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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王의 모습으로
----박남철의 시세계
너희들 중에 그 누구가 웃으면서 동시에 높아 질 수 있겠는가?
가장 높은 산에 오르는 자는 장난 비극이나 정말 비극을 넘어서 모두 웃는 것이다.
냉담하고 조소적이고 난폭하고---- 지혜는 우리더러 그렇게 되라고 한다. 지혜는 여자로서,
항상 투사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게 말한다. “삶은 견디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희가 무엇 때문에 아침
에는 긍지를 갖고 저녁에는 체념을 해야 되겠느
냐?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반 경 환
박남철은 그의 첫 시집 {地上의 人間}을 통하여 “진실과 현실 사이에 시는존재하는가”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 바가 있었다. 진실과 현실 사이에 시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것은 그 질문이 시의존재론적 기반을 관통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인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 것인가라는 문제에 까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박낙철 시인의 질문은 단 하나의 해답이 주어질 수 없는 질문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순간의 外道도 허용되지 않고 있는 일생 일대의 탐구적인 주제가 되고 있는 질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이 세상에 나아갈 때, 과감하게 전투적인 정신으로 첫 걸음을 내딛어야 하듯이, 그것은 그의 출정식 날의 話頭이고, 위대한 시인으로서의 숙명적인 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다소 논리적인 비약이 될는지도 모르지만, 그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로서 수직 상승하면서 그의 시세계에 다양성과 통일성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첫 시집 {地上의 人間}(문학과 지성사, 1984), 두번째 시집 {반시대적 고찰}(한겨례출판사, 1988), 세번째 시집 {용의 모습으로}(청하, 1990), 네번째 시집 {러시아집 稗說}(청하, 1991), 그리고 다섯번째 시집 {자본에 살어리랏다}(창작과비펑사, 1997)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제는 더욱 더 심화되고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박남철 시인의 [詩人의 집, 뒤]를 살펴보기로 하자.
새벽에 잠들어 오후에 깨는
나는 詩라는 이름의 病 앓는 사람
오래간만에 하늘이 내려 준 축복에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다
꿈 속에 어느 눈 덮인 山莊에서 舊約을 읽고 있노라니
에이프런을 두른 하얀 소녀가
양고기를 튀겨
들고 나왔다
자, 드세요... 세요... 요... 오
배가 고파 잠을 깨니,
앞집 지붕은 그대로 허연대
하숙집 마당은 싹 치워져 콘크리이트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담배를 사려고 대문을 나서니 골목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
역시, 너무 詩的인 것은, 거부당하는 이 생활의 공간이여
먼산의 눈이 아름답고
敵이 아닌 猶太人이 위대한 것
都市의 눈은 백해 무익하다는
도시공학도의 말이
생각났다
---- ([詩人의 집 뒤]--진실과 현실사이에 詩는 존재하는가])
진실과 현실 사이에 시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속에 아름답게 묘사된 [詩人의 집, 뒤]를 산문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설명을 할 수가 있을 것같다. 밤새 눈이 하얗게 내렸고, 나는 오래간만에 하늘이 내려 준 축복 속에서 행복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나는 詩라는 이름의 病을 앓는 사람이며, 그 꿈 속에서 舊約을 읽고 있노라니, 에이프런을 두른 하얀 소녀가 양고기를 튀겨 들고 나왔다; 하지만 배가 고파서 잠을 깨어보니 앞집 지붕은 그대로 허연데, 하숙집 마당은 싹 치워져 콘크리이트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담배를 사려고 대문을 나서니 골목이 홍해처럼----하나님의 이적처럼----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시인은 역시, 너무 詩的인 것은 거부당하는 생활 공간을 탄식하게 