런 과정 전체를 저는 서사라는 단어로 규정하는 게 저에게는 굉장히 다가오는 그런 얘기라. 그래서 역사조차도 조선왕조실록을 완벽한 기록이라 얘기하는 것에 대해 전혀 반대 입장입니다, 저는. 어떤 누구도 과거사든 현재사든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기록할 수 없다. 그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의 서사물일 뿐이다. 그것이 다른 역사 기록에 비해서 조금 더 정교하거나 충실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본에 들어가보면 그것 역시 유가 이데올로기라든지 철학이라든지 종교 의식이라든지 가치관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베이스로 깔고 지금 현재 일어나는 모든 사태들을 왕을 주변으로 해서 이 나라의 여러 중요한 사태들을 기록한. 조선 왕조 실록에 나온 많은 인물평들. 돌아가시면 사후에 그 사람에 대해서 사관이 평가하는 그런 것들도 그 역시 냉정하고 객관적인 어떠한 전제도 하지 않은 무전제의 평가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그 인물을 평가한 거기 때문에 그것에서 벗어난 인물들은 굉장히 박하거나 거의 저주에 가까운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그리고 실제로 저는 사극을 하면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나 이런 것들을,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보는데 심지어는 거기에는 조작된 것 같다는 느낌도 굉장히 많이 받습니다. 특정 사건에 관련된 것 그런 것들 보면. 그래서 실록을 보는 방법, 역사를 보는 방법을, 이것도 서사라는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있는 문자, 문장 그 자체도 보겠지만 기록되지 않거나 문자와 문자 사이, 문장과 문장의 행간,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과연 무엇인가 이것은 왜 기록되지 않았는가. 그런 부분에 상당히 주안점을 두고 역사를 하고 있죠.
기자: 나랏말싸미가 훈민정음 혜각존자 신미평전이라는 것에 착안되신 겁니까, 아니면 감독님 스스로 시나리오를...
감독: 아닙니다. 제가 훈민정음을 갖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일종의 영화인으로써의 서원은 꽤 오래 됐습니다. 거의 한 15년, 20년 가까이 된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글자를 모르셨어요. 평생 자기 한이 글자를 모르는. 예전 분들은 그러잖아요. 학교도 못가고 그래서. 평생 젊어서 과부되셔서 자식들 키우고 하려다보니까 학교를 다시 뒤늦게라도 배울 기회가 없어서. 늘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글자만 알았어도 내 자식들을 이렇게 고생 안시키고. 저희는 고생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분 입장에서는 더 편하게 살게 해줄 수 있었는데 하면서 굉장히 아쉬워하는 그런 모습을 늘 봤었어요. 영화계 와서 영화 일을 하다보니까 역사 쪽에 관심을 많이 갖고 영화를 하려다 보니까.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영화로 해보고 싶다, 이왕에 할 거면. 그러면 무엇이냐. 한글 아니냐, 훈민정음. 누가 봐도 자타가 공인하고 인정하는. 세계적으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이 훈민정음을 가지고 영화를 해보겠다고 여러 차례 시도했었습니다. 관련된 책들이라든지 논문이라든지 세미나라든지 내 눈에 걸리는 것들은 다 찾아보고 소설도 관련된 소설 나오면읽어보고 학술 서적도 보고 다 이렇게 그러다가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나서 실험을 해보는 과정을 눈병 치료 하면서 ‘초정리 편지’라는 동화가 하나 나왔어요. 그 동화 판권을 샀어요. 창작과 비평사에서. 그래서 각색을 했는데 동화 형식이라 그런지 투자 유치 하는데 안돼서 그때 그걸 못하고 실패하고 그것 외에도 비슷한 뿌리 깊은 나무 책 나오면 신문에서 책 출판됐다 인터넷에서 책 출판됐다 그러면 늘 그런 어떤 새로운 신간 서적에 대한 것들을 반복적으로 검색하는 그런 습관이 있어서 훈민정음과 관련된 책이 출판됐다 그러면 그 책이 서점에 깔린 날 서점에 가서 사보는 그런 부지런한 다른 것은 게으른데 그 쪽에는 굉장히 부지런하게 살았었어요. 그러다가 사도라는 작품의 시나리오를 제가 써서 감독과 같이 팟캐스트 방송을 출판사와 하게 됐는데 사도라는 영화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취지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관한 팟캐스트 방송을 하는 데 가서 방송을 했는데 휴머니스트라는 출판사였던 것 같아요. 방송이 끝나고 그 회사 대표님이 자기 출판사에서 인문 서적을 역사 서적을 많이 내는 출판사라 자기 출판사에서 나온 영화 작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고려사라든지 이런 근래에 나온 책들을 잔뜩 몇 십 권을 선물로 주더라고요. 그 중에 용재총화라는 것이 있어요. 성현 16세기 초 세종 다음인 그 용재총화가 그때까지의 조선이라든지 고려, 우리 역사 속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인데 역사 속에서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그 안에 훈민정음은 범어 산스크리트어의 문자 체계라든지 모양이라든지 그런 것들과 상당히 관련이 있다 라는 것이 그 전에도 막연히 듣기는 했지만 그걸 보고 아, 이것은 한 번 더 찾아봐야겠다 그러던 차에 제가 아는 어르신으로부터 박해진 작가를 소개받았어요. 훈민정음을 영화화하고 싶다라는 얘기가 나와서 그 분하고 늘 얘기를 하다가 그럼 이 사람을 만나봐라. 신미 스님을 연구해서 평전을 썼다 한다.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라는 관점에서. 만나러 약속한 날 가기 전에 그 분의 책을 읽고 갔어요. 박작가는 소설가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고 시인이예요. 그러면서 한국 고건축 사진 전문가고 그런데 10여 년 간을 신미 스님을 연구하면서 조선 전기 속에 파묻혀서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책은 신미 스님의 행적과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다양한 방계 기록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신미 스님이 67번인가 나옵니다. 스님으로서는 굉장히 등장 횟수가 많으신 거죠. 태종 때부터 아마 성종 때인가 돌아가실 때까지 나오는데 그런 기록들과 거기에서 밝힐 수 없는 방계 기록들을 다 찾아서 그것을 정리를 해놨더라고요. 훈민정음 뿐만 아니라 신미 스님에 대한 기록으로는 가장 방대한 기록을 평전 형식으로. 그런데 평전의 형식도 굉장히 독특해서 시인의 문장이라 아주 정선된 학문적 평전 문장이 아니라 시적 감수성으로 문장을 표현해서 보기에 따라서는 읽기 어려운 사람도 있지만 저 같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감성적으로 다가오니까 편하더라고요.
