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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 영천이씨 소종중 금전출납부 표지, 단기 4284년이면 1951년이다. 1951년부터 현재까지 소종중 금전 출납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체로 훌륭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거니와 신촌 영천이씨 종중의 성실함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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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 마을 남자경로당에 있던 이은호 이장(66세)을 비롯해, 이만호(88세), 고석재(82세), 고석환(82세) 이병찬 노인회장(80세), 공재훈(80세), 유홍렬(79세), 이석호 영천이씨 종친 회장(78세), 이상호(77세), 황인무(70세)씨등 신촌 주민과 신촌출신으로 이웃마을에 사는 주민들. |
실질적인 소재지 마을
안성사람들, 아니 서운면 사람들 중에서도 “소재지 마을이 어디에요?”라고 물으면 “신촌아닌가요?”하고 되물어올 사람이 있을 것이다.
소재지 마을이라는 것은 “면소재지 마을”을 줄여 이야기하는 것으로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을 이야기하는데, 상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그 면의 가장 중심이 되고 큰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서운면 마을을 소개한다고 1년 넘게 사운면을 취재하고 다닌 기자도 얼마 전까지 서운면 소재지 마을은 당연히 신촌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의 마을 구성이나 도로 등으로 보았을 때 면사무소와 서운농협, 파출소, 식당 등이 모여 있는 마을이 행정구역상으로 신촌과 인리로 구분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행정구역상으로 현재의 면사무소와 파출소는 인리구역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촌 주민들은 신촌마을이 “실질적인”소재지 마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말속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담겨 있으며, 그럴만한 이유 또한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면사무소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약 30여년간 신촌구역에 있다가 일제말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구도 서운면에서 가장 많은 동네이고 부자도 많았던 동네라는 등, 마을에 대한 각종 자랑이 덧붙여진다. 이 자랑은 마을의 역사와 문화에서 나오는 것이며, 내일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자산중 하나이다.
이런 신촌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마을이 갖는 의미, 역사가 갖는 의미, 마을탐방을 하는 의미등을 돌아보게 된다.
행정적으로는 분리되었지만 실제로는 한 마을
신촌마을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양동과 음동, 두 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마을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러한 행정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두 마을은 예로부터 대동계를 함께 할 정도로 역사나 재정이 하나의 마을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취재를 하면서 확인한 사실도 양동 마을회관은 주로 여자주민들이, 음동마을회관은 주로 남자 주민들이 사용하는 등 두 마을의 구분이 행정적 편의외에는 별 다른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양동마을과 음동마을이라는 지명유래에 대해서 안성군지(1990년)나 마을 주민들의 설명이 비슷하다.
양달마을은 양지쪽에 음달마을은 음지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인데, 음달말 쪽에는 지금은 확인하기 힘들지만 옛날에는 얕은 언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언덕으로 인해 음동마을에는 그늘이 지고, 양동마을에는 그늘이 없어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마을주민 이명수씨(73세)는 기자에게 손수 정리해 놓은 마을의 지명 등을 알려주었는데, 양달말과 음달말을 구분하는 것은 작은 개울인데 양동마을은 다시 양달말, 앞뜸, 뒤뜸으로 나뉘고 음동마을은 다시 음달말, 뒷동산, 방앗간뜸, 죽저골 등으로 이루어진다.
400년 전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신촌”
신촌이라는 지명유래에 대해 안성군지에는 그 유래를 인리와 연관지어, 설명했고, 주민들에게 확인한 결과 마을의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지명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촌”(新村)이라는 마을이름은 말 그대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것인데, 이런 뜻을 가진 마을이름이 안성에도 많이 있다.
그런데 신촌에 대해 이야기할때는 언제 어떻게 새로 생긴 마을인지가 중요하다.
그 ‘언제’와 ‘어디서’에 따라 같은 “신촌”이라고 해도 몇십년전에 생긴 마을이 되기도 하고 수백년전에 생긴 마을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와 “영천이씨 유적총람”(2009년)과 족보 등 관련 문서등을 종합하면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서운면의 신촌마을은 적어도 400여년전에 영천이씨가 이주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다.
이와 관련해 마을주민들은 신촌마을이 영천이씨의 집성촌이라고 했는데, 옛날에 즉 60-70년전에는 마을주민의 70%가 영천이씨였고, 지금도 120여세대의 30%이상이 영천이씨이며, 마을의 대지 중 상당부분도 영천이씨의 종중 땅이라는 것이다.
영천이씨 남곡공파 효우당파의 집성촌
그런데 이 영천이씨가 신촌마을에 자리 잡은 시기가 1600년대 초반으로 생각되는데, 영천이씨가 신촌마을에 들어오는 데는 인근 인리가 영천이씨 집성촌이라는 사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옛 덕곡면의 대표적인 대성(大性)으로 청주한씨, 남양홍씨와 함께 영천이씨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영천이씨가 덕곡면에 처음 들어 온 것은 신촌이 아니라 지금의 인리 인처동 인데, 그 시기가 1500년경이다.
용인에 살던 영천이씨 남곡공파 효우당파 후손인 달증(李達曾)공의 부인이 전염병을 피해 두 아들과 함께 인리 인처동에 자리잡아 현재까지 500년 넘게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달증공의 형 효증(李孝曾)공의 후손들은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 지역으로 가서 살다가 효증공의 증손 대남(大男)공이 현재의 신촌지역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남공이 신촌으로 이주한데는 인리에 살고 있던 영천이씨 집안이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되고, “신촌”이라는 지명이 유래한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신촌의 영천이씨와 인리의 영천이씨는 일부 재산은 함께 관리하지만 따로 관리하는 재산도 있고, “자손이 무(無)하면” 양자를 들이기도 하는 등 가깝게 지내오고 있다.
며느리들끼리도 화목하다는 영천이씨 집안자랑
영천이씨에 대해서는 인리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신촌에 거주하는 영천이씨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만 하자면 이미 언급했지만 신능리에 묘가 있는 효자 이정욱이 신촌 영천이씨 집안이다.
또 이덕남 장군 묘가 있는 진재산(행정구역상으로는 미양면 구수리)도 신촌 영천이씨 땅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신능리는 물론이고 미양면에도 신촌 영천이씨 땅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와 관련해 “영천이씨 땅 밟지 않고는 안성 장보러 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촌영천이씨의 땅도 많았다고 한다.(서운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표현하듯이, 인리의 영천이씨와 구분하기 위해 신촌영천이씨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종중모임으로 전국적인 효우당 종친회(서울, 경기, 충남, 충북 포함), 소종중, 차종중 모임을 활발히 운영 중이고 조상숭배 정신이 투철하다는 것이 신촌 영천 이씨 사람들의 자랑이었다.
특히 영천이씨 문중으로 결혼시집온 50-50대 중반 며느리들로 여성단체가 결성되어 매우 열정적으로 혼사 등 장사일에 전원이 참석하여 똘똘뭉쳐 일을 하는 등 잘 운영되고 있다고 자랑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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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마을에서 만난 최고령 이만호 옹, 1929년생으로 마을과 영천이씨에 대해서 소중한 증언을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당시 위생병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이 있어서는 안됨을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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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마을 이병찬 노인회장(80세)과 고석재 전 노인회장(8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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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 영천이씨 이석호 회장과 회장을 역임한 이상호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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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마을을 조금만 살펴보면 옛날 나무대문이나 흙돌담집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옛날에 흙돌담집은 조금 형편이 괜찮은 집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