되고, “먼산의 눈이 아름답고/ 敵이 아닌 猶太人이 위대”하다는 사실과 함게, “都市의 눈은 백해 무익하다는/ 도시공학도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詩人의 집, 뒤]는 진실과 현실의 대립 사이에서 진실(시)이 배척되고 현실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는 시이며, 이상한 역설같지만, 그 깨달음을 통해서 한국시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의 탄생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새로운 신인의 뛰어난 감수성과 자유분방한 상상력, 그리고 지적인 민감성으로 무장되어 있는 위트와 극적인 구조----꿈과 현실, 혹은 진실과 현실 사이의 반전----가 돋보이는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없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진실과 현실 사이에 시는 존재하는가? 사이버 공간에서의 가상 섹스의 시대가 열리고, 유전자 공학에 의한 복제 양의 탄생과 함께, 전지전능한 인공지능의 시대가 현실화되어가고 있는 오늘날, 그러나 아직도 박남철 시인의 질문은 해명되지를 않고 있고, 그 질문에 대한 해명은 여전히 요원한 과제인 것처럼도 보인다. 더럽고 추하고 속된 현실은 시인의옷깃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진실 따위는 아무런 효용 가치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없이 고귀하고 순결한 시인의 영혼은 현실의 손길을 뿌리치면서, 이 세상의 실존적 근거가 되어주고 있는 물질적인 유혹마저도 뿌리쳐 버린다. 시인은 철저하게 고독하고 더욱 더 가난해야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어중이 떠중이들은 이 세상의 모든 사교 무대를 풍미하면서 우리 시인들의 고독을 경멸해야 하고, 더욱 더 권력의 지렛대인 돈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시인은 고독하고 또 고독하게 살아감으로써 최고급의 인간들----호머, 아이스퀼로스, 괴테, 셰익스피어, 보들레르, 랭보, 이상, 김수영 등---과도 사귈 수가 있고, 또한 더욱 더 가난하게 살아감으로써 무소유의 기쁨을 향유할 수가 있다. 위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어중이 떠중이들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과 사귀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또한 더욱 더 많은 돈을 소유함으로써 그만큼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진실과 현실 사이의 이 대립이 근본적인 대립이며, 시인과 일상 생활인들과의 메꿀 수 없는 간극이 된다. 이 간극을 섣불리 메우려고 드는 자는 천박한 변증법의 신봉자이거나 중용의 미덕을 내세운 절충주의자, 아니, 더욱 더 나쁘게 말한다면, 저 교활하고 간사한 타협론자에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김수영과 니체가 역설한 바가 있듯이, 시와 예술의 영역에서는 어떠한 도피처나 타협이 허용되지를 않는다. 그가 만일, 참된 시인이라면, 저 머나 먼 유토피아 때문에 천 길의 벼랑 끝을 기어 올라가야만 하고,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는 심연의 깊이 때문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그가 만일, 참된 시인이라면,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더 이상, 현실과의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내 앞발에 박힌
이 깊숙한 가시를
핥다가 나는 이따금
부릅뜬 눈을 들어, 핥
야 이 개새애끼들아
내 머리, 오 이 구름같은 불
내 머리 내 이 머리에 온통 뒤덮인
이 저주받은 이 성난 갈기, 핥
야 이 개애자식들아아아 ---- ([獅子]-- 모교의 교정에서] 전문
미셸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권력은 억압의 도구일 뿐만이 아니라 생산의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권력은 학교, 군대, 공장, 병원 등의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우리 인간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며, 전면적인 관리 체계를 생산해낸다. 이러한 전면적인 관리 체계는 학생, 군인, 노동자, 환자는 물론, 심지어는 교사, 장교, 공장장, 의사 등도 상호 감시되고 관리되는 메카니즘을 창출해낼 뿐이다. 