영화라는 것은 일종이 내면적이든 외면적이든 갈등 구조가 있어야 하는데 영화를 하다 보면 중국과의 관계, 신하들과의 관계등 갈등 구조를 만들고 그러니까 저는 그게 진부했어요. 늘 그런 관점에서 사극을 만들다보니까. 그래서 핵심 멤버들 사이의 내면적 갈등을 오히려 핵심 갈등으로 하고 나머지 외부의 갈등은 환경적 요인으로 뒤로 밀어놔버리는 내러티브를 구사하고 싶더라고요,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걸 보고 다른 많은 자료 조사를 하고 또 박해진 씨를 자문으로 제가 위촉을 했어요. 그 책 안에는 드라마가 없으니까 영화의 원작이나 원안으로 되려면 기승전결으로 전개되는 드라마 구조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세종이 시켜서 그냥 했다 이런 것만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는 영화적 줄거리가 형성이 안돼니까 그렇지만 그 책은 나한테 이런 완성된 형태의 영화로 만드는 가장 큰 영감을 준 굉장히 좋은 참고 자료였어요. 그래서 그 분을 상당량의 사례를 하고 자문으로 위촉을 했어요. 그리고 실제로 제가 너무 고마워서 역사극을 많이 만들다보니까 인문학자나 역사학자나 학자들이란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열악한 조건에서 책을 만들고 하는 것이 너무 훌륭해보이고 고맙고 그래서 뭐라도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분한테 제가 원안자로 해주겠다. 신미 스님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에서도 제가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이 책이 중심이 되니까. 그렇게 얘기를 했었다고요. 그런데 그 책을 낸 출판사의 대표가 그 사실을 알고 아마 자기들끼리는 2차 저작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출판사가 주가 되고 출판사에서 계약을 전개하고 거기서 돈을 받으면 양분을 하고 이렇게 계약이 되어 있었나 보더라고요. 출판사에서 클레임을 걸어서 계약을 그렇게 하면 안된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만나서 그런 사전 계약이 있으면 다시 이 사람과 계약을 파기하고 그렇게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했는데 그때 스님 한 분을 모시고 가서 그 스님이 중재자처럼 나서서 잘못했다 라고 굉장히 큰 실수를 한 거니까 잘못했다고 반성문 비슷하게 문서로 써서 보내라 이렇게 얘기를 하셔서 우리 회사 대표가 어떻게 해드리겠다 그 책이 많은 대중들한테 알려질 수 있게끔 영화 개봉 전후로 해서 마케팅도 해드리고 같이 전개도 하는 그런 문건을 다 만들어왔는데 반성문을 첨부하라고 그러니까 그건 못하겠다. 그래서 그 분들과 원안 계약을 해드리겠다고 하는 일 자체를 없는 걸로 합시다 하고 끝내버린 거죠.
기자: 그런 어려움도 있었군요.
감독: 재판까지 걸려서 가처분 신청하고 재판장에 처음 가봤습니다, 제 인생에.
기자: 훈민정음으로 영화하려던 가장 큰 이유가 있으시다면?
