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스케이팅) 천재'가 '도핑(금지약물) 천재'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출전 중인 러시아(정식 명칭은 러시아 올림픽 위원회 ROC)의 카밀라 발리예바다. 오는 4월에야 만 16세가 되는 발리예바가 피겨 선수로서 걸어온 길은 '놀라움과 탄성' 그 자체다. 그녀가 도핑 검사에서 금지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또한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이번 발리예바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안겨준다. 16세 이하의 선수는 WADA 규정상 '보호 대상'이다. 스스로 모든 것을 책임질 인격체가 아니라는 뜻일 터다. 그러니, 이제 갓 사춘기에 들어선 소녀를 정보 공개로부터 보호하든, 도핑으로부터 보호하든, '보호 책임'을 게을리한 진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통상의 도핑 적발 사건과도 그 진행 과정이 크게 다르다. 국제대회에선 경기가 끝난 뒤, 혹은 직전에 도핑 검사를 받고, 금지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나면, 기록을 취소한 뒤 (약물의 효과가 사라지는) 일정 기간 경기 출전을 금지하는 징계를 부과한다. 해당 선수가 그 징계에 불복하면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항소한다. 또 도핑 의혹이 제기될 경우, 해당 경기단체 혹은 IOC, WADA가 그 선수에 대해 선제적으로 징계 조치를 취하고, 이에 불복하는 선수가 CAS에 항소하는 게 으례 우리가 지켜본 통상의 절차였다.
한때 이렇게 활짝 웃었던 선수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CAS의 판정을 기다려야 발리예바/@카밀라발리예바 인스타그램, ROS 공식 텔레그램 계정 캡처
그러나 발리예바의 경우, 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 측이 합리적인(?) 이유로 발리예바의 경기 출전을 허용하자, (IOC의 위임을 받은) 국제(도핑)검사기구(ITA)가 이를 막아달라며 CAS에 항소했다. 스포츠 관련 국제기구들이 발리예바를 둘러싼 '법적 분쟁'에서 자신이 없다는 뜻은 아닌가? 아예 CAS에 모든 책임을 미루고 면피하려는 생각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 전말을 Q&A 형식으로 자세히 살펴보자.
러시아는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조직적으로 도핑 샘플을 조작했다는 혐의로 국제사회의 징계를 받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2020 도쿄 하계올림픽, 그리고 이번 베이징 대회까지 3회 연속 올림픽에 '러시아'라는 국가명을 쓰지 못하고 러시아출신올림픽선수(OAR), ROC라는 이름으로 출전했다.
Q: 발리예바의 도핑 혐의는 확실한가?
A: 국제(도핑)검사기구(ITA)는 발리예바가 지난해 12월에 실시한 도핑검사에서 금지 약물 성분인 트리메타지딘이 검출됐다는 검사 결과를 스톡홀름 WADA 실험실에서 통보를 받았다고 11일 공식 발표했다. 트리메타지딘은 협심증 치료제이지만, 심장내 혈류량을 늘려 지구력 증진에 도움을 주는 약물로 사용될 수 있어, WADA는 지난 2014년 이를 금지약물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선수는 경기 기간은 물론, 경기 기간 외에도 치료 목적 등 정당한 사유 없이 복용하면 안 된다. 중국의 수영 스타 쑨양이 2014년 5월 자국 선수권 대회 중 실시한 도핑 검사에서 트리메타지딘 양성 반응을 보여 중국반도핑기구로부터 3개월 자격정지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Q: 공식 발표가 늦어진 이유는?
A: ITA가 트리메타지딘이 검출됐다는 검사 결과를 통보받은 게 지난 8일이라고 한다. 피겨스케이팅 단체전이 끝나고 러시아의 우승이 확정된(7일) 그 이튿날이다. 발리예바의 나이, 도핑 검사의 법적 유효성 등 문제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IOC는 일단 8일로 예정된 피겨 단체전 시상식을 미뤘다. 그리고 '법적 문제'가 생겼다고 발표했다.
이후 영국의 올림픽 보도 전문 매체인 '인사이드게임'을 시작으로 발리예바의 도핑 의혹 보도가 쏟아졌다. IOC와 ITA 등은 장고끝에 11일 발리예바의 도핑 사실을 발표하고, 이 사건을 CAS로 넘기기로 했다. IOC가 이 문제를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접근했다는 반증이다.