그 결과, 현대 사회의 전면적인 관리 체계는 합리주의적인 야만을 낳았으며, ‘이성의 기술화’, 혹은 ‘기술의 사회화’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을 억압하고 말살시켰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권력이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권력을 위해서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물리적인 힘의 반대 반향에서, 권력이 행사되고 있는 자장이며, 전면적인 관리 체계는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조직되고 변모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박남철 시인이 [獅子]라는 시를 통해서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 시인의 발에는 깊숙히 가시가 박혀 있는 것이며, 왜, 또한 시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엄청난 분노를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일까? 왜 시인은 그의 상처를 핥다 말고 “야 이 개애새끼들아아”하고 욕을 하고 있는 것이며, 왜, 또한 시인은 “저주”받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내 머리, 오 이 구름같은 불”에서처럼, “성난 갈기”를 곧추 세우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도 없이 전면적인 관리 체계, 혹은 문화적 함정(지배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진 것에 대한 분노이며, 정당방어 차원에서의 조건반사적인 대응의 몸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박남철 시인의 [박수부대]를 살펴보면, 초 중고등학교, 대학, 그리고 열혈 청년들의 집단인 군대에 이르기까지, 20여년 동안 ‘박수’치는 법만을 배웠다는 사실이 아주 날카롭게 나타나 있다. 주체성도 없고 독창성도 없는 문화적 함정(지배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져서 ‘박수부대’의 일원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자의 비애가 이처럼 분노하는 사자의 공격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백수의 왕인 사자에게 날개 아닌 족쇄를 채워주고 있는 자는 누구이며, 시적인 진실을 쫓아서 帝王의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시인에게, 또한 날개 아닌 족쇄를 채워주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제 시인에게는 스승과 부모 형제도 필요가 없고, 사제나 친구도 필요가 없다. 또한 시인에게는 예언자나 의사도 필요가 없고, 어떠한 감언이설이나 화해의 제스처도 필요가 없다. 신성모독적인 입장에서, 득죄의 수련을 쌓고 있는 [맏아들의 기도]나 “나 이 호로자식 같은 놈은 문둥이 엄마가 원망스러워 매일 밤 울고 울고/ 故 클레오파트라女王의 젖가슴을 그리워한다”는 [제목이 없는 大字報]를 생각해보더라도, 그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온몸의 땀과 피와 불굴의 용기일 뿐이다. 박남철의 [獅子]는 유토피아로 향한 열망과 심연에의 두려움이 다 같이 겹쳐져 있다. 분노는 현실의 멱살을 움켜쥔 채 광기로 나타나고, 두려움은 천 길의 벼랑 끝에 매달려서 추락에의 공포로 나타난다. 진실된 자, 정직한 자는 시대 정신의 체현자가 아니라 영원한 투사이다. 그는반 시대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미래의 비전을 끌어내린다. 그는 현실의 압력 속에서 질식해 가지만, 죽음의 끝에서 불멸의 시인으로 되살아난다. 시를 창조하는 자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언제나 청춘인 것이다. 박남철의 시는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애송시’로 수직 상승하게 된다. 진실되지 못한 자, 정직하지 못한 자에게는 그의 방법적인 비판과 부정 정신이 치명적인 독이 되겠지만, 사자나 독수리처럼, 帝王의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에게는 천세불변의 교훈이 될 것이다.