감독: 영화로 하겠다는 것의 핵심이 두 개의 인연이 있는데 한 분은 김석연 교수라고 콜롬비아 대학에서 훈민정음으로 박사 학위를 하셨어요. 그 분은 돌아가셨는데. 국민 대학교 석좌 교수로 계시다가. 그 분이 유엔 유네스코의 한글이 공식문자화 하는데 굉장한 노력을 하셨지요. 유엔에서 공식 문자화하기 위해서는 이 문자가 없는 민족들이나 부족들이나 종족들이나 문자가 있는데 너무 어렵거나 비효율적인 문자의 부족 종족들에게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사례를 만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 분이 다른 많은 분들과 히말라야 그 쪽을 돌아다니시고 또 실크로드 그 쪽으로 돌아다니면서 무문자. 낙문자 부족 종족들에게 실험을 했어요. 녹음시설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들의 말을 다 채취하고 녹음하고 분류해서 굉장히 빠른 시간 내에 훈민정음의 원리를 이용해서 그들의 말을, 소리를 기록해주는 그런 사례들을 여러 개 만들었어요. 그래서 유엔 유네스코 본부인가에서 발표를 했어요, 이 분이. 그래서 기립 박수를 받았어요. 이 분은 될 줄 알았는데 한 가지를 더 요구를 한 거예요. 유엔의 공식 문자로 제정을 해야 하는 것에 영어보다 영문 알파벳이나 유럽 쪽에서 쓰는 페니키아 문자를 기반으로 한 그런 알파벳들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사례를 만들어 오라는 것인데 복잡한 거예요 이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저하고 만나서 얘기할 때는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자기는 기독교인인데 선교의 목적으로 한글을 활용하려고 그랬었다. 그래서 중국 선교를 위해서 중국이 병음부호를 알파벳으로 쓰고 있으니까 발음 기호를 그것보다 훈민정음이 더 효율적이고 쉽고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를 만들기 위해서 성경을 중국말로 번역하는데 훈민정음으로 번역을 하겠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러면 중국말로 어떻게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고 읽는 방법을 실험을 하다가 돌아가신 거 같아요. 다른 분들이 교대해서 이어받아 계속 하고 있는 걸로 저는 알고 있는데 그 이후에는 그 분들의 작업이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고 그래서 그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만났었는데 내가 영화로 만들려고 한다고 하니까 손을 꼬옥 잡으면서 “훈민정음은 꼭 영화로 만들어야 합니다” 고 당부 하셨고 도올 김용옥 선생이라고 불교에도 해박하시고 기독교에도 해박하신 사상가 철학가인데 대학 교수님을 하실 때 제가 그 대학을 다녀서. 강의도 가끔 듣고 그랬는데. 왕의 남자란 영화가 2004년 5년에 했던 영화인데 그때 저희 회사에서 영화를 만들어서 제가 기획 작업을 했었고. 소재 선택도 제가 했었는데 그 인연으로 김용옥 선생님이 한 번 보자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서 얘기를 했는데 그때 그 분이 훈민정음을 영화로 해야하는 것 아니냐. 자기가 국내에 있는 많은 감독들을 알고 지내면서 그 얘기를 누차 해도 뭔 말인지를 잘 못알아듣더라. 그게 어떻게 영화가 되냐, 문자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얘기하면서. 저도 사실은 훈민정음을 언젠가는 영화화하겠다고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고 말씀 드렸더니 꼭 훈민정음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자 그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사모님께서 더군다나 훈민정음 전문가예요. 언어학자이신데 중국 계통의 홍무정운 이라고 명나라의 초대 황제인 주원장이 자기가 황제가 되었으니까 중국의 발음 체계를 다시 재정비하고 싶은 거예요. 북방의 오랑캐들이 원나라를 200년 정도 지배하면서 중국의 말이 다 북방쪽과 뒤섞여서 발음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걸 정리해야 한다. 고대 중국의 황제들은 자기가 황제가 되면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면 꼭 음운 체계 정리를 해요. 발음 정리를. 이것을 운서라고 하죠. 그게 조선에도 들어왔고요. 우리는 한자어를 상류계층, 학자층, 지식인계층에서는 거의 뭐. 일반 언어에서도 50퍼센트 이상의 한자를 쓰기 때문에 외교 문제 뭐 여러 가지 문제에서도 발음을 중국과 정확하게 일치된 발음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처음에는 김석연 교수님이 한글을 국제 공용 문자로 만들려고 유엔 유네스코와 노력해서 했던 과정 자체를 영화로 만들려고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서 훈민정음의 원리가 자연스럽게 드라마 속에 드러나게 되는 그런 영화를 하려고 했었다가, 고전적으로 하기위해 세종을 벤치마킹했던 정조, 정조가 재위 시절에 문자책문이라는 명령을 해요. 책문이라는 것이 지금 현직 관료로써 있는 거나. 과거의 마지막. 정책을 발표를 해서 현직 관료들을 시험하고 점수를 매겨서 승진시킬 사람 승진시키고 고과 점수에 적용하는 그런 제도인데 논문을 써라 이거죠. 문자에 대해서. 훈민정음에 대해서 논문을 써라 그 명령이었던 거예요. 거기에서 보면 제가 그걸 일일이 다 검색해서 찾아서 읽어봤는데. 규장각 신하들부터 시작해서 일반 신하들까지 다 왕의 명령이니까 하는데 그 책문들의 내용이 송나라 정초의 통서라는 아주 방대한 역사 입문서가 있어요. 그 안에 육서략이라는 챕터가 있어요. 글자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그리고 그 육서략 안에 칠음서라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서 음운을 어떻게 분석하는가 그 원리에 대해서. 정초가 그 책을 쓰면서 고백을 하기를 어떻게 고백을 하냐면 원래 사람의 목소리, 소리에 대한 분석 체계라든지 이런 원리는 우리 중국에는 없던 것이었다. 불경이 한나라 때 중국에 들어오면서 천축의 인도의 승려들이 불경을 중국 한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소리 글자인 산스크리트어를 뜻글자인 한자로 번역을 하다보니까 인도에 있는 성운학, 음운학 체계를 그 번역 과정에서 중국에 전수한 것이다. 그 기록이 다 나와요. 중국 사람들은 음운학이나 성운학이란 게 없었다.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훈민정음이 그러면 과연 어떤 원리를 채용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는가를 역사적으로 인도로 거슬러 가보면 베다 문학 시절에. 