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헤브론을 차지한 여푼네의 아들 칼렙
「플랜더스의 개」는 어린 시절 인상 깊게 읽은 동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이라이트는 추운 겨울날 주인공 소년이 그토록 꿈꾸었던 루벤스의 작품 <십자가에서 내림>을 본 뒤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 자신과 동행한 개를 끌어안은 채 죽는 장면이었습니다. 가난과 냉혹한 사회 탓에 희망을 빼앗긴 소년의 비극적 삶을 그린 명작입니다. 소년의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플랜더스의 개는 전 주인에게 학대받고 버려졌으나 소년에게 구해져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이런 충성스러움은 45년 동안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노인의 나이에 이르러 그것을 실현시킨 칼렙을 떠올리게 합니다(여호 14,6-15).
칼렙은 히브리어로 ‘개’를 뜻합니다. 사람 이름에 ‘개’를 붙이는 일이 흔치 않고 성경에서 개의 이미지도 그리 긍정적이진 않지만(시편 22,17; 마태 7,6 등), 다른 한편으로 개는 충성스러움의 상징입니다. 고대근동에선 ‘마르둑 신의 개’를 의미하는 [칼비-마르둑]이란 이름도 존재하였습니다.
칼렙은 이집트 탈출 뒤 모세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을 정탐한 정찰대의 일원이었습니다. 열두 지파의 대표로 구성된 정찰대는 가나안 땅이 좋다는 건 확인했으나, 그곳 주민들이 강력한 나필족이라 전하며 백성들의 의지를 꺾어 놓았습니다(민수 13,25-33). 칼렙과 여호수아만 가나안 정복을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정찰대의 중론에 휘둘려 가나안 진입을 포기하고, 이로써 탈출 1세대는 광야에서 죽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14,34-35).
그에 비해, 칼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진입을 허락받는데요,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고(신명 1,38) 칼렙은 상속 재산을 차지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민수 14,24; 신명 1,36). 그리고 여호수아기에서는 가나안 정복 후 땅의 분배에 대해 서술하는 대목(14-15장)에서 칼렙이 맨 앞에 나옵니다. 그가 약속대로 헤브론을 차지했음을 밝히고(14,13) 그를 백성의 모범으로 세우려 한 것입니다. 칼렙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진취성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준 인물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약속이라도, 믿고 실행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없다면 과연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과 백성의 의지가 하나로 만날 때 주님의 약속이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칼렙은 장장 45년(14,10)을 기다려 약속의 실현을 이끌어 냈습니다. 에프라임과 므나쎄 지파의 경우에는, 평야 지방의 가나안인들에게 철 병거가 있다며 그곳을 차지하기 꺼려했지만(17,14-18), 당시 여든다섯 살이던 칼렙은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아낙인의 땅도 차지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14,11-12).
주님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한 칼렙은 자기 이름의 의미처럼 무덤까지 주인을 따르는 개의 충직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이러한 한결같음으로 헤브론을 차지하고 백성의 모범이 될 수 있었습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박사, 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학 교수, 전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저서 「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
[2024년 7월 28일(나해)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