초 중고등학교와 대학은 물론, 열혈 청년들의 집단인 군대 생활을 통하여, 오직 20여년 동안 박수치는 법만을 배웠다는 [박수부대], 사랑하는 여인과의정사를 꿈꾸었던 [情事, 79年], 아내와의 [이혼], 20세기 말의 핏빛 일몰이 보인다는 [자본에 살어리랏다], 어느 덧 술래 차원으로만 전락한 삶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는 [못 찾겠다 꾀꼬리], 부모 형제지간의 불화를 노래하고 있는 [우리 집, 아니 남의 집 얘기], 광주의 역사적 비극을 노래한 [세월이여, 시간이여, 역사여, 광주여], 구 시대의 독자놈들을 길들이고 있는 [독자놈들 길들이기], 한국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일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을 희화화한 [권투], 지나치게 인습적이고 획일화되어 있는 종교와 윤리를 풍자한 [맏아들의 기도], 자기 위악적인 삶을 드러내고 있는 [天報之], 외세와 분단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는 [해미르], 세대 교체가 안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노망든 늙은이들----정객들, 기업주들, 할아버지들, 아버지들----의 행태를 야유하고 풍자한 [광인일지] 등, 그의 분노의 원인은 단순하지도 않고, 그만큼 다종 다양한 원인과 배경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과 현실 사이의 대립이 화해할 수 없는 양극단인 것처럼, 그의 분노의 파장은 자기 자신의 실존적 근거를 뿌리 채 뽑아버리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외적 구조물들을허물어버린다. 예컨대, 초기 시인
저 저 저 저 저, 으쩌
저런 늙은 놈 좀 보게
오입이 안 될 나이니까 이젠 원 별
소리도 다 하나 봐
쩌 쩌 쩌 쩌 쩌, 더 쳐라, 원 별
별 X지 껌 씹는 소릴 다 하네
라는, [광인일지]를 살펴보고, 또한 최근의 시인
다들 어디에 숨어 있니 사랑들아
빌딩나무 뒤에 숨어서들 웃고 있니
자본과 이자꽃 뒤에 숨어 있니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개꼬리
사십년 가까이 오직 술래만을 했더니
라는, [못 찾겠다 꾀꼬리]를 살펴보라. “오입이 안 될 나이니까” “별 보지 껌 씹는 소리”를 다 하는 늙은이들을 대할 때에도 그의 분노는 나타나고, “자본과 이자꽃 뒤에 숨어” 있는 자들을 찾아서 40여년 동안 “오직 술래만을” 하고 있는 불공정한 현실을 대할 때에도 그의 분노는 나타난다. 분노는 이성적 사유의 소산이 아닌, 비 이성적인 감정의 소산이다. 이러한 전면적이고도 총체적인 비판과 부정 정신이 그의 형태 파괴의 요체가 되어주면서, 그만큼 대단한 충격과 반향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광기는 분노의 감정이 정교하고 세련되게 양식화된 것이며, 뛰어난 시인은 광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의 광기는 사회적인 모순과 새로운 사실를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것이고, 그에게서 광기를 제거한다는 것은 그의 뛰어난 천재성과 함께, 리얼리티, 혹은 모더니티를 제거하는 일이 될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의 도덕군자나 보수주의자들은 낡은 것을 숭배하고 새로운 것을 배척하겠지만, 모든 전위주의자들은 기존의 도덕 가치와 인습과 문화와 전통까지도 모조리 뒤흔들어 버린다. 한국 사회는 서구의 전위주의까지도 대학 제도의 심장부에서 매우 합리적으로 베껴먹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것과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하는 진정한 전위주의자들을 무한히 탄압하고 배척하고 있는 이중의 과오를 범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가짜 전위주의자들의 부흥집회 장소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편한 사회일 뿐이다.
박남철의 시는 [詩人의 집, 뒤]의 전통적인 서정시에서부터, 패러디 아닌, 메타적인 형태를 띤 비평시들, 그리고 띄어쓰기를 무시한 [제목이 없는 大字報] 등의 반 서정시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형식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소, 조롱, 냉소, 야유도 벼랑 끝에 몰린 자의 감정의 소산이며, 속어, 비어, 사투리, 욕설까지도 벼랑 끝에 몰린 자의 감정의 소산이다. 띄어쓰기를 무시한줄글이나 거꾸로 된 활자도 그렇고,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는 시들도 그렇다. 그 분노의 감정의 이면에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따뜻한 애정이 깃들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들이 메마르고, 음산하며, 살벌한 감정들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명태야......
명태야......
아니, 병태야......
반항을 하려거든 똑바로 해라......
왜 애꿎은 나를 보고 자꾸 그러지이......
니 친구 동태보고 그러든지, 아니면
니 작은 황태보고 그러든지......
(북어보고 그러든지)
병태야아,
병태야아,
네 이, 생떼야아......
(네 이, 대가리에 피도 채 안 마른 놈아......)