그 당시에 산스크리트어로 기록이 되겠지만. 베다 문학이라든지 그 시절의 전통이란 것은 암송. 구전이잖아요. 백만 송, 십만 송 해서 모든 걸 앞으로 외우고 뒤로도 외우고 거꾸로도 외우고 하는. 그 과정에서 음성에 대한 얘기가 발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B.C 5세기에 판인이라는 문법가가 산스크리트어의 언어학적인 모든 것을 다 정리했어요. 문법체계까지. 그리고 원나라는 라마승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던 왕조라. 파스파한테 명령을 합니다. 파스파가 만든 파스파 문자가 소리글자로써 한글 이전에 가장 진화된 문자예요. 그리고 티벳이 융성 할때 새로운 사상과 철학과 종교 체계를 받아들여야겠는데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자. 그러면 불경을 번역을 해야 하는데 문자가 없다. 그래서 역시 이 라마승한테 소리 글자를 만들라고 명령을 해서 만든 게 오늘 날 티베트 문자하고 파스파라는 원나라 때의 소리 글자는 불교 계통에서 오래된 문자입니다. 글자를 만들 때는. 산스크리트어의 칠음서라는 게 아설순치후 반설반치(?)라고 인간이 구강구조를 이용해서 만드는 소리를 분류해 놓은 거예요. 그게 인류 최초예요. 서양의 언어학은 산스크리트어 문법과 언어학 체계를 영국의 총독이 19세기인가, 18세기에 인도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인도에 와서 그걸 발견하고 세계 언어학회에 보고를 한 다음에 현대 세계 언어학이 형성이 된 거라고요. 문자학이나 언어학이나 이런 모든 것들의 뿌리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나 베다 문학, 불교 불경 이런 거 기록했던 그 쪽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인사에 팔만대장경 파크를 갔어요. 해인사 앞에 있는. 전구로 아시아 지도를 쫘악 그려놓고 대장경이 어떻게 해서 전파되었는가 그 과정을 붉은 전구로 파란 전구로 지도를 만들어놓고. 인도에서 티베트로, 티베트에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거란.여진으로 통해서 고려 통해서 일본까지 가는. 대장경 로드라고 해서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그것은 어찌 보면 정확하게 표음문자 로드, 소리 문자 로드 더라구요. 일본의 가나 글자도 심지어는 삼장 법사 현장께서 18년, 19년 동안 인도에 유학을 해서 산스크리트어 원전 불경을 가져와서 신역을 하는 과정 속에서 성명기학이라고 인간의 목소리를 명확하게 기록한 밝게 기록하는 기론. 성명 기론, 학문 이러한 것을 정리를 해놓은 게 있다고요. 그것을 신라나 백제를 통해서 불교를 전수받던 일본이 직접 당나라로 견당사 파견하고 해서 유학을 가서 불교를 배우고 장안에 가서 배우는 과정에서 성명기학을 배워와요. 산스크리어의 음운론이죠, 그것을 배워서 일본에 가서 나라의 동대사에 성명기학 아카데미를 세우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요. 그래서 그걸 기반으로 해서 가나 문자를 만들었다. 그게 굉장히 파워풀한 일본 문자 창제의 이론이에요. 산스크리트어가 오십자잖아요. 일본 가나 문자 정확히 50자예요. 순서까지도 아이우에오 모음 체계까지도 산스크리트어 모음 체계와 다 똑같고 물론 디자인은 좀 다른 문제고. 그런 어떤 여러 가지 정황이 이 영화가 잘 만들었다고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두 시간 반 되는 영화 속에 그런 것을 다 잡아 넣을 수는 없지만 그런 사전의 연구 결과라든지 그런 것을 참고해서 만들었습니다.
기자: 역사 왜곡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바르게 전달할 수 있는 면을 갖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네요.
감독: 왜곡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기존의 훈민정음이라는 것은 세종 대왕이 친히 혼자 만들었다. 집현전 학자들을 데리고. 집현전 학자들과 같이 만들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걸로 역사학회에서도, 언어학회, 국어학회에서도 근거가 없는 걸로 요즘. 왜 그러냐면...
훈민정음 서문에 (실제로 이 영화에도 기본 설정이 그렇게 되어 있지만 이거는 비밀 프로젝트였다라는 것이 영화하는 사람으로써도 굉장히 흥미롭거든요.) 한 나라의 국왕이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데 왜 비밀리에 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 비밀의 핵심이 과연 무엇이냐. 최만리의 상소문을 근거로 해서 중국한테 들키면 안되니까? 말이 안된다고 생각을 해요. 중국이, 제국의 황제가 조선 같은 나라에서 자기 나라 문자 만들어서 쓰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다른 나라들 다 쓰는데. 오히려 그것보다는 최만리의 중국과의 외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핑계고 기득권을 갖고 있는 자가, 사대부 세력들이 국왕한테 압박을 주기 위한 문자 권력이라는 것이 고대 사회에서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는데 그리고 우리는 그걸 프라이드로 삼고 만든 왕조인데 중화 문명을 우리 조선에다 이식시켜서 문명 국가로써의 나라를 건설하자고 약속하고 만든 거 아니냐. 유교 철학에 기반해서. 그런데 왜 그런 말도 안돼는 이상한 쓰레기 같은 문자를 만들려고 하냐. 그것이 기본이고 그것에 대한 중화 문명의 배경을 갖고 왕을 압박하기 위해서 중국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는 근거가 없어요. 일본이고 거란, 여진, 티베트 다른 나라들 다 자기 문자가 있는데. 세종조 때를 기준으로 해서 제대로 된 나라가 문자가 없는 나라가 조선밖에 없는 거예요. 이거 얼마나 이상한 것이냐고요. 그래서 비밀의 핵심이 무엇인가가 영화하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흥미로운 거예요. 정사의 기록에 세종이 학승들과 같이 특히 신미라는 학승과 같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정사에 없어요. 확신하지는 못하는데 정황상 비밀의 핵심이 혹시 유교 국가의 임금이 해서는 안될 행위를 하기 때문에 형성되지 않았나. 그게 나는 영화적으로 극적으로 서사적으로 훨씬 더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기자: 한글이 창제되고 처음 나온 책이라고 표현해도 되나 모르겠어요.