Q: IOC가 이 문제에 신중하게 접근하는 이유는?
A: 우선, 발리예바의 도핑 검사는 지난해 12월 2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러시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직후 이뤄졌다. 정상적인 절차다. 러시아측은 도핑 샘플을 스톡홀름에 있는 WADA 실험실로 보냈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검사 결과 통보가 평상시에 비해 크게 늦은 지난 8일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WADA의 도핑 검사는 20일쯤 걸린다. 이번에는 무려 40일 이상 소요됐으니, 러시아 올림픽 위원회(ROC)측이 '음모론'을 들고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누군가가 검사 결과를 갖고 있다가, 단체전 시상식 직전에야 통보했다'는 문제 제기다.
러시아피겨스케이팅연맹, 발리예바의 도핑 파문에 대한 공식 입장 표명/얀덱스 캡처
포즈드냐코프 러시아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발리예바 도핑 검사 기간에 대한 이의(음모론) 제기/얀덱스 캡처
러시아반도핑기구(RUSADA)는 양성 반응 결과 확인 후 발리예바에게 잠정 출전 금지 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발리예바 측은 이에 불복해 이의를 제기했고, RUSADA는 재심을 통해 징계를 철회했다, IOC와 ITA측에도 통보했다.
그 후 RUSADA와 IOC, 즉 ITA간에 처리 방향을 놓고 물밑 접촉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발리예바는 만 16세 이하여서 보호선수에 해당되고, 도핑 검사가 베이징올림픽 기간에 이뤄진 것도 아닌 데다 지난해 12월 25일 이후 실시된 두어차례(피겨유럽선수권 대회와 베이징 올림픽 참가용) 도핑검사에서 모두 음성으로 나온 점 등이 주요 쟁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측은 이번 올림픽 기간에 받은 도핑 검사에서 양성이 나올 경우, 발리예바의 메달을 박탈하고 징계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고, ITA측은 일단 양성 결과가 나온 만큼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반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과적으로 양측의 협상이 결렬됐거나, 혹은 CAS의 판정에 따르자는 절충안에 합의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마크 아담스 IOC 대변인도 11일 "도핑과 관련된 모든 사안은 ITA와 CAS에 위임했다"며 "올림픽 개최 전에 발생한 사건인 만큼 자세한 언급은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Q: 왜 CAS인가?
A: CAS는 스포츠와 관련된 분쟁을 해결하는 국제 중재 기관이다. 스포츠 분쟁 전담 법원이라고 보면 된다. 본부는 스위스 로잔에 있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IOC 위원장이 각종 스포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기관으로 CAS 창설을 주도했고, IOC 산하기관으로 존재하다가 독립했다. 이후 각급 국제 스포츠 연맹들이 CAS를 도핑 분쟁을 최종 판단하는 기관으로 인정하면서 현재의 법적 권위를 확보했다. IOC가 발리예바 사건을 CAS의 결정에 따르기로 한 이유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스포츠 중재 재판소(CAS)/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발리예바의 출전 여부는 CAS의 판단에 달렸다. 여자 싱글 경기가 오는 15일에 시작되는 만큼 CAS의 청문회(심의)는 그 이전에 끝날 것으로 전망된다. 심의에서 러시아측 변호를 맡은 곳은 스위스 로펌인 셸렌베르크 비트머(Schellenberg Wittmer)다. 지난 2000년 설립된 이 로펌은 러시아 선수들의 도핑 문제 해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2014 소치동계올림픽에서 도핑 위반 징계를 받은 러시아 선수 28명을 CAS에서 구제해 내기도 했다.
쟁점은 이미 RUSADA와 IOC(즉 ITA)가 다퉈온 것과 거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 발리예바의 나이 △ 지난해 12월 검사와 그 이후 검사에서 나타난 결과의 상이성 △ 올림픽 기간 중 도핑 검사 결과 등이다.
특히 러시아 측은 "양성 판정을 받은 발리예바의 도핑 샘플이 올림픽 기간에 채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선수와 러시아 팀의 올림픽 성적은 자동적 연계 사항이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도핑 결과의 통보가 통상시보다 무려 2배나 더 시간이 걸린 이유를 집중 물고 늘어질 수도 있다. 일부 외신에 따르면, 스톡홀름의 WADA 실험실이 신종 코로나(COVID 19)로 샘플 분석이 늦어졌다고 한다.