----[명태에게] 전문
박남철 시인이 바라보는 ‘명태’는 반항도 한번 제대로 못한 ‘병태’(병신)이면서도, 애꿎은 시인에게만 항변을 하고 있는 명태일 수밖에 없다. ‘애꿎은’은 죄가 없이 괴로힘을 당하는 것을 말하고, ‘자꾸’라는 말은 그 빈도수가 여러번되풀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난데없는 봉변 속에서도 시인은 자기 자신의 기지를 발휘하여 ‘명태’의 천태만상을 여러 각도에서 아주 우스꽝스럽게 희화화시켜 놓는다. 반항도 한번 제대로 못하는 명태는 ‘병태’가 되고, 그 반항의 번지수를 제대로 찾지 못한 명태에게 시인은 “니 친구 동태보고 그러든지, 아니면/ 니 작은 황태보고 그러든지”라고, 매우 익살스럽게 놀려댄다. 뿐만 아니라, 괄호 속의 “북어보고 그러든지”라고, 저절로 솟아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병태야야/ 병태야아”라고 부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네 이, 생떼야아......”라고, 아주 엄하게 꾸짖기까지도 한다. 명태는 대가리에 피도안 마른 놈, 즉, 사물의 이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철부지----현대 사회의 익명화된 어중이 떠중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기지는 사물을 사물답게 제대로 볼 줄 아는 직관의 힘에서 나오며,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희극의 기법인 교묘한 말놀이에서 얻어진다. 말놀이는단순한 말놀이가 아니라 세계와 대상, 타인과 자기 자신, 역사와 인간의 정신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직관의 힘의 결정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어 영역의 확대는 세계 영역의 확대이다. 언어가 없으면 인간의 의식이 확대되지 못하고, 인간의 문화와 역사와 전통도 소멸된다. 시인은 언어의 사제이며, 언어의 마술사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로부터 세계가 창조되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라는 낡은 도식은 이제 조건 없이 언어(성령)의 질서 속에 통합되지 않으면 안된다. 박남철의 시에는 이러한 펀(Pun) 효과 이외에도, “부아아아앙”하고, 의성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여름의 입김], 서양음악과 국악, 혹은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넘나들면서도 “덩덕!// 허잇!// 두르륵.....// 허잇!// 덩덕!”하고, 음악적 효과를 활용한 [줄타기], 고대가사를 차용한 [자본에 살어리랏다], 산울림의 효과를 활용한 “飛鶴山 飛鶴山 飛鶴山”의 [飛鶴山], “자, 드세요... 세요... 요... 오”나 “왜 애꿎은 나를 보고 자꾸 그러지이”의 대화체, 혹은 구어체의 활용 등을 통해서, 그의 풍자와 해학의 공간을 무한히 다양하고 풍요롭게 변주시켜 나간다. 조소, 조롱, 냉소, 야유, 속어, 비어, 사투리, 욕설, 띄어쓰기를 무시한 줄글, 거꾸로 된 활자,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는 시, 펀 효과, 의성어의 활용, 음악적 효과, 고대가사의 차용, 산울림의 효과, 대화체와 구어체의 활용 등은 박남철 시인의 풍자와 해학의 공간의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아우른다. 박남철의 시세계가 무한히 다양하고 풍요롭다는 것은 그의 시세계가 단순한 역사 의식이나 도덕 의식으로 경직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을 뜻하고, 또한 그의 시세계가 과격한 실험 정신과 형태 파괴를 통하여 메마르고 건조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분노도 시를 질식시키고, 광기도 시를 질식시킨다. 그는 그 분노와 광기를 풍자와 해학으로 부드럽고 넉넉하게 완화시키면서, 모든 것을 다 끌어 안으면서도 언제나 의연한 帝王처럼, 극적인 서사 구조를 전개하여 나간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유모어가 있고, 기지가 있고, 그리고 역사 의식과 시대 정신을 갖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즉, 세목의 진실성 이외에도 전형적인 상황에서 전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인물의 리얼리티(혹은 모더니티)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帝王은 용기, 지혜, 성실성 등의 삼박자를 다 갖춘 시인을 말한다.
도서출판 {푸른숲}의 청탁 있어
‘젊은 북녘 시인에게’
편지 쓴다.
젊은 북녘 시인 동무,
그런데 젊은 북녘 시인 동무......
이렇게 적어놓고 봐도 ‘젊은 북녘 시인 동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북녘 산하도 떠오르지 않는다...... 일선에 계신 국군 장병, 떠오르는 것은 다만 북한 지도와 ‘동무는 반동이야요!’ 하는 어릴 때의 어떤 목소리들 뿐이다. 일선에 계신 국군 장병 아저씨께,
아아, 어릴 때의 장난꾸러기들 소리 뿐이다.
“동무는 반동이야! 날래 걸으라우, 이 종간나쌔끼!”