감독: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게 있는데 훈민정음해례본이에요. 훈민정음해례본은 정사의 기록과 맞물려 있습니다. 정사의 기록입니다. 1446년 9월 30일자 조선 왕조 실록에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 날을 우리는 한글날로 쓰고 있어요. 음력이니까 양력으로 계산해서. 그것이 반포라는 말은 단 한 글자도 없어요, 거기에. 그냥 현대 학자들이나 관료들이 그것이 반포가 아니겠느냐. 훈민정음해례본이라는 책이 완성됐다라는 기록이. 세종실록의 편수책임자는 정인지니까 정인지 말이라고 봐도 되요, 거기에 뭐라고 하냐면 훈민정음해례본에 쓰기를 어제 왈 임금이 제정했다 라는 문장에서 말하기를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국지어음이 이호중국하야.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 썼어요. 그리고 '가'는, '기역'은 군자 초발성이니 이거 한자로 다 표현한 거예요. 그야말로 훈민정음의 취지, 그리고 자모 28자의 발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합자해서 쓸 것인가. 그리고 사성체계. 평성거성사성입성. 이거를 세종이 이렇게 얘기했다. 이거는 왕이 했으니까 니들이 불만이 있어도 지우지 못하는 거지. 거기까지만 해례본에 조선왕조실록에 정인지가 편집을 해놓은 거예요. 그 뒤에 계속 나가잖아요. 그거는 훈민정음이 완성된 다음에 집현전 학자들한테 자료를 주면서 니들이 이거 정리해서 백성들한테 그리고 사대부들한테 보급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어라 해서 그 이후로는 자기들이 정리했다. 그 동안 연구 결과를 참고해서. 그렇지만 우리는 이 원리나 체계의 오묘하고 깊은 뜻은 전혀 모른다. 이렇게 얘기를 했잖아요.
어제 왈, 세종이 이 책을 만들면서 직접 했다라는 그 말이 거의 여덟 페이지예요. 해례본이 표지까지 해서 66쪽인데 옛날에 조선에 제책 시스템 자체가 한지 한 장에 목판으로 찍어서. 뭐 금속활자도 있지만. 찍은 후 그걸 접어서 제본을 해서 책으로 만들잖아요. 훈민정음해례본은 서른 세 장의 한지에다 찍은 책이예요. 그래서 이게 접으니까 표지까지 하면 66장인 거죠. 그러니까 이 33장이란 것은 욕계의, 도리천의 33천을 얘기하는 거죠.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 훈민정음해례본 조차도...정사에 나온 기록이잖아요, 훈민정음해례본은. 얼마나 불가적인가를 설명하려고 해요. 서른 세장의 한지로 만드는데 세종이 직접 말씀했다라는 어제왈 부분에 그것이 33장, 66쪽 중에 8페이지. 8페이지에 걸쳐서 그게 나오는데 거기에서 반복되는 한자를 빼면 그게 정확하게 108자예요. 방금 전화하신 정진홍(?) 교수님이 월인석보 전문가 박사이신데 정진홍 교수님 연구에 의하면 월인석보 1권에 108자... 이것도 236페이지 108장의 한지에다 찍은 책이예요. 1권이 상징적으로.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28자라는 것을 왜 맞췄을까. 29자도 될 수 있고, 30자도 될 수가 있고. 그것도 다 불교의 법수라거나 천문학적인 전통과 관련이 있지만 나는 앞으로도 33장의 한지로 만든 불과 66쪽의 훈민정음해례본 안에도. 훈민정음 코드라고 해보자고요, 다빈치 코드같이. 발굴된 코드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특히 불교 관련한 것으로.
기자: 한글창제에 천. 지. 인이 들어 있다는데요.
감독: 천지인이란 말을 세종은 한 적이 없어요.
기자: 아, 그래요?
감독: 네.
기자: 그럼, 그건 유교학자들이...
감독: 그건 유교의 언어예요. 음양오행에 관련되거나 삼재에 관련되거나 이런 것들은. 영화 속에서 나오지만 정인지가 얘기하는 말 중에 후서를 집현전 학자들에게 쓰게 하잖아요. 영화에서 세종이 그러잖아요. “너희 유가들의 말로 정리해라.” 세종이 천지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어느 기록에도. 그렇게 보면. 훈민정음해례본 중에 집현전 학자들이 유가의 언어로 정리한 그 내용으로 거기에 그게 나오는 거예요.
기자: 그래서 모음에서 만들어진 점이나 ‘으’ 할 때 그것이...
감독: 천지인이다.
기자: 그렇게 한 것은 만들어진 걸 가지고 유가적 입장에서 해석을 해서라는 것이네요.