ROC는 11일 보도문에 통해 "지난 1월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유럽선수권대회 이후, 또 베이징 올림픽 기간에 채취한 발리예바 선수의 도핑 샘플 결과는 음성이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Q: 발리예바의 향후 출전 여부는?
A: CAS가 징계를 철회한 러시아측의 손을 들어줄 경우, 15일 시작하는 여자 싱글 부문에 출전할 수 있다. 그녀는 강력한 금메달 후보다. 지난 7일 끝난 피겨 단체전에서도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서 모두 압도적인 1위에 올랐다.
CAS가 IOC의 손을 들어주면, 더 이상 은반 위에서 발리예바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러시아의 피겨 단체전 금메달도 박탈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단체전 경기의 경우, 참가 선수 2명 이상이 실격당하지 않을 경우, 경기 결과를 인정한다는 IOC 조항도 있다는 게 러시아 언론의 해석이다.
발리예바는 싱글 부문 출전을 대비해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발리예바는 (자국의 징계를 받은) 8일, 9일에는 훈련에 결장했지만, 10일 단체전 우승 이후 처음으로 연습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의제기로 자체 징계가 취소됐기 때문이다. 이날 그녀는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네 번이나 깔끔하게 소화했다.
발리예바, 두번째 훈련 중 세차례나 넘어져/얀덱스 캡처
그러나 IOC의 발표가 나온 11일에는 혼란스러운 듯, 두 차례 연습에서 세번이나 넘어지는 실수를 저질렀다. 연습시간은 약 35분. 훈련 후 빠져나가는 발리예바를 향해 한 외신(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가 이름을 부르며 질문을 시도했지만,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날 함께 연습한 또다른 러시아 피겨 선수 안나 셰르바코바와 알렉산드라 트루소바도 쿼드러플 점프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크 아담스 IOC 대변인은 '발리예바가 계속 훈련하는 게 적합하냐'는 질문에 "미성년자라서 보호를 받는 것은 아니고, WADA 규정을 보면, 왜 연습이 가능한 지 알 수 있을 것"이라며 규정상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Q: 미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A: 우선 현실적인 이유로, 러시아가 단체전 금메달을 박탈당할 경우, 미국이 1위로 올라선다. 시상식이 끝난 뒤 이뤄지는 금메달 박탈이 아니어서, 미국 선수들은 시상식에서 자랑스럽게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다.
미국반도핑기구 수장, 발리예바의 훈련 허용해서는 안된다 주장/얀덱스 캡처
미국은 지난 2020년 로드첸코프 반도핑법(RADA)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르면, 도핑 결과로 미국 선수들의 성적이 영향을 받았을 경우, 국적을 불문하고 도핑 관련자들에게는 최대 100만 달러의 벌금과 최대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다. 이 법은 모스크바 반도핑 연구소의 소장 출신으로 내부고발자인 그리고리 로드첸코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미국 반도핑기구(USADA)의 트래비스 타이가트 국장은 11일 “미국은 로드첸코프법에 따라 발리에바의 도핑 사건에 연루된 러시아인을 기소할 수 있다”며 "스포츠 정신을 존중하는 모든 이들은 ‘로드첸코프 반도핑법’의 적용을 주장할 것”이라며 말했다. 또 "발리예바의 연습을 더이상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러시아측은 발리예바의 도핑 사건과 관련, 주변인물을 대상으로 금지약물 복용 경위를 조사중이다. 그녀를 지도하는 에테리 투트베리제 코치와 주치의 등이 조사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카타리나 비트의 인스타그램 캡처
올림픽을 2회 연속 제패한 전설적인 피겨선수 카타리나 비트(전 동독)는 11일 자신의 SNS를 통해 '천재 소녀' 발리예바의 도핑 스캔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비트는 "전 세계를 매료시킨 어린 천재 소녀는 이번 사건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며 "그녀는 어릴 때부터 믿고 따른 트레이너와 의사의 말을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 약물이 쿼드러플 점프에, 연기의 예술성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잘못을 잘 알고 있는 주변 어른들이 의도적으로 그걸(약물 복용) 시켰다면, 비인간적이고 수치스러운 그 사람들을 영원히 스포츠계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피겨스케이팅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른 카밀라 발리예바를 진정으로 아끼고 있으며, 은반 위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정말로 원한다"고 썼다.