----[젊은 북녘 시인에게] 전문
대부분의 시인들이 “사랑하는 북한 시인이여”라고, 하면서 인문주의를 강조할 때 조차도, 시인은 “일선에 계신 국군 장병 아저씨”라고 쓰고, 또한 그대들이 “민족 통일의 그날이 오면 어쩌구 저쩌구”를 쓸 때조차도, 시인은 “젊은 북녘 시인 동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라고 쓴다. 그러면서도 이 평범한 사실 속에다가 가짜 인문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있는 우리들---- 나와 그대들----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벗겨 놓는다. “동무는 반동이야! 날래 걸으라우, 이 종간나쌔끼!”의 다양한 울림의 열린 결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는 시인의 말이기도 하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길든 젊은 북녘 시인의 말이기도 하며, 제3의 관점에서, 서로 간의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는 의식을 다 같이 비판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북한 시인이여”라는 노래나 “민족통일의 그날이 오면 어쩌구 저쩌구”의 노래보다도 열번, 백번 “젊은 북녘 시인 동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시인의 말이 그만큼 더 진솔하고 더욱 더 감동적인 것이다. 박남철의 풍자와 해학의 정신은 좌, 우의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고발하면서도, 그 대립의 무모함을 유머러스한 웃음 속에 하나의 날카로운 비수처럼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언어는 세계 영역의 확대이며, 그의 형태 파괴는 자기와 세계의 파괴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시에는 언어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전위적인 실험시와 그의 생활이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온몸으로, 온몸으로의 미학이 이성복과 황지우의 지적이면서도 그만큼 인위적인 세계를 뛰어 넘어서서, 한국 현대 시인의 帝王의 자리로 올라서게 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실과 현실 사이에 시는 존재하는가?” 그 절대 불변의 진리(진실)를 염두에 두면서, 박남철 시인이 그의 아내로부터 받은 ‘훈장’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요......나는 현실도피 하고 있어요......”
“그건 박남철씨의 자기기만이지 박남철씨의 본질이 아니에요! 박남철씨는 현실과 싸우거나 현실을 이겨나가는 사람이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는 그런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욧!”
나는 어어어......하며 눈물이 왈칵 나올 듯해서 얼른 뭐러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떻게어떻게 전화를 끊고 한참 뒤에서야 아내는 내가 ‘자기 집’과도 크게 싸우고 있음을 또 까먹어버렸구나 생각하다가, 그래, 복수심으로 비춰져서는 안되지......생각하다가는, 작은처남으로부터 들은, 아내가 작은 처남에게 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그만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진정한 예술가다. 내가 그동안 못 도와 준 게 한이다.”
----([이혼]----아내로부터의 훈장) 에서
박남철 시인은 일찍이 니체와 김수영 시인으로부터 엄격한 자기 추구와 자기 도야의 자세를 배웠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용기, 지혜, 성실성 등의 삼박자를 다 갖춘 시인이 ‘아내로부터 받은 훈장’이 ‘이혼’이라면, 아마도 여러분들은 동키호테를 연상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기사도 정신에 투철하지 못한 17세기 식의 동키호테, 아니, 20세기 말의 동키호테가 있다. 이 현대판 동키호테는 용기, 지혜 성실성 등의 삼박자를 다 갖추고 있지도 않고, 현실과의 어떠한 타협도 거절할 수 있는 플라톤적인 이데아로 무장되어 있지도 않다. 또한 그는 세계 정신과 절대 정신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헤겔의 낙관주의도 신봉하지를 않고 있고, 비록, 불가능한 상상 속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조차도 인정하지를 않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발목 깊숙히 “자본주의의 정화조”([목련에 대하여])에 빠져서, 저 기사도 정신에 투철한 동키호테의 길을 버리고, 너무나도 교활하고 간사한 사기꾼처럼,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요...... 나는 현실도피하고 있어요”라는 시인의말이 그렇고, “그건 박남철씨의 자기기만이지 박남철씨의 본질이 아니에요! 박남철씨는 현실과 싸우거나 현실을 이겨나가는 사람이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욧!”라는 아내의 말이 그렇다. 그의 [이혼]은 현실로부터의 패배의 소산이며, 진실로부터의 도피의 소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시인이기를 거부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어중이 떠중이들이 되기를 선언했던 셈이지만, 그러나 그 비겁한 도피마저도 그의 시인됨의 멍에를 해방시켜 주지는 못했던 것같다. 시인은 현실을 도피해서도 안되고,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서도 안되며, 어쨌든 현실과 싸워 이겨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아내의 이 말은 그가 아내에게 되풀이 가르쳐 주었던 말이기도 하지만, 그가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하고자 할 때, 다시 그 말이 비수처럼 되돌아와 그의 가슴에 꽂혔던 것이다. 이른바 부메랑 효과인 셈이다. “나는 어어어...... 하며 눈물이 왈칵 나올 듯해서 얼른 뭐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라는 것은 자승자박의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며, ‘시인’이라는 함정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시인의 눈물은 현실 도피와 반성이 담겨 있는 눈물이며, 그 위기를 기회로 다시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눈물임을 뜻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내와 자식은 물론, 엄격한 자기 추구와 자기 도야를 내팽개쳐 버리고, 너무나도 교활하고 간사한 사기꾼의 길을 걸어가려는 자가 무엇 때문에 “꺼이꺼이 울어버려야” 한단 말인가? 아내로부터의 훈장은 ‘이혼’이 아닌, 시인의 영광임을 뜻하고, 또한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기사도 정신에 투철한 동키호테의 영광임을 뜻한다.