감독: 제가 그렇게 해석을 해요. 나는 그게 훨씬 더 현대적이다, 해석이. 더 논리적이고. 한글이 만들어진 천지인이라는 그거는 사상 가치 체계 속에서 할 수 있는 얘기지 직접 디자인하는 사람 입장에서 그거는 고려의 대상이 안돼요. 만약에 내가 20세기에 이 영화를 만들었으면 저도 천지인이라는 말을 썼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21세기에 영화를 만든 거예요. 그러면 알고리즘이라는 게. 무슨 일을 할 때 기본 논리를 세우고 뭐하고 하는 것들과 관련성 속에서 과거의 사람이지만 내가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신경썼던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세종이란 사람과 신미라는 사람이 얼마나 논리적인 체계를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인가. 그것이 문자라 하더라도.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이거 또 갑자기 얘기가 튀는 것 같은데. 세종은 뭐 한 게 없지 않냐. 신미가 다 한 거 아니냐. 그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세종은 신미가 알고 있는 산스크리트어를 배경으로 한 음운학적 원리 그리고 그것이 중국에 전달돼서 중국의 운서에 있는 것도 저는 다 공부했다고 봐요, 세종은. 중국에 나와 있는 운서를. 공부 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그렇지만 그 오리지널은. 아무리 음운학적인 원리가 중국에 적용이 됐다 하더라도 이건 뜻글자이기 때문에 소리 글자로부터 파생된 음운원리라든지 소리글자에 적용되는 음운 원리에 대해서는 약간 또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오리지널한 산스크리트어. 소리글자의 음운학. 문자를 만들기 위해 필수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는 소리글자를 만들려고 하니까. 소리글자의 음운학을 중국의 음운학의 오리지널인 더더군다나. 이것을 신미대사가 전문가로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나는 배워서 아니면 같이 이용해서 이 문자를 만들었다고 얘기하는 것이 과연 그렇게 왜곡인가.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거나 분석할 때 정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해서 없는 건 아니잖아요.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들이 사실 어떤 사건들을 선택해서 그것을 해석해서 기록하는 것이 역사 아닙니까. 선택할 때부터 벌써 여러 가지 정황이 들어가고 빠진 것도 있고. 선택한 기록을 해석하는 방식도 또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는 건데 이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기 사관에 의해서 해석을 하잖아요. 그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잖아요. 그러면 선택되지 않은 자료,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석되지 않은 내용이. 훨씬 더 많을 거라고요.
기자: 조선 왕조 실록에 보면 사관들은 왕이 회의를 하다가 화장실을 갔다 그것까지도 쓰고 또 사관도 혼자가 아니라 둘이 했다는 것은 잘못 쓸까봐. 그랬다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한글 창제하는 것은 세종 대왕께서 다 알려놓고 하지 않고 거의 정사 시간 외의 시간에 가족끼리 했다 그런 면에서는 아무리 왕조실록이 사실을 근거하려고 했다 하더라도 세종대왕께서 하루를 사시는 것에 신하들과 같이... 집현전 학자들과 했다 라고 표현은 되어 있나요? 그런데 정말 집현전 학자들과 했다면 왕조 실록에도 사관이 정확하게 많이 썼을 거 아니예요.
감독: 집현전 학자들과 한 것은 완성을 해놓고 보급을 하기 위한 책을 만드는 작업을 집현전 학자들과 했습니다.
기자: 그러니까 그 전의 것은 나타나있지 않군요.
감독: 예, 없어요. 그리고 한자를 표기하기 위해서 이미 우리의 말에 개념어나 학술어나 사상어나 상층부들이 쓰고 있는 여러 가지 언어가 한자어 투성이니까 50프로 이상이 한자어니까 우리 언어 속에 말속에 들어와 있는 한자를 표기하려면 그 한자를 어떻게 이 새로운 문자로 표기하는가를 발음서를 만들어야 할 것 아니예요, 그 운서를. 동국정운을 만들기 위해서 운서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말을 많이 쓰고 글자를 마음대로 쓰니까 그게 별로 중요한 것 같지가 않지만 그런 것까지 필요하냐, 배워서 쓰면 되지 하지만 처음으로 없는 문자를 만들어서 그것을 퍼뜨리고 하려면 그 사전이란 게 반드시 필요한 거예요. 발음기호 사전이라는 게. 운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훈민정음 관련된 운서. 중국어 표기를 하기 위한 발음 표기를 위한 운서를 만들기 위해서 동국정운이란 책을. 위대한 책 아닙니까집현전의 소장학자들을 동원했다. 8명. 정인지 이하 나머지. 그때 동원된 집현전 학자들의 나이가 다 20대. 많아야 30대. 47년 동국정운이 발표될 때 많아야 서른 살, 스물 몇 살짜리 들이예요. 이제 과거 합격해서 온 지 얼마 안돼는 얘들. 그들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기자: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감독: 한 나라의 제왕이 문자를 제정하고 일을 하잖아요. 일을 하는데. 자기가 쓰고 디자인하고. 이게 할 짓입니까. 그것은 일하는 방식이 아니죠. 명령하고 원칙을 세우고 동원할 것 동원하고 조직을 해주고. 취지를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라 이걸 하는 게 국왕의 역할인 거지, 그럼 옛날에 그 전에 세종이 만들었던 그 많은 책은 본인이 논에 가서 인터뷰하고 농사직설 만들고 산에 가서 풀 뜯고 해서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사람 찔러보고 해서 만들고 연주해서 소리 들어 보고. 저기 남양만 가서 옥 산출해서 이게 좋은 옥 같다 해서 만들어보고 해서 자기가 편경, 편종 만들고 해서 음악을 정비하고. 이게 제왕이 할 일이 아니잖아요.