박남철 시인의 엄격한 자기 추구와 자기 도야는 이미 한국 문단에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그 용기, 지혜, 성실성의 이름으로 “둥”([망월])이라는 울림 하나 때문에 다시 시를 쓰기도 하고, “이”와 “은”의 토씨 하나의 차이 때문에 [묵상]이란 시를 다시 쓰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첫경험]의 솔직함을 비롯해서, 자기 자신의 나쁜 타성을 뜯어 고치겠다는 [눈보라 속의 벌]과 하늘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헤라클레스, 혹은 아틀란타의 노역을 미화시킨 [시인]을 또 다시, 쓰기도 한다. 이처럼 엄격한 자기 추구와 자기 도야의 자세가 그의 모든 시들에는 아름답게 각인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삶 자체가 시 같아지고 시 자체가 삶과도 같아진다. 앎과 행동을 일치시킬 수 있는 자만이시인이 될 자격이 있다. 박남철 시인에게는 시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며, 세계 해석의 열쇠인 것이다. 진실과 현실 사이에 시는 존재하는가? 그렇다. 시는 진실과 현실 사이의 그 대립과 긴장 속에서만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박남철 시인의 [새벽, 북한강가에서]라는 시를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아 옛날이여허
아 옛날이여허어
그리하여 그대 혹시 마음의 눈까지 보인다면
내 이 홀로 추는 춤까지 한번 보아라
나는 이제 흘러가는 강물 위에 명멸하는 장급 여관의 불빛처럼, 바라보 며 춤을 추거늘,
이젠 내 곁을 떠나간 아쉬운 그대기에
마음속의 그대를 못 잊어 그려본다
훌쩍, 훌쩍 홀로 휘저으며 큰 강을 건너고 있는 이 나의 헤엄을.
모든 시인들은 깊고 깊은 사색을 통하여 대담한 관점을 지니지 않으면 안되고, 이해하는 자만이 가치판단을 할 수가 있듯이, 냉혹하고 예리한 분석력을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너무나도 어렵고 위험한 시적 모험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고, 최악의 기상 조건 속에서도 정신의 히말리야를 정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帝王의 모습으로, 帝王의 모습으로......
너희들 중에 그 누가 홀로 춤을 추면서 동시에 가장 큰 강을 건너갈 수가 있겠는가?
가장 큰 강을 건너가는 자는 장난 비극이나 정말 비극을 넘어서, 시인이라는 이름의 훈장을 달고 모두가 춤을 추는 것이다.
고독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시인은 진실로 우리더러 그렇게 되라고 한다. 지혜는 여자로서 항상 시인만을 사랑한다. 너희들은 내게 말한다. “삶은 견디기 힘들다”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찌 시인이 이처럼 홀로 춤을 추면서----“아 옛날이여허/ 아 옛날이여허어”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고독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큰 강을 건너 갈 수가 있겠는가!
유유히, 유유히----, 단 한 순간도 멈출 수 없는 몸짓으로----.
----반경환, {비판, 비판, 그리고 또 비판} 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