기자: 민주국가의 대통령은 할 수 있는 일이 더 한정적이지만 마음 먹는 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감독: 왕조시대와 민주사회하고 좀 다를 수도 있지만 국가적인 일을 할 때의 방식이란 것은 그렇게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아요. 예를 들어 경부 고속도로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하잖아요.
기자: 그런데 그 분이 도로에 가서 직접 길을 놓은 것은 아니지요...
감독: 초고속 인터넷망 누가 깔았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깔았다고 그러잖아요.
기자: 그렇게 말을 하죠.
감독: 가족들과만 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기자: 한계가 있죠.
감독: 문자라는 것은 음성 분석을 해야 해요. 일단은. 자기가 통치하고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구강구조를 통해서 나오는 수많은 사운드를 분석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칠음(?) 체계로. 그런 작업들이나 뭐나 이것을 가족들하고 골방에 앉아서.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집단 지성이 동원되어야만 그때 그렇다면 유가의 집단 지성이 아니고 뭐냐.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학자들은 불가의 집단 지성이 여전히 아주 수준 높게 유지되고 있는.
기자: 그렇죠. 고려의 문화를 이룬 것은 불교니까요.
감독: 신라 때부터 천 년 이상을 축적된 엄청난 학문 체계가 있잖습니까. 폭넓고. 대각국사 의천이라든지 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속장경에 목록 같은 걸 보면. 지금 컴퓨터가 있어도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그리고 아까 제가 사극을 많이 했다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신미 스님과 관련되서 더 충격적이었던 것이 신미 스님도 중요하지만 제가 이 영화를 만들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위대한 창작물. 그것이 문자든 뭐든 이게 하루 아침에 무에서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면면이 흘러오는 수많은 것들의 누적과 축적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지 그래서 그 면면히 흘러온 것은 도대체 어디서 흘러온 것인가. 나는 그것을 팔만대장경이라고 봤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현장 법사의 성명기론이라든지 산스크리트어의 음운체계에 대한 설명이라든지. 팔만대장경에 다 있어요. 경판으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을 저는 팔만대장경과 훈민정음이라고 생각을 해요. 영화의 서사적인 면이 매력적이고 가장 흥분되는 일이었어요. 따로 따로 있는 것 같은 저 두 위대한 문화유산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 라는. 그것을 세종과 신미의 만남으로 본 거예요. 그리고 예를 들어 신미가 지엄한 국왕 앞에서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냐. 말도 안돼는 거 아니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고 지성인들의 만남이예요. 그리고 세종의 가장 위대한 특징이 뭐냐면 저는 책을 많이 읽는 독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미도 그에 못지않고. 그들의 사연 구조를 영화에 다 밝혀 놨어요. 신미는 세종의 가문에 의해서 몰락한 집안이예요, 어찌 됐건 간에. 역적이라는 극한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실제로는 역적은 아니지만 강상죄를 범했으니까. 충과 효를 지키지 않은 조선 시대의 가장 국시에 관련된 거를 범했으니까. 조선 사회에서는 출세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낙인을 찍혀 버린 거라고. 몰락했잖아요, 실제로. 그래서 불가에 의탁을 한 거고. 그런 사람이 세종이라는. 왕이지만 자기 집안을 이렇게 만든 그리고 자기를. 십대 때 성균관 유생이면 천재 아닙니까. 자기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부탁을 해요, 그래서 세종을 떠보고 시험해보고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내 집안을 이렇게 만드냐는. 인간적인 그런 호승심과. 영화적인 개연성의 캐릭터 구축 방법에서는 그렇게 큰 무리가 아니라고 봤어요. 만날 때부터 기싸움하고. 서로 반목하고. 완성의 직전에 또 한 번 의견 충돌을 하고. 또 완성해놓고 보급하는 과정에 대한 방법론으로 의견 충돌을 해서 관계가 깨져버리고. 와이프 죽어서 겨우 그것을 봉합해서 나중에 그 왕비 죽음을 기리는 그 행사를 훈민정음을 보급하는 불씨를 살리는계기로 삼는 것!
기자: 감독님의 관점이십니까.
감독: 제 관점이기도 하지만 역사의 흐름이.
기자: 역사의 흐름이 있습니까.
감독: 훈민정음의 흐름이 불가를 통해서. 그 이후에 간경도감에서 불경언해작업을 계속 세조 때까지 해서 했고 또 여자들이 그것을 계속 씀으로 해서 서체도 개발하고 해서 그것이 사장되지 않고 그 흐름이 밑으로 흘러가면서 그게 조선 후기에 와서 성경 번역이란 걸 통해서 폭발적으로 대중화되고 독립신문 이렇게 해서 식민지 시대 지나면서 자유당 정권 때 와서. 그런데 이게 참 아이러니한 게 유교와 불교가 만나서 만든 건데 근대의 훈민정음 대중화의 결정적 작업을 기독교가 했다 는 거예요.
기자: 성경이 한글로 번역하는 것에는 한자어에서 온 것보다 영어에서 왔기에 대중화에 앞섰던 것 아닐까요.
감독: 그렇게 볼 수 있지요. 영화에서 아쉬운 것은 다 찍어놓고 보니 2시간 45분 되더라구요. 1시간 50분 정도 압축을 했는데. 좀 긴 버전으로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짧게 압축한 것이 아쉽습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라든지 석보상절을 번역하는 과정도 그 안에 들어가 있어요. 세종이 의외로. 이것은 학자들이 해야 할 영역 같은데. 조선의 제4대 국왕이. 왜 불교에 그렇게 자기가 지은 책 안에도 그렇게 불교 법수 같은 것을 남겨 놓고 그랬을까. 만약에 세종이 남겨놨다면, 세종의 명으로 남겨 놨다면 세종은 왜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세종은 재위 말기에 굉장히 불교에 경도됐다. 심정적으로. 실제적으로. 그럼 불교에 경도되면 세종이 혼자 책 읽고 위대하구나 이거 해야겠구나 이렇게 한 게 아니라 그거를 전수해준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맞장구를 쳐주고. 모르는 것 가르쳐주고. 금강경 삼가해, 오가해 읽었다는 기록이 다 있잖습니까. 능엄경도 읽었고. 그렇지 않다면 훈민정음과 관련해서도 불교와 관련해서도 누군가 있었다. 이 둘 중에 하나잖아요. 훈민정음 해례본에 보면 끝이 꼭 결로 끝나잖아요. 우리 게송하듯이 마치. 한 구절 하고 뭐 한 구절하고. 서적 자체 편집 체계가 불가적이라는 거죠. 물론 신숙주나 소장학자들이지만, 거기 참여한. 핵심은 정인지거든요. 신숙주는 워낙 집안에 불가세력이 강하잖아요. 자기 아버지도 그렇고. 그렇다 친다 하더라도. 발언권이 없잖아요, 어려서. 그 책을 편집할 때만 해도. 서른 살도 안된 사람인데. 하여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갈 게 아니다, 이게. 내가 봤을 때는. 앞으로 학자들이나. 상황이 허락이 되면. 세종과 불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요. 불교 방송하고. 다빈치 코드와 같은 훈민정음 코드를 다 분석해보고.
기자: 그때는 영어로 번역해서 널리 알리는 것도 좋겠습니다.
감독: 우리 한글의 문자의 더 기적같은 디자인은 모음에 있습니다. 훈민정음이 위대하다는 것은 그 원리가 위대한 게 아니예요. 원리는 다 있어요. 인도에서부터. 수천년 전부터. 그 원리를 이용해서 한 디자인에 있는 거예요. 융합적 마인드. 요즘 21세기 융합, 융합 하잖아요. 그 디자인이 위대한 거지. 원리는 이미 있어서 빌려온 거라고요. 그런 관점에서 디자인하는 과정을 아주 핵심적인 것만 보여주고 말았는데 조금 더 보여주고 왜 그렇게,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 뿌리가 뭔가. 아까 말했듯이 이건 세종이 한 게 맞다. 왜. 그가 재위기간에 그 어려움을 거치고 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시나리오를 세웠어요. 신미가 세종이 뭔지 모르지만 잘 풀리지 않는 원리의 어떤 부분을 보충해줬다. 산스크리트어의 체계를 통해서. 표의 문자의 체계를 통해서 보충해주고 세종이 그 원리를 가지고 문자 디자인 원칙을 만들었다. 원칙은 나는 세종이 세웠다고. 이 일의 전체 원칙을. 쉬워야 한다. 디자인이 간단명료해야 한다. 누구나 한 눈에 다 들어와야 한다. 언제 일하는 사람들이 그걸 길게 배워서 쓰겠냐. 한자 10년 해도 되지도 않는 걸. 한 나절, 길어도 일주일 안에 다 배워서 쓸 수 있게끔. 10일 안에. 이 원칙은 세종이 세운 거예요. 그의 정치 철학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을 신미는 끝까지 지켰어요. 모음을 만들 때도 오기가 발생하잖아요. 지난 번 자음 만들 때 자기가 좀 밀린 거 같은 거예요, 세종한테. 구강구조 어떻게 해서. 내가 모음할 때. 보여줄게. 점 하나로 끝내 버릴려고 한 거예요. 안돼는 거야, 이게. 에이, 작대기 하나만 더 쓰자. 그것은 천장 보고 하는 게 아니라 그건 영화적 표현일 뿐이고 세종이 세운 정확한 원칙이에요. 점과 직선으로만 만든다. 영화 속에도 나오잖아요. 새 문자는 점과 직선으로만 만든다. 그런데 거기에 돌연변이처럼 어린 승려가 동그라미를 하나 넣은 거예요. 이 동그라미는 극한의 곡선이라 직선도 아니고 곡선도 아닌 이상한. 만약에 우리 문자 디자인에 이 동그라미가 없었다면 눈이 피로해서 볼 수가 없어요.
기자: 그리고 소리를 어떻게 다 표현할 거예요?
감독: 그리고 합작한 과정 또 그것을 보급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 이런 것도 세종이 철저히 리드를 하고 신미가 보좌를 하고 지켜주고 해서 만든 거 아니예요. 마지막에 회향을 하잖아요. 그리고 신미는 이것은 전하께서 주상이 만든 팔만대장경 같은 것이다 라고. 공손하게 합장까지 하면서.
기자: 감독님은 누구십니까.
감독: 하하하. 영화하는 사람이예요. 훌륭한 문화유산을 다시 살아나게 하기위해 과정을 영화로 만들고 싶은 영화 하는 사람입니다.
장소: 명상의집 자애
일시: 2019년 10